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어린이 : 하나님 사랑의 선물
자녀를 키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며,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만드신 첫 번째 공동체입니다. 제 가정을 생각해 봐도 아내와 만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이듬해에 아버지가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첫 아이를 낳은 해가 1978년으로, 제 나이 서른 살 때였습니다. 가정의 축복을 경험하면서 마음에 큰 감사가 일었습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아, 인생을 헛되이 산 게 아니구나.’ 하는 감격이 들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도 너무 많았습니다. 사랑스런 자녀들을 볼 때마다 ‘아, 하나님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겠구나.’ 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녀를 키우면서 하는 경험들은 모두가 처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바르게 세워 나가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니 애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인간을 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을 키우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고, 한걸음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한편 자녀들을 키우고 돌아보니, 그들이 그동안 효도도 많이 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보다 보람 있고 즐거웠던 기억이 훨씬 많기도 합니다. 아들과 딸이 얼마나 웃음을 많이 선물해 주었는지, 그들을 통해 내 가슴이 얼마나 따뜻해졌는지, 얼마나 흐뭇하게 바라봤는지,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해 준 효도였고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니 ‘효도하라’는 말보다는 “건강하게 자라기만 해 다오. 지혜롭게 자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 성장하거라.”라는 권면과 기도를 하게 될 뿐입니다.
이 자리에는 부모님이 되신 분도 계시고, 조부모님이 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마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얘야, 밥은 먹었니? 공부는 했니? 숙제 했어? 일찍 일어나야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랑이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얘야, 뭐 갖고 싶니? 내가 뭘 해 줬으면 좋겠니?”라고 묻는 사랑입니다. 같은 사랑이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귀히 여기며 존중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 곁에 오는 것을 보고 꾸짖고 내쫓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가복음 10:14)
야단맞아야 할 사람은 어린이들이 아니라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린이들을 포용하셨는데, 다음과 같은 행동을 이어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6절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마가복음 10:16)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안고 안수하셨으며,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어린이가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어떤 마음을 느끼고 받았습니까? 너그러움과 배려, 존중과 친절을 배웠습니까? 혹 우리가 그런 귀중한 마음을 받지 못했더라도 우리 자녀들에게는 그러한 감정과 마음을 전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 마음은 알겠지만,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감성에 올인 하는 게 아니라 지식 교육에 올인 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점수로 자녀들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소위 ‘안달하는 은사’를 한국의 부모들이 조금씩은 다 갖고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정보도 빨라야 하고, 이를 위한 행동도 신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기다림의 소중함을 잃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런 통계도 있습니다. 미국의 초등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질문하면, 학생이 대답할 때까지 약 5초에서 8초 정도 기다린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의 초등학교 교사는 약 2초에서 3초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엄마들은 몇 초를 기다릴까요? 0.5초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자녀가 즉시 답을 하지 못하면 욱하고 화가 치밀어 욕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부모님들께 자녀와의 관계를 위한 두 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감성적 만남을 하라’는 권면을 드립니다. 자녀들과의 만남은 지식의 만남이 아닙니다. 진실게임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감성의 만남, 감정의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소통이 안 되면 만나기를 꺼려합니다. 대화하기조차 싫어합니다. 감정적 소통은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으뜸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을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솟아오릅니까? 화가 납니까, 불평했던 기억이 납니까? 아니면 따사롭고 감사한 기억들이 솟아오릅니까?
도로시 놀트(Dorothy Nolte)라는 사람의 ‘아이들은 생활에서 배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아이들은 생활에서 배운다>
– 도로시 놀트
꾸지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비난하는 것을 배우고
미움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싸움을 배우고
두려움 속에 자란 아이들은
근심을 배우고
동정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자기 연민을 배우고
놀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수줍음을 배우고
질투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시기심을 배우고
부끄러워하며 자란 아이들은
죄책감을 배우고
칭찬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자신감을 배우고
너그러움 속에 자란 아이들은
인내심을 배우고
격려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고마워하는 것을 배우고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고
관심 속에 자란 아이들은
자긍심을 배우고
인정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목표 세우는 것을 배우고
함께 나누며 자란 아이들은
관대함을 배우고
정직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진실 된 삶을 배우고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정의를 배우고
친절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남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평안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배우고
다정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이 세상이 살기 좋은 곳임을 배운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님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요? 위 시에 나타난 감성적 따뜻함, 넉넉함, 배려와 존중이 우리 삶에 녹아 있어야 자녀들이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편안하게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자녀가 어리다면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중‧고등학생이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란다.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라는 감정적 소통을 끊임없이 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듯 감성적 소통을 열어 가야 가정의 행복과 축복이 배가될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나아가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 쓴 자녀에 대한 시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아들이고 생명의 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왔으나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당신과 함께 있으나
당신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은 줄 수 있으나
생각은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들의 몸을 가둘 수 있으나
마음은 가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미래의 집에 거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곳을 방문할 수도 없습니다.
꿈속에서조차도.
당신이 그들처럼 되고자 해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고자 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인생은 과거로 가는 것도 아니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활이니, 이 활에 의해
당신의 자녀들은 살아 있는 화살로서
쏘아 보내지게 됩니다.
사수의 손에 팽팽히 당겨진 활은 곧 기쁨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자녀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녀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는 말과 함께 “너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란다.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라는 말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떠나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세상이 말하는 마마보이, 파파걸이 됩니다. 2,30대 남성과 여성들에게 “가장 꺼리는 결혼 상대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한결같이 ‘마마보이’와 ‘파파걸’이 나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야, 학교 갈 시간이란다. 어서 일어나라.” 아들이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면서 대답합니다. “학교 가기 싫어요.” 엄마는 “학교는 꼭 가야 한다.”라고, 아들은 “학교 가기 싫다니까요.”라고 실랑이합니다. 선생님들도 자기를 싫어하고, 아이들도 자신을 놀린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들의 이불을 당기며 확고하게 말합니다. “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무조건 학교에 가야 돼.” 그러자 아들이 “좋아요. 그럼 내가 학교에 가야 할 이유를 한 가지만이라도 알려 주세요.”라고 묻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들아, 너는 쉰두 살이란다. 게다가 너는 학교 교장이잖니!”
여러분, ‘마마보이’, ‘파파걸’로 계속 남아 있는 건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축복하지만, 어린아이로 남는 건 축복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52)
바로 이때까지 부모가 키우는 것입니다.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라고,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도록 키우고 난 뒤에는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어리면 많이 안아주십시오. 조금 더 성장한 자녀들은 옆에서 기도해 주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란다. 내가 너를 위해 평생 기도하고 있단다.”라고 말해 주십시오. 이렇게 감성적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그런 뒤 언젠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 13 ~ 16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자녀를 키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며,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만드신 첫 번째 공동체입니다. 제 가정을 생각해 봐도 아내와 만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이듬해에 아버지가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첫 아이를 낳은 해가 1978년으로, 제 나이 서른 살 때였습니다. 가정의 축복을 경험하면서 마음에 큰 감사가 일었습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아, 인생을 헛되이 산 게 아니구나.’ 하는 감격이 들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도 너무 많았습니다. 사랑스런 자녀들을 볼 때마다 ‘아, 하나님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겠구나.’ 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녀를 키우면서 하는 경험들은 모두가 처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바르게 세워 나가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니 애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인간을 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을 키우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고, 한걸음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한편 자녀들을 키우고 돌아보니, 그들이 그동안 효도도 많이 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보다 보람 있고 즐거웠던 기억이 훨씬 많기도 합니다. 아들과 딸이 얼마나 웃음을 많이 선물해 주었는지, 그들을 통해 내 가슴이 얼마나 따뜻해졌는지, 얼마나 흐뭇하게 바라봤는지,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해 준 효도였고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니 ‘효도하라’는 말보다는 “건강하게 자라기만 해 다오. 지혜롭게 자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 성장하거라.”라는 권면과 기도를 하게 될 뿐입니다.
이 자리에는 부모님이 되신 분도 계시고, 조부모님이 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마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얘야, 밥은 먹었니? 공부는 했니? 숙제 했어? 일찍 일어나야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랑이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얘야, 뭐 갖고 싶니? 내가 뭘 해 줬으면 좋겠니?”라고 묻는 사랑입니다. 같은 사랑이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귀히 여기며 존중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 곁에 오는 것을 보고 꾸짖고 내쫓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가복음 10:14)
야단맞아야 할 사람은 어린이들이 아니라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린이들을 포용하셨는데, 다음과 같은 행동을 이어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6절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마가복음 10:16)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안고 안수하셨으며,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어린이가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어떤 마음을 느끼고 받았습니까? 너그러움과 배려, 존중과 친절을 배웠습니까? 혹 우리가 그런 귀중한 마음을 받지 못했더라도 우리 자녀들에게는 그러한 감정과 마음을 전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 마음은 알겠지만,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감성에 올인 하는 게 아니라 지식 교육에 올인 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점수로 자녀들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소위 ‘안달하는 은사’를 한국의 부모들이 조금씩은 다 갖고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정보도 빨라야 하고, 이를 위한 행동도 신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기다림의 소중함을 잃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런 통계도 있습니다. 미국의 초등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질문하면, 학생이 대답할 때까지 약 5초에서 8초 정도 기다린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의 초등학교 교사는 약 2초에서 3초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엄마들은 몇 초를 기다릴까요? 0.5초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자녀가 즉시 답을 하지 못하면 욱하고 화가 치밀어 욕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부모님들께 자녀와의 관계를 위한 두 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감성적 만남을 하라’는 권면을 드립니다. 자녀들과의 만남은 지식의 만남이 아닙니다. 진실게임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감성의 만남, 감정의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소통이 안 되면 만나기를 꺼려합니다. 대화하기조차 싫어합니다. 감정적 소통은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으뜸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을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솟아오릅니까? 화가 납니까, 불평했던 기억이 납니까? 아니면 따사롭고 감사한 기억들이 솟아오릅니까?
도로시 놀트(Dorothy Nolte)라는 사람의 ‘아이들은 생활에서 배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아이들은 생활에서 배운다>
– 도로시 놀트
꾸지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비난하는 것을 배우고
미움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싸움을 배우고
두려움 속에 자란 아이들은
근심을 배우고
동정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자기 연민을 배우고
놀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수줍음을 배우고
질투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시기심을 배우고
부끄러워하며 자란 아이들은
죄책감을 배우고
칭찬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자신감을 배우고
너그러움 속에 자란 아이들은
인내심을 배우고
격려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고마워하는 것을 배우고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고
관심 속에 자란 아이들은
자긍심을 배우고
인정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목표 세우는 것을 배우고
함께 나누며 자란 아이들은
관대함을 배우고
정직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진실 된 삶을 배우고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정의를 배우고
친절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남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평안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배우고
다정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이 세상이 살기 좋은 곳임을 배운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님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요? 위 시에 나타난 감성적 따뜻함, 넉넉함, 배려와 존중이 우리 삶에 녹아 있어야 자녀들이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편안하게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자녀가 어리다면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중‧고등학생이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란다.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라는 감정적 소통을 끊임없이 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듯 감성적 소통을 열어 가야 가정의 행복과 축복이 배가될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나아가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 쓴 자녀에 대한 시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아들이고 생명의 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왔으나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당신과 함께 있으나
당신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은 줄 수 있으나
생각은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들의 몸을 가둘 수 있으나
마음은 가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미래의 집에 거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곳을 방문할 수도 없습니다.
꿈속에서조차도.
당신이 그들처럼 되고자 해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고자 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인생은 과거로 가는 것도 아니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활이니, 이 활에 의해
당신의 자녀들은 살아 있는 화살로서
쏘아 보내지게 됩니다.
사수의 손에 팽팽히 당겨진 활은 곧 기쁨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자녀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녀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는 말과 함께 “너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란다.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라는 말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떠나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세상이 말하는 마마보이, 파파걸이 됩니다. 2,30대 남성과 여성들에게 “가장 꺼리는 결혼 상대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한결같이 ‘마마보이’와 ‘파파걸’이 나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야, 학교 갈 시간이란다. 어서 일어나라.” 아들이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면서 대답합니다. “학교 가기 싫어요.” 엄마는 “학교는 꼭 가야 한다.”라고, 아들은 “학교 가기 싫다니까요.”라고 실랑이합니다. 선생님들도 자기를 싫어하고, 아이들도 자신을 놀린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들의 이불을 당기며 확고하게 말합니다. “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무조건 학교에 가야 돼.” 그러자 아들이 “좋아요. 그럼 내가 학교에 가야 할 이유를 한 가지만이라도 알려 주세요.”라고 묻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들아, 너는 쉰두 살이란다. 게다가 너는 학교 교장이잖니!”
여러분, ‘마마보이’, ‘파파걸’로 계속 남아 있는 건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축복하지만, 어린아이로 남는 건 축복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52)
바로 이때까지 부모가 키우는 것입니다.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라고,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도록 키우고 난 뒤에는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어리면 많이 안아주십시오. 조금 더 성장한 자녀들은 옆에서 기도해 주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란다. 내가 너를 위해 평생 기도하고 있단다.”라고 말해 주십시오. 이렇게 감성적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그런 뒤 언젠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