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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나오미와 룻의 신뢰관계 –

룻기 1: 11 ~ 18

김지철 목사

2016.02.07

명절이 지나면 갈등이 커진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명절이 지나면 부부 갈등이나 고부 갈등이 증가되고 이혼 소송 건수도 늘어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2015년 설 연휴 다음 달이던 3월에 접수된 이혼 소송 청구 건수는 3,539건이었습니다. 이것은 2월 달 접수 건수(2,540건)보다 약 40% 이상 늘어난 수치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부부간의 갈등이 명절을 지나면서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명절의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먹는 사람은 주로 남자들이고 일하는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가사 노동에 대한 여성들의 스트레스가 부부 갈등을 일으키고 고부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며느리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에게도 명절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요사이 며느리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이번 연휴에 회사 당번을 서야 해서 명절 모임에 미리 갈 수가 없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시어머니는 당신들의 과거를 떠올립니다. ‘내가 며느리였을 때는 모든 일을 도맡아서 했는데 요새는 시어머니인 내가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하니 오히려 내가 시집살이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섭섭함도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공감 영역이 자꾸만 줄어들게 됩니다.
명절에 가장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사이가 어떤 사이일까요? 한 보험 회사가 사내 임직원 3,0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1위가 고부 사이, 2위가 시누이와 올케 사이, 3위가 동서지간이었습니다. 1,2,3위가 모두 여성들의 관계인 이유는 설문조사 대상들이 주로 여성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4위는 장인과 사위 사이였습니다. 남자들끼리 있으면 할 말이 없어서 서먹서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것을 넘어서서 상처가 될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꽂히는 것입니다. 어떤 말들이 상처가 될까요? 며느리가 싫어하는 말을 찾아봤습니다. 첫 번째는 “일찍 좀 와라. 친정에도 가는 거냐?”였습니다. 며느리들에게 이 말은 친정에 가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두 번째는 “내년부터는 간소하게 차리자”였습니다. 그 내년이 언제나 ‘내년’이 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세 번째는 “빚은 다 갚았니?”, “애가 너무 말랐구나” 등의 집안일에 대한 세세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가니?”, “나 같은 좋은 시어머니는 없다”, “애는 하나 더 가져야지” 등의 말들이 있었습니다.
또 경기도 여성능력개발센터에서 올해 1월 기혼여성들에게 언제 가장 화가 나는지 물었습니다. 1위가 여자들은 온종일 음식 준비를 하는데 남자들은 TV만 보고 있을 때였고, 2위는 친정에 안 보내주거나 보내줘도 늦게 보내줄 때였습니다. 그리고 3위는 남편 내조를 못 한다고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할 때, 4위는 친정에 간 남편이 잠만 잘 때였습니다. 아마 우리도 이 중 한두 가지는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떤 표현들이 부모와 자녀의 마음을 화합하게 할까요? 바로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제사 지내느라 고생했지만 너희부터는 제사 지내지 말고 그냥 우리를 기억해다오”, “친정 가는 길이 훨씬 머니 거기부터 다녀 오거라” 같은 말들에 며느리의 마음이 확 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생했다, 애썼구나,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들을 건네는 것을 어색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통해서 우리의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 축복을 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며 약 3천 년 전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나오미는 슬픔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쓰여진 책이 있습니다. 바로 룻기입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유대인들의 족보는 가부장적인 족보였습니다. 한국도 가부장적인 사회라 족보에 남자들의 이름만 기록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여성들의 이름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많은 남자들의 이름 가운데 여성 이름이 다섯 개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룻이 바로 오늘 이야기를 나누게 될 여인 룻입니다.
룻이 누굽니까? 다윗의 증조할머니입니다. 당시 이방 민족의 여인과 결혼을 금했던 이스라엘에서 룻이 이스라엘 백성, 그것도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가 있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다 초청하신다는 메시지인 동시에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룻기는 세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어머니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그녀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는데 한 명은 오르바이고 다른 한 명은 룻이었습니다. 이 세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뿐만 아니라 두 아들까지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한 맺힌 여인들입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3천 년 전 가부장적인 시대에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신을 ‘기쁨’을 뜻하는 ‘나오미’가 아닌 ‘괴로움’을 뜻하는 ‘마라’라고 부르라고 이야기한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깝다는 처절한 고백인 것입니다.

…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 1:20)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버림받았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남편이 죽고 두 아들도 죽어버린 자신의 인생은 망가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낙이 사라졌다는 탄식입니다.
두 며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홀로 남았습니다. 옛날 한국 사회에서 ‘여자 잘못 만나서 남편들이 다 요절했다’는 조롱과 모욕을 받을 만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세 여인들의 모습을 알게 되면 이들이 참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여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조가 있고, 인간미가 흘러넘치는 아름답고 복된 여인들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의 슬픔을 모른 척하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없는 설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도 서러운데 너희는 얼마나 서러웠겠느냐?’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의 공허와 절망을 눈여겨보며 며느리들이 자신보다 더 힘들다고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도 자신은 남편과 오랫동안 살면서 자녀들이 자라는 기쁨을 맛보고 결혼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남편과 즐겁게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게다가 아이까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결정한 것은 아직 젊은 며느리들을 그녀들의 집으로 돌려보내 새로운 삶을 살게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남편으로부터 위로와 즐거움을 받아볼 수 있도록 재혼을 권면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룻 1:9)

“하나님께서 너희를 축복해 주시어 너희에게 남편을 얻게 하셔서 남편의 집에서 위로와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며느리를 향한 시어머니의 따뜻한 배려와 존중이었습니다.
첫 번째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떠나갑니다. 그런데 다른 며느리 룻은 좀처럼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합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 1:15)

아들이 언제까지 아들일까요? 결혼하기 전까지 내 아들입니다. 요즘은 결혼하고 나면 내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의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도 ‘내 아들, 내 아들’이라고 주장하면 가정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내 아들인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분명히 내 아들이지만, 이제는 나와 보내는 시간보다 며느리와 함께 사는 시간이 훨씬 깁니다. 내가 아들을 돌보았던 사랑과 헌신보다 며느리가 내 아들을 사랑하고 돕는 헌신이 더 큽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잘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들과 딸에게 자신의 인생을 올인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이 쓰실 만하게 키우고 그 다음부터는 자녀들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어머니의 인생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시어머니 된 분들은 남편에게 올인 하십시오. 시아버지들은 아내에게 올인 하십시오. 어머니, 아버지가 서로를 위하며 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아들, 딸이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었으니 며느리들에게 너희의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인생은 너희의 것이니 나와의 인연은 여기서 끊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나오미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비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친정집으로 보내면서 복을 비는데 여호와의 이름으로 복을 빕니다.

…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룻 1:8)

“너희가 내 아들에게 잘한 것처럼 나에게도 잘했다. 내가 그것을 안다. 이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시기를 원한다.” 며느리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만약 옛날 시어머니들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뭐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네가 내 아들을 잡아먹었구나!” 우리가 과거 이런 식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는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비난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며느리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너무 붙잡고 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슬픔 끝에서 ‘하나님, 떠나간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잘해야 합니다.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있는 자를 귀히 여기며 사랑하고 넉넉하게 대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나오미는 며느리를 축복한 것입니다.

세 여인 사이에는 공감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며느리들도 대단합니다. 놀랍게도 시어머니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신앙의 역사를 함께 나눕니다. 한마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공감이 형성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 ‘신뢰’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공감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오미의 며느리들에게는 시어머니에 대한 공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생각의 공감입니다. 그들은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돌려보내려는 시어머니의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뜻을 알지만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룻 1:10)

두 번째는 감정의 공감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 (룻 1:14)

이미 9절에도 함께 껴안고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감정적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귀히 여기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그 마음을 알고 같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공감은 많은 문제들을 푸는 열쇠가 됩니다. 생각은 비슷한데 감정이 통하지 않아 하나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와 며느리들에게는 그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감정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의지의 공감입니다. 이것은 내가 의지적으로 시어머니와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16절 전반부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 (룻 1:16)

룻은 결단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겠습니다!” 의지의 공감입니다. 영어 단어 ‘empathy’는 ‘공감’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같은 처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룻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공감이 세워질 수 있었던 기본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신앙의 공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공감입니다. 신앙생활의 공감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16절 후반부입니다.

…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6)

“어머니가 섬겼던 여호와가 내가 섬겨야 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방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어머니가 사랑했던 하나님, 어머니가 섬겼던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다.”
룻이 이런 모습으로 나아갔을 때, 그녀가 가는 곳은 축복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선택한 것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복을 전하고 나누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서부터 생깁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서부터 생깁니까? 나를 만난 사람을 통해서 생깁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아내나 남편의 말, 자식의 이야기로부터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설날에 가족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족들이 다 모이면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자녀들을 축복하고 부모님을 축복하세요. 남편은 아내를 안고 축복하세요. 아내는 남편의 등을 두드리고 보듬으면서 축복하세요. 형제들을 만나면 기도하면서 축복하세요.
설날은 가족들이 모두 모여 복을 나누는 날입니다. 이런 복된 날 서로의 모습에 화를 내고 상처를 주거나 받고 헤어진다면, 이것이 어떻게 축복의 날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먼저 가족들의 생각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생각과 감정의 공감을 통해 그들을 축복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축복하시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축복하셔서 축복의 역사를 감당하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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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 11 ~ 18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명절이 지나면 갈등이 커진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명절이 지나면 부부 갈등이나 고부 갈등이 증가되고 이혼 소송 건수도 늘어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2015년 설 연휴 다음 달이던 3월에 접수된 이혼 소송 청구 건수는 3,539건이었습니다. 이것은 2월 달 접수 건수(2,540건)보다 약 40% 이상 늘어난 수치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부부간의 갈등이 명절을 지나면서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명절의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먹는 사람은 주로 남자들이고 일하는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가사 노동에 대한 여성들의 스트레스가 부부 갈등을 일으키고 고부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며느리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에게도 명절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요사이 며느리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이번 연휴에 회사 당번을 서야 해서 명절 모임에 미리 갈 수가 없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시어머니는 당신들의 과거를 떠올립니다. ‘내가 며느리였을 때는 모든 일을 도맡아서 했는데 요새는 시어머니인 내가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하니 오히려 내가 시집살이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섭섭함도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공감 영역이 자꾸만 줄어들게 됩니다.
명절에 가장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사이가 어떤 사이일까요? 한 보험 회사가 사내 임직원 3,0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1위가 고부 사이, 2위가 시누이와 올케 사이, 3위가 동서지간이었습니다. 1,2,3위가 모두 여성들의 관계인 이유는 설문조사 대상들이 주로 여성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4위는 장인과 사위 사이였습니다. 남자들끼리 있으면 할 말이 없어서 서먹서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것을 넘어서서 상처가 될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꽂히는 것입니다. 어떤 말들이 상처가 될까요? 며느리가 싫어하는 말을 찾아봤습니다. 첫 번째는 “일찍 좀 와라. 친정에도 가는 거냐?”였습니다. 며느리들에게 이 말은 친정에 가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두 번째는 “내년부터는 간소하게 차리자”였습니다. 그 내년이 언제나 ‘내년’이 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세 번째는 “빚은 다 갚았니?”, “애가 너무 말랐구나” 등의 집안일에 대한 세세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가니?”, “나 같은 좋은 시어머니는 없다”, “애는 하나 더 가져야지” 등의 말들이 있었습니다.
또 경기도 여성능력개발센터에서 올해 1월 기혼여성들에게 언제 가장 화가 나는지 물었습니다. 1위가 여자들은 온종일 음식 준비를 하는데 남자들은 TV만 보고 있을 때였고, 2위는 친정에 안 보내주거나 보내줘도 늦게 보내줄 때였습니다. 그리고 3위는 남편 내조를 못 한다고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할 때, 4위는 친정에 간 남편이 잠만 잘 때였습니다. 아마 우리도 이 중 한두 가지는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떤 표현들이 부모와 자녀의 마음을 화합하게 할까요? 바로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제사 지내느라 고생했지만 너희부터는 제사 지내지 말고 그냥 우리를 기억해다오”, “친정 가는 길이 훨씬 머니 거기부터 다녀 오거라” 같은 말들에 며느리의 마음이 확 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생했다, 애썼구나,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들을 건네는 것을 어색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통해서 우리의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 축복을 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며 약 3천 년 전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나오미는 슬픔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쓰여진 책이 있습니다. 바로 룻기입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유대인들의 족보는 가부장적인 족보였습니다. 한국도 가부장적인 사회라 족보에 남자들의 이름만 기록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여성들의 이름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마태복음 1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많은 남자들의 이름 가운데 여성 이름이 다섯 개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룻이 바로 오늘 이야기를 나누게 될 여인 룻입니다.
룻이 누굽니까? 다윗의 증조할머니입니다. 당시 이방 민족의 여인과 결혼을 금했던 이스라엘에서 룻이 이스라엘 백성, 그것도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가 있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다 초청하신다는 메시지인 동시에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룻기는 세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어머니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그녀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는데 한 명은 오르바이고 다른 한 명은 룻이었습니다. 이 세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뿐만 아니라 두 아들까지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한 맺힌 여인들입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3천 년 전 가부장적인 시대에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신을 ‘기쁨’을 뜻하는 ‘나오미’가 아닌 ‘괴로움’을 뜻하는 ‘마라’라고 부르라고 이야기한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깝다는 처절한 고백인 것입니다.

…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 1:20)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버림받았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남편이 죽고 두 아들도 죽어버린 자신의 인생은 망가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낙이 사라졌다는 탄식입니다.
두 며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홀로 남았습니다. 옛날 한국 사회에서 ‘여자 잘못 만나서 남편들이 다 요절했다’는 조롱과 모욕을 받을 만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세 여인들의 모습을 알게 되면 이들이 참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여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조가 있고, 인간미가 흘러넘치는 아름답고 복된 여인들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의 슬픔을 모른 척하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없는 설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도 서러운데 너희는 얼마나 서러웠겠느냐?’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의 공허와 절망을 눈여겨보며 며느리들이 자신보다 더 힘들다고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도 자신은 남편과 오랫동안 살면서 자녀들이 자라는 기쁨을 맛보고 결혼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남편과 즐겁게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게다가 아이까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결정한 것은 아직 젊은 며느리들을 그녀들의 집으로 돌려보내 새로운 삶을 살게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남편으로부터 위로와 즐거움을 받아볼 수 있도록 재혼을 권면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룻 1:9)

“하나님께서 너희를 축복해 주시어 너희에게 남편을 얻게 하셔서 남편의 집에서 위로와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며느리를 향한 시어머니의 따뜻한 배려와 존중이었습니다.
첫 번째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떠나갑니다. 그런데 다른 며느리 룻은 좀처럼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합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 1:15)

아들이 언제까지 아들일까요? 결혼하기 전까지 내 아들입니다. 요즘은 결혼하고 나면 내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의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도 ‘내 아들, 내 아들’이라고 주장하면 가정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내 아들인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분명히 내 아들이지만, 이제는 나와 보내는 시간보다 며느리와 함께 사는 시간이 훨씬 깁니다. 내가 아들을 돌보았던 사랑과 헌신보다 며느리가 내 아들을 사랑하고 돕는 헌신이 더 큽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잘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들과 딸에게 자신의 인생을 올인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이 쓰실 만하게 키우고 그 다음부터는 자녀들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어머니의 인생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시어머니 된 분들은 남편에게 올인 하십시오. 시아버지들은 아내에게 올인 하십시오. 어머니, 아버지가 서로를 위하며 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아들, 딸이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었으니 며느리들에게 너희의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인생은 너희의 것이니 나와의 인연은 여기서 끊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나오미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비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친정집으로 보내면서 복을 비는데 여호와의 이름으로 복을 빕니다.

…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룻 1:8)

“너희가 내 아들에게 잘한 것처럼 나에게도 잘했다. 내가 그것을 안다. 이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시기를 원한다.” 며느리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만약 옛날 시어머니들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뭐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네가 내 아들을 잡아먹었구나!” 우리가 과거 이런 식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는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비난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며느리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너무 붙잡고 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슬픔 끝에서 ‘하나님, 떠나간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잘해야 합니다.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있는 자를 귀히 여기며 사랑하고 넉넉하게 대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나오미는 며느리를 축복한 것입니다.

세 여인 사이에는 공감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며느리들도 대단합니다. 놀랍게도 시어머니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신앙의 역사를 함께 나눕니다. 한마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공감이 형성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 ‘신뢰’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공감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오미의 며느리들에게는 시어머니에 대한 공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생각의 공감입니다. 그들은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돌려보내려는 시어머니의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뜻을 알지만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룻 1:10)

두 번째는 감정의 공감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 (룻 1:14)

이미 9절에도 함께 껴안고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감정적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귀히 여기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그 마음을 알고 같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공감은 많은 문제들을 푸는 열쇠가 됩니다. 생각은 비슷한데 감정이 통하지 않아 하나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와 며느리들에게는 그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감정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의지의 공감입니다. 이것은 내가 의지적으로 시어머니와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16절 전반부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 (룻 1:16)

룻은 결단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겠습니다!” 의지의 공감입니다. 영어 단어 ‘empathy’는 ‘공감’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같은 처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룻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공감이 세워질 수 있었던 기본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신앙의 공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공감입니다. 신앙생활의 공감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16절 후반부입니다.

…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6)

“어머니가 섬겼던 여호와가 내가 섬겨야 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방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어머니가 사랑했던 하나님, 어머니가 섬겼던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다.”
룻이 이런 모습으로 나아갔을 때, 그녀가 가는 곳은 축복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선택한 것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복을 전하고 나누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서부터 생깁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서부터 생깁니까? 나를 만난 사람을 통해서 생깁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아내나 남편의 말, 자식의 이야기로부터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설날에 가족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족들이 다 모이면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자녀들을 축복하고 부모님을 축복하세요. 남편은 아내를 안고 축복하세요. 아내는 남편의 등을 두드리고 보듬으면서 축복하세요. 형제들을 만나면 기도하면서 축복하세요.
설날은 가족들이 모두 모여 복을 나누는 날입니다. 이런 복된 날 서로의 모습에 화를 내고 상처를 주거나 받고 헤어진다면, 이것이 어떻게 축복의 날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먼저 가족들의 생각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생각과 감정의 공감을 통해 그들을 축복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축복하시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축복하셔서 축복의 역사를 감당하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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