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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물음 11-

마태복음 27: 45 ~ 46

김지철 목사

2012.04.01

하나님은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지니신 분이실까요? 하나님을 생각하면 무서우십니까? 아니면 친밀한 느낌이 드십니까? 어쩌면 두 가지 감정이 다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엄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우리가 그 분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잘 표현한 말씀 중 구약성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 68:5)

여기서 거룩한 처소란 감히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가장 높고 영광스러운 곳을 의미합니다. 그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쌍한 이들의 친구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아의 아버지가 되시고, 과부의 재판장이 되셔서 그들의 마음속에 맺혀있는 고통과 한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혹시 고아원에 가본 적 있으십니까? 그곳에는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버림받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 어쩌다가 이 곳에 오게 되었을까 싶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남편을 잃은 여자들이 경험하는 아픔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버림받음의 고통이고 상실의 아픔입니다. ‘내 인생은 왜 이리 못났을까?’,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어’ 하는 자괴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버림받음의 느낌이 고아나 과부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버림받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은 고아로 태어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버림받음의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심리적으로 고아의 심정을 느끼며 성장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상황에서의 상실의 아픔이기도 하고,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슬픔이기도 합니다.
여기 부모로부터 소외받은 한 아들의 고백이 있습니다. 너무나 바쁘게 사는 부모를 보면서 그는 마음이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가끔 만나는 부모님에게서는 끊임없이 이런 암시를 받았습니다. “너는 아빠 엄마가 시간을 낼 만큼 결코 중요한 존재가 아니야. 아빠 엄마에게는 너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고, 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어.” 움츠린 감정과 분노의 감정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음을 느꼈습니다.
또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것을 통해 열등감으로 주눅이 든 자녀들이 있습니다. “형처럼 못해? 너는 왜 언니처럼 저렇게 하지 못하냐? 너는 왜 맨날 이것밖에 안되냐? 너 이웃집 쟤 좀 닮아봐라. 내가 보기에 너는 싹수가 노랗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말 한마디였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낙심과 절망의 경험이 됩니다.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외로움과 주위 사람들의 무관심, 비교당함 등은 일그러진 자화상을 만들게 하고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냅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여러 자리에서 좌절감과 마주칩니다. 원했던 대학과 전공 분야에서 거절당했을 때, 충성했던 직장으로부터 해고를 당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렸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죽음으로 내 곁을 떠날 때, 그리고 끝없이 죄책감으로 얽어매는 죄악과 불의 속에서 우리는 버림받음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 때 우리 영혼이 소리를 지릅니다. “누가 나를 이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낼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다양한 자리에 숨어있는 이러한 상실감, 버림받음의 아픔은 과연 누가 치료해 줄 수 있을까요?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로써 열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도 그러합니다. 내가 가진 버림받음의 아픔은 다른 누군가의 버림받음을 통해서 치유가 됩니다.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쁜 구두가 없어서 늘 불평했는데, 어느 날 한쪽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녀는 깜짝 놀라며 다짐합니다. ‘더 이상 불평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나보다 더 없는 사람, 더 고통받는 사람을 통해서 내 상처와 슬픔이 치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예수님을 ‘상처받은 치유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상처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십니다. 당신이 절망하심으로 우리의 절망을 회복시키십니다. 당신이 슬퍼하심으로 우리의 슬픔을 해결해 주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으셨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빛을 잃고 침묵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해가 빛을 잃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때,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예수님 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떠나갔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마저도 예수님을 외면하시고 예수님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철저히 혼자셨습니다. 홀로 그 길을 가야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주지 않았던 죽음의 형틀입니다. 반란자와 노예들에게만 가해졌던 형틀이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노예들이 당하는 가장 극단적인 징벌, 그것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유대 역사가였던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도 십자가를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로 이야기합니다. 즉,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참혹한 사형방식이었습니다.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벌거벗긴 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며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몸무게 때문에 몸이 흘러내릴 때 횡경막이 조여드는 극심한 고통 속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바라보며 죽어야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고통스러운 죽음, 누구도 맞이하고 싶지 않은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그 고통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셨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명이었습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예수님의 소리에는 십자가 위에서의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왜 나를 버렸습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는 하나님을 향한 저항의 질문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 나입니까? 왜 내가 이 모든 짐을 대신 져야 되는 것입니까?” 하는 부르짖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탄식의 소리 같기도, 자포자기한 슬픔과 절망의 표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죄 없음의 항변, 희생자의 울부짖음,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큰 부르짖음은 인간이 경험했던 그 동안의 모든 슬픔들, 고통들, 절망들을 다 끌어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외침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이 말씀 하나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전생애가 이 말씀 속에 다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그것은 곧 그 아들을 보는 하나님의 애통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슬픔, 절망, 인간의 죄악과 고통을 대신 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탄식하시면서 그동안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됩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에 서서 그들과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고난받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탄식하는 사람들, 외로워하는 사람들,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끌어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이미 버림을 당했다. 가장 철저하게, 그것도 가장 비참하게 버림을 당했다. 나의 이 버림받음에 너의 아픔과 고통을 갖고 와라. 함께 참여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새롭게 주시는 약속, 생명, 부활의 능력 속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초청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나대신 하나님께 저항하고 나대신 하나님께 원망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 내 죄악이 당해야 할 죽음의 역사를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 나의 눈물을 예수님이 대신 흘리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 속에서 내가 아파하고 탄식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아파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 속에 죽음을 당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들의 신분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시면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인간들이 겪는 죄악의 문제, 슬픔의 문제, 외로움과 절망, 질병의 문제 등 이 모든 고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죄악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고난은 고난으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죄악은 죄악을 지는 몸으로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값비싼 것을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더 우울했던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사람, 나보다 더 절망했던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짐 진 자들의 고통을 대신 지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역사, 죄 용서의 역사, 은혜의 역사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값비싼 주님의 생명을 쏟아부어주시면서 죄악된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룩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나의 죄악이 달려있습니다. 내 절망과 고통, 내 죽음이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고, 내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내 질병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아프셨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 죽으셨으며, 내가 흘려야할 눈물을 예수님께서 대신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무거운 짐이 있어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초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 되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이 의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할 줄 모르는 우리는 나를 아낌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과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5)

십자가에 나의 모든 슬픔을 못 박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 십자가 속에 내 슬픔과 죄악, 내 모든 절망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나의 모든 것들을 온전히 그분에게 맡기고,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자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질병이 치유되고, 절망이 소망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눈물이 닦여지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외면과 하나님과의 단절까지 경험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비참함, 버림받음의 아픔, 외로움, 근심과 걱정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픔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뿐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그 사실을 믿고, 그분에게 나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맡겨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주는 예수님의 수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내 모든 것 하나하나 다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죄책감에서 허덕이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다시 함께 일어나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나아가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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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 45 ~ 46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은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지니신 분이실까요? 하나님을 생각하면 무서우십니까? 아니면 친밀한 느낌이 드십니까? 어쩌면 두 가지 감정이 다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엄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우리가 그 분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잘 표현한 말씀 중 구약성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 68:5)

여기서 거룩한 처소란 감히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가장 높고 영광스러운 곳을 의미합니다. 그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쌍한 이들의 친구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아의 아버지가 되시고, 과부의 재판장이 되셔서 그들의 마음속에 맺혀있는 고통과 한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혹시 고아원에 가본 적 있으십니까? 그곳에는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버림받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 어쩌다가 이 곳에 오게 되었을까 싶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남편을 잃은 여자들이 경험하는 아픔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버림받음의 고통이고 상실의 아픔입니다. ‘내 인생은 왜 이리 못났을까?’,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어’ 하는 자괴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버림받음의 느낌이 고아나 과부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버림받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은 고아로 태어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버림받음의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심리적으로 고아의 심정을 느끼며 성장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상황에서의 상실의 아픔이기도 하고,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슬픔이기도 합니다.
여기 부모로부터 소외받은 한 아들의 고백이 있습니다. 너무나 바쁘게 사는 부모를 보면서 그는 마음이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가끔 만나는 부모님에게서는 끊임없이 이런 암시를 받았습니다. “너는 아빠 엄마가 시간을 낼 만큼 결코 중요한 존재가 아니야. 아빠 엄마에게는 너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고, 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어.” 움츠린 감정과 분노의 감정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음을 느꼈습니다.
또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것을 통해 열등감으로 주눅이 든 자녀들이 있습니다. “형처럼 못해? 너는 왜 언니처럼 저렇게 하지 못하냐? 너는 왜 맨날 이것밖에 안되냐? 너 이웃집 쟤 좀 닮아봐라. 내가 보기에 너는 싹수가 노랗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말 한마디였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낙심과 절망의 경험이 됩니다.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외로움과 주위 사람들의 무관심, 비교당함 등은 일그러진 자화상을 만들게 하고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냅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여러 자리에서 좌절감과 마주칩니다. 원했던 대학과 전공 분야에서 거절당했을 때, 충성했던 직장으로부터 해고를 당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렸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죽음으로 내 곁을 떠날 때, 그리고 끝없이 죄책감으로 얽어매는 죄악과 불의 속에서 우리는 버림받음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 때 우리 영혼이 소리를 지릅니다. “누가 나를 이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낼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다양한 자리에 숨어있는 이러한 상실감, 버림받음의 아픔은 과연 누가 치료해 줄 수 있을까요?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로써 열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도 그러합니다. 내가 가진 버림받음의 아픔은 다른 누군가의 버림받음을 통해서 치유가 됩니다.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쁜 구두가 없어서 늘 불평했는데, 어느 날 한쪽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녀는 깜짝 놀라며 다짐합니다. ‘더 이상 불평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나보다 더 없는 사람, 더 고통받는 사람을 통해서 내 상처와 슬픔이 치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예수님을 ‘상처받은 치유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상처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십니다. 당신이 절망하심으로 우리의 절망을 회복시키십니다. 당신이 슬퍼하심으로 우리의 슬픔을 해결해 주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으셨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빛을 잃고 침묵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해가 빛을 잃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때,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예수님 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떠나갔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마저도 예수님을 외면하시고 예수님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철저히 혼자셨습니다. 홀로 그 길을 가야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주지 않았던 죽음의 형틀입니다. 반란자와 노예들에게만 가해졌던 형틀이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노예들이 당하는 가장 극단적인 징벌, 그것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유대 역사가였던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도 십자가를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로 이야기합니다. 즉,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참혹한 사형방식이었습니다.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벌거벗긴 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며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몸무게 때문에 몸이 흘러내릴 때 횡경막이 조여드는 극심한 고통 속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바라보며 죽어야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고통스러운 죽음, 누구도 맞이하고 싶지 않은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그 고통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셨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명이었습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예수님의 소리에는 십자가 위에서의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왜 나를 버렸습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는 하나님을 향한 저항의 질문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 나입니까? 왜 내가 이 모든 짐을 대신 져야 되는 것입니까?” 하는 부르짖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탄식의 소리 같기도, 자포자기한 슬픔과 절망의 표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죄 없음의 항변, 희생자의 울부짖음,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큰 부르짖음은 인간이 경험했던 그 동안의 모든 슬픔들, 고통들, 절망들을 다 끌어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외침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이 말씀 하나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전생애가 이 말씀 속에 다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그것은 곧 그 아들을 보는 하나님의 애통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슬픔, 절망, 인간의 죄악과 고통을 대신 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탄식하시면서 그동안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됩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에 서서 그들과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고난받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탄식하는 사람들, 외로워하는 사람들,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끌어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이미 버림을 당했다. 가장 철저하게, 그것도 가장 비참하게 버림을 당했다. 나의 이 버림받음에 너의 아픔과 고통을 갖고 와라. 함께 참여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새롭게 주시는 약속, 생명, 부활의 능력 속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초청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나대신 하나님께 저항하고 나대신 하나님께 원망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 내 죄악이 당해야 할 죽음의 역사를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 나의 눈물을 예수님이 대신 흘리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 속에서 내가 아파하고 탄식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아파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 속에 죽음을 당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들의 신분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시면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인간들이 겪는 죄악의 문제, 슬픔의 문제, 외로움과 절망, 질병의 문제 등 이 모든 고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죄악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고난은 고난으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죄악은 죄악을 지는 몸으로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값비싼 것을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더 우울했던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사람, 나보다 더 절망했던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짐 진 자들의 고통을 대신 지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역사, 죄 용서의 역사, 은혜의 역사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값비싼 주님의 생명을 쏟아부어주시면서 죄악된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룩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나의 죄악이 달려있습니다. 내 절망과 고통, 내 죽음이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고, 내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내 질병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아프셨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 죽으셨으며, 내가 흘려야할 눈물을 예수님께서 대신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무거운 짐이 있어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초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 되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이 의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할 줄 모르는 우리는 나를 아낌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과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5)

십자가에 나의 모든 슬픔을 못 박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 십자가 속에 내 슬픔과 죄악, 내 모든 절망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나의 모든 것들을 온전히 그분에게 맡기고,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자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질병이 치유되고, 절망이 소망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눈물이 닦여지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외면과 하나님과의 단절까지 경험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비참함, 버림받음의 아픔, 외로움, 근심과 걱정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픔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뿐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그 사실을 믿고, 그분에게 나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맡겨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주는 예수님의 수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내 모든 것 하나하나 다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죄책감에서 허덕이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다시 함께 일어나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나아가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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