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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물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 목요일에 예수님은 체포를 당하셨고, 금요일 아침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왕으로 높임을 받다가 흉악한 죄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삶의 변화가 단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억지로 가신 길은 아닌가? 상황이 갑자기 악화되어서 고난의 자리에 든 것은 아닌가?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이며 자발적으로 가신 길인가?’
이런 물음을 갖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고난의 길 앞에서 주저하셨던 흔적이 곳곳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실 때는, “하나님 내게서 이 잔을 물리쳐 주십시오”라고 십자가의 길을 거절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당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가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 (요한복음 10:17∼18)
당신의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하시고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그렇다면 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고통스럽게 울부짖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비통하게 외치시며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다양한 인간형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형태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인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아담적 인간형’이 있습니다. 그는 유혹을 받으면 넘어지는 인간입니다. 재물의 유혹, 명예의 유혹, 권력의 유혹을 받으면 자신의 탐욕과 결부시키면서 그 유혹에 빠져듭니다.
실제로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신이 보기에 좋고 먹고 마시기에 좋은 것을 선책하면서 첫 번째 죄인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적 인간형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인간형입니다. 후에 이 인간형은 바벨탑을 높이 쌓아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하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인간형의 대표가 됩니다.
아담적 인간형과 닮은 또 하나의 인간형이 있습니다. 바로 ‘가인적 인간형’입니다. 아담형은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비해 가인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물, 사건, 인간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거나 문제가 드러나면 전형적으로 남의 탓을 하는 인간형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을 탓하고, 형제를 탓하고, 친구를 탓합니다. 이런 인간형에게는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불만과 불평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이런 아담형과 가인형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실패 앞에서 남을 탓하고 나는 책임지려 하지 않는 내면의 형태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인간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닮은 인간형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이런 인간형으로 바뀐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적 인간형은 남을 축복할 줄 아는 인간형입니다.
남을 탓하는 사람과 남을 축복할 줄 아는 사람의 인생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복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에게는 몇 가지 복이 주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의 복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람의 복입니다. 그는 자녀의 복을 받았습니다. 친구의 복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물질의 복이었습니다. 땅을 유업으로 받고 재물의 복을 받으면서 그의 삶이 풍요로워졌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복을 받고 남을 축복할 수 있는 복이었습니다. “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와 같은 믿음을 지니면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신다. 그러니 너도 이 복을 받아라.” 남을 축복하는 복을 통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남을 축복한 경험이 많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목사에게만 주시는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모두 남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를 만나면 속으로 복을 빌어 주세요. 운전 중에 지나치는 옆 차들을 향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비세요. ‘이 사람도 예수 믿는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 하나님의 복을 받고 세상을 향해서 복을 빌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가정에 들어가면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축복하시고,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복을 비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건강의 복과 평안의 복과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축복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은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 줬던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인간형은 예수님입니다. 어느 누구도 보여 주지 못했던 삶의 태도를 예수님은 지니셨습니다. 당신은 낮아지시면서 남은 높이셨습니다. 당신은 고난을 당하시고 남은 치유받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죽음을 향해 가시고 남은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인간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이천년 전의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가장 비참하고 비인격적인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며 오해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거지. 자기가 못된 짓 했으니까 저렇게 큰 고통을 당하는 거지!’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그 죗값인 죽음을 당하는 것을 아픔과 슬픔으로 지켜보셨습니다. 멸망당하는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서 오히려 하나뿐인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고통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가겠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누구나 섬김을 받기 원하지만, 나는 섬기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살기를 원하지만 나는 너희가 살도록 내 목숨을 내놓겠다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적 인간형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의 아픔을 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더 의연하시지 왜 그토록 힘들어 하셨을까요? 십자가에 달리실 때 더 당당하시지 왜 그토록 고통스럽게 부르짖으셨을까요?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우리는 병이 들거나 갑자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제일 먼저 ‘왜 하필 납니까?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나보다 더 나쁜 사람도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는데 왜 나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어찌하여 나를’이라는 부르짖음 속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고난당한 사람들의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악인은 번성하고 잘나가는데 의인은 고난을 당합니까?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라면서 인생의 수많은 고난을 보시면서도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십니까? 정말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이 물음을 모두 받으셔서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찌하여 나를’이라는 부르짖음 속에는 이제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고난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앞으로도 당할 사람들아, 너희의 한 맺힌 절규를 내가 알고 있다. 나도 고난을 통해 너희의 아픔에 동참하겠다.” 고난받는 사람들의 한 맺힌 절규들이 예수님의 이 마지막 부르짖음 속에서 수용되고 수렴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 고통과 탄식이 아무리 커도, 내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답답해도 주님 앞에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나보다 더 큰 고통과 아픔 속에서 부르짖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외침을 ‘제 구시에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시란, 오후 세 시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은 단순한 탄식 이상이자 곧 기도였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그것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을 아주 친밀하게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의심이나 한 맺힌 절규를 넘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기대가 그 안에 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짖음 속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이 죄 많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십자가에 내버려 두십니까? 이 인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나를 포기하십니까?” 죄 많은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버리기까지 하시냐는 역설적인 찬양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가르쳐 줍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8)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그동안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던 휘장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장벽과 차별성들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고,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를 차별하고, 인종에 따라 차별하고, 사회적 위치에 따라 차별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변화 중 하나가 매년 동물의 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던 전통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의 습관 하나 바꾸기도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수천 년 동안 내려왔던 피의 제사를 없앤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이 사실을 깨닫고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경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7∼8)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적대자 되었을 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나아갑시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 안에 인간이 가진 문제에 대한 모든 대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처절한 부르짖음 속에 우리의 분노와 한 맺힘의 이야기가 들어 있고, 우리와 연대하시는 예수님의 용기가 들어 있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지심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죄 용서의 사건이 있고, 예수님 안에 절망을 넘어서는 소망이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고난을 만나면 스스로를 공격하는 어리석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내 인생은 다 끝났다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죄책감에 무기력해진 우리에게 용서받음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늘도 이 시간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일주일 중 하루나 혹은 하루에 한 끼씩 금식하시면서 예수님의 수난의 말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져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확인하며, 아담적 인간, 가인적 인간형을 타파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받은 복을 증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하고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15: 33 ~ 39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물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 목요일에 예수님은 체포를 당하셨고, 금요일 아침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왕으로 높임을 받다가 흉악한 죄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삶의 변화가 단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억지로 가신 길은 아닌가? 상황이 갑자기 악화되어서 고난의 자리에 든 것은 아닌가?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이며 자발적으로 가신 길인가?’
이런 물음을 갖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고난의 길 앞에서 주저하셨던 흔적이 곳곳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실 때는, “하나님 내게서 이 잔을 물리쳐 주십시오”라고 십자가의 길을 거절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당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가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 (요한복음 10:17∼18)
당신의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하시고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그렇다면 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고통스럽게 울부짖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비통하게 외치시며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다양한 인간형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형태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인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아담적 인간형’이 있습니다. 그는 유혹을 받으면 넘어지는 인간입니다. 재물의 유혹, 명예의 유혹, 권력의 유혹을 받으면 자신의 탐욕과 결부시키면서 그 유혹에 빠져듭니다.
실제로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신이 보기에 좋고 먹고 마시기에 좋은 것을 선책하면서 첫 번째 죄인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적 인간형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인간형입니다. 후에 이 인간형은 바벨탑을 높이 쌓아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하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인간형의 대표가 됩니다.
아담적 인간형과 닮은 또 하나의 인간형이 있습니다. 바로 ‘가인적 인간형’입니다. 아담형은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비해 가인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물, 사건, 인간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거나 문제가 드러나면 전형적으로 남의 탓을 하는 인간형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을 탓하고, 형제를 탓하고, 친구를 탓합니다. 이런 인간형에게는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불만과 불평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이런 아담형과 가인형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실패 앞에서 남을 탓하고 나는 책임지려 하지 않는 내면의 형태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인간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닮은 인간형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이런 인간형으로 바뀐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적 인간형은 남을 축복할 줄 아는 인간형입니다.
남을 탓하는 사람과 남을 축복할 줄 아는 사람의 인생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복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에게는 몇 가지 복이 주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의 복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람의 복입니다. 그는 자녀의 복을 받았습니다. 친구의 복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물질의 복이었습니다. 땅을 유업으로 받고 재물의 복을 받으면서 그의 삶이 풍요로워졌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복을 받고 남을 축복할 수 있는 복이었습니다. “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와 같은 믿음을 지니면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신다. 그러니 너도 이 복을 받아라.” 남을 축복하는 복을 통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남을 축복한 경험이 많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목사에게만 주시는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모두 남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를 만나면 속으로 복을 빌어 주세요. 운전 중에 지나치는 옆 차들을 향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비세요. ‘이 사람도 예수 믿는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 하나님의 복을 받고 세상을 향해서 복을 빌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가정에 들어가면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축복하시고,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복을 비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건강의 복과 평안의 복과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축복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은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 줬던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인간형은 예수님입니다. 어느 누구도 보여 주지 못했던 삶의 태도를 예수님은 지니셨습니다. 당신은 낮아지시면서 남은 높이셨습니다. 당신은 고난을 당하시고 남은 치유받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죽음을 향해 가시고 남은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인간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이천년 전의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가장 비참하고 비인격적인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며 오해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거지. 자기가 못된 짓 했으니까 저렇게 큰 고통을 당하는 거지!’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그 죗값인 죽음을 당하는 것을 아픔과 슬픔으로 지켜보셨습니다. 멸망당하는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서 오히려 하나뿐인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고통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가겠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누구나 섬김을 받기 원하지만, 나는 섬기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살기를 원하지만 나는 너희가 살도록 내 목숨을 내놓겠다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적 인간형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의 아픔을 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더 의연하시지 왜 그토록 힘들어 하셨을까요? 십자가에 달리실 때 더 당당하시지 왜 그토록 고통스럽게 부르짖으셨을까요?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우리는 병이 들거나 갑자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제일 먼저 ‘왜 하필 납니까?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나보다 더 나쁜 사람도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는데 왜 나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어찌하여 나를’이라는 부르짖음 속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고난당한 사람들의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악인은 번성하고 잘나가는데 의인은 고난을 당합니까?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라면서 인생의 수많은 고난을 보시면서도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십니까? 정말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이 물음을 모두 받으셔서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찌하여 나를’이라는 부르짖음 속에는 이제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고난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앞으로도 당할 사람들아, 너희의 한 맺힌 절규를 내가 알고 있다. 나도 고난을 통해 너희의 아픔에 동참하겠다.” 고난받는 사람들의 한 맺힌 절규들이 예수님의 이 마지막 부르짖음 속에서 수용되고 수렴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 고통과 탄식이 아무리 커도, 내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답답해도 주님 앞에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나보다 더 큰 고통과 아픔 속에서 부르짖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외침을 ‘제 구시에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시란, 오후 세 시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은 단순한 탄식 이상이자 곧 기도였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그것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을 아주 친밀하게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의심이나 한 맺힌 절규를 넘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기대가 그 안에 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짖음 속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이 죄 많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십자가에 내버려 두십니까? 이 인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나를 포기하십니까?” 죄 많은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버리기까지 하시냐는 역설적인 찬양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가르쳐 줍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8)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그동안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던 휘장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장벽과 차별성들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고,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를 차별하고, 인종에 따라 차별하고, 사회적 위치에 따라 차별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변화 중 하나가 매년 동물의 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던 전통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의 습관 하나 바꾸기도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수천 년 동안 내려왔던 피의 제사를 없앤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이 사실을 깨닫고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경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7∼8)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적대자 되었을 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나아갑시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 안에 인간이 가진 문제에 대한 모든 대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처절한 부르짖음 속에 우리의 분노와 한 맺힘의 이야기가 들어 있고, 우리와 연대하시는 예수님의 용기가 들어 있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지심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죄 용서의 사건이 있고, 예수님 안에 절망을 넘어서는 소망이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고난을 만나면 스스로를 공격하는 어리석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내 인생은 다 끝났다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죄책감에 무기력해진 우리에게 용서받음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늘도 이 시간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일주일 중 하루나 혹은 하루에 한 끼씩 금식하시면서 예수님의 수난의 말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져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확인하며, 아담적 인간, 가인적 인간형을 타파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받은 복을 증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하고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