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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예수님의 물음 12-

누가복음 24: 36 ~ 43

김지철 목사

2012.04.08

죽음은 인생의 종료를 의미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 이것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의 독자적인 선포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분을 높여 드렸습니다. 세상에 어떤 종교가 고난당하고 죽임당한 종교창시자를 이야기하며, 게다가 그것을 예찬하기까지 합니까?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그냥 끝, 인생의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말하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공자의 제자였던 계로(季路)가 스승에게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삶이 신비라면, 죽음은 무지(無知)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바르게 아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죽음을 경험한 자, 즉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회복 불가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에 아무도 죽음에 대해서 이렇다 말할 수 없습니다.
작년에 죽은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IT 산업의 천재적인 선구자였습니다. 그런 그도 죽음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췌장암을 앓았던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죽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50대 50입니다. 어쨌든 나는 내 인생 대부분에 걸쳐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 우리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고 느껴왔습니다.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그렇게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어쩌면 약간의 지혜까지 쌓았는데 그 모든 것이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래서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어쩌면 나의 의식은 영속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딸깍’ 누르면 그냥 꺼져버리는 거지요. 아마 그래서 내가 애플기기에 스위치를 넣는 걸 그렇게 싫어했나 봅니다.”

애플기기를 사용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의 제품에는 on/off 스위치가 없습니다. 그냥 슬쩍 밀면 켜지고, 지나가는 듯이 누르면 꺼져버리게 되어있습니다. 자기 죽음에 대한 거부와 싫음을, 그는 그가 만들어내는 기기 속에서 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새 생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죽으면 3일 이내에 장사지내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회복 불가능. 그것이 죽음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음이 다른 모든 죽음들과 같았다면, 기독교신앙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청년 예수의 삶과 죽음은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의 부르짖음도 고통 속에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토해내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꺾이는구나.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생애가 참혹하게 끝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제 끝이다. 우리도 옛 직업으로 돌아가야겠다. 3년 동안 따라다닌 것도 다 허무한 일이다.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대도, 예수님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도, 부질없이 사라지는구나.’ 하며 탄식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끝, 모든 것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임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며칠이 지나고, 놀라운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대. 이미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있대. 우리들 중에도 누군가는 만났대.”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소식을 그대로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믿고 의지했던 스승을 상실하고,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억울함과 울분이 제자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일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일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의심과 기대가 서로 뒤엉켜있던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누가복음 24:38)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죽은 자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다시 일어나게 하고 싶고, 새 생명 얻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었던 자가 직접 눈앞에 나타나면 반가움 보다는 놀람이 먼저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의심과 의혹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심의 해석학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의심을 멈출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본래 해석학이란, 문서에 기록된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풀어내는 기술입니다. 여기서 의심의 해석학이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의심이라는 거대한 구름이 사고를 덮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두뇌는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믿을 만한 사건인가? 그냥 지나쳐야할 사건인가?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 아니면 더 이상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인가?’ 등 의심의 해석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기존에 경험했던 죽음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목격했는데 어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3년을 함께 보낸 예수님이 분명했습니다. 놀랍고, 두렵고, 의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을까요? 의심의 해석학을 바꿔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이상 절망의 해석학이 제자들의 사고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의심과 절망의 해석학을 신뢰와 담대함의 해석학으로 바꾸어 제자들을 다시 세우려 하셨던 것입니다. 의심의 해석학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고 신뢰해야만 진정으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제자들을 향해서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누가복음 24:36)

가장 먼저,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으라.” peace be with you.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제자들을 보시며 마음의 평강과 쉼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사용하는 말 중에서 최고의 멋진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강을 의미하는 샬롬(shalom)입니다. 이것은 전천후적인 인사입니다. 기쁠 때도 샬롬, 슬플 때도 샬롬입니다. 결혼식에 가서도, 장례식에 가서도 샬롬입니다. 세계 제2차대전 중, 나치정권에 의해서 붙잡힌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면서 서로 주고 받았던 인사도 “샬롬”이었습니다. 그들은 짐승처럼 죽어갈 때도 서로에게 평강을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부터의 평안, 그것이 샬롬입니다. 세상의 걱정, 근심, 환경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 평안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상상이 아닌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보여주신 것은, 바로 못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당신의 손과 발이었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39)

기독교 신앙은 상상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허상이 아니라 실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학자들이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책상 앞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고통 받는 현장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절망하고 낙심하는 삶의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 고통 받는 자, 외로운 자, 힘든 자의 자리에 직접 찾아가셔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친히 몸과 몸으로 마주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해야 성숙해질 수 있는지 아십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보고, 직접 성경을 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봐야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찬양해봐야 됩니다. 힘든 자의 자리에 들어가서 그 아픔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어보고 그들을 섬겨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보아야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예수님이 나 때문에 저 십자가 골고다 언덕을 가셨구나. 내 죄를 대신 지시고 고통스럽게 죽으셨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구나. 그 은혜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하는 신앙의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됩니다. 그때서야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은 자라는 것입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마주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아버지의 신앙, 어머니의 신앙으로 멈춰섭니다. 아내의 신앙, 남편의 신앙으로 멈춰서고 맙니다. 그것은 결코 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네 마음으로 요청하고, 네 믿음으로 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는 것은, 부활했음을 자랑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억압받고 압제받던 의심의 해석학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몸으로 위로를 전하시며, 이제는 신뢰의 해석학으로 인생을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부활했다. 내가 생명의 자리에 들어왔다”고 용기를 주시며 생명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작은 자가 위대하게 되는 역설의 사건입니다.

이들이 어떤 제자들인지 생각해보십시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무서워 다 도망갔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뿐입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가 버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쓸모없는 제자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신뢰를 가르치십니다. 다시 믿음을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맡기십니다.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이란 이런 것입니다. 작은 자, 별 볼 일 없는 자, 아무것도 아닌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절망하고 낙심한 자에게 희망을 주고, 우울한 자에게 이제는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답답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에게 할 수 있다고, 네가 믿음의 사람인 것을 보여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두움과 죽임을 향해서 가지 말고, 이제는 빛으로 나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려주실 것을 믿고,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라고 가르쳐주시는 사건이 바로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도망갔던 제자들이, 의심 많았던 제자들이, 겁냈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할 말이 없던 제자들에게 할 말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격자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목격자다. 내가 증인이다.” 라고 담대히 말하며 초대교회에 부활의 역사를 만들어 내도록 주님께서는 신뢰와 생명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의심 절반, 믿음 절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만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갖게 될 것이다.” 하시는 말씀을 받아야 의심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내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장래에 일어날 나 자신의 부활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어둠 속을 헤매지 말고 빛으로 나와야합니다. 더 이상 우울함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기쁨으로 나오십시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더 이상 불평하며 남을 조롱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감사의 제단을 쌓으십시오.

신뢰가 사랑과 회복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의심의 해석학이 미덕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시대정신의 명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의심은 결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의심하면 두려움이 생기고, 남에 대한 미움이 생깁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기에 심성이 사나워지기 시작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왜 이렇게 남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며 남을 무너뜨리고 싶어합니까? 내 속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심의 해석학이 만연되어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다툼과 갈등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위기도, 교회의 위기도 의심의 해석학을 미덕으로 삼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들이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의심의 해석학을 신뢰의 해석학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과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살리는 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슴에 받으시면서 이 땅에 새 생명의 역사를 창출해 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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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 36 ~ 43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죽음은 인생의 종료를 의미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 이것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의 독자적인 선포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분을 높여 드렸습니다. 세상에 어떤 종교가 고난당하고 죽임당한 종교창시자를 이야기하며, 게다가 그것을 예찬하기까지 합니까?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그냥 끝, 인생의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말하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공자의 제자였던 계로(季路)가 스승에게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삶이 신비라면, 죽음은 무지(無知)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바르게 아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죽음을 경험한 자, 즉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회복 불가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에 아무도 죽음에 대해서 이렇다 말할 수 없습니다.
작년에 죽은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IT 산업의 천재적인 선구자였습니다. 그런 그도 죽음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췌장암을 앓았던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죽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50대 50입니다. 어쨌든 나는 내 인생 대부분에 걸쳐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 우리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고 느껴왔습니다.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그렇게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어쩌면 약간의 지혜까지 쌓았는데 그 모든 것이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래서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어쩌면 나의 의식은 영속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딸깍’ 누르면 그냥 꺼져버리는 거지요. 아마 그래서 내가 애플기기에 스위치를 넣는 걸 그렇게 싫어했나 봅니다.”

애플기기를 사용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의 제품에는 on/off 스위치가 없습니다. 그냥 슬쩍 밀면 켜지고, 지나가는 듯이 누르면 꺼져버리게 되어있습니다. 자기 죽음에 대한 거부와 싫음을, 그는 그가 만들어내는 기기 속에서 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새 생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죽으면 3일 이내에 장사지내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회복 불가능. 그것이 죽음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음이 다른 모든 죽음들과 같았다면, 기독교신앙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청년 예수의 삶과 죽음은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의 부르짖음도 고통 속에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토해내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꺾이는구나.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생애가 참혹하게 끝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제 끝이다. 우리도 옛 직업으로 돌아가야겠다. 3년 동안 따라다닌 것도 다 허무한 일이다.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대도, 예수님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도, 부질없이 사라지는구나.’ 하며 탄식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끝, 모든 것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임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며칠이 지나고, 놀라운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대. 이미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있대. 우리들 중에도 누군가는 만났대.”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소식을 그대로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믿고 의지했던 스승을 상실하고,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억울함과 울분이 제자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일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일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의심과 기대가 서로 뒤엉켜있던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누가복음 24:38)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죽은 자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다시 일어나게 하고 싶고, 새 생명 얻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었던 자가 직접 눈앞에 나타나면 반가움 보다는 놀람이 먼저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의심과 의혹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심의 해석학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의심을 멈출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본래 해석학이란, 문서에 기록된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풀어내는 기술입니다. 여기서 의심의 해석학이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의심이라는 거대한 구름이 사고를 덮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두뇌는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믿을 만한 사건인가? 그냥 지나쳐야할 사건인가?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 아니면 더 이상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인가?’ 등 의심의 해석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기존에 경험했던 죽음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목격했는데 어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3년을 함께 보낸 예수님이 분명했습니다. 놀랍고, 두렵고, 의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을까요? 의심의 해석학을 바꿔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이상 절망의 해석학이 제자들의 사고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의심과 절망의 해석학을 신뢰와 담대함의 해석학으로 바꾸어 제자들을 다시 세우려 하셨던 것입니다. 의심의 해석학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고 신뢰해야만 진정으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제자들을 향해서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누가복음 24:36)

가장 먼저,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으라.” peace be with you.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제자들을 보시며 마음의 평강과 쉼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사용하는 말 중에서 최고의 멋진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강을 의미하는 샬롬(shalom)입니다. 이것은 전천후적인 인사입니다. 기쁠 때도 샬롬, 슬플 때도 샬롬입니다. 결혼식에 가서도, 장례식에 가서도 샬롬입니다. 세계 제2차대전 중, 나치정권에 의해서 붙잡힌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면서 서로 주고 받았던 인사도 “샬롬”이었습니다. 그들은 짐승처럼 죽어갈 때도 서로에게 평강을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부터의 평안, 그것이 샬롬입니다. 세상의 걱정, 근심, 환경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 평안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상상이 아닌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보여주신 것은, 바로 못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당신의 손과 발이었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39)

기독교 신앙은 상상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허상이 아니라 실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학자들이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책상 앞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고통 받는 현장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절망하고 낙심하는 삶의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 고통 받는 자, 외로운 자, 힘든 자의 자리에 직접 찾아가셔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친히 몸과 몸으로 마주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해야 성숙해질 수 있는지 아십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보고, 직접 성경을 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봐야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찬양해봐야 됩니다. 힘든 자의 자리에 들어가서 그 아픔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어보고 그들을 섬겨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보아야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예수님이 나 때문에 저 십자가 골고다 언덕을 가셨구나. 내 죄를 대신 지시고 고통스럽게 죽으셨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구나. 그 은혜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하는 신앙의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됩니다. 그때서야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은 자라는 것입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마주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아버지의 신앙, 어머니의 신앙으로 멈춰섭니다. 아내의 신앙, 남편의 신앙으로 멈춰서고 맙니다. 그것은 결코 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네 마음으로 요청하고, 네 믿음으로 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는 것은, 부활했음을 자랑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억압받고 압제받던 의심의 해석학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몸으로 위로를 전하시며, 이제는 신뢰의 해석학으로 인생을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부활했다. 내가 생명의 자리에 들어왔다”고 용기를 주시며 생명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작은 자가 위대하게 되는 역설의 사건입니다.

이들이 어떤 제자들인지 생각해보십시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무서워 다 도망갔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뿐입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가 버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쓸모없는 제자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신뢰를 가르치십니다. 다시 믿음을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맡기십니다.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이란 이런 것입니다. 작은 자, 별 볼 일 없는 자, 아무것도 아닌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절망하고 낙심한 자에게 희망을 주고, 우울한 자에게 이제는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답답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에게 할 수 있다고, 네가 믿음의 사람인 것을 보여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두움과 죽임을 향해서 가지 말고, 이제는 빛으로 나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려주실 것을 믿고,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라고 가르쳐주시는 사건이 바로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도망갔던 제자들이, 의심 많았던 제자들이, 겁냈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할 말이 없던 제자들에게 할 말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격자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목격자다. 내가 증인이다.” 라고 담대히 말하며 초대교회에 부활의 역사를 만들어 내도록 주님께서는 신뢰와 생명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의심 절반, 믿음 절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만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갖게 될 것이다.” 하시는 말씀을 받아야 의심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내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장래에 일어날 나 자신의 부활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어둠 속을 헤매지 말고 빛으로 나와야합니다. 더 이상 우울함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기쁨으로 나오십시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더 이상 불평하며 남을 조롱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감사의 제단을 쌓으십시오.

신뢰가 사랑과 회복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의심의 해석학이 미덕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시대정신의 명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의심은 결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의심하면 두려움이 생기고, 남에 대한 미움이 생깁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기에 심성이 사나워지기 시작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왜 이렇게 남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며 남을 무너뜨리고 싶어합니까? 내 속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심의 해석학이 만연되어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다툼과 갈등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위기도, 교회의 위기도 의심의 해석학을 미덕으로 삼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들이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의심의 해석학을 신뢰의 해석학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과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살리는 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슴에 받으시면서 이 땅에 새 생명의 역사를 창출해 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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