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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고해’나 ‘고통의 바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만큼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삶의 현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본 사람들은 삶이 너무 힘들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마음 속으로부터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가장 큰 뒷면을 우리가 깨닫고 터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살펴봐도 얼마나 걱정거리가 많고 근심거리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잠을 자다가도 밤중에 벌떡 일어나는 것은 스트레스의 중압감에 못 이겨서 몸이 반응하는 표현이기도 할 것입니다. 늘 밝게 웃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조금만 그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속은 찡그리고 있고 때로는 깊이 한숨지으며 눈물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반드시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건강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고, 자기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능력을 증진시키는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스트레스가 없으면 아마 우리는 게을러지기 쉬울 겁니다. 때로는 무기력해 질 수도 있을 겁니다. 스트레스에는 이런 좋은 점이 있습니다.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스트레스가 지속되고, 반복되고, 누적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질병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병적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이러한 병적 스트레스의 지속은 걱정 근심을 만들고, 걱정 근심은 ‘두려움’이라는 형체 없는 괴물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한 심리학 교수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용 쥐 300 마리에게 암세포를 주입한 후 그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인 100마리 쥐에게는 그들이 있는 자리에 전기 충격을 준 후, 쥐들이 깜짝 놀라서 도망가면 도망간 곳에서도 전기충격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100마리 쥐에게는 전기 충격 후 쥐들이 도망을 가면, 그 곳에서는 전기 충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의 쥐들에게는 아무런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방치해놨습니다. 어느 그룹의 쥐에서 암 발병률이 가장 높았을까요?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기 충격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또 피하려고 다른 방으로 갔을 때에도 전기 충격을 받은 첫 번째 그룹에서 암 발병률이 73%로 가장 높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피할 곳이 있었던 두 번째 그룹에서는 31%, 마지막으로 아무런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던 그룹에서는 50%의 발병률을 보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쥐의 세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사람들의 세계는 안 그럴까요?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트레스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나가라는 신체적이고 심리학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적응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생기게 합니다. 문제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절망감입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느낀 쥐들은 저항 능력이 매우 축소되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와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상세포는 옆의 세포와 대화를 나눕니다. 다시 말하면, 정보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도와주다가 자기 역할이 끝나면 조용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암세포는 다릅니다. 옆의 세포와 대화를 나누거나 정보를 공유하지 않습니다. 혼자 영양분을 독점합니다. 그리고 무한대의 분열과 증식 과정을 통해 다른 세포들을 잡아먹게 되어있습니다. 이 암세포를 이기는 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면역세포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면역세포는 어떤 때 가장 활발하게 운동 할까요? 그것은 마음에 평안이 있을 때, 마음에 도전의식이 있을 때, 용기가 있을 때입니다. ‘아! 이제 절망이다. 나는 이제 끝이다. 나는 암에 걸려서 더 이상은 살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자기를 차단하면 면역체계는 취약해집니다. 그러나 ‘난 가능성이 있어. 암세포가 나를 어쩌지 못할 거야. 난 도전할거야. 내가 절제해 볼 거야. 내가 내 몸을 귀히 여길 거야’하며 스트레스 상황에서 용기를 내면, 면역세포가 강해지고 암세포를 이길 수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위기는 언제라도 닥쳐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는 아주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무력감과 소외감으로, 때로는 적개심으로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도전하는 마음과 자신을 훈련시키는 마음으로 새로운 가망성에 대한 희망을 갖고 문제에 접근하면 이겨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깨우십시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300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일 한 번씩 읽을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을 가슴에 품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세상을 겁내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겁내야 할 것을 겁내고, 겁내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어찌하여 두려움 속에서 빠져 있느냐?” 그것은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인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저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해서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낮 동안의 일들로 피곤하셨는지 배에 오르시자마자 배 뒤편에서 베개를 베고 깊은 잠에 빠져 드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 배가 출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분 것입니다. 비가 오고, 파도가 치고, 배가 휘청거립니다. 심지어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다급했습니다. 그들에게 여러 가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첫째로는, ‘이제 죽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명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지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홀로 있다는 두려움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깨우는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8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마가복음 4:38)
우리 인생에도 이런 돌풍이 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릴 때마다 열심히 헌금했고, 교회에서 봉사하라고 하면 봉사도 했는데, 내 삶에 갑자기 뜻하지 않은 돌풍이 불면서 걱정과 근심의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동안은 참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질병이 나를 억누릅니다. 잘 나가던 직장에서 갑자기 손가락질 당하며 쫓겨납니다. 내가 있던 기업, 내가 했던 사업이 파산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동안 아무 문제없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깨지기 시작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한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생겨서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마르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일들 경험해 본 적 없으십니까?
인생의 돌풍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더욱 위협적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삶의 모든 복을 빼앗는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누리기가 힘들 정도의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작게, 어떤 사람은 아주 크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해 줍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깨우는 겁니다. 예수님을 깨운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내 실존의 위기를 예수님께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면한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렵습니다. 하나님, 나 죽게 됐습니다. 하나님, 고통스럽습니다. 힘듭니다. 하나님 좀 간섭하세요. 내 인생을 이끌어 주세요. 날 좀 위로하세요. 내가 가야할 길을 가르쳐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갖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러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에이, 그래도 내가 해야지.’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나를 조금이라도 억누르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왠지 마음이 우울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내 마음에 미움이 생깁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내 마음에 적개심이 생기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두려움이 생겨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장 작은 것도 하나님께 고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깨우셔야 합니다. 본래 예수님은 항상 깨어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께 아무것도 아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내 삶 속에서 주무시게 두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십시오.
첫 번째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이라면,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두려워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이것은 나 스스로에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질문해야 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두려워하느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절망하고 낙심하느냐? 무엇이 그렇게 너를 겁나게 하고 있는가?’하고 물어야 됩니다. 그래야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마가복음 4:40)
두려움은 마치 형체 없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괴물의 실체를 밝혀라. 별것 아닌 두려움을 하나 하나씩 제거해라.”라고 말입니다. 두려움을 향해서 이야기해야 됩니다. “너는 나를 이길 수가 없어. 너는 내게 겁줄 수가 없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야. 내가 분투 중에 쓰러질지언정 나를 겁주는 너에게 타협할 수 없어.”라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대공황으로 미국의 경제 사회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유일한 것, 그 단 한 가지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두려움이란 얼마나 민감한 것인지 모릅니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두려움은 시각이 예리하여 땅 속에 숨은 것을 볼 줄 알고 하늘에 뜨는 것은 더 잘 찾아낸다.”
우리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 생기면 그동안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하나 두려움으로 변해서 근심걱정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제일 처음에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그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두려움 자체가 나를 엄습하며 억누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두려움은 우리가 약한 마음을 품게 만듭니다.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의지를 무력하게 하고 행동을 억압시킵니다. 실존하지도 않는 장애물을 괴물처럼 여기면서 도망가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를 침몰시키는 아주 악한 세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세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두려움을 만들고 있는 것을 향해서 꾸짖는 것입니다. “두려움아, 물러가라!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것아, 내게서 떠나라!” 이렇게 엄하게 명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마가복음 4장 3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마가복음 4:39)
예수님의 목표는 뚜렷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시는 대상은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의 생명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뜻없이 손상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꾸짖은 대상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귀신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귀신을 향해서 꾸짖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을 꾸짖으셨습니다. “질병아. 네가 어찌하여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느냐?”라고 하시며 쫓아내셨습니다. 세 번째는 바로 바람과 바다였습니다. “어떻게 너희가 우리를 위협하느냐?” 그렇게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시고, 자연과 이 모든 만물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제자들이 목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마가복음 4:41)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처음에는 파도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물결치는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 세상의 환경과 여건,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겠다고 하는 선언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시편 기자들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사람을 두려워하랴? 내가 어찌 환경을 두려워하랴? 내가 두려워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바로 이러한 선배들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스트레스가 없는 곳을 향해 도망가시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스트레스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멈출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에도 끊임없이 암세포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암세포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면역체계가 있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그럼 신앙의 면역체계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세 가지를 기억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깨워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야 됩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꾸지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꾸지람을 듣는 것은 언짢지만,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는 것은 괜찮습니다. 나의 형편없는 모습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 속에서 나를 겁주고, 근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해야 됩니다. 그 실체를 밝히고 그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예수님처럼 꾸짖어야 됩니다. 나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을 내 속에서 다 쫓아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이시다. 나는 생명을 사랑한다.”라고 선포하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세상의 모든 자잘한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수많은 근심과 걱정들을 담대히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축복을 누리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4: 35 ~ 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스트레스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고해’나 ‘고통의 바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만큼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삶의 현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본 사람들은 삶이 너무 힘들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마음 속으로부터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가장 큰 뒷면을 우리가 깨닫고 터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살펴봐도 얼마나 걱정거리가 많고 근심거리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잠을 자다가도 밤중에 벌떡 일어나는 것은 스트레스의 중압감에 못 이겨서 몸이 반응하는 표현이기도 할 것입니다. 늘 밝게 웃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조금만 그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속은 찡그리고 있고 때로는 깊이 한숨지으며 눈물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반드시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건강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고, 자기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능력을 증진시키는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스트레스가 없으면 아마 우리는 게을러지기 쉬울 겁니다. 때로는 무기력해 질 수도 있을 겁니다. 스트레스에는 이런 좋은 점이 있습니다.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스트레스가 지속되고, 반복되고, 누적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질병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병적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이러한 병적 스트레스의 지속은 걱정 근심을 만들고, 걱정 근심은 ‘두려움’이라는 형체 없는 괴물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한 심리학 교수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용 쥐 300 마리에게 암세포를 주입한 후 그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인 100마리 쥐에게는 그들이 있는 자리에 전기 충격을 준 후, 쥐들이 깜짝 놀라서 도망가면 도망간 곳에서도 전기충격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100마리 쥐에게는 전기 충격 후 쥐들이 도망을 가면, 그 곳에서는 전기 충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의 쥐들에게는 아무런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방치해놨습니다. 어느 그룹의 쥐에서 암 발병률이 가장 높았을까요?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기 충격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또 피하려고 다른 방으로 갔을 때에도 전기 충격을 받은 첫 번째 그룹에서 암 발병률이 73%로 가장 높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피할 곳이 있었던 두 번째 그룹에서는 31%, 마지막으로 아무런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던 그룹에서는 50%의 발병률을 보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쥐의 세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사람들의 세계는 안 그럴까요?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트레스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나가라는 신체적이고 심리학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적응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생기게 합니다. 문제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절망감입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느낀 쥐들은 저항 능력이 매우 축소되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와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상세포는 옆의 세포와 대화를 나눕니다. 다시 말하면, 정보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도와주다가 자기 역할이 끝나면 조용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암세포는 다릅니다. 옆의 세포와 대화를 나누거나 정보를 공유하지 않습니다. 혼자 영양분을 독점합니다. 그리고 무한대의 분열과 증식 과정을 통해 다른 세포들을 잡아먹게 되어있습니다. 이 암세포를 이기는 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면역세포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면역세포는 어떤 때 가장 활발하게 운동 할까요? 그것은 마음에 평안이 있을 때, 마음에 도전의식이 있을 때, 용기가 있을 때입니다. ‘아! 이제 절망이다. 나는 이제 끝이다. 나는 암에 걸려서 더 이상은 살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자기를 차단하면 면역체계는 취약해집니다. 그러나 ‘난 가능성이 있어. 암세포가 나를 어쩌지 못할 거야. 난 도전할거야. 내가 절제해 볼 거야. 내가 내 몸을 귀히 여길 거야’하며 스트레스 상황에서 용기를 내면, 면역세포가 강해지고 암세포를 이길 수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위기는 언제라도 닥쳐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는 아주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무력감과 소외감으로, 때로는 적개심으로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도전하는 마음과 자신을 훈련시키는 마음으로 새로운 가망성에 대한 희망을 갖고 문제에 접근하면 이겨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깨우십시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300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일 한 번씩 읽을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을 가슴에 품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세상을 겁내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겁내야 할 것을 겁내고, 겁내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어찌하여 두려움 속에서 빠져 있느냐?” 그것은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인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저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해서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낮 동안의 일들로 피곤하셨는지 배에 오르시자마자 배 뒤편에서 베개를 베고 깊은 잠에 빠져 드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 배가 출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분 것입니다. 비가 오고, 파도가 치고, 배가 휘청거립니다. 심지어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다급했습니다. 그들에게 여러 가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첫째로는, ‘이제 죽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명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지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홀로 있다는 두려움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깨우는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8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마가복음 4:38)
우리 인생에도 이런 돌풍이 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릴 때마다 열심히 헌금했고, 교회에서 봉사하라고 하면 봉사도 했는데, 내 삶에 갑자기 뜻하지 않은 돌풍이 불면서 걱정과 근심의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동안은 참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질병이 나를 억누릅니다. 잘 나가던 직장에서 갑자기 손가락질 당하며 쫓겨납니다. 내가 있던 기업, 내가 했던 사업이 파산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동안 아무 문제없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깨지기 시작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한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생겨서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마르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일들 경험해 본 적 없으십니까?
인생의 돌풍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더욱 위협적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삶의 모든 복을 빼앗는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누리기가 힘들 정도의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작게, 어떤 사람은 아주 크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해 줍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깨우는 겁니다. 예수님을 깨운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내 실존의 위기를 예수님께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면한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렵습니다. 하나님, 나 죽게 됐습니다. 하나님, 고통스럽습니다. 힘듭니다. 하나님 좀 간섭하세요. 내 인생을 이끌어 주세요. 날 좀 위로하세요. 내가 가야할 길을 가르쳐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갖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러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에이, 그래도 내가 해야지.’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나를 조금이라도 억누르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왠지 마음이 우울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내 마음에 미움이 생깁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내 마음에 적개심이 생기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두려움이 생겨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장 작은 것도 하나님께 고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깨우셔야 합니다. 본래 예수님은 항상 깨어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께 아무것도 아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내 삶 속에서 주무시게 두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십시오.
첫 번째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이라면,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두려워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이것은 나 스스로에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질문해야 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두려워하느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절망하고 낙심하느냐? 무엇이 그렇게 너를 겁나게 하고 있는가?’하고 물어야 됩니다. 그래야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마가복음 4:40)
두려움은 마치 형체 없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괴물의 실체를 밝혀라. 별것 아닌 두려움을 하나 하나씩 제거해라.”라고 말입니다. 두려움을 향해서 이야기해야 됩니다. “너는 나를 이길 수가 없어. 너는 내게 겁줄 수가 없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야. 내가 분투 중에 쓰러질지언정 나를 겁주는 너에게 타협할 수 없어.”라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대공황으로 미국의 경제 사회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유일한 것, 그 단 한 가지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두려움이란 얼마나 민감한 것인지 모릅니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두려움은 시각이 예리하여 땅 속에 숨은 것을 볼 줄 알고 하늘에 뜨는 것은 더 잘 찾아낸다.”
우리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 생기면 그동안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하나 두려움으로 변해서 근심걱정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제일 처음에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그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두려움 자체가 나를 엄습하며 억누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두려움은 우리가 약한 마음을 품게 만듭니다.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의지를 무력하게 하고 행동을 억압시킵니다. 실존하지도 않는 장애물을 괴물처럼 여기면서 도망가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를 침몰시키는 아주 악한 세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세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두려움을 만들고 있는 것을 향해서 꾸짖는 것입니다. “두려움아, 물러가라!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것아, 내게서 떠나라!” 이렇게 엄하게 명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마가복음 4장 3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마가복음 4:39)
예수님의 목표는 뚜렷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시는 대상은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의 생명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뜻없이 손상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꾸짖은 대상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귀신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귀신을 향해서 꾸짖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을 꾸짖으셨습니다. “질병아. 네가 어찌하여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느냐?”라고 하시며 쫓아내셨습니다. 세 번째는 바로 바람과 바다였습니다. “어떻게 너희가 우리를 위협하느냐?” 그렇게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시고, 자연과 이 모든 만물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제자들이 목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마가복음 4:41)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처음에는 파도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물결치는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 세상의 환경과 여건,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겠다고 하는 선언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시편 기자들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사람을 두려워하랴? 내가 어찌 환경을 두려워하랴? 내가 두려워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바로 이러한 선배들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스트레스가 없는 곳을 향해 도망가시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스트레스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멈출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에도 끊임없이 암세포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암세포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면역체계가 있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그럼 신앙의 면역체계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세 가지를 기억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깨워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야 됩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꾸지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꾸지람을 듣는 것은 언짢지만,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는 것은 괜찮습니다. 나의 형편없는 모습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 속에서 나를 겁주고, 근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해야 됩니다. 그 실체를 밝히고 그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예수님처럼 꾸짖어야 됩니다. 나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을 내 속에서 다 쫓아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이시다. 나는 생명을 사랑한다.”라고 선포하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세상의 모든 자잘한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수많은 근심과 걱정들을 담대히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축복을 누리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