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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 20: 11 ~ 18

김지철 목사

2015.04.05

부활의 아침에 죽음의 슬픔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 주간에 남산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겨울에는 그렇게도 황량하게 보이던 누런 흙 속에서 파란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봄을 알리는 신호가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나리는 노랗게, 진달래는 띄엄띄엄 붉게 물든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목련도 보였습니다. 벚꽃은 발그스름하게 봉우리는 맺혀 있었지만 아직 피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매화가 몇 그루 있었습니다.
벚꽃은 군락을 이루면서 피어야 화려함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꽃입니다. 그런데 매화는 다릅니다. 매화는 한 그루만 피어 있어도 품위와 기품이 느껴지는 꽃입니다. 한국의 선비들이 추운 겨울의 세 가지 벗,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송, 소나무이고 둘째는 죽, 대나무, 셋째는 매, 매화입니다. 그중에서도 매화는 봄의 첫 소식을 알리는 꽃입니다. 따뜻한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때로는 눈 덮인 산에서도 자기의 기상을 알리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동안 벚꽃축제만 많은 듯한 분위기가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알고 있던 매화의 아름다움이 묻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문득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봄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가슴 가득 감사가 차올랐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매서운 추운 겨울이 인생의 죽음이라고 여겨진다면, 따뜻한 봄은 마치 새 생명과 부활의 아침같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춥고 시린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창세기를 읽으면서 죽음이 왜 인간에게 왔는지를 배웠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의 많은 죽음들을 통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흙에서 나온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병을 앓기도 하고, 고통과 고난이 뒤따르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의 공격이 나를 넘어뜨린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는 것처럼 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함께 있었어야 되는데, 조금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조금 더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었는데…, 하는 회한의 눈물이 속으로 흐르고 겉으로 쏟아집니다.

여인의 눈물은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눈물을 흘리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이 여인은 슬픔 가운데 울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한복음 20:11)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성경은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11절에서 18절의 본문에는 ‘운다’는 표현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두 번은 여인의 객관적인 모습에서, 하나는 천사의 질문에서, 또 하나는 예수님의 물음에서 나옵니다. 이 울음은 작은 소리의 흐느낌이 아니라 큰 소리의 대성통곡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울음에는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사람이 제일 크게 웁니까? 떠난 사람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의 추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울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본래 일곱 귀신들린 미친 여자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려진 여인, 아무 쓸모없는 여인.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내 속에 든 일곱 귀신을 다 쫓아내시고, 나를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딸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버림받은 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 예수님. 예수님은 내게 삶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덤 속에 갇히시다니요.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것 같은 애통함이 있습니다.’

울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의 모습을 읽어보면, 대표적으로 대성통곡한 두 인물이 나옵니다. 한 명은 오늘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이 체포되던 때 곁에 있었고,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울었을 것 같습니까? 성경에는 베드로가 통곡했다고 기록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75)

영어 성경에는 ‘wept bitterly’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성통곡하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겠습니다. 생명을 바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보호하겠습니다!” 호언장담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런데 “당신 예수와 한 패잖아”라는 어린 여종의 말 한마디에 혼비백산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때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물이구나. 참 못났다. 내 결심이 고작 이 정도라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구나.’ 그는 바깥에 나가 회개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은 베드로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을 부인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후회했습니다.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까?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에게는 눈물이 없었습니다. 죄 없는 스승을 은 30에 판 것이 부끄러웠지만, 회개의 눈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탓을 돌리고 싶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은 30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 척했습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화살이 스스로를 향해 꽂히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둘 다 똑같은 제자였습니다. 둘 다 똑같이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은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눈물이 없었기에 삶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눈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안다는 뜻이고,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눈물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자들이 눈물을 잘 안 흘리지 않습니까? 한국 남자나 서구 남자나 비슷합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울 줄을 모릅니다. 아니 아예 울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울음이란 나약함의 상징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주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매우 어색해하고 심지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려고 애를 씁니다.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을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무덤이 비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는 두 제자가 무덤으로 뛰어옵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역시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제자들이 먼저 옵니다. 이렇기 급히 달려간 것은 당시 남자 제자들의 마음이고 감정 상태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한복음 20:4)

성경은 ‘놀랐다’는 표현 없이 그냥 달려갔다는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놀란 마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요한이 더 젊었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뛰어 무덤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슬프면 말이 사라집니다. 슬프면 오히려 침묵합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행동할 뿐입니다. 1991년 걸프전 당시에 연합군을 지배했던 노먼 슈바르츠코프 사령관이 있습니다. 그는 장군이었습니다.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울 줄 모르는 남자라면 누구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힘들고 어렵고, 죽음과 부상이 있는 자리에서 가슴에 울음이 있어야 그것이 진짜 남자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울지 않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 아니라 울 줄 알아야 진정한, 신뢰받을 수 있는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슬플 때, 그 슬픔을 토로할 줄 알아야 슬픔이 떠나갑니다. 슬프고 슬픈 것의 정점이 무엇일까요? 바로 울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슬픔의 정점인 것입니다. 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렸을 때 여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20:14)

슬픔의 눈물이 시야를 가렸습니다.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아마 마리아가 예수님을 놓쳤을 것입니다. 정확히 못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못 봐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예수님이 묻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때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는 우는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물음이 나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 (요한복음 20:15)

“어찌해서 우느냐?” 무슨 뜻입니까? 울음을 멈추라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까지 내내 울고 있는 것을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눈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은 힘이 있습니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마음이 망가집니다. 아니 육체까지도 망가집니다. 우리가 때로는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떠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무엇이 없으면 그럴까요? 바로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팔복’에 대해 말씀하실 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을까요?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영혼을 정화하여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냥 눈물도 그렇습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부모에게 흘리는 눈물도 이런 정화작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눈물은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스스로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합니다. 그동안 허위의식과 체면으로 쓰고 있던 가면을 훌훌 벗게 합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둘렀던 비장의 무기들, 때로는 돈이었고, 명예였고, 권력이었고, 육체적인 쾌락이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부수는 것이 바로 눈물의 힘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몸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소리 내어 울부짖는 바로 그때, 하나님은 나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으면서 울고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과 하나님이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사람들의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 통곡해 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 하나님 앞에서 통곡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서게 되면 조금씩 감추게 됩니다. 나의 부족한 모습들은 가리게 됩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까지 나를 감추려고 하면, 참된 신앙의 자리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 모습이 이렇습니다. 외롭고 힘듭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나의 못나고 부끄러운 모습까지 전부 아뢰며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 나의 탄식인 동시에 나의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십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눈물을 흘리라는 말입니다. 단, 하나님 앞에서 울라는 이야기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울면 눈물이 그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찾느냐?” 이것은 예수님을 찾으면서 울라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신 생명의 예수님을 찾으며 울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의 울음을 멈추어 주실 거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아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갖고 있는 애통함을 아시고 친히 그 눈물을 닦아 주신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해 주시는 일은, 바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언제 터져 나올는지 모를 눈물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 울부짖게 되면, 그것이 미움이 되고 분노로만 멈춰 서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안의 눈물들을 토해내면, 하나님은 그 눈물을 받으시고 닦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눈물이 가진 힘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슬픔의 바다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눈물이 씻어지고 멈춰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두 멀쩡하게 보여도 우리 속에 아픔들이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탄식과 공허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귀한 아들, 너는 내 사랑하는 귀한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말씀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회복 받은 우리가 멈추지 않은 눈물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고,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은 은혜를 기억하며, 이제는 우리 눈물을 주님께 아뢰고, “내가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고백하면서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과 함께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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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 11 ~ 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부활의 아침에 죽음의 슬픔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 주간에 남산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겨울에는 그렇게도 황량하게 보이던 누런 흙 속에서 파란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봄을 알리는 신호가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나리는 노랗게, 진달래는 띄엄띄엄 붉게 물든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목련도 보였습니다. 벚꽃은 발그스름하게 봉우리는 맺혀 있었지만 아직 피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매화가 몇 그루 있었습니다.
벚꽃은 군락을 이루면서 피어야 화려함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꽃입니다. 그런데 매화는 다릅니다. 매화는 한 그루만 피어 있어도 품위와 기품이 느껴지는 꽃입니다. 한국의 선비들이 추운 겨울의 세 가지 벗,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송, 소나무이고 둘째는 죽, 대나무, 셋째는 매, 매화입니다. 그중에서도 매화는 봄의 첫 소식을 알리는 꽃입니다. 따뜻한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때로는 눈 덮인 산에서도 자기의 기상을 알리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동안 벚꽃축제만 많은 듯한 분위기가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알고 있던 매화의 아름다움이 묻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문득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봄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가슴 가득 감사가 차올랐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매서운 추운 겨울이 인생의 죽음이라고 여겨진다면, 따뜻한 봄은 마치 새 생명과 부활의 아침같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춥고 시린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창세기를 읽으면서 죽음이 왜 인간에게 왔는지를 배웠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의 많은 죽음들을 통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흙에서 나온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병을 앓기도 하고, 고통과 고난이 뒤따르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의 공격이 나를 넘어뜨린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는 것처럼 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함께 있었어야 되는데, 조금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조금 더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었는데…, 하는 회한의 눈물이 속으로 흐르고 겉으로 쏟아집니다.

여인의 눈물은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눈물을 흘리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이 여인은 슬픔 가운데 울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한복음 20:11)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성경은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11절에서 18절의 본문에는 ‘운다’는 표현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두 번은 여인의 객관적인 모습에서, 하나는 천사의 질문에서, 또 하나는 예수님의 물음에서 나옵니다. 이 울음은 작은 소리의 흐느낌이 아니라 큰 소리의 대성통곡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울음에는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사람이 제일 크게 웁니까? 떠난 사람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의 추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울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본래 일곱 귀신들린 미친 여자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려진 여인, 아무 쓸모없는 여인.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내 속에 든 일곱 귀신을 다 쫓아내시고, 나를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딸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버림받은 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 예수님. 예수님은 내게 삶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덤 속에 갇히시다니요.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것 같은 애통함이 있습니다.’

울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의 모습을 읽어보면, 대표적으로 대성통곡한 두 인물이 나옵니다. 한 명은 오늘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이 체포되던 때 곁에 있었고,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울었을 것 같습니까? 성경에는 베드로가 통곡했다고 기록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75)

영어 성경에는 ‘wept bitterly’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성통곡하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겠습니다. 생명을 바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보호하겠습니다!” 호언장담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런데 “당신 예수와 한 패잖아”라는 어린 여종의 말 한마디에 혼비백산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때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물이구나. 참 못났다. 내 결심이 고작 이 정도라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구나.’ 그는 바깥에 나가 회개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은 베드로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을 부인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후회했습니다.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까?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에게는 눈물이 없었습니다. 죄 없는 스승을 은 30에 판 것이 부끄러웠지만, 회개의 눈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탓을 돌리고 싶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은 30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 척했습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화살이 스스로를 향해 꽂히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둘 다 똑같은 제자였습니다. 둘 다 똑같이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은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눈물이 없었기에 삶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눈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안다는 뜻이고,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눈물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자들이 눈물을 잘 안 흘리지 않습니까? 한국 남자나 서구 남자나 비슷합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울 줄을 모릅니다. 아니 아예 울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울음이란 나약함의 상징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주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매우 어색해하고 심지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려고 애를 씁니다.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을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무덤이 비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는 두 제자가 무덤으로 뛰어옵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역시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제자들이 먼저 옵니다. 이렇기 급히 달려간 것은 당시 남자 제자들의 마음이고 감정 상태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한복음 20:4)

성경은 ‘놀랐다’는 표현 없이 그냥 달려갔다는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놀란 마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요한이 더 젊었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뛰어 무덤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슬프면 말이 사라집니다. 슬프면 오히려 침묵합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행동할 뿐입니다. 1991년 걸프전 당시에 연합군을 지배했던 노먼 슈바르츠코프 사령관이 있습니다. 그는 장군이었습니다.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울 줄 모르는 남자라면 누구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힘들고 어렵고, 죽음과 부상이 있는 자리에서 가슴에 울음이 있어야 그것이 진짜 남자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울지 않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 아니라 울 줄 알아야 진정한, 신뢰받을 수 있는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슬플 때, 그 슬픔을 토로할 줄 알아야 슬픔이 떠나갑니다. 슬프고 슬픈 것의 정점이 무엇일까요? 바로 울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슬픔의 정점인 것입니다. 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렸을 때 여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20:14)

슬픔의 눈물이 시야를 가렸습니다.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아마 마리아가 예수님을 놓쳤을 것입니다. 정확히 못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못 봐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예수님이 묻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때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는 우는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물음이 나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 (요한복음 20:15)

“어찌해서 우느냐?” 무슨 뜻입니까? 울음을 멈추라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까지 내내 울고 있는 것을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눈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은 힘이 있습니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마음이 망가집니다. 아니 육체까지도 망가집니다. 우리가 때로는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떠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무엇이 없으면 그럴까요? 바로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팔복’에 대해 말씀하실 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을까요?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영혼을 정화하여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냥 눈물도 그렇습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부모에게 흘리는 눈물도 이런 정화작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눈물은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스스로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합니다. 그동안 허위의식과 체면으로 쓰고 있던 가면을 훌훌 벗게 합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둘렀던 비장의 무기들, 때로는 돈이었고, 명예였고, 권력이었고, 육체적인 쾌락이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부수는 것이 바로 눈물의 힘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몸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소리 내어 울부짖는 바로 그때, 하나님은 나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으면서 울고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과 하나님이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사람들의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 통곡해 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 하나님 앞에서 통곡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서게 되면 조금씩 감추게 됩니다. 나의 부족한 모습들은 가리게 됩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까지 나를 감추려고 하면, 참된 신앙의 자리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 모습이 이렇습니다. 외롭고 힘듭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나의 못나고 부끄러운 모습까지 전부 아뢰며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 나의 탄식인 동시에 나의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십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눈물을 흘리라는 말입니다. 단, 하나님 앞에서 울라는 이야기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울면 눈물이 그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찾느냐?” 이것은 예수님을 찾으면서 울라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신 생명의 예수님을 찾으며 울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의 울음을 멈추어 주실 거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아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갖고 있는 애통함을 아시고 친히 그 눈물을 닦아 주신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해 주시는 일은, 바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언제 터져 나올는지 모를 눈물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 울부짖게 되면, 그것이 미움이 되고 분노로만 멈춰 서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안의 눈물들을 토해내면, 하나님은 그 눈물을 받으시고 닦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눈물이 가진 힘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슬픔의 바다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눈물이 씻어지고 멈춰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두 멀쩡하게 보여도 우리 속에 아픔들이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탄식과 공허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귀한 아들, 너는 내 사랑하는 귀한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말씀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회복 받은 우리가 멈추지 않은 눈물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고,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은 은혜를 기억하며, 이제는 우리 눈물을 주님께 아뢰고, “내가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고백하면서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과 함께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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