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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누가복음 24: 1 ~ 12

김지철 목사

2014.04.20

대한민국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절 아침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너무 무겁고 막막합니다. 지난 16일 오전, 진도 앞바다에 세월호 침몰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배는 거의 7천 톤에 해당되는 우리나라 여객선 중에서 가장 큰 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해서 3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사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것을 어린 자녀들이 당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말을 따른 학생들은 죽음에 이르렀고, 그 말을 어기고 스스로 판단한 학생들은 탈출했다는 것도 우리 마음을 비통하게 합니다. 마치 엉터리 권위주의 사회에 대한 마지막 조롱처럼 들립니다. 또한 배와 승객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구조는 지휘하지 않고 가장 먼저 도망 나왔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우리를 참담하게 합니다. 첨단 과학과 기술, 도구를 다 이용하는데도 생존자 한 사람 구조할 수 없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무력감이 자괴감이 되어 우리를 무섭게 내려 누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워 할 말이 없습니다. 모두 어른들의 비겁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들의 탐욕이 그 안에 들어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관행이 그런 엄청난 사고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 대한 경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죽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죽지 않으니 세상에 고통과 환란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죽지 않으니 교회라는 배가 마구 흔들리고 있습니다. 영광된 자리는 혼자 차지하려 하면서 고난은 내팽개치는 거짓 지도자가 나오게 되니 파선하는 배처럼 우리 삶이 몰락하는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징조입니다. 오, 하나님 어찌하오리이까? 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곁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고난의 자리보다는 그곳을 탈출해서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려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면 이런 경향을 더 갖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그 반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영광된 주님이셨고, 지도자 중에 지도자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이 고난의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도 고난 받는 아들을 뒤에서 후원하셨습니다. 아들이 상처를 받고 절망하며 탄식 속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아들을 지켜보시며 아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지막 길,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모두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오는 이름입니다.
그녀는 누구입니까?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을 통해 치유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의 삶은 얼마나 피폐했을까요? 육체적 질병이 그녀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억눌렀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과 수모를 받았을까요? 그녀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유대종교 사회에서 늘 외톨이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여자라는 신분, 게다가 귀신들린 여자라는 ‘불결한 존재’의 딱지를 늘 붙이고 다녔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순간에도 사회 중심부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공간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늘 변두리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녀의 삶이 변화를 얻었습니다. 인간대접을 받았습니다.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했습니다. 자존감을 다시 찾았습니다. 자유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처지를 온전히 바꿔준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허무하게도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얼마나 통분했을까요?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로마병정이 휘두르는 회초리에 맞는 모습,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모습,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리던 모습, 십자가에 달려 양 손에 못이 박히고 허리에 창이 찔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생명을 잃을 때 누가 가장 많이 통곡합니까? 누가 가장 슬퍼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파하고 슬퍼하며 통곡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들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능력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희망도, 기대감도 없었던 그 자리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 부활의 첫 증인이 남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다는 것을 누가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언가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가장 먼저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고 상상할 수 없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허구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언이 당시에 증언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여인에 기초한 기독교는 가짜다. 일곱 귀신 들려 미쳤다고 여겨졌던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시작한 기독교는 신빙성이 없다. 그 여인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정말 그럴까요? 정말 이 여인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의 복음은 가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 속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도 가장 낮은 자, 가장 슬퍼하며 아파하는 자, 가장 탄식하는 자, 가장 외로워하는 자로부터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부활은 가짜입니다. 죽음을 내 것으로 삼을 때, 하나님의 긍휼함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죽음으로 내려가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활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이며, 진정성이 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생명을 시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수고함으로 넘어갈 것 같으냐? 무거운 짐 때문에 인생이 평탄하지 않느냐? 좌절하며 절망하고 있느냐?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느냐?” 물으시며 그런 자들은 “내게로 올 수 있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과 부활은 이런 버려진 것과 같은 낮은 사람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부활은 잘난 내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못난 내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까? 잘나가고 모든 것을 가졌을 때입니까? 높은 지위에 있었을 때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낙심했을 때, 병들었을 때, 인생에 아무것도 없다고 탄식했을 때, “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무력합니다.”라며 자신의 한계를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내가 생명이고 기쁨이라고, 내가 진리이며 구원이라고, 내가 너희를 영원히 살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빈 무덤 앞에서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여인들을 향해서 천사가 가장 먼저 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5∼6)

하나님은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사실 여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던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그저 너무 가슴이 아파 그 시신에 향이나 붓고 아름답게 보내드리려는 마음으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의 눈물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의 애통함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나치정권을 만들고 6백 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합니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고 유대인들을 매일매일 처형했습니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한 아이가 겁난 표정으로 질문합니다. “엄마,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 거야?” 그때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얘야, 하나님은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단다.”
고통과 절망의 현장에 있는 예수님을 지켜보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고통과 절망 속에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십니다. 불의와 폭력에 의해 고난당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슴 치며 바라보셨던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도 불의와 폭력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자기 욕심만을 차리려는 사람들로 인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신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도 탐욕의 사람들에게 억압당하고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절망적 사건의 현장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잠겨있는 저 깊은 물 속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아파하셨고 함께 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친히 말씀하십니다. 아니 엄중하게 질문하십니다. “아직도 이 땅에 어둠에 갇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아느냐? 아직도 이 땅에 억압받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잃은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아직도 이 땅에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아직도 이 땅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듣지 못해서 육체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어가는 절망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저 밑바닥에서부터, 낮은 곳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십니다. 죽음에 제일 가까운 신음의 자리, 그 현장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 속에서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얘야, 네가 내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해 나가보지 않을래? 저 고난 받는 자리에 부활의 생명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을래?”

시대의 아픔 속에서 주님만이 소망임을 기억하십시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슬픔의 반대말은 기쁨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부활만이 소망이고, 부활만이 위로고, 부활만이 평안이고, 부활만이 생명이고, 부활만이 진정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신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슬프고 아픈 사람들을 만지시면서 다가오십니다. 겸손히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은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는 예수님의 요청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

주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평안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부활절 아침을 맞이하면서, 이 시간 고통 속에 있는 우리 이웃들을 위해서, 특별히 진도 앞바다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세 가지를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생존자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니 우리의 자녀들을 살려주시기를 구합시다. 둘째,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고 고통 받는 부모님, 가족, 친구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셋째, 찬 바다 속에 뛰어들어 구조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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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 1 ~ 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대한민국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절 아침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너무 무겁고 막막합니다. 지난 16일 오전, 진도 앞바다에 세월호 침몰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배는 거의 7천 톤에 해당되는 우리나라 여객선 중에서 가장 큰 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해서 3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사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것을 어린 자녀들이 당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말을 따른 학생들은 죽음에 이르렀고, 그 말을 어기고 스스로 판단한 학생들은 탈출했다는 것도 우리 마음을 비통하게 합니다. 마치 엉터리 권위주의 사회에 대한 마지막 조롱처럼 들립니다. 또한 배와 승객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구조는 지휘하지 않고 가장 먼저 도망 나왔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우리를 참담하게 합니다. 첨단 과학과 기술, 도구를 다 이용하는데도 생존자 한 사람 구조할 수 없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무력감이 자괴감이 되어 우리를 무섭게 내려 누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워 할 말이 없습니다. 모두 어른들의 비겁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들의 탐욕이 그 안에 들어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관행이 그런 엄청난 사고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 대한 경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죽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죽지 않으니 세상에 고통과 환란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죽지 않으니 교회라는 배가 마구 흔들리고 있습니다. 영광된 자리는 혼자 차지하려 하면서 고난은 내팽개치는 거짓 지도자가 나오게 되니 파선하는 배처럼 우리 삶이 몰락하는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징조입니다. 오, 하나님 어찌하오리이까? 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곁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고난의 자리보다는 그곳을 탈출해서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려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면 이런 경향을 더 갖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그 반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영광된 주님이셨고, 지도자 중에 지도자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이 고난의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도 고난 받는 아들을 뒤에서 후원하셨습니다. 아들이 상처를 받고 절망하며 탄식 속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아들을 지켜보시며 아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지막 길,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모두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오는 이름입니다.
그녀는 누구입니까?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을 통해 치유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의 삶은 얼마나 피폐했을까요? 육체적 질병이 그녀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억눌렀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과 수모를 받았을까요? 그녀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유대종교 사회에서 늘 외톨이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여자라는 신분, 게다가 귀신들린 여자라는 ‘불결한 존재’의 딱지를 늘 붙이고 다녔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순간에도 사회 중심부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공간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늘 변두리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녀의 삶이 변화를 얻었습니다. 인간대접을 받았습니다.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했습니다. 자존감을 다시 찾았습니다. 자유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처지를 온전히 바꿔준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허무하게도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얼마나 통분했을까요?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로마병정이 휘두르는 회초리에 맞는 모습,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모습,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리던 모습, 십자가에 달려 양 손에 못이 박히고 허리에 창이 찔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생명을 잃을 때 누가 가장 많이 통곡합니까? 누가 가장 슬퍼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파하고 슬퍼하며 통곡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들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능력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희망도, 기대감도 없었던 그 자리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 부활의 첫 증인이 남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다는 것을 누가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언가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가장 먼저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고 상상할 수 없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허구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언이 당시에 증언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여인에 기초한 기독교는 가짜다. 일곱 귀신 들려 미쳤다고 여겨졌던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시작한 기독교는 신빙성이 없다. 그 여인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정말 그럴까요? 정말 이 여인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의 복음은 가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 속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도 가장 낮은 자, 가장 슬퍼하며 아파하는 자, 가장 탄식하는 자, 가장 외로워하는 자로부터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부활은 가짜입니다. 죽음을 내 것으로 삼을 때, 하나님의 긍휼함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죽음으로 내려가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활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이며, 진정성이 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생명을 시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수고함으로 넘어갈 것 같으냐? 무거운 짐 때문에 인생이 평탄하지 않느냐? 좌절하며 절망하고 있느냐?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느냐?” 물으시며 그런 자들은 “내게로 올 수 있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과 부활은 이런 버려진 것과 같은 낮은 사람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부활은 잘난 내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못난 내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까? 잘나가고 모든 것을 가졌을 때입니까? 높은 지위에 있었을 때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낙심했을 때, 병들었을 때, 인생에 아무것도 없다고 탄식했을 때, “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무력합니다.”라며 자신의 한계를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내가 생명이고 기쁨이라고, 내가 진리이며 구원이라고, 내가 너희를 영원히 살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빈 무덤 앞에서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여인들을 향해서 천사가 가장 먼저 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5∼6)

하나님은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사실 여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던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그저 너무 가슴이 아파 그 시신에 향이나 붓고 아름답게 보내드리려는 마음으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의 눈물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의 애통함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나치정권을 만들고 6백 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합니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고 유대인들을 매일매일 처형했습니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한 아이가 겁난 표정으로 질문합니다. “엄마,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 거야?” 그때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얘야, 하나님은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단다.”
고통과 절망의 현장에 있는 예수님을 지켜보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고통과 절망 속에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십니다. 불의와 폭력에 의해 고난당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슴 치며 바라보셨던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도 불의와 폭력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자기 욕심만을 차리려는 사람들로 인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신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도 탐욕의 사람들에게 억압당하고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절망적 사건의 현장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잠겨있는 저 깊은 물 속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아파하셨고 함께 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친히 말씀하십니다. 아니 엄중하게 질문하십니다. “아직도 이 땅에 어둠에 갇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아느냐? 아직도 이 땅에 억압받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잃은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아직도 이 땅에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아직도 이 땅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듣지 못해서 육체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어가는 절망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저 밑바닥에서부터, 낮은 곳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십니다. 죽음에 제일 가까운 신음의 자리, 그 현장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 속에서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얘야, 네가 내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해 나가보지 않을래? 저 고난 받는 자리에 부활의 생명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을래?”

시대의 아픔 속에서 주님만이 소망임을 기억하십시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슬픔의 반대말은 기쁨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부활만이 소망이고, 부활만이 위로고, 부활만이 평안이고, 부활만이 생명이고, 부활만이 진정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신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슬프고 아픈 사람들을 만지시면서 다가오십니다. 겸손히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은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는 예수님의 요청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

주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평안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부활절 아침을 맞이하면서, 이 시간 고통 속에 있는 우리 이웃들을 위해서, 특별히 진도 앞바다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세 가지를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생존자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니 우리의 자녀들을 살려주시기를 구합시다. 둘째,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고 고통 받는 부모님, 가족, 친구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셋째, 찬 바다 속에 뛰어들어 구조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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