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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시편 22: 1 ~ 4

김지철 목사

2018.03.25

예수님의 삶은 외면 받고 버림받는 삶이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호산나!” 하며 노래 부르며 찬양했습니다. 호산나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대 분위기가 점차 바뀌기 시작합니다. 열렬한 환호도 시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마지막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은 홀로, 묵묵히,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로 버림받은 생애다.” 이렇게 정의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누울 곳이 없어 짐승의 구유에 누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도 환영받지 못했고, 오히려 조롱을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7절에 보면,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며 거부당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당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발당하셨습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위반했고 하나님을 모독한 자라며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축출하며 각종 기적을 행하실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호산나! 호산나!” 환영하던 민중들도 한결같이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마지막 순간엔 예수님 곁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입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동행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비참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성만찬을 나누시고, 이후 곧 체포 당하셨습니다. 밤새도록 유대 공의회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심문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고합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십자가형이 집행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새벽에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당하며 옷을 뺏기고 채찍질 당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도 써야 했습니다. 때문에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곁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됩니다. 그런 후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로마 사형 집행관들이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을 묶었고, 길이가 15~18cm나 되는 대못을 그분의 손목과 발목에 박았습니다.
십자가형은 당대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사형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는 이 사형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반란자들과 노예들에게만 행했던 사형 방식입니다. 산 채로 사람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처형 방식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면 탈진할 수밖에 없고, 심장마비로 죽거나 십자가 고통에 못 이겨 기절하고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몸무게를 견뎌내지 못하다 횡격막이 좁혀지면서 질식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십자가 처형을 예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사망까지 시간이 매우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탈진과 탈수 상태에 빠져 계셨고, 과도한 채찍질로 몸 상태가 망가져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더욱이 곁에 선 사람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비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깊은 어둠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했고, 하늘과 땅도 예수님을 외면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더욱 예수님을 마음을 아프게 한 건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내버려 두십니다.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있는 아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십니다.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철저히 예수님을 외면하고 거부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때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님이 커다란 소리로 울부짖으십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입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제 9시는, 오늘날 시간 계산법으로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매우 큰 소리로 하늘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무슨 뜻일까요? 한 맺힌 부르짖음일까요? 절망에 사무친 탄식일까요? 배신당함과 아픔의 외침일까요? 아니면 고통을 끝내달라는 간구일까요? 이도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르되, ‘나의 하나님’이라고 가장 친근한 방식으로 부르셨습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 부름 속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이 길이라면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비참한 죽음의 길이라도 내가 감당하겠습니다.’라는 결단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똑같이 반응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22편의 주인공 다윗입니다. 시편 22편 1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1)

다윗 역시 자신을 버린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왜 내가 버림받아야 하냐고, 내가 부르짖을 때 왜 듣지 않냐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여기서 ‘버렸다’는 건 완전히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더는 관심을 두지 않고 유기 처분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처럼 절망의 부르짖음을 반복하셨습니다. 다윗의 이 절규를 예수님이 따라 외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고통과 사랑이 병존합니다.

이 절규를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우리도 위기가 닥칠 때 이렇게 절규합니까? 우리에게 절망이 다가올 때 어떤 본문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구약 말씀을 인용하신 적이 많습니다. 특히 시편을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 기사를 보면 구약 인용을 13번이나 하시는데, 그중 8번이 시편입니다. 또 그중 5개 인용이 시편 22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편 22편을 깊이 묵상하셨고, 당신의 수난 속에 그 말씀을 적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저장된 그 말씀이 절체절명의 순간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속에 있던 성경구절을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23편의 유명한 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을 읊으면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선언합니다. 예수님도 시편 22편 1절을 외치며 당시 다윗의 마음을 떠올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부르짖었던 다윗의 절규, 그 음성을 예수님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입니다.
시편 22편을 묵상하면, 마치 예수님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억압받고 있습니다. 소외당했으며, 생명의 기운이 한계에 도달해 쇠잔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며 적대감을 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모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벌레와 같은 존재다. 나는 사람의 훼방거리가 되었다. 백성들이 나를 조롱한다. 황소 떼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다. 악한 무리가 나의 수족을 찌르고 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고 있다. 개와 사자와 들소가 뿔로 나를 박고 있다. 그러므로 나를 구원해 달라.” 죽음과 심판의 징조가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살 희망이 사라져 물같이 쏟아졌다는 표현까지 합니다. 모든 뼈가 어그러졌으며, 질그릇 조각까지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신의 모든 뼈까지 셀 수 있다고 토로합니다. 아주 심한 몸살을 앓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큰 병을 앓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온몸이 쑤시기 시작합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아파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 뼈가 몇 개인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즉 그 정도가 의식될 만큼 고통이 심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22편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목도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분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 또한 예수님이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하나님을 향한 간구이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한 역설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분께 고통을 토로하며 구해 달라는 간구이면서 동시에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역설적인 질문입니다.

상처 입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치유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은 열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버림받음의 아픔을 무엇으로 치유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더 큰 버림받음으로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이 있을 때, 우리의 절망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내가 당한 슬픔보다 더 큰 슬픔에 직면할 때, 우리는 내 슬픔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가진 질병, 나의 죽음의 공포가 더 큰 아픔을 만날 때, 신비롭게도 그 안에서 치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의 고난보다 가장 큰 고난, 가장 큰 아픔, 가장 큰 절망, 가장 큰 외로움을 경험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십자가에서 치유를 경험합니다.
헨리 나우웬이란 영성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자다. 그런데 상처 입은 치유자다.” 예수님의 아픔에 내가 들어가면 내 아픔이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낙심과 절망에 내가 들어가면 내 안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큰 절망과 아픔, 외로움을 통째로 받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속에 내 모든 죄악이 있고, 내 모든 절망, 질병, 탄식, 인간의 모든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알고 놀라 로마서를 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이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24)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 모든 죄악과 절망, 고통, 죽음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죄 사함의 은총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모든 아픔과 절망, 고통, 질병, 외로움이 치유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며 내 안에 있던 죽음의 공포가 사라집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머물지 않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우리는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죽음과 그분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또한 그만큼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게 됩니다. 인간의 슬픔과 절망, 죄악의 고통을 대신 지기 위한 하나님의 애통의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버림받고 탄식하는 사람들과 하나 되기 위해, 바로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혹시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으십니까?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번 금식하는 것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금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나를 얽어맸던 것, 짓눌렀던 것, 답답했던 문제, 내 안의 자유와 생명, 소망을 파괴했던 문제를 예수님께 내어놓으시길 바랍니다. 다시 주님 앞에, 그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 그 십자가 안에 내 모든 죄악과 허물이 있다는 것, 그분이 부활의 새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끌어안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이 모든 문제들을 극복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속에 우리의 죄악과 허물이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긍휼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다시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길 바랍니다. “하나님, 그동안 나 혼자 앓았습니다. 나 혼자 끙끙댔습니다. 나 혼자 실망하고, 나 혼자 연민 속에서 좌절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기쁨, 감사, 평안,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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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 1 ~ 4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예수님의 삶은 외면 받고 버림받는 삶이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호산나!” 하며 노래 부르며 찬양했습니다. 호산나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대 분위기가 점차 바뀌기 시작합니다. 열렬한 환호도 시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마지막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은 홀로, 묵묵히,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로 버림받은 생애다.” 이렇게 정의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누울 곳이 없어 짐승의 구유에 누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도 환영받지 못했고, 오히려 조롱을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7절에 보면,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며 거부당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당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발당하셨습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위반했고 하나님을 모독한 자라며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축출하며 각종 기적을 행하실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호산나! 호산나!” 환영하던 민중들도 한결같이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마지막 순간엔 예수님 곁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입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동행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비참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성만찬을 나누시고, 이후 곧 체포 당하셨습니다. 밤새도록 유대 공의회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심문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고합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십자가형이 집행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새벽에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당하며 옷을 뺏기고 채찍질 당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도 써야 했습니다. 때문에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곁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됩니다. 그런 후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로마 사형 집행관들이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을 묶었고, 길이가 15~18cm나 되는 대못을 그분의 손목과 발목에 박았습니다.
십자가형은 당대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사형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는 이 사형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반란자들과 노예들에게만 행했던 사형 방식입니다. 산 채로 사람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처형 방식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면 탈진할 수밖에 없고, 심장마비로 죽거나 십자가 고통에 못 이겨 기절하고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몸무게를 견뎌내지 못하다 횡격막이 좁혀지면서 질식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십자가 처형을 예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사망까지 시간이 매우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탈진과 탈수 상태에 빠져 계셨고, 과도한 채찍질로 몸 상태가 망가져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더욱이 곁에 선 사람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비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깊은 어둠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했고, 하늘과 땅도 예수님을 외면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더욱 예수님을 마음을 아프게 한 건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내버려 두십니다.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있는 아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십니다.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철저히 예수님을 외면하고 거부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때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님이 커다란 소리로 울부짖으십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입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제 9시는, 오늘날 시간 계산법으로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매우 큰 소리로 하늘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무슨 뜻일까요? 한 맺힌 부르짖음일까요? 절망에 사무친 탄식일까요? 배신당함과 아픔의 외침일까요? 아니면 고통을 끝내달라는 간구일까요? 이도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르되, ‘나의 하나님’이라고 가장 친근한 방식으로 부르셨습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 부름 속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이 길이라면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비참한 죽음의 길이라도 내가 감당하겠습니다.’라는 결단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똑같이 반응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22편의 주인공 다윗입니다. 시편 22편 1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1)

다윗 역시 자신을 버린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왜 내가 버림받아야 하냐고, 내가 부르짖을 때 왜 듣지 않냐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여기서 ‘버렸다’는 건 완전히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더는 관심을 두지 않고 유기 처분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처럼 절망의 부르짖음을 반복하셨습니다. 다윗의 이 절규를 예수님이 따라 외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고통과 사랑이 병존합니다.

이 절규를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우리도 위기가 닥칠 때 이렇게 절규합니까? 우리에게 절망이 다가올 때 어떤 본문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구약 말씀을 인용하신 적이 많습니다. 특히 시편을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 기사를 보면 구약 인용을 13번이나 하시는데, 그중 8번이 시편입니다. 또 그중 5개 인용이 시편 22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편 22편을 깊이 묵상하셨고, 당신의 수난 속에 그 말씀을 적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저장된 그 말씀이 절체절명의 순간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속에 있던 성경구절을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23편의 유명한 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을 읊으면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선언합니다. 예수님도 시편 22편 1절을 외치며 당시 다윗의 마음을 떠올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부르짖었던 다윗의 절규, 그 음성을 예수님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입니다.
시편 22편을 묵상하면, 마치 예수님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억압받고 있습니다. 소외당했으며, 생명의 기운이 한계에 도달해 쇠잔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며 적대감을 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모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벌레와 같은 존재다. 나는 사람의 훼방거리가 되었다. 백성들이 나를 조롱한다. 황소 떼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다. 악한 무리가 나의 수족을 찌르고 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고 있다. 개와 사자와 들소가 뿔로 나를 박고 있다. 그러므로 나를 구원해 달라.” 죽음과 심판의 징조가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살 희망이 사라져 물같이 쏟아졌다는 표현까지 합니다. 모든 뼈가 어그러졌으며, 질그릇 조각까지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신의 모든 뼈까지 셀 수 있다고 토로합니다. 아주 심한 몸살을 앓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큰 병을 앓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온몸이 쑤시기 시작합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아파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 뼈가 몇 개인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즉 그 정도가 의식될 만큼 고통이 심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22편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목도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분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 또한 예수님이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하나님을 향한 간구이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한 역설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분께 고통을 토로하며 구해 달라는 간구이면서 동시에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역설적인 질문입니다.

상처 입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치유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은 열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버림받음의 아픔을 무엇으로 치유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더 큰 버림받음으로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이 있을 때, 우리의 절망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내가 당한 슬픔보다 더 큰 슬픔에 직면할 때, 우리는 내 슬픔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가진 질병, 나의 죽음의 공포가 더 큰 아픔을 만날 때, 신비롭게도 그 안에서 치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의 고난보다 가장 큰 고난, 가장 큰 아픔, 가장 큰 절망, 가장 큰 외로움을 경험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십자가에서 치유를 경험합니다.
헨리 나우웬이란 영성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자다. 그런데 상처 입은 치유자다.” 예수님의 아픔에 내가 들어가면 내 아픔이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낙심과 절망에 내가 들어가면 내 안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큰 절망과 아픔, 외로움을 통째로 받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속에 내 모든 죄악이 있고, 내 모든 절망, 질병, 탄식, 인간의 모든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알고 놀라 로마서를 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이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24)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 모든 죄악과 절망, 고통, 죽음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죄 사함의 은총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모든 아픔과 절망, 고통, 질병, 외로움이 치유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며 내 안에 있던 죽음의 공포가 사라집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머물지 않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우리는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죽음과 그분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또한 그만큼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게 됩니다. 인간의 슬픔과 절망, 죄악의 고통을 대신 지기 위한 하나님의 애통의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버림받고 탄식하는 사람들과 하나 되기 위해, 바로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혹시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으십니까?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번 금식하는 것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금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나를 얽어맸던 것, 짓눌렀던 것, 답답했던 문제, 내 안의 자유와 생명, 소망을 파괴했던 문제를 예수님께 내어놓으시길 바랍니다. 다시 주님 앞에, 그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 그 십자가 안에 내 모든 죄악과 허물이 있다는 것, 그분이 부활의 새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끌어안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이 모든 문제들을 극복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속에 우리의 죄악과 허물이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긍휼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다시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길 바랍니다. “하나님, 그동안 나 혼자 앓았습니다. 나 혼자 끙끙댔습니다. 나 혼자 실망하고, 나 혼자 연민 속에서 좌절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기쁨, 감사, 평안,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8년 3월 2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엘리 엘리 라마?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44장, 15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시 22:1~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2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를 들고 예수님을 향해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상황과 분위기가 반전되었습니다. 열렬한 환호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설교의 요약
예수님의 삶은 ‘버림받은 생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누우실 곳이 없어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② 고향 땅이 나사렛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조롱(마13:57)받으셨으며 ③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끊임없이 고발당하셨습니다. ④ 병 치유, 귀신축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그들도 한결 같이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⑤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예수님 곁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막14:51).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는 어떤 곳입니까? 시간에 따라 살펴본다면 목요일 저녁에 체포당하셨습니다. 새벽에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셨으며 곧바로 십자가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힘도 없으셨기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는 당대에 가장 잔혹한 사형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전9시부터 오후3시까지 사람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비난,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오가 지난 다음 오후3시에 죽음을 alwdl할 때까지 깊은 어둠이 몰려왔습니다. 하늘도 땅도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하나님도 침묵하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존재가 다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 땡에 예수님의 커다란 울부짖음이 들여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 맺힌 부르짖음이었을까? 아니면 절망감에 사무친 탄식, 배신당한 아픔, 혹은 고통을 끝내달라는 간구였을까? 그런데 이런 외침을 이미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시22:1에서 버림받은 자의 탄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급박한 위기에서 시편 22편을 그대로 외치셨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말씀을 입으로 뿜어 내셨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상실감, 버림받음’이라는 아픔을 누가 치유할 수 있을까? 버림받음의 경험은 또 다른 버림받음의 경험을 통해 치유 받습니다. 인간에게 제일 슬프고 외로운 경험은 버림받음의 아픔입니다. 예수님의 절망이 나의 절망을, 예수님의 슬픔/고통이 나의 슬픔/고통을 치유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 그래서 죽음으로 몰려가는 인간을 누가 건질 수 있습니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벧전2:22)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바로 내 죄악이 달려있습니다. 내 절망과 고통이 내 죽음이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다린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의 고난 받는 현장에 참여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순간순간 위기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내 생애 가장 큰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 순간 내 입술에는 어떤 말들이 흘러나왔습니까?
2. 고난주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십지가 고통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나는 버림받았다’고 탄식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과 하나 됨을 위하여 결단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씻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상실감, 버림받음의 아픔을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나의 삶에 모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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