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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뀐 여인이 있습니다.
한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주제로 남자 제자들의 이야기만을 나누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의 여제자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남자 제자 중 수제자가 베드로라면, 여자 제자 중에 수제자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랍비셨는데, 그런 그에게 여자 제자가 있다는 것은 당시 랍비들의 종교 습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율법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배울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떤 랍비에게도 여자 제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여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들 중 첫 번째로 막달라 마리아를 들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인물입니까? ‘막달라’는 여인의 성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있던 지역 이름으로 아마도 그녀가 자란 고향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로 이방인들이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는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남자들에게 낙인찍힌 여인이었고, 삶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던 여인이었습니다. 사회·종교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칭호가 있습니다. 바로 ‘일곱 귀신 들린 여인’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냥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니라 일곱이라는 완전수로, 즉 아주 완전하게 귀신 들렸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뒤틀림과 정신적인 발작이 극에 달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귀신 들린 거라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모습을 성경은 아주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과 가까운 곳,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자기 몸을 스스로 해치며 어느 누구에겐가 원망 섞인 말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여인 막달라 마리아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나는 살 가치가 없어. 나는 죽는 것이 마땅해.’ 인생의 어두움이 그녀의 삶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질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빛이 이 여인에게 비추어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나 되었다는 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감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인생을 걸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2절 말씀에는 그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누가복음 8:2)
여러 여자들이 귀신에 들렸다가 놓여나고, 질병에서 치유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스캔들은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어둠에 갇혔던 자를 수용하셨습니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예수님 앞에 나오는 데 과거의 어두움이 결코 지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음울했던 과거, 통탄스러웠던 과거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와는 상관없이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예수님의 새로운 제자가 되는 축복의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 우리를 덮었던 어둠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변화를 받는다는 표징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기독교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내가 잘나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이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죄인 되었을 때 택하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셨다는 이 은혜는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이 은혜를 가장 실감나게 체험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다른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3)
질병 때문에, 또는 귀신들림 때문에 삶의 실존이 흔들리고 인생의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와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자 제자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과 돈과 재물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제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오늘날이 아닌 2000년 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것은 종교·사회적인 맥락 에서 엄청난 스캔들이었습니다. 당대의 관습을 깨뜨리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사건들로 인해 ‘스캔들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처녀에게서의 탄생도 그랬습니다. 연약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의 친구가 된 것도 그랬습니다. 세리 같은 죄인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한 것도 그랬습니다. 여자 제자들을 함께 불러 모은 것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스캔들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동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장벽과 차별들을 부숴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랍비도 이런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없었을 그때,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성별의 차이 없이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성별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스스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여인들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당시 가부장적인 환경 속에 숨겨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해 기록한 구절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녀는 제자 중에 제자였습니다. 제자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불렀을 때 지체 없이 즉각 반응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 여인과의 관계를 아주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1∼3)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열두 제자가 있었고 또 여인들이 함께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여자들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여인들은 자신의 돈과 재물을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위해서 내놓았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과 남자 제자들을 섬기면서 동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3절의 ‘섬기다’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네인(diakonein)인데,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디아코니아’의 동사 형태입니다. 여성 제자들이 하나님나라 운동에 아마도 식사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섬기다’는 말은 그것 이상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바로 함께 사역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함께 선포했다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섬김의 자리를 용기 있게 지킨 것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섬기다’는 말은 예수님이 당신의 사역을 표현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오히려 남자 제자들은 이 말을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등극할 때, 자신들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특권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이것은 곧 예수님의 삶의 핵심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과 동일한 단어가 바로 여인들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를 섬기고,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선포사역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남자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한 것을 여성 제자들이 기쁨으로 감당했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여인들에게는 남자 제자들보다 더 뛰어난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길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남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는 “내 목숨을 버릴 지라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큰소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체포해서 끌고 갔을 때, 남자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다 흩어졌습니다. 도망갔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은 남자 제자들이 그 위기에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아주 담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그 제자들이 누구일까요? 남자들입니다. 그렇게 당당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위기를 직감하는 순간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시작하는 이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마가복음 15:40)
네 복음서가 똑같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자 제자들은 마지막 자리를 지켰습니다. 끝까지 남아서 죽음의 현장을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왜 남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남자들은 무덤에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고, 어디에 묻히시는지를 확인하고야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목격자는 여자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첫 번째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선언하게 됩니다. 남자들이 먼저 보고, 남자들이 먼저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잘난 남자들, 힘 있는 남자들에게 하나님의 사건이 먼저 보여진 것이 아니라, 버려진 자 같은 여인, 사람들에게 조롱받던 여인, 아무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던 여인을 통해 부활의 능력의 역사가 이 땅에 펼쳐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이러니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뒤바꿔 놓으시는 하나님의 역전의 역사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9∼11)
이 여인은 먼저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지만, 남자 제자들은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여성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의 빚입니다. 섬김의 빚입니다. 복음의 빚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가장 먼저, 뚜렷하게 등장하는 여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역사 안에서, 남자들이 남성의 우월을 이야기하는 이 모든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여성들을 통해서 새로운 일을 펼치셨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것이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믿음의 동역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여성인권이 신장된 것은,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매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동안 여성들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모두가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가부장사회에서 신음하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되면서, 생명의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구나. 나도 하나님나라에 동참할 수 있구나.’ 짓밟혀 있던 여성인권의 신장에 복음의 역사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런데, 130년이 지난 오늘날 오히려 사회보다 교회가 뒷걸음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은퇴 장로님들까지 합하면 150명 이상의 장로님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성 장로님은 단 세 분뿐입니다. 그분들도 다 은퇴를 하셔서 현역에는 지금 한 분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주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부분입니다.
여성 성도님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여성의 적이 여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여성은 존귀해지기 어렵습니다. 부족해도 여성이 여성을 소중히 여겨야 여성의 자리가 높아집니다. 교회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길을 여러분이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성들에게 부탁합니다. 여자를 함부로 무시하지 마십시오.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를 조롱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아주 쩨쩨한 남자들의 오만입니다. 그렇다고 여자를 숭배하지는 마십시오. 이것은 어리석은 남자의 모습입니다.
여자를 인생의 파트너로, 동역자로 만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이 땅에 세워질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동역하는 믿음의 동지로 서로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차별이 없다고 말입니다. 서로를 귀히 여기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세요. 여러분의 딸을 소중히 여기세요. 여러분의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세요.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을 남자들이 막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건입니다.
오늘도 잘못된 차별은 우리 공동체와 우리 사회 속에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회복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사랑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두려움 없이 사랑하며 자신의 전체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감복하여 주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겠다고 다짐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8: 1 ~ 3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이 바뀐 여인이 있습니다.
한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주제로 남자 제자들의 이야기만을 나누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의 여제자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남자 제자 중 수제자가 베드로라면, 여자 제자 중에 수제자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랍비셨는데, 그런 그에게 여자 제자가 있다는 것은 당시 랍비들의 종교 습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율법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배울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떤 랍비에게도 여자 제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여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들 중 첫 번째로 막달라 마리아를 들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인물입니까? ‘막달라’는 여인의 성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있던 지역 이름으로 아마도 그녀가 자란 고향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로 이방인들이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는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남자들에게 낙인찍힌 여인이었고, 삶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던 여인이었습니다. 사회·종교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칭호가 있습니다. 바로 ‘일곱 귀신 들린 여인’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냥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니라 일곱이라는 완전수로, 즉 아주 완전하게 귀신 들렸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뒤틀림과 정신적인 발작이 극에 달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귀신 들린 거라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모습을 성경은 아주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과 가까운 곳,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자기 몸을 스스로 해치며 어느 누구에겐가 원망 섞인 말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여인 막달라 마리아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나는 살 가치가 없어. 나는 죽는 것이 마땅해.’ 인생의 어두움이 그녀의 삶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질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빛이 이 여인에게 비추어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나 되었다는 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감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인생을 걸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2절 말씀에는 그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누가복음 8:2)
여러 여자들이 귀신에 들렸다가 놓여나고, 질병에서 치유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스캔들은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어둠에 갇혔던 자를 수용하셨습니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예수님 앞에 나오는 데 과거의 어두움이 결코 지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음울했던 과거, 통탄스러웠던 과거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와는 상관없이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예수님의 새로운 제자가 되는 축복의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 우리를 덮었던 어둠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변화를 받는다는 표징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기독교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내가 잘나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이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죄인 되었을 때 택하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셨다는 이 은혜는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이 은혜를 가장 실감나게 체험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다른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3)
질병 때문에, 또는 귀신들림 때문에 삶의 실존이 흔들리고 인생의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와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자 제자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과 돈과 재물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제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오늘날이 아닌 2000년 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것은 종교·사회적인 맥락 에서 엄청난 스캔들이었습니다. 당대의 관습을 깨뜨리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사건들로 인해 ‘스캔들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처녀에게서의 탄생도 그랬습니다. 연약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의 친구가 된 것도 그랬습니다. 세리 같은 죄인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한 것도 그랬습니다. 여자 제자들을 함께 불러 모은 것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스캔들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동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장벽과 차별들을 부숴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랍비도 이런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없었을 그때,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성별의 차이 없이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성별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스스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여인들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당시 가부장적인 환경 속에 숨겨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해 기록한 구절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녀는 제자 중에 제자였습니다. 제자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불렀을 때 지체 없이 즉각 반응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 여인과의 관계를 아주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1∼3)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열두 제자가 있었고 또 여인들이 함께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여자들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여인들은 자신의 돈과 재물을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위해서 내놓았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과 남자 제자들을 섬기면서 동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3절의 ‘섬기다’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네인(diakonein)인데,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디아코니아’의 동사 형태입니다. 여성 제자들이 하나님나라 운동에 아마도 식사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섬기다’는 말은 그것 이상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바로 함께 사역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함께 선포했다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섬김의 자리를 용기 있게 지킨 것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섬기다’는 말은 예수님이 당신의 사역을 표현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오히려 남자 제자들은 이 말을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등극할 때, 자신들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특권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이것은 곧 예수님의 삶의 핵심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과 동일한 단어가 바로 여인들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를 섬기고,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선포사역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남자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한 것을 여성 제자들이 기쁨으로 감당했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여인들에게는 남자 제자들보다 더 뛰어난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길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남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는 “내 목숨을 버릴 지라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큰소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체포해서 끌고 갔을 때, 남자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다 흩어졌습니다. 도망갔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은 남자 제자들이 그 위기에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아주 담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그 제자들이 누구일까요? 남자들입니다. 그렇게 당당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위기를 직감하는 순간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시작하는 이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마가복음 15:40)
네 복음서가 똑같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자 제자들은 마지막 자리를 지켰습니다. 끝까지 남아서 죽음의 현장을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왜 남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남자들은 무덤에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고, 어디에 묻히시는지를 확인하고야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목격자는 여자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첫 번째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선언하게 됩니다. 남자들이 먼저 보고, 남자들이 먼저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잘난 남자들, 힘 있는 남자들에게 하나님의 사건이 먼저 보여진 것이 아니라, 버려진 자 같은 여인, 사람들에게 조롱받던 여인, 아무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던 여인을 통해 부활의 능력의 역사가 이 땅에 펼쳐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이러니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뒤바꿔 놓으시는 하나님의 역전의 역사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9∼11)
이 여인은 먼저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지만, 남자 제자들은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여성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의 빚입니다. 섬김의 빚입니다. 복음의 빚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가장 먼저, 뚜렷하게 등장하는 여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역사 안에서, 남자들이 남성의 우월을 이야기하는 이 모든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여성들을 통해서 새로운 일을 펼치셨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것이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믿음의 동역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여성인권이 신장된 것은,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매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동안 여성들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모두가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가부장사회에서 신음하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되면서, 생명의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구나. 나도 하나님나라에 동참할 수 있구나.’ 짓밟혀 있던 여성인권의 신장에 복음의 역사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런데, 130년이 지난 오늘날 오히려 사회보다 교회가 뒷걸음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은퇴 장로님들까지 합하면 150명 이상의 장로님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성 장로님은 단 세 분뿐입니다. 그분들도 다 은퇴를 하셔서 현역에는 지금 한 분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주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부분입니다.
여성 성도님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여성의 적이 여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여성은 존귀해지기 어렵습니다. 부족해도 여성이 여성을 소중히 여겨야 여성의 자리가 높아집니다. 교회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길을 여러분이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성들에게 부탁합니다. 여자를 함부로 무시하지 마십시오.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를 조롱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아주 쩨쩨한 남자들의 오만입니다. 그렇다고 여자를 숭배하지는 마십시오. 이것은 어리석은 남자의 모습입니다.
여자를 인생의 파트너로, 동역자로 만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이 땅에 세워질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동역하는 믿음의 동지로 서로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차별이 없다고 말입니다. 서로를 귀히 여기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세요. 여러분의 딸을 소중히 여기세요. 여러분의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세요.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을 남자들이 막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건입니다.
오늘도 잘못된 차별은 우리 공동체와 우리 사회 속에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회복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사랑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두려움 없이 사랑하며 자신의 전체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감복하여 주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겠다고 다짐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