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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누구이기에?” – 모세 이야기 8 –

출애굽기 5: 1 ~ 9

김지철 목사

2016.12.18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습니까? 당신의 신앙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는데, 한 번 설명을 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만약 우리의 대답이 불분명하다면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무속 신앙에 심취된 사람들로 오인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말 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부모님 신앙을 내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만의 신앙의 이유와 목적 없이 그저 신앙생활만을 반복해 온 것은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 내 신앙의 이유에 대해 물어볼 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는 나만의 신앙의 이유와 대답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와 애굽 왕 바로가 맞대결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바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는 목자입니다. 하지만 바로 왕은 절대군주입니다. 당대 최고 권력을 지닌 권력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삶의 자리는 황량한 광야입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화려한 왕궁에서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압과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소개하니까 바로 왕이 호통을 칩니다. 자신이 신 곧 태양의 아들인데, 자기 위에 어떤 신이 존재할 수 있느냐고 모세에게 대항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참 하나님일까요? 누가 진짜 신들 중의 신이며, 누가 가짜 신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 누가 신들 중의 신인지 판명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 했던 원천적 동기는 무엇입니까? 정치적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사회‧경제사적인 노예해방운동이었습니까? 물론, 그런 측면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그런 관점이 우선적인 목적이나 가치관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운동은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예배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출애굽이 시작된 것입니다. 애굽 땅 곧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생활하던 그 땅에서 탈출하면서 자유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을 탈출하는 이유이자 목적이 왜 예배였을까요? 왜 그들은 그 땅을 탈출하면서까지 예배드리려고 했을까요?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가능해 집니다. 즉, 인간의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획득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며 세상에서 나를 얽어매던 것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나의 우상이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내가 붙잡아야 할 분이 하나님 한분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릴 때, 진정한 자유가 우리 안에 깃듭니다.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되고, 돈의 우상, 권력의 우상, 탐욕과 쾌락의 우상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유자가 되는 시간이 바로 예배드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도 바로 앞에 서서 우리가 예배드리러 가야 되겠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5:1)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로 나아가는 그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분의 이름을 들고 바로 왕 앞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 백성을 보내라’고 명하셨다고 이릅니다. 이는 영어로, ‘let my people go!’입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광야, 그곳이 우리의 예배 처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로 보내라 하십니까? 광야로 보내라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기를 지킬 것이라 합니다. 즉,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보내 바로 왕에게 요청하신 것입니다. 3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 (출애굽기 5:3 중)

여기에도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일까? 왜 굳이 광야로 가서 예배드려야 하는가?’
애굽은 애굽 왕이 지배하는 땅입니다. 그러니 그곳에서는 애굽 왕을 섬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애굽 왕과 여호와 하나님 중 한분을 택해야 합니다. 때문에 애굽을 떠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겐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기 위해 모든 것이 단절된 광야로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신 땅, 곧 거룩한 땅입니다. 바로 이 광야에 나가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고 선언하며, 바로 왕의 억압과 횡포에서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광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 봐도 됩니다. 우리가 참되게 예배드리는 이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러 나올 때 잘라내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얽어맸던 것, 우리에게 상처 줬던 것, 우리가 우상으로 삼았던 돈, 쾌락, 탐욕과 같은 모든 것들을 단절하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그것이 우리 예배 공동체의 참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예배드릴 때 참 자유를 맛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슴을 펴고 해방된 자의 자유를 마음껏 느끼라고 부탁하십니다.
우리의 주인은 애굽 왕 바로가 아닙니다.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탐욕이나 세상의 쾌락도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이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자가 갖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나를 얽어맸던 모든 것을 타파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섬길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예배자의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연약하고 비천한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를 드리려 할 때,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가려고 하는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자유를 억압하며 종살이를 계속하라고 요구하는 세력입니다. 예배하는 자와 억압하는 자가 부딪칩니다. 두 세력은 동거할 수 없습니다. 예배드린다는 건 자유를 향한 갈구이기에, 또 남에게 빼앗겼던 권리를 회복하며 종살이를 박차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방해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바로 왕이라는 막강한 권력자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모세가 예배드리러 간다고 하니, 바로가 그 앞을 막아섰습니다. 2절 말씀에 바로의 답변이 나옵니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5:2)

‘네가 말하는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냐’고 바로가 되묻습니다. 이는 권력자의 오만한 질문입니다. 냉소적이며 빈정대는 말입니다. 내가 태양의 아들이고 내가 신인데 나보다 더 뛰어난 신이 있냐고, 나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수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로 왕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출애굽기 5:3)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란 말을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도대체 여기 나타난 ‘히브리인’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그들이 당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연구를 했는데, 전반적으로 합의하는 부분이 이런 내용입니다. ‘사회적 천민 출신의 사람들’, ‘고된 노동을 하는 밑바닥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막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들을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연약한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무능력한 자들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무능한 사람들을 대변하셨습니다. 또, 비천한 자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모세가 바로 왕에게 선언했습니다. 모세의 요청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는 것. 그러나 그 말은 바로 왕 당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을 이제 그치겠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절대강자이자 모든 것을 소유한 왕과 아무것도 갖지 못한 노예들의 입장을 대변한 모세가 대결 구도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 예배가 왜 중요합니까? 예배드리는 그 순간 우리를 억누르던 모든 우상이 평준화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우상들을 폐기처분할 수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누구신가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없는 자의 편이십니다.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자를 보호하십니다.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자리에서 그들을 살려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기를 펴지 못하는 자들에게 친구처럼 찾아오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파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모든 세력을 거부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또, 그것이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이런 속성을 예수님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자로 오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연약한 자를 품기 위해서, 절망한 자를 품기 위해서, 비천한 자들의 밑바닥 인생을 품기 위해서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애통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인권 대접을 받지 못한 여성들을 예수님이 만나 주셨고, 질병에 걸려서 고통 받는 자들, 버려진 사람들을 예수님이 끌어안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7장 7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7:7)

이스라엘이 잘나서, 능력이나 소유가 많아서 택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보잘것없어서 그들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을 택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잠언 14장 31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언 14:31)

나보다 작고 연약하다고, 나보다 못하다고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조롱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연약한 자를 배려할 줄 알고 귀히 여긴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마태복음 25:40 중)

가장 작은 자, 가장 연약한 자를 사랑으로 돌보았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 행한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돈 있는 사람 옆에 서려고 합니다. 힘 있는 자 옆에 붙으려고 합니다. 뭔가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권력을 쥔 사람 옆에 가야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이십니다. 오히려 연약한 자, 부족한 자, 힘든 자, 눈물 흘리는 자,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비전과 억압자의 횡포가 맞부딪칩니다.

이스라엘이 가진 비전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공동체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니, 그들을 얽어매던 모든 쇠사슬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를 얽어매는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를 몰아붙이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길뿐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바로 왕은 분노했습니다. 억압 정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거짓 지도자로 몰아붙이며 분란을 일으키는 자라고 쏘아붙였습니다. 백성을 선동하지 말고 더 이상 거짓으로 그들을 매도하지 말라고도 호통쳤습니다. 이처럼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면, 더욱 악해지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을 더욱 혹독하게 대하라. 그러면 잠잠해질 것이다. 백성을 더 억압하라. 그럼 성과가 나올 것이다.” 바로 왕 역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움을 주는 권력자로, 포악하고 악랄한 권력자로 나섰습니다. 우리가 북한의 권력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이런 것입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억압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호의호식합니다. 백성에게 두려움만 가져다주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지도자는 악하고 무능한 지도자일 뿐입니다.
바로 왕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체성을 가지려 하자 그들을 더욱 억압합니다. 자주의식과 독립의식은 위험하니, 민족적인 자의식을 말살시키려고 그들을 노예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라고 부추기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 너희는 게을러. 너희는 더 큰 노력을 해야 돼.” 이렇게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했습니다. 이는 독재자들이 백성을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백성은 미련하고 게으르단 것입니다. 더 억압하고 억눌러야 제정신을 차린다며, 억압을 강화하는 잔인한 정책을 씁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 바로 왕입니다. 자신에게만 복종해야 한다고, 이스라엘의 노역을 경감할 수 있는 건 바로 왕 자신밖에 없다고, 그런데 모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 과중한 노역의 짐이 부과된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근성도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종으로 오랫동안 지내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겐 종 된 삶이 익숙했습니다. 바로가 그 노예근성을 이용한 것입니다. 노예근성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이미 노예라고, 당연히 노역을 감내해야 한다고, 나는 이것 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당연히 채찍에 맞아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자 곧 해방자가 되려면 엄청난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결코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예근성을 바로 왕이 이용하면서, 또 이런 생각을 이스라엘에게 세뇌시키면서 백성들을 지배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자유자의 삶을 회복합시다.

이와 같은 세뇌는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향해 주장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그러니 너는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너는 본래 사탄의 종이다. 네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넌 금방 무너질 것이다. 금세 쾌락에 빠지고 타락할 것이다. 그러니 그냥 편하게 살아라.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버려라.” 이렇게 우리를 미혹하며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노예근성 곧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돈과 권력, 탐욕과 쾌락이라는 우상에서 해방되는 길도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의 우상들로 인해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이 자꾸 방향을 놓치려고 합니다. 주님, 이곳이 광야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용기를 주옵소서.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모든 것을 차단하고 주님만을 바라게 하옵소서.” 이렇게 선언할 때, 우리 안에서 회복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왕이 그랬습니다.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냐고. 이 오만한 질문에 우리가 대답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여호와는 우리가 예배드려야 할 분이며, 우리가 생명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분이라고. 또, 그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그분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우리의 억압의 사슬을 끊으시며, 우리를 해방시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가 선언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는 예배 공동체에 속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삶의 어려운 여정 속에서도 진정한 자유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예배자의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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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5: 1 ~ 9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6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습니까? 당신의 신앙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는데, 한 번 설명을 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만약 우리의 대답이 불분명하다면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무속 신앙에 심취된 사람들로 오인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말 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부모님 신앙을 내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만의 신앙의 이유와 목적 없이 그저 신앙생활만을 반복해 온 것은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 내 신앙의 이유에 대해 물어볼 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는 나만의 신앙의 이유와 대답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와 애굽 왕 바로가 맞대결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바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는 목자입니다. 하지만 바로 왕은 절대군주입니다. 당대 최고 권력을 지닌 권력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삶의 자리는 황량한 광야입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화려한 왕궁에서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압과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소개하니까 바로 왕이 호통을 칩니다. 자신이 신 곧 태양의 아들인데, 자기 위에 어떤 신이 존재할 수 있느냐고 모세에게 대항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참 하나님일까요? 누가 진짜 신들 중의 신이며, 누가 가짜 신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 누가 신들 중의 신인지 판명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 했던 원천적 동기는 무엇입니까? 정치적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사회‧경제사적인 노예해방운동이었습니까? 물론, 그런 측면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그런 관점이 우선적인 목적이나 가치관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운동은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예배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출애굽이 시작된 것입니다. 애굽 땅 곧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생활하던 그 땅에서 탈출하면서 자유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을 탈출하는 이유이자 목적이 왜 예배였을까요? 왜 그들은 그 땅을 탈출하면서까지 예배드리려고 했을까요?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가능해 집니다. 즉, 인간의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획득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며 세상에서 나를 얽어매던 것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나의 우상이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내가 붙잡아야 할 분이 하나님 한분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릴 때, 진정한 자유가 우리 안에 깃듭니다.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되고, 돈의 우상, 권력의 우상, 탐욕과 쾌락의 우상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유자가 되는 시간이 바로 예배드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도 바로 앞에 서서 우리가 예배드리러 가야 되겠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5:1)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로 나아가는 그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분의 이름을 들고 바로 왕 앞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 백성을 보내라’고 명하셨다고 이릅니다. 이는 영어로, ‘let my people go!’입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광야, 그곳이 우리의 예배 처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로 보내라 하십니까? 광야로 보내라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기를 지킬 것이라 합니다. 즉,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보내 바로 왕에게 요청하신 것입니다. 3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 (출애굽기 5:3 중)

여기에도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일까? 왜 굳이 광야로 가서 예배드려야 하는가?’
애굽은 애굽 왕이 지배하는 땅입니다. 그러니 그곳에서는 애굽 왕을 섬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애굽 왕과 여호와 하나님 중 한분을 택해야 합니다. 때문에 애굽을 떠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겐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기 위해 모든 것이 단절된 광야로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신 땅, 곧 거룩한 땅입니다. 바로 이 광야에 나가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고 선언하며, 바로 왕의 억압과 횡포에서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광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 봐도 됩니다. 우리가 참되게 예배드리는 이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러 나올 때 잘라내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얽어맸던 것, 우리에게 상처 줬던 것, 우리가 우상으로 삼았던 돈, 쾌락, 탐욕과 같은 모든 것들을 단절하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그것이 우리 예배 공동체의 참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예배드릴 때 참 자유를 맛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슴을 펴고 해방된 자의 자유를 마음껏 느끼라고 부탁하십니다.
우리의 주인은 애굽 왕 바로가 아닙니다.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탐욕이나 세상의 쾌락도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이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자가 갖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나를 얽어맸던 모든 것을 타파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섬길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예배자의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연약하고 비천한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를 드리려 할 때,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가려고 하는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자유를 억압하며 종살이를 계속하라고 요구하는 세력입니다. 예배하는 자와 억압하는 자가 부딪칩니다. 두 세력은 동거할 수 없습니다. 예배드린다는 건 자유를 향한 갈구이기에, 또 남에게 빼앗겼던 권리를 회복하며 종살이를 박차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방해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바로 왕이라는 막강한 권력자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모세가 예배드리러 간다고 하니, 바로가 그 앞을 막아섰습니다. 2절 말씀에 바로의 답변이 나옵니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5:2)

‘네가 말하는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냐’고 바로가 되묻습니다. 이는 권력자의 오만한 질문입니다. 냉소적이며 빈정대는 말입니다. 내가 태양의 아들이고 내가 신인데 나보다 더 뛰어난 신이 있냐고, 나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수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로 왕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출애굽기 5:3)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란 말을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도대체 여기 나타난 ‘히브리인’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그들이 당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연구를 했는데, 전반적으로 합의하는 부분이 이런 내용입니다. ‘사회적 천민 출신의 사람들’, ‘고된 노동을 하는 밑바닥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막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들을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연약한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무능력한 자들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무능한 사람들을 대변하셨습니다. 또, 비천한 자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모세가 바로 왕에게 선언했습니다. 모세의 요청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는 것. 그러나 그 말은 바로 왕 당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을 이제 그치겠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절대강자이자 모든 것을 소유한 왕과 아무것도 갖지 못한 노예들의 입장을 대변한 모세가 대결 구도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 예배가 왜 중요합니까? 예배드리는 그 순간 우리를 억누르던 모든 우상이 평준화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우상들을 폐기처분할 수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누구신가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없는 자의 편이십니다.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자를 보호하십니다.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자리에서 그들을 살려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기를 펴지 못하는 자들에게 친구처럼 찾아오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파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모든 세력을 거부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또, 그것이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이런 속성을 예수님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자로 오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연약한 자를 품기 위해서, 절망한 자를 품기 위해서, 비천한 자들의 밑바닥 인생을 품기 위해서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애통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인권 대접을 받지 못한 여성들을 예수님이 만나 주셨고, 질병에 걸려서 고통 받는 자들, 버려진 사람들을 예수님이 끌어안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7장 7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7:7)

이스라엘이 잘나서, 능력이나 소유가 많아서 택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보잘것없어서 그들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을 택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잠언 14장 31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언 14:31)

나보다 작고 연약하다고, 나보다 못하다고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조롱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연약한 자를 배려할 줄 알고 귀히 여긴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마태복음 25:40 중)

가장 작은 자, 가장 연약한 자를 사랑으로 돌보았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 행한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돈 있는 사람 옆에 서려고 합니다. 힘 있는 자 옆에 붙으려고 합니다. 뭔가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권력을 쥔 사람 옆에 가야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이십니다. 오히려 연약한 자, 부족한 자, 힘든 자, 눈물 흘리는 자,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비전과 억압자의 횡포가 맞부딪칩니다.

이스라엘이 가진 비전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공동체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니, 그들을 얽어매던 모든 쇠사슬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를 얽어매는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를 몰아붙이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길뿐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바로 왕은 분노했습니다. 억압 정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거짓 지도자로 몰아붙이며 분란을 일으키는 자라고 쏘아붙였습니다. 백성을 선동하지 말고 더 이상 거짓으로 그들을 매도하지 말라고도 호통쳤습니다. 이처럼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면, 더욱 악해지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을 더욱 혹독하게 대하라. 그러면 잠잠해질 것이다. 백성을 더 억압하라. 그럼 성과가 나올 것이다.” 바로 왕 역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움을 주는 권력자로, 포악하고 악랄한 권력자로 나섰습니다. 우리가 북한의 권력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이런 것입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억압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호의호식합니다. 백성에게 두려움만 가져다주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지도자는 악하고 무능한 지도자일 뿐입니다.
바로 왕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체성을 가지려 하자 그들을 더욱 억압합니다. 자주의식과 독립의식은 위험하니, 민족적인 자의식을 말살시키려고 그들을 노예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라고 부추기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 너희는 게을러. 너희는 더 큰 노력을 해야 돼.” 이렇게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했습니다. 이는 독재자들이 백성을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백성은 미련하고 게으르단 것입니다. 더 억압하고 억눌러야 제정신을 차린다며, 억압을 강화하는 잔인한 정책을 씁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 바로 왕입니다. 자신에게만 복종해야 한다고, 이스라엘의 노역을 경감할 수 있는 건 바로 왕 자신밖에 없다고, 그런데 모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 과중한 노역의 짐이 부과된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근성도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종으로 오랫동안 지내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겐 종 된 삶이 익숙했습니다. 바로가 그 노예근성을 이용한 것입니다. 노예근성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이미 노예라고, 당연히 노역을 감내해야 한다고, 나는 이것 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당연히 채찍에 맞아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자 곧 해방자가 되려면 엄청난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결코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예근성을 바로 왕이 이용하면서, 또 이런 생각을 이스라엘에게 세뇌시키면서 백성들을 지배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자유자의 삶을 회복합시다.

이와 같은 세뇌는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향해 주장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그러니 너는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너는 본래 사탄의 종이다. 네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넌 금방 무너질 것이다. 금세 쾌락에 빠지고 타락할 것이다. 그러니 그냥 편하게 살아라.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버려라.” 이렇게 우리를 미혹하며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노예근성 곧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돈과 권력, 탐욕과 쾌락이라는 우상에서 해방되는 길도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의 우상들로 인해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이 자꾸 방향을 놓치려고 합니다. 주님, 이곳이 광야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용기를 주옵소서.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모든 것을 차단하고 주님만을 바라게 하옵소서.” 이렇게 선언할 때, 우리 안에서 회복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왕이 그랬습니다.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냐고. 이 오만한 질문에 우리가 대답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여호와는 우리가 예배드려야 할 분이며, 우리가 생명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분이라고. 또, 그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그분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우리의 억압의 사슬을 끊으시며, 우리를 해방시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가 선언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는 예배 공동체에 속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삶의 어려운 여정 속에서도 진정한 자유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예배자의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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