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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무엘하 12: 1 ~ 10

김지철 목사

2009.08.02

다윗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다윗’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가히 입지전적인 것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일개 양치는 목동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가족 안에서조차 그는 의미 없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버지의 눈에도 차지 않는 어떻게 보면 버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한 시골 목동의 삶에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삶을 외딴 광야에서 사람들이 사는 삶의 한 복판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다윗은 광야에 홀로 있으면서 늘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했습니다. 그 외진 곳에서 곰과 사자를 만나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기를 내서 물리쳤습니다. 앞뒤를 분간 못하는 양떼를 이끌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던 목자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는 외진 곳에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포악한 블레셋의 거대한 장수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일약 영웅이 되어 이스라엘의 왕 사울보다 더 인기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안정된 삶의 전성기에서 다윗은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생을 시기별로 요약해보면, 20대의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지만,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끊임없이 도피하던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30대의 다윗의 삶은 이스라엘 통일왕이 되지만 철저하게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피흘림의 삶이었습니다. 40대의 다윗은 이웃과의 전쟁으로 자기의 영토를 넓히고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는 권력자입니다. 50대에 들어서자 다윗의 삶에는 여유와 안정이 생겼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며 안정된 삶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걱정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오늘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사무엘하 12:7~8)

그의 전성기 시기 어느 한 때 군대 장관 요압은 군인들과 함께 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인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인간이 여유가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다윗은 정상에 있을 때 자기 통제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틈타 생각이 새어나가고 행위도 뒤따라갑니다. 인간이 무너지는 때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차고 넘치는 풍요한 순간, 모든 가능성을 쥐고 있는 순간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사무엘하 11:2)

본문은 다윗의 여가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 절에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요압의 군대들과 대비하여 왕궁 옥상을 거니는 왕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저녁 때 그가 침상에서 일어났다면, 이른 낮부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뙤약볕에 땀 흘리며 화살 세례에 피 흘리는 자기 군대를 두고 낮잠을 자는 왕의 눈에 무엇이 들어 왔을까요?
이미 다윗의 눈은 유혹을 받아들일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혹이 눈으로 들어오면 금방 마음으로 내려갑니다. 마음이 유혹에 붙잡기 시작하면 삶 전체를 붙들고 좌지우지합니다. 그것이 유혹의 치명적인 특성입니다.

다윗은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권력을 사용했습니다.

다윗은 여인이 벌거벗고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심히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침상에서 유혹의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묵상했습니다. 여인을 묵상한 것이 아니라 여인의 육체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쾌락을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가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다윗 왕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니이까?’ 문장의 끝이 의문문으로 답합니다. ‘다윗 왕이여! 엘리암의 딸입니다.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신하는 오히려 그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신하는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경고합니다. ‘왕이여! 남의 아내입니다. 충성된 당신 부하의 아내입니다. 이 여인은 유부녀입니다.’ 그는 다윗의 욕정에 ‘멈춤!’의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조심스러운 경고를 들어야 했으나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욕정이 불붙으면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잠언 9:17)

잠언 기자는 이런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의 본성을 알려줍니다. 몰래 먹는 떡과 도둑질한 물이 더 달콤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성경은 아무런 절차를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욕정대로 동침했습니다. 그의 권력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풍요롭게 하고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골리앗을 죽이던 힘,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고 굴복시키던 능력, 하나님의 백성을 전무후무하게 풍요롭게 하던 권력을 한 순간에 욕정의 도구로 써버렸습니다. 그 모두를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했고 참담하게 무너졌습니다.

유혹에 무너진 다윗은 모든 것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무너짐을 확실하게 드러냈습니다. 용감한 자가 순식간에 비겁한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여 자기의 죄악을 숨기려고 음모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평생 수많은 사람들의 음모와 모함에 그토록 힘든 삶을 살았으면서도 이제 왕이 되어 절정의 권력을 구하는 다윗 자신이 음모의 주동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어디에서도 우리는 왕으로서의 다윗, 권력가로서의 다윗, 장수로서의 다윗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빈들에서 연주를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던 다윗이나 어린양을 지키려 맹수와 사투를 벌이는 다윗을 도저히 연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무너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참한 순간을 자신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잘 숨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이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의 죄를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일을 지켜본 분이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왕이 권력과 힘으로 숨기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알아도 모른 체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고,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단은 지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처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서게 할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 비유를 사실처럼 이야기합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는 소와 양이 너무 많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암양새끼 한 마리를 자기 자식과 같이 아끼면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왔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의 양 한 마리를 잡는 것이 아까워서 그는 가난한 자의 자식같이 아끼는 양을 빼앗아다가 잡아 자기 손님을 위하여 대접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닥치면 억울함을 하소연할 것입니다. 적어도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죄악을 숨기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고 신하를 죽도록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왕으로서의 양심으로 이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사무엘하 12:5)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두고 맹세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으로 자기가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나단은 이 선언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렇게 지적합니다. ‘왕이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이 지은 죄악에 더 반응합니다.

우리는 종종 다윗처럼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단두대의 칼날처럼 세우고 봐줄 수 없는 듯 말합니다. 거룩한 분노인 양 남의 죄에 대해서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죄는 칼로 물을 베는 것처럼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의 입을 빌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사무엘하 12:9)

이 모든 것은 우연한 유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혹이 가슴에 들어와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 피할 수 없는 범죄가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더 큰 죄악을 짓고 거짓과 술수로 은폐하기 위하여 달려가던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는 것보다 나 자신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공개하는 일이 더 어렵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과 허점, 실수 등을 스스로 공개하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도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 자기의 죄가 공개되는 것이 더 힘들지 모릅니다.

정욕의 유혹은 하나님을 망각하고 절제의 능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다윗은 죄를 인정할 수가 없어서 숨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업신여기는 죄악에 들어갔습니다. 인간이 유혹받고 죄를 범할 때 생기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인간관계에만 문제가 생길까요?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그 결과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본회퍼의 저서 『창조 타락 유혹』에서 유혹이 갖는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의 지체 속에 잠자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구가 갑자기 난폭해집니다. 욕망은 억제할 수 없는 폭력으로 육체를 사로잡습니다. 숨어 있던 불꽃이 단번에 피어오릅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하나님은 모든 현실성을 상실합니다.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은 피조물을 즐기는 쾌락이요, 단 하나의 실체는 악마입니다.”

쾌락에 대한 욕구가 유혹으로 들어오면 난폭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에는 절제하는 줄 알았는데, 숨어있던 정욕의 불꽃이 갑자기 피어오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유혹받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현실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하고 상관없는 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피조물을 즐기려는 쾌락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없어지고 악마만이 실체로 내게 다가오고 현실적인 육체적인 쾌락만이 나를 붙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욕의 유혹은 하나님을 망각의 동굴에 가두어 버립니다. 유혹하는 악마는 하나님을 미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증오하고 적대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잠깐 하나님을 잊어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잠시 생각나지 않게 하라고 할 뿐입니다. 네가 언제나 하던 것처럼 잠깐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 행동하라고 우리를 부추길 뿐입니다. 그러나 치명적이게도 유혹은 자기 절제를 무너뜨립니다. 마치 재와 같이 불타올라 흩어져 버립니다. 분별력과 통찰력도 사라지고 깊은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고 칭찬받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겼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바로 네가 그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즉시 무릎을 꿇습니다. 즉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음에 처할 다윗을 살려두십니다. 살려두시긴 했지만, 죄에 대한 참혹한 현실은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무엘하 12:10)

이때부터 다윗 가문은 몰락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시기, 질투, 근친상간, 형제 살인 등.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대항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다윗의 첩을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강간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가정에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유혹에 넘어졌을 때 즉시 인정하고 회개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정욕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유혹이 너무 크다고 생각되면 잠시 그 자리에서 피하십시오. 술과 도박과 이성들의 춤 속에 있으면서 ‘나는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일 뿐입니다.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도망쳐야 합니다. 유혹에서 도망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혹에 넘어가 죄를 저지르고 숨기는 일이 비겁한 것입니다. 유혹의 자리를 피하고, 악마의 유혹에 정면으로 도전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자기 절제의 능력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께 간구하면서 도와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여 넘어졌을 때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다시 나아와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우리는 다윗처럼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사람, 말씀의 사람, 지혜의 사람으로 세움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쉽게 유혹받고 마음과 육체로 범죄하는 연약한 우리를 돌보아 주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유혹의 현장에서 도망칠 힘을 주시고, 유혹의 삶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이기게 하옵소서. 혹 유혹으로 인하여 무너진 사람의 삶에 주님 앞에 회개할 양심을 허락하여 주시고, 지금 즉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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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2: 1 ~ 10

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10

다윗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다윗’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가히 입지전적인 것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일개 양치는 목동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가족 안에서조차 그는 의미 없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버지의 눈에도 차지 않는 어떻게 보면 버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한 시골 목동의 삶에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삶을 외딴 광야에서 사람들이 사는 삶의 한 복판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다윗은 광야에 홀로 있으면서 늘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했습니다. 그 외진 곳에서 곰과 사자를 만나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기를 내서 물리쳤습니다. 앞뒤를 분간 못하는 양떼를 이끌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던 목자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는 외진 곳에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포악한 블레셋의 거대한 장수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일약 영웅이 되어 이스라엘의 왕 사울보다 더 인기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안정된 삶의 전성기에서 다윗은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생을 시기별로 요약해보면, 20대의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지만,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끊임없이 도피하던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30대의 다윗의 삶은 이스라엘 통일왕이 되지만 철저하게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피흘림의 삶이었습니다. 40대의 다윗은 이웃과의 전쟁으로 자기의 영토를 넓히고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는 권력자입니다. 50대에 들어서자 다윗의 삶에는 여유와 안정이 생겼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며 안정된 삶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걱정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오늘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사무엘하 12:7~8)

그의 전성기 시기 어느 한 때 군대 장관 요압은 군인들과 함께 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인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인간이 여유가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다윗은 정상에 있을 때 자기 통제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틈타 생각이 새어나가고 행위도 뒤따라갑니다. 인간이 무너지는 때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차고 넘치는 풍요한 순간, 모든 가능성을 쥐고 있는 순간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사무엘하 11:2)

본문은 다윗의 여가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 절에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요압의 군대들과 대비하여 왕궁 옥상을 거니는 왕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저녁 때 그가 침상에서 일어났다면, 이른 낮부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뙤약볕에 땀 흘리며 화살 세례에 피 흘리는 자기 군대를 두고 낮잠을 자는 왕의 눈에 무엇이 들어 왔을까요?
이미 다윗의 눈은 유혹을 받아들일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혹이 눈으로 들어오면 금방 마음으로 내려갑니다. 마음이 유혹에 붙잡기 시작하면 삶 전체를 붙들고 좌지우지합니다. 그것이 유혹의 치명적인 특성입니다.

다윗은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권력을 사용했습니다.

다윗은 여인이 벌거벗고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심히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침상에서 유혹의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묵상했습니다. 여인을 묵상한 것이 아니라 여인의 육체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쾌락을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가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다윗 왕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니이까?’ 문장의 끝이 의문문으로 답합니다. ‘다윗 왕이여! 엘리암의 딸입니다.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신하는 오히려 그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신하는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경고합니다. ‘왕이여! 남의 아내입니다. 충성된 당신 부하의 아내입니다. 이 여인은 유부녀입니다.’ 그는 다윗의 욕정에 ‘멈춤!’의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조심스러운 경고를 들어야 했으나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욕정이 불붙으면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잠언 9:17)

잠언 기자는 이런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의 본성을 알려줍니다. 몰래 먹는 떡과 도둑질한 물이 더 달콤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성경은 아무런 절차를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욕정대로 동침했습니다. 그의 권력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풍요롭게 하고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골리앗을 죽이던 힘,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고 굴복시키던 능력, 하나님의 백성을 전무후무하게 풍요롭게 하던 권력을 한 순간에 욕정의 도구로 써버렸습니다. 그 모두를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했고 참담하게 무너졌습니다.

유혹에 무너진 다윗은 모든 것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무너짐을 확실하게 드러냈습니다. 용감한 자가 순식간에 비겁한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여 자기의 죄악을 숨기려고 음모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평생 수많은 사람들의 음모와 모함에 그토록 힘든 삶을 살았으면서도 이제 왕이 되어 절정의 권력을 구하는 다윗 자신이 음모의 주동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어디에서도 우리는 왕으로서의 다윗, 권력가로서의 다윗, 장수로서의 다윗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빈들에서 연주를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던 다윗이나 어린양을 지키려 맹수와 사투를 벌이는 다윗을 도저히 연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무너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참한 순간을 자신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잘 숨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이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의 죄를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일을 지켜본 분이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왕이 권력과 힘으로 숨기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알아도 모른 체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고,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단은 지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처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서게 할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 비유를 사실처럼 이야기합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는 소와 양이 너무 많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암양새끼 한 마리를 자기 자식과 같이 아끼면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왔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의 양 한 마리를 잡는 것이 아까워서 그는 가난한 자의 자식같이 아끼는 양을 빼앗아다가 잡아 자기 손님을 위하여 대접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닥치면 억울함을 하소연할 것입니다. 적어도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죄악을 숨기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고 신하를 죽도록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왕으로서의 양심으로 이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사무엘하 12:5)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두고 맹세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으로 자기가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나단은 이 선언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렇게 지적합니다. ‘왕이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이 지은 죄악에 더 반응합니다.

우리는 종종 다윗처럼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단두대의 칼날처럼 세우고 봐줄 수 없는 듯 말합니다. 거룩한 분노인 양 남의 죄에 대해서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죄는 칼로 물을 베는 것처럼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의 입을 빌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사무엘하 12:9)

이 모든 것은 우연한 유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혹이 가슴에 들어와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 피할 수 없는 범죄가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더 큰 죄악을 짓고 거짓과 술수로 은폐하기 위하여 달려가던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는 것보다 나 자신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공개하는 일이 더 어렵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과 허점, 실수 등을 스스로 공개하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도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 자기의 죄가 공개되는 것이 더 힘들지 모릅니다.

정욕의 유혹은 하나님을 망각하고 절제의 능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다윗은 죄를 인정할 수가 없어서 숨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업신여기는 죄악에 들어갔습니다. 인간이 유혹받고 죄를 범할 때 생기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인간관계에만 문제가 생길까요?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그 결과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본회퍼의 저서 『창조 타락 유혹』에서 유혹이 갖는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의 지체 속에 잠자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구가 갑자기 난폭해집니다. 욕망은 억제할 수 없는 폭력으로 육체를 사로잡습니다. 숨어 있던 불꽃이 단번에 피어오릅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하나님은 모든 현실성을 상실합니다.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은 피조물을 즐기는 쾌락이요, 단 하나의 실체는 악마입니다.”

쾌락에 대한 욕구가 유혹으로 들어오면 난폭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에는 절제하는 줄 알았는데, 숨어있던 정욕의 불꽃이 갑자기 피어오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유혹받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현실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하고 상관없는 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피조물을 즐기려는 쾌락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없어지고 악마만이 실체로 내게 다가오고 현실적인 육체적인 쾌락만이 나를 붙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욕의 유혹은 하나님을 망각의 동굴에 가두어 버립니다. 유혹하는 악마는 하나님을 미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증오하고 적대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잠깐 하나님을 잊어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잠시 생각나지 않게 하라고 할 뿐입니다. 네가 언제나 하던 것처럼 잠깐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 행동하라고 우리를 부추길 뿐입니다. 그러나 치명적이게도 유혹은 자기 절제를 무너뜨립니다. 마치 재와 같이 불타올라 흩어져 버립니다. 분별력과 통찰력도 사라지고 깊은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고 칭찬받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겼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바로 네가 그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즉시 무릎을 꿇습니다. 즉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음에 처할 다윗을 살려두십니다. 살려두시긴 했지만, 죄에 대한 참혹한 현실은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무엘하 12:10)

이때부터 다윗 가문은 몰락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시기, 질투, 근친상간, 형제 살인 등.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대항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다윗의 첩을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강간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가정에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유혹에 넘어졌을 때 즉시 인정하고 회개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정욕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유혹이 너무 크다고 생각되면 잠시 그 자리에서 피하십시오. 술과 도박과 이성들의 춤 속에 있으면서 ‘나는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일 뿐입니다.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도망쳐야 합니다. 유혹에서 도망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혹에 넘어가 죄를 저지르고 숨기는 일이 비겁한 것입니다. 유혹의 자리를 피하고, 악마의 유혹에 정면으로 도전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자기 절제의 능력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께 간구하면서 도와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여 넘어졌을 때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다시 나아와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우리는 다윗처럼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사람, 말씀의 사람, 지혜의 사람으로 세움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쉽게 유혹받고 마음과 육체로 범죄하는 연약한 우리를 돌보아 주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유혹의 현장에서 도망칠 힘을 주시고, 유혹의 삶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이기게 하옵소서. 혹 유혹으로 인하여 무너진 사람의 삶에 주님 앞에 회개할 양심을 허락하여 주시고, 지금 즉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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