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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영적 통찰

느헤미야 9: 28 ~ 33

김지철 목사

2010.08.15

지식보다 소중한 것이 지혜입니다

유대인들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정보를 얻는 지식도 삶에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생각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혜가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얻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으로 알려진 잠언, 시편, 욥기는 이러한 지혜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자 중의 지혜자가 누구냐는 물음 앞에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정통한 랍비들을 뽑습니다. 유대인들은 랍비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 제도가 사라졌을 때에도,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회당에서 랍비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다음과 질문을 합니다. “얘야, 집이 불타서 재산을 다 잃게 된다면 너는 무엇을 가지고 도망치겠니?” 아이들은 대답합니다. “돈이요! 보석이요!” 그때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충고를 합니다. “얘야, 네가 가지고 가야할 것은 모양도 없고 빛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이란다. 그것은 돈이나 보석이 아니고 바로 지혜란다.” 돈도 잃고 보석도 잃고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다 잃어버려도 지혜만 있다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슬픔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의 역사였습니다. 수많은 아픔을 견뎌내고 일어선 역사였습니다. 그들의 역사 속에는 생각하는 지혜자 신앙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이 백성들은 자신의 불행과 행복을 동시에 회상했습니다. 그들이 지녔던 아픔도 생각했고 기쁨도 생각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이외수의 말입니다. “불행이란 행복이라는 이름의 나무 밑에 드리워져 있는 나무만한 크기의 그늘이다.”
행복이라는 나무가 있으면 불행은 바로 행복이라는 나무 밑에 드리워진 비슷한 크기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이외수는 이어서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그 그늘까지 나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불행과 슬픔과 아픔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것이 있는 한 행복하지 않다고 소리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행복 뒤에는 불행이라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의 그림자인 아픔과 슬픔을 품어야 우리는 넉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성숙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훌륭하다는 사람은 진정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니 더 많이 가졌고 인품도 좋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전의 자신에 비해 향상된 사람을 진정 훌륭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옛 모습에서부터 점점 발전하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예전보다 지금의 신앙이 더 성숙해있습니까?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더 순수해졌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더 가득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설레임과 떨림보다 더 성숙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갈 때도 있고 뒤로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삶의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어제는 -1이었다면 오늘은 0까지 와야 합니다. 내일은 1에서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헛걸음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고, 때로는 몇 걸음 뒤로 물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기로 마음속에 결단해야만 성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성숙한 삶으로 이끌어가려면 그 동안에 있었던 슬픔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쓰라린 역사들을 기억하고 가슴으로 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실패의 역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좌절 그 자체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서 우울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들이 준 교훈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한다는 뜻입니다.

고통의 시절을 기억해야 새로운 역사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역사를 회고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의 회고 속에 중심이 되어서 나타난 과거의 역사는 출애굽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얘들아, 우리 조상들은 종이었단다. 우리에게는 자주권이 없었단다. 참으로 비참했단다. 고통 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았단다. 우리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아픔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단다. 광야에서 생활할 때 목말랐고 배고파서 지쳐 쓰러졌던 백성이 바로 우리 백성들이란다.” 이렇게 그들은 자녀들에게 선조들의 아픔과 고통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슬픔의 역사였고 탄식이 솟구치는 역사였습니다. 36년 동안 일제로부터의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순국열사와 순교자가 발생했습니다.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의 참화도 있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살상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은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던 우리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풀죽을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독재의 위협 속에서 숨죽이면서 살았던 암울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고통의 시절을 기억해야 새로운 역사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새로운 역사 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고난과 고통의 시절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벗어나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나갔습니다.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결코 그들의 힘만으로는 일어설 수 없었던 처참한 역사였습니다. 주저앉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느 백성이 수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는단 말입니까? 무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이리저리 방황했던 이 백성이 어떻게 자기 나라를 되찾는 축복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애굽을 탈출했던 역사는 정치적 해방사가 아니었습니다. 사회경제적 해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해방사였습니다. 정신적인 해방사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정치권력의 억압에서부터 해방되었고 사회 불평등의 종살이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분명한 동기부여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하고 있다는 그들의 선언이 그들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예배로부터 모든 자유가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광야로 나가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라.” 모든 자유와 해방의 길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까요?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가 모든 인간의 자유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자리에는 자유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언론의 자유, 주거이전의 자유,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 사탄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몹쓸 것으로부터의 해방의 역사가 예배드리는 자유 속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축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두려워함으로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때 이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함으로 세상의 어떤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기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이 자유의 특권을 누리게 하셔서 결코 사탄의 지배와 억눌림에 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예배드릴 때마다 이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여, 내게 오시옵소서. 하나님의 성령이여, 내게 오시옵소서. 내게 자유케하는 영, 생명의 영, 치유의 영, 회복의 영으로 나를 가득하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요, 온 세계 열방을 향해 빛을 비추는 빛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며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올해는 한일합방을 했던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입니다. 또한 올해는 광복된 지 65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올해는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또한 올해는 4.19혁명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어둠과 억압 속에 있었던 이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빛의 역사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사하면서 우리의 슬펐던 역사 속에서도 자유를 외쳤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가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변화와 성숙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까? 과거 식민지 국가에서 오늘과 같은 민주자유국가로 변모한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수백만 명의 인명이 살상되고 초토화된 전쟁의 허허벌판에서 이렇게 풍요를 누리는 나라를 지구촌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이 만들어준 이 축복된 나라를 생각하면서 그분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찢어질 만큼 가난했던 역사에서 벗어나 이 나라의 풍요를 창출하기 위해서 애썼던 노동자들, 산업전사들, 그리고 도전의식으로 가득 찼던 기업인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권을 소중히 여기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생명을 걸었던 민주 투사들과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육의 치열한 현장에서 사랑을 쏟아 부으며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해서 애썼던 교육자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질병을 치유하고 이 땅의 기술 문명을 세워나갔던 의료인들과 과학기술자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자유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왔던 문화 예술인들, 체육인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를 북한의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고 평화를 일구어낸 국군 장병들과 군 지휘관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던 이 나라의 국가 공무원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선배, 우리의 부모님들, 우리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더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와 성도들을 세워주시고 한국교회 125년이라는 세월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던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의 열정이 축복받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룩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했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쓴 함석헌이 8.15 해방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해방은 민족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요, 공산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요, 전체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요, 무정부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다. 국내 사람의 손으로 된 것도 아니다. 해외지사의 손으로 된 것도 아니다. 이 해방의 원동력이 어떤 종교에서 나왔다 할 수도 없고, 어떤 교육에서 나왔다 할 수도 없다. 공정하게 사실을 사실로 보는 한 이것을 인적 노력에 돌릴 수는 없고, 부득이 하늘에 돌릴 수밖에는 없다.” 그러면서 그는 이 땅에 8.15 해방이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때 민중에 마음에서 나올 것은 감사밖에 없다. 이 감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첫 걸음이다.”

겸손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는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에게, 우리의 선배들에게, 우리의 교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없을 때보다 있을 때 감사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도 위기이지만 풍요로운 것도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가 다가올까요? 그것은 바로 오만의 위기, 타락의 위기, 불평과 원망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느헤미야 9:33)

우리가 악을 행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징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다시 겸손하게 자기의 민족을 세워나가는 일에 전념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세계 열방을 향한 제사장의 나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역사와 배고픔의 역사 속에서 여기까지 축복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겸손하게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은 오만한 생각입니다. 우리를 파괴시키는 것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이 자유를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나아가게 하옵소서.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나라를 사랑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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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9: 28 ~ 33

28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29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32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33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지식보다 소중한 것이 지혜입니다

유대인들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정보를 얻는 지식도 삶에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생각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혜가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얻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으로 알려진 잠언, 시편, 욥기는 이러한 지혜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자 중의 지혜자가 누구냐는 물음 앞에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정통한 랍비들을 뽑습니다. 유대인들은 랍비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 제도가 사라졌을 때에도,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회당에서 랍비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다음과 질문을 합니다. “얘야, 집이 불타서 재산을 다 잃게 된다면 너는 무엇을 가지고 도망치겠니?” 아이들은 대답합니다. “돈이요! 보석이요!” 그때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충고를 합니다. “얘야, 네가 가지고 가야할 것은 모양도 없고 빛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이란다. 그것은 돈이나 보석이 아니고 바로 지혜란다.” 돈도 잃고 보석도 잃고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다 잃어버려도 지혜만 있다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슬픔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의 역사였습니다. 수많은 아픔을 견뎌내고 일어선 역사였습니다. 그들의 역사 속에는 생각하는 지혜자 신앙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이 백성들은 자신의 불행과 행복을 동시에 회상했습니다. 그들이 지녔던 아픔도 생각했고 기쁨도 생각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이외수의 말입니다. “불행이란 행복이라는 이름의 나무 밑에 드리워져 있는 나무만한 크기의 그늘이다.”
행복이라는 나무가 있으면 불행은 바로 행복이라는 나무 밑에 드리워진 비슷한 크기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이외수는 이어서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그 그늘까지 나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불행과 슬픔과 아픔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것이 있는 한 행복하지 않다고 소리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행복 뒤에는 불행이라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의 그림자인 아픔과 슬픔을 품어야 우리는 넉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성숙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훌륭하다는 사람은 진정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니 더 많이 가졌고 인품도 좋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전의 자신에 비해 향상된 사람을 진정 훌륭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옛 모습에서부터 점점 발전하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예전보다 지금의 신앙이 더 성숙해있습니까?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더 순수해졌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더 가득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설레임과 떨림보다 더 성숙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갈 때도 있고 뒤로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삶의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어제는 -1이었다면 오늘은 0까지 와야 합니다. 내일은 1에서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헛걸음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고, 때로는 몇 걸음 뒤로 물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기로 마음속에 결단해야만 성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성숙한 삶으로 이끌어가려면 그 동안에 있었던 슬픔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쓰라린 역사들을 기억하고 가슴으로 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실패의 역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좌절 그 자체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서 우울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들이 준 교훈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한다는 뜻입니다.

고통의 시절을 기억해야 새로운 역사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역사를 회고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의 회고 속에 중심이 되어서 나타난 과거의 역사는 출애굽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얘들아, 우리 조상들은 종이었단다. 우리에게는 자주권이 없었단다. 참으로 비참했단다. 고통 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았단다. 우리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아픔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단다. 광야에서 생활할 때 목말랐고 배고파서 지쳐 쓰러졌던 백성이 바로 우리 백성들이란다.” 이렇게 그들은 자녀들에게 선조들의 아픔과 고통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슬픔의 역사였고 탄식이 솟구치는 역사였습니다. 36년 동안 일제로부터의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순국열사와 순교자가 발생했습니다.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의 참화도 있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살상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은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던 우리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풀죽을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독재의 위협 속에서 숨죽이면서 살았던 암울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고통의 시절을 기억해야 새로운 역사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새로운 역사 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고난과 고통의 시절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벗어나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나갔습니다.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결코 그들의 힘만으로는 일어설 수 없었던 처참한 역사였습니다. 주저앉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느 백성이 수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는단 말입니까? 무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이리저리 방황했던 이 백성이 어떻게 자기 나라를 되찾는 축복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애굽을 탈출했던 역사는 정치적 해방사가 아니었습니다. 사회경제적 해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해방사였습니다. 정신적인 해방사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정치권력의 억압에서부터 해방되었고 사회 불평등의 종살이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분명한 동기부여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하고 있다는 그들의 선언이 그들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예배로부터 모든 자유가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광야로 나가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라.” 모든 자유와 해방의 길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까요?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가 모든 인간의 자유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자리에는 자유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언론의 자유, 주거이전의 자유,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 사탄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몹쓸 것으로부터의 해방의 역사가 예배드리는 자유 속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축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두려워함으로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때 이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함으로 세상의 어떤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기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이 자유의 특권을 누리게 하셔서 결코 사탄의 지배와 억눌림에 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예배드릴 때마다 이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여, 내게 오시옵소서. 하나님의 성령이여, 내게 오시옵소서. 내게 자유케하는 영, 생명의 영, 치유의 영, 회복의 영으로 나를 가득하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요, 온 세계 열방을 향해 빛을 비추는 빛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며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올해는 한일합방을 했던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입니다. 또한 올해는 광복된 지 65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올해는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또한 올해는 4.19혁명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어둠과 억압 속에 있었던 이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빛의 역사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사하면서 우리의 슬펐던 역사 속에서도 자유를 외쳤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가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변화와 성숙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까? 과거 식민지 국가에서 오늘과 같은 민주자유국가로 변모한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수백만 명의 인명이 살상되고 초토화된 전쟁의 허허벌판에서 이렇게 풍요를 누리는 나라를 지구촌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이 만들어준 이 축복된 나라를 생각하면서 그분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찢어질 만큼 가난했던 역사에서 벗어나 이 나라의 풍요를 창출하기 위해서 애썼던 노동자들, 산업전사들, 그리고 도전의식으로 가득 찼던 기업인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권을 소중히 여기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생명을 걸었던 민주 투사들과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육의 치열한 현장에서 사랑을 쏟아 부으며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해서 애썼던 교육자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질병을 치유하고 이 땅의 기술 문명을 세워나갔던 의료인들과 과학기술자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자유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왔던 문화 예술인들, 체육인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를 북한의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고 평화를 일구어낸 국군 장병들과 군 지휘관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던 이 나라의 국가 공무원들을 기억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선배, 우리의 부모님들, 우리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더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와 성도들을 세워주시고 한국교회 125년이라는 세월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던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의 열정이 축복받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룩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했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쓴 함석헌이 8.15 해방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해방은 민족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요, 공산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요, 전체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요, 무정부주의자가 한 것도 아니다. 국내 사람의 손으로 된 것도 아니다. 해외지사의 손으로 된 것도 아니다. 이 해방의 원동력이 어떤 종교에서 나왔다 할 수도 없고, 어떤 교육에서 나왔다 할 수도 없다. 공정하게 사실을 사실로 보는 한 이것을 인적 노력에 돌릴 수는 없고, 부득이 하늘에 돌릴 수밖에는 없다.” 그러면서 그는 이 땅에 8.15 해방이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때 민중에 마음에서 나올 것은 감사밖에 없다. 이 감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첫 걸음이다.”

겸손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는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에게, 우리의 선배들에게, 우리의 교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없을 때보다 있을 때 감사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도 위기이지만 풍요로운 것도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가 다가올까요? 그것은 바로 오만의 위기, 타락의 위기, 불평과 원망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느헤미야 9:33)

우리가 악을 행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징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다시 겸손하게 자기의 민족을 세워나가는 일에 전념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세계 열방을 향한 제사장의 나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역사와 배고픔의 역사 속에서 여기까지 축복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겸손하게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은 오만한 생각입니다. 우리를 파괴시키는 것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이 자유를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나아가게 하옵소서.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나라를 사랑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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