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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리더십을 원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강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동계올림픽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월드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올림픽의 모토는 평화와 화합입니다. 전 세계인들이 이 축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한편 올림픽 표어는 라틴어로 ‘Citius’, ‘Altius’, ‘Fortius’입니다. 이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라는 뜻입니다. 즉 올림픽을 통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겠다는 의지입니다. 때문에 올림픽 선수들의 목표는 당연히 승리입니다.
여러분도 그동안 월드컵을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밤 12시면 러시아 월드컵 결승 경기가 진행됩니다. 누가 우승의 주역이 될까요? 프랑스일까요, 크로아티아일까요?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눈여겨보실 것입니다. 최종 우승팀에게는 약 3,800만 달러가 지급됩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430억 원입니다. 준우승 팀에게는 2,800만 달러가 지급되는데, 우리 돈으로 약 320억 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겠습니까? 16강부터 진행된 토너먼트(tournament) 방식은 승자만이 생존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더 강해야 하고, 더 많아야 하고, 더 높아야 한다는 생각이 인간 삶을 사로잡습니다. 스포츠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사도 그렇습니다. 강해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연약함의 리더십’입니다. 연약함이 리더십의 덕목이 될 수 있을까요? 지도자에게 과연 연약함이 필요할까요? 강함으로 밀어붙이는 지도자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고 추앙 받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힘들어 하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의 환경과 문제를 이해하는 지도자를 요청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며 접근하는 지도자에게 지도력을 부여하며 인정합니다.
최근 등장한 신조어 가운데 ‘갑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자기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 약자에게 오만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태도를 칭하는 말입니다. 때로는 언어적인 폭력을 가하고, 때로는 육체적인 폭력까지 가하면서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날의 삶의 현상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신앙의 선배인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이 받은 고난의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또한 자신은 연약한 존재며, 그간 어려운 고난의 길을 지나왔다고, 고통 가운데서 힘들어 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실 바울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는 목표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직 성공을 지향하며 다른 이보다 뛰어나길 열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더 큰 업적을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붙잡혀 달려왔던 의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랑도 강했고, 이를 위해 자기 절제와 훈련에 애썼던 인물입니다. 구체적으로 당대 가말리엘이라는 위대한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율법에도 조예가 깊었고, 그 율법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를 우월한 자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뀝니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 삶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가를 고백합니다. 또한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고 하며, 고난 목록을 열거합니다. 오늘 본문 중 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린도후서 11:23 중)
바울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 한계 상황이 묘사됩니다. 숱한 고통을 당했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어 24~25절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고린도후서 11:24~25 중)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하는데, 왜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때리게 했을까요? 구약성경에 따르면, 사십 번 가죽 채찍으로 맞으면 죽을 지경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하나 감한 매를 때림으로써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맞기를 무려 다섯 차례였습니다. 또한 세 번 태장으로 맞았는데, 이는 로마의 채찍으로 맞았다는 의미입니다. 로마 채찍에는 끝에 뾰족한 쇳조각이 달려 있습니다. 이 채찍으로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습니다. 이러한 고통도 세 번이나 당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돌로 맞았는데,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범한 자라는 죄목 아래 행해진 처벌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절해서 죽은 자처럼 끌려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도 당했습니다. 25~2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린도후서 11:25~26 중)
그야말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고난과 고초를 다 경험한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고난을 자처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는 사도 바울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자신의 몸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을 비난하던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나를 너무 비난하지 말라. 내 속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뒤따라가면서 얻게 된 고난의 흔적이 내 몸에 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직접 경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낮아지고 미련해지기를 자처했습니다. 자신의 온 마음과 몸을 바쳐 오직 주님만 드러나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2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1:27)
바울의 인생을 살펴보면 묻고 싶은 질문이 생깁니다. “당신은 어쩌다 이렇게 낮고 천한 자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이토록 별 볼 일 없는 연약한 자로 변모되기를 자처했습니까? 당신이 고난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 때문에 이런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십자가 복음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사랑한 교회를 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 귀결된 대답을 얻을 뿐입니다. 28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11:28)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바울의 모든 삶을 이끌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겸허히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 고난을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누가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얻어맞고 고통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두렵고 피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고난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겠다. 고난의 강도가 더해질수록 오히려 당당하게 주의 복음을 전할 것이다.” 교회를 염려하면서, 또 교회가 바로 세워지길 바라면서 그는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생명과 시간과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우리의 어머니 모습을 닮았습니다. 어머니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꿈과 자아실현의 비전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오직 자녀들을 위해 온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습니다. 당신 자신보다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 바울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29절입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고린도후서 11:29)
바울은 성도들의 연약함에 동참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당대의 거짓 지도자들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면서 자기 허세와 자랑에 몰두하는 거짓 지도자들이 상당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거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 자랑에 몰두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자랑하며 성도들의 것을 빼앗는 거짓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못된 지도자들,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지도자들이 이천 년 전에도 존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때문에 연약한 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질문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후서 11:20)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너희는 누구의 종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무릎 꿇을 수 있고, 우리가 높이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들이다. 그러니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못된 지도자들에게 속지 말라. 우리가 경배할 분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뿐이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성도들에게 그대로 고백합니다.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여러분이 필요하다. 여러분도 내가 필요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연약함을 누군가에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까? 아마 지나가는 사람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신뢰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나의 친구가 되고, 동역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어느새 사랑과 우정이 깃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 때문에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위대한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된 바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바울을 지혜로운 자로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사랑 때문에 연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바울을 능력 있는 자게 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처럼 교회를 사랑한 인물입니다.
연약함을 드러내고 표현한다는 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남편 되시는 분들은 아내에게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남편이기 때문에 항상 강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연약함을 아내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또 아내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남편에게 보여줄 때, 그 안에서 더욱 깊은 사랑이 피어나고 애정이 생기는 법입니다.
좋은 친구가 된다는 건,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동지가 된다는 건, 내 연약함을 표현하며 내게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 서로에게 유대감이 생기며, 진정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표현하며, 그들이 자신의 믿음의 동지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인한 연약함은 생명의 역사를 만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한 분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 하나님의 약한 모습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바로 ‘사랑’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시려다가도 그들이 회개하고 나오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또한 이 사랑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약해지셨습니까? 그분도 인간을 사랑할 때 약해지셨습니다. 오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엄격하셨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못된 짓을 하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때는 엄정하게 대하셨습니다. 하지만 민중에게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여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고, 어린아이들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자, 소외된 자들에게 똑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찾아가셔서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 됨을 전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모습을 그대로 닮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도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고난의 삶을 자처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낮아짐을 이렇게 자랑합니다. 30절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린도후서 11:30)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강한 것, 많은 것, 힘 있는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바울은 자기 자신 때문에 연약해진 게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연약해졌으며, 예수님을 위해 고난과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이 연약해진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어떤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모욕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하다가 비난을 감수해 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까? 예수님께 내 시간과 정성을 바쳐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 때문에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무력해지고 미련해지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생명의 역사를 만듭니다. 그런 이들이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의 역사는 강한 자의 역사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사랑으로 낮아지고,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 역사에 따뜻한 온기가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 속에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모습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연약함을 자처할 때 엄청난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보다 담대하게 나의 연약함을 표현하며 낮아지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 23 ~ 30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강한 리더십을 원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강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동계올림픽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월드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올림픽의 모토는 평화와 화합입니다. 전 세계인들이 이 축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한편 올림픽 표어는 라틴어로 ‘Citius’, ‘Altius’, ‘Fortius’입니다. 이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라는 뜻입니다. 즉 올림픽을 통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겠다는 의지입니다. 때문에 올림픽 선수들의 목표는 당연히 승리입니다.
여러분도 그동안 월드컵을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밤 12시면 러시아 월드컵 결승 경기가 진행됩니다. 누가 우승의 주역이 될까요? 프랑스일까요, 크로아티아일까요?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눈여겨보실 것입니다. 최종 우승팀에게는 약 3,800만 달러가 지급됩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430억 원입니다. 준우승 팀에게는 2,800만 달러가 지급되는데, 우리 돈으로 약 320억 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겠습니까? 16강부터 진행된 토너먼트(tournament) 방식은 승자만이 생존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더 강해야 하고, 더 많아야 하고, 더 높아야 한다는 생각이 인간 삶을 사로잡습니다. 스포츠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사도 그렇습니다. 강해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연약함의 리더십’입니다. 연약함이 리더십의 덕목이 될 수 있을까요? 지도자에게 과연 연약함이 필요할까요? 강함으로 밀어붙이는 지도자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고 추앙 받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힘들어 하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의 환경과 문제를 이해하는 지도자를 요청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며 접근하는 지도자에게 지도력을 부여하며 인정합니다.
최근 등장한 신조어 가운데 ‘갑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자기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 약자에게 오만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태도를 칭하는 말입니다. 때로는 언어적인 폭력을 가하고, 때로는 육체적인 폭력까지 가하면서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날의 삶의 현상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신앙의 선배인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이 받은 고난의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또한 자신은 연약한 존재며, 그간 어려운 고난의 길을 지나왔다고, 고통 가운데서 힘들어 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실 바울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는 목표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직 성공을 지향하며 다른 이보다 뛰어나길 열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더 큰 업적을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붙잡혀 달려왔던 의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랑도 강했고, 이를 위해 자기 절제와 훈련에 애썼던 인물입니다. 구체적으로 당대 가말리엘이라는 위대한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율법에도 조예가 깊었고, 그 율법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를 우월한 자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뀝니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 삶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가를 고백합니다. 또한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고 하며, 고난 목록을 열거합니다. 오늘 본문 중 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린도후서 11:23 중)
바울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 한계 상황이 묘사됩니다. 숱한 고통을 당했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어 24~25절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고린도후서 11:24~25 중)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하는데, 왜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때리게 했을까요? 구약성경에 따르면, 사십 번 가죽 채찍으로 맞으면 죽을 지경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하나 감한 매를 때림으로써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맞기를 무려 다섯 차례였습니다. 또한 세 번 태장으로 맞았는데, 이는 로마의 채찍으로 맞았다는 의미입니다. 로마 채찍에는 끝에 뾰족한 쇳조각이 달려 있습니다. 이 채찍으로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습니다. 이러한 고통도 세 번이나 당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돌로 맞았는데,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범한 자라는 죄목 아래 행해진 처벌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절해서 죽은 자처럼 끌려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도 당했습니다. 25~2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린도후서 11:25~26 중)
그야말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고난과 고초를 다 경험한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고난을 자처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는 사도 바울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자신의 몸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을 비난하던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나를 너무 비난하지 말라. 내 속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뒤따라가면서 얻게 된 고난의 흔적이 내 몸에 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직접 경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낮아지고 미련해지기를 자처했습니다. 자신의 온 마음과 몸을 바쳐 오직 주님만 드러나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2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1:27)
바울의 인생을 살펴보면 묻고 싶은 질문이 생깁니다. “당신은 어쩌다 이렇게 낮고 천한 자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이토록 별 볼 일 없는 연약한 자로 변모되기를 자처했습니까? 당신이 고난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 때문에 이런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십자가 복음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사랑한 교회를 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 귀결된 대답을 얻을 뿐입니다. 28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11:28)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바울의 모든 삶을 이끌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겸허히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 고난을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누가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얻어맞고 고통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두렵고 피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고난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겠다. 고난의 강도가 더해질수록 오히려 당당하게 주의 복음을 전할 것이다.” 교회를 염려하면서, 또 교회가 바로 세워지길 바라면서 그는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생명과 시간과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우리의 어머니 모습을 닮았습니다. 어머니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꿈과 자아실현의 비전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오직 자녀들을 위해 온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습니다. 당신 자신보다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 바울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29절입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고린도후서 11:29)
바울은 성도들의 연약함에 동참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당대의 거짓 지도자들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면서 자기 허세와 자랑에 몰두하는 거짓 지도자들이 상당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거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 자랑에 몰두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자랑하며 성도들의 것을 빼앗는 거짓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못된 지도자들,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지도자들이 이천 년 전에도 존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때문에 연약한 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질문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후서 11:20)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너희는 누구의 종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무릎 꿇을 수 있고, 우리가 높이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들이다. 그러니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못된 지도자들에게 속지 말라. 우리가 경배할 분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뿐이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성도들에게 그대로 고백합니다.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여러분이 필요하다. 여러분도 내가 필요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연약함을 누군가에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까? 아마 지나가는 사람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신뢰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나의 친구가 되고, 동역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어느새 사랑과 우정이 깃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 때문에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위대한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된 바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바울을 지혜로운 자로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사랑 때문에 연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바울을 능력 있는 자게 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처럼 교회를 사랑한 인물입니다.
연약함을 드러내고 표현한다는 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남편 되시는 분들은 아내에게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남편이기 때문에 항상 강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연약함을 아내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또 아내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남편에게 보여줄 때, 그 안에서 더욱 깊은 사랑이 피어나고 애정이 생기는 법입니다.
좋은 친구가 된다는 건,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동지가 된다는 건, 내 연약함을 표현하며 내게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 서로에게 유대감이 생기며, 진정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표현하며, 그들이 자신의 믿음의 동지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인한 연약함은 생명의 역사를 만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한 분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 하나님의 약한 모습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바로 ‘사랑’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시려다가도 그들이 회개하고 나오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또한 이 사랑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약해지셨습니까? 그분도 인간을 사랑할 때 약해지셨습니다. 오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엄격하셨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못된 짓을 하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때는 엄정하게 대하셨습니다. 하지만 민중에게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여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고, 어린아이들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자, 소외된 자들에게 똑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찾아가셔서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 됨을 전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모습을 그대로 닮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도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고난의 삶을 자처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낮아짐을 이렇게 자랑합니다. 30절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린도후서 11:30)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강한 것, 많은 것, 힘 있는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바울은 자기 자신 때문에 연약해진 게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연약해졌으며, 예수님을 위해 고난과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이 연약해진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어떤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모욕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하다가 비난을 감수해 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까? 예수님께 내 시간과 정성을 바쳐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 때문에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무력해지고 미련해지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생명의 역사를 만듭니다. 그런 이들이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의 역사는 강한 자의 역사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사랑으로 낮아지고,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 역사에 따뜻한 온기가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 속에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모습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연약함을 자처할 때 엄청난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보다 담대하게 나의 연약함을 표현하며 낮아지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2018년 7월 1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연약함의 리더십, 바울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51장, 25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고후11:23~3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7월 1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사람은 본질적으로 강한 것을 추구합니다.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의 표현은 라티어로 ‘Citius(더 빨리)’ ‘Altius(더 높이)’ ‘Fortius(더 힘차게, 더 강하게)’라는 표현을 지니고 있습니다. 땀 흘려 훈련한 선수들의 목표는 당연히 승리입니다. 과거 전쟁이란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역사였습니다. 그것을 평화적인 스포츠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새롭게 전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의 요약
연약함이란 리더십의 덕목이 될 수 있을까? 지도자에게 있어서 연약함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 고전11장에서 사도바울은 “나 연약했다고, 나 힘들었다고, 나 어떻게 그 어려운 고난의 길을 극복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목표지향적인 인물,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명문이었던 베냐민 지파, 율법으로 존경받던 바리새인 출신이고,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학벌 좋은 인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인물로 남을 율법에 의해 정죄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23~25절). 인간이 당할 수 있는 한계상황의 고난(매 맞음, 태장, 태형, 돌로 던짐을 당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바울 자신이 직접 경험했습니다(27절). 바울은 어떻게 낮고 천한 자로, 별 볼일 없는 연약한 자로 변모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런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받은 복음 때문에, 그가 사랑한 교회 때문입니다. 고난이 인격적으로는 두렵고 힘들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한 점을 두려움 없이 교회 성도들에게 토로했습니다. 자기 연약함을 표현함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속에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 교회를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자신의 연약함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신이 가진 연약함 때문에 믿음의 친구와 동지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마음이 약해지실까? 인간을 사랑하실 때입니다. 그렇게 못된 인간도 자기 죄를 고백하면, 그대로 인간을 용서하시고 끌어안으시며 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강한 자에게는 엄하셨지만, 연약한 이들에게는 오히려 부드럽게 다가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사도 바울도 사랑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낮아지고 연약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것이 무엇이 있을까? 예수님 때문에 교회, 세상에서 고난을 받은 것이 무엇일까? 약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도자, 열정을 갖고 세상을 바꿉니다. 사랑 때문에 무력해 지고, 사랑해 때문에 연약해 지고, 사랑 때문에 미련해 집니다. 연약함을 통하여 낮아짐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오늘 나에게 연약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연약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나눠보세요.
2. 성공지향적인 사도 바울은 어떻게 낮고 천한 자, 별 볼일 없는 연약한 자로 변화되었습니까?
오늘 나는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3. 하나님의 마음이 연약해질 때는 언제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강인 것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연약해질 수 있도록 서로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하신 긍휼의 마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영광을 받았지만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고 낮아진 경험들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아들과 딸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