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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을 넘어 우정에로!

잠언 27: 17

김지철 목사

2016.05.22

이혼하는 가정이 늘고 있습니다.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이날이 기념일이 된 데는 한 목사님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계기는 한 아이의 말이었습니다. 1995년 어린이날, 한 어린아이가 TV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그 아이는 이혼한 부부의 자녀였습니다. 리포터가 소원을 물으니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 사는 게 소원이에요.” 결국 부부의 날은 2003년 국회 청원을 거쳐서 2007년부터 대통령령으로 확정된 법정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5월 21일로 결정한 것은 5월이 가정의 달이고,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족해체, 부부해체를 예방하기 위한 기념일입니다.
요새는 중년과 노년에 들어서 이혼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합니다. 이혼 전문 변호사의 진단에 의하면, 남편의 은퇴 후나 자녀의 결혼 후에 부부간 갈등이 증폭되어 이혼까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들의 눈이나 체면 때문에 이혼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손주를 키운다는 명분으로 아내가 자녀의 집에 가 있기도 한답니다. 부부가 마주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것입니다. 또는 이혼 대신 각자 집을 마련하여 별거하는 것을 택한다고 합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2015년 기준으로 2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한 부부의 이혼이 무려 한 해에 3만 2천 6백 건에 이른다고 합니다. 10년 전인 2005년에 비하면 만 건 가까이 증가한 숫자입니다. 30년 이상 결혼을 유지한 부부가 이혼한 것은 2005년에는 4천 8백 건이었는데, 2015년에는 만 4백 건을 넘어 10년 사이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결혼한 지 5년 미만의 부부들이 이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황혼이혼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과거 가부장적인 시대에는 여성에게 희생과 인내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가 여성이 이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남편이 이혼 신청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점점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가정 안에 불신이 싹트고 있습니다.

2016년 5월 20일 신문에 가정의 어려움과 위기를 보여 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다음소프트’라는 회사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의심되는 대상 Top10’을 선정했습니다. 이번 분석에 활용된 빅데이터는 최근 3년 5개월 동안 국내 인터넷 블로그와 커뮤티니에 올라온 5억 3천만 건의 글에 대해서 ‘믿다’ 또는 ‘못 믿다’ 등의 연계 단어에 기반을 두고 추출한 정보라고 합니다.
의심되는 사람 1위는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는 Top10에 들지 않았습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아빠도 의심되는 사람 8위에 올랐습니다. 결혼한 한국 성인 남성이 아내와 자식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결과입니다. 의심되는 사람으로 친구도 있었고, 직원도 있었습니다. 4위는 엄마, 7위는 아들, 8위는 아빠, 9위은 가족이었습니다.
거짓말쟁이 Top10도 정했습니다. 1위는 친구, 2위는 엄마였습니다. 엄마가 거짓말쟁이인 이유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대학가면 예뻐지니까 지금은 신경 안 써도 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줄게” 등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3위는 남편이었습니다. 의심되는 사람에 이어 또 상위권에 속한 것입니다. 남편의 위기, 남자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 보험회사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를 보면, 생명보험을 들 때 남자들은 대부분 보험금의 수익자를 아내로 둔 반면, 아내들은 거의 대부분 자녀를 수익자로 지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오래 살기 때문에 아내의 경우 남편을 수익자로 두기가 어려워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들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수익자를 남편이 아닌 자녀로 둔 이유 중 가장 공통된 것은 “나 죽으면 보나마나, 남편은 재혼할 텐데 내 보험금은 애들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이 서로 신뢰할 수 있을까요? 특별히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신뢰지수가 높아질 수 있을까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언 27:17)

성경은 ‘친구가 되면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부부의 모습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부부가 젊을 때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살지만, 결혼생활의 연수가 흐르면 단순한 열정을 넘어서서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때 상대방의 얼굴에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정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열정 때문에 연애했고, 열정 때문에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 사랑의 열정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독점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 것이야.” 사랑에는 소유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헌신에 대한 열망입니다. “너에게 내 모든 것을 줄 거야. 내 목숨이라도 내놓을 거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결혼도 하고, 부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열정이 어느 날 식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웁니다. 생활이 안정됩니다. 그러면 점차 성적인 열정은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서서히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제는 “당신은 내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남편의 삶, 아내의 삶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유롭게 숨 쉴 공간을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상대가 자유롭게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역할임을 아는 것입니다.
또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치열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는 나를 위해서도 살아야 되겠다. 그동안은 남편(아내)을 위해서 살았지만, 나를 위한 공간과 미래에 대한 꿈도 꾸어야 되겠다’ 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젊을 때 가졌던 사랑의 열정을 넘어서 부부간에 새로운 관계 설정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때 바로 서로에게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자녀에게 삶의 방향과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 주고 그것을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는 유효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가 동일한 태도를 유지하면 자녀는 부모와 대화하기를 거절합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녀가 나이가 들면 부모는 자녀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친구란 무엇입니까? ‘듣는 사람’입니다. 만약 친구가 되려고 하면, 먼저 듣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친구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을 통해서 배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 즉 내 아들을 너희를 위해서 내놓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 하늘의 생명, 하늘에서 주시는 죄의 용서와 자유함, 지혜와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하신 것이 바로 우리와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나는 너의 친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여기에 나타난 ‘구속했다’는 것은 억압의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의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3:1)

예수님은 자기의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듣는 것에서 신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 입체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과 청각과 촉각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감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청각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납니까? 들음에서부터 납니다. 그러면 들음은 무엇으로 말미암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이것을 부부관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부부간의 신뢰는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아내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잘 듣기 시작할 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입니다. 아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 본 적 있습니까? 남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 본 적 있습니까?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부부 화합의 도는 ‘부창부수(夫唱婦隨)’입니다. 남편이 부르면, 아내가 따라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가부장적인 구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옛 부창부수를 이렇게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부르면 남편이 따라가는 부창부수(婦唱夫隨)로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바른 부부관계가 형성됩니다. 남편이 부르면 아내가 “예” 하고 따라가고, 때로는 아내가 부르면 남편이 “그래” 하고 따라갈 때 신뢰가 생깁니다. 이것이 들음의 축복입니다.
친구가 있다는 것은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친구를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남자들은 술을 마십니다. 남자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도 결국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건강한 친구, 좋은 친구란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혼자 계속 떠드는 사람과 또 만나고 싶습니까? 우리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속 이야기를 하나님께 터놓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억울함, 분노, 슬픔, 우울함을 하나님께 꺼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말이 없다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꺼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내 속마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가족 안에서 부부끼리, 부모와 자녀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도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들으려고 할 때 요구되는 자세가 있습니다. 먼저 상대방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잠깐의 기다림을 갖지 못하고 상대방을 향한 시선을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방 다른 곳을 보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이 사람이 나하고 이야기하기 싫구나’ 깨닫고는 입을 닫습니다.

듣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하십시오.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참 쉽지 않습니다. 저도 아내가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꾸 정답부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금방 해결될 텐데 왜 이렇게 힘들어하나?’ 그래서 1분도 듣지 못하고 금방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서운해하거나 화를 냅니다. “내가 정답을 몰라서 당신한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정답을 알고 있지만, 그냥 내 이야기를 듣고 힘들었겠네, 화났겠네 그렇게 말해 주면 안 돼요? 그 말이 듣고 싶은 거예요.”
자녀가 부모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도 동일합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 걸까요? 아니에요.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만나면 자꾸만 정답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아내의 얼굴이 빛나기를 원합니까? 남편의 얼굴이 빛나기를 원합니까? 내 자녀의 얼굴이 환해지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경청의 마음입니다. 듣기를 원할 때, 우리의 가정이 넉넉해지고, 가족들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감사가 샘솟고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해결부터 하려고 하지 마시고 우선 듣기부터 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내 아내와 남편의 말을 경청하고, 자녀의 말을 듣겠습니다. 제가 말을 멈추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그러면 상대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하고 내 얼굴에도 빛이 날 것입니다. 좋은 친구가 되어, 열정을 넘어서 경청의 친구가 되어 가정을 꾸려 나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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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7: 17

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이혼하는 가정이 늘고 있습니다.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이날이 기념일이 된 데는 한 목사님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계기는 한 아이의 말이었습니다. 1995년 어린이날, 한 어린아이가 TV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그 아이는 이혼한 부부의 자녀였습니다. 리포터가 소원을 물으니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 사는 게 소원이에요.” 결국 부부의 날은 2003년 국회 청원을 거쳐서 2007년부터 대통령령으로 확정된 법정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5월 21일로 결정한 것은 5월이 가정의 달이고,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족해체, 부부해체를 예방하기 위한 기념일입니다.
요새는 중년과 노년에 들어서 이혼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합니다. 이혼 전문 변호사의 진단에 의하면, 남편의 은퇴 후나 자녀의 결혼 후에 부부간 갈등이 증폭되어 이혼까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들의 눈이나 체면 때문에 이혼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손주를 키운다는 명분으로 아내가 자녀의 집에 가 있기도 한답니다. 부부가 마주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것입니다. 또는 이혼 대신 각자 집을 마련하여 별거하는 것을 택한다고 합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2015년 기준으로 2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한 부부의 이혼이 무려 한 해에 3만 2천 6백 건에 이른다고 합니다. 10년 전인 2005년에 비하면 만 건 가까이 증가한 숫자입니다. 30년 이상 결혼을 유지한 부부가 이혼한 것은 2005년에는 4천 8백 건이었는데, 2015년에는 만 4백 건을 넘어 10년 사이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결혼한 지 5년 미만의 부부들이 이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황혼이혼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과거 가부장적인 시대에는 여성에게 희생과 인내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가 여성이 이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남편이 이혼 신청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점점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가정 안에 불신이 싹트고 있습니다.

2016년 5월 20일 신문에 가정의 어려움과 위기를 보여 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다음소프트’라는 회사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의심되는 대상 Top10’을 선정했습니다. 이번 분석에 활용된 빅데이터는 최근 3년 5개월 동안 국내 인터넷 블로그와 커뮤티니에 올라온 5억 3천만 건의 글에 대해서 ‘믿다’ 또는 ‘못 믿다’ 등의 연계 단어에 기반을 두고 추출한 정보라고 합니다.
의심되는 사람 1위는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는 Top10에 들지 않았습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아빠도 의심되는 사람 8위에 올랐습니다. 결혼한 한국 성인 남성이 아내와 자식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결과입니다. 의심되는 사람으로 친구도 있었고, 직원도 있었습니다. 4위는 엄마, 7위는 아들, 8위는 아빠, 9위은 가족이었습니다.
거짓말쟁이 Top10도 정했습니다. 1위는 친구, 2위는 엄마였습니다. 엄마가 거짓말쟁이인 이유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대학가면 예뻐지니까 지금은 신경 안 써도 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줄게” 등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3위는 남편이었습니다. 의심되는 사람에 이어 또 상위권에 속한 것입니다. 남편의 위기, 남자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 보험회사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를 보면, 생명보험을 들 때 남자들은 대부분 보험금의 수익자를 아내로 둔 반면, 아내들은 거의 대부분 자녀를 수익자로 지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오래 살기 때문에 아내의 경우 남편을 수익자로 두기가 어려워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들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수익자를 남편이 아닌 자녀로 둔 이유 중 가장 공통된 것은 “나 죽으면 보나마나, 남편은 재혼할 텐데 내 보험금은 애들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이 서로 신뢰할 수 있을까요? 특별히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신뢰지수가 높아질 수 있을까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언 27:17)

성경은 ‘친구가 되면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부부의 모습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부부가 젊을 때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살지만, 결혼생활의 연수가 흐르면 단순한 열정을 넘어서서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때 상대방의 얼굴에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정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열정 때문에 연애했고, 열정 때문에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 사랑의 열정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독점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 것이야.” 사랑에는 소유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헌신에 대한 열망입니다. “너에게 내 모든 것을 줄 거야. 내 목숨이라도 내놓을 거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결혼도 하고, 부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열정이 어느 날 식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웁니다. 생활이 안정됩니다. 그러면 점차 성적인 열정은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서서히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제는 “당신은 내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남편의 삶, 아내의 삶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유롭게 숨 쉴 공간을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상대가 자유롭게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역할임을 아는 것입니다.
또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치열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는 나를 위해서도 살아야 되겠다. 그동안은 남편(아내)을 위해서 살았지만, 나를 위한 공간과 미래에 대한 꿈도 꾸어야 되겠다’ 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젊을 때 가졌던 사랑의 열정을 넘어서 부부간에 새로운 관계 설정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때 바로 서로에게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자녀에게 삶의 방향과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 주고 그것을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는 유효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가 동일한 태도를 유지하면 자녀는 부모와 대화하기를 거절합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녀가 나이가 들면 부모는 자녀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친구란 무엇입니까? ‘듣는 사람’입니다. 만약 친구가 되려고 하면, 먼저 듣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친구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을 통해서 배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 즉 내 아들을 너희를 위해서 내놓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 하늘의 생명, 하늘에서 주시는 죄의 용서와 자유함, 지혜와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하신 것이 바로 우리와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나는 너의 친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여기에 나타난 ‘구속했다’는 것은 억압의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의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3:1)

예수님은 자기의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듣는 것에서 신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 입체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과 청각과 촉각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감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청각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납니까? 들음에서부터 납니다. 그러면 들음은 무엇으로 말미암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이것을 부부관계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부부간의 신뢰는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아내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잘 듣기 시작할 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입니다. 아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 본 적 있습니까? 남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 본 적 있습니까?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부부 화합의 도는 ‘부창부수(夫唱婦隨)’입니다. 남편이 부르면, 아내가 따라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가부장적인 구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옛 부창부수를 이렇게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부르면 남편이 따라가는 부창부수(婦唱夫隨)로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바른 부부관계가 형성됩니다. 남편이 부르면 아내가 “예” 하고 따라가고, 때로는 아내가 부르면 남편이 “그래” 하고 따라갈 때 신뢰가 생깁니다. 이것이 들음의 축복입니다.
친구가 있다는 것은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친구를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남자들은 술을 마십니다. 남자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도 결국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건강한 친구, 좋은 친구란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혼자 계속 떠드는 사람과 또 만나고 싶습니까? 우리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속 이야기를 하나님께 터놓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억울함, 분노, 슬픔, 우울함을 하나님께 꺼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말이 없다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꺼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내 속마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가족 안에서 부부끼리, 부모와 자녀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도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들으려고 할 때 요구되는 자세가 있습니다. 먼저 상대방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잠깐의 기다림을 갖지 못하고 상대방을 향한 시선을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방 다른 곳을 보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이 사람이 나하고 이야기하기 싫구나’ 깨닫고는 입을 닫습니다.

듣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하십시오.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참 쉽지 않습니다. 저도 아내가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꾸 정답부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금방 해결될 텐데 왜 이렇게 힘들어하나?’ 그래서 1분도 듣지 못하고 금방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서운해하거나 화를 냅니다. “내가 정답을 몰라서 당신한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정답을 알고 있지만, 그냥 내 이야기를 듣고 힘들었겠네, 화났겠네 그렇게 말해 주면 안 돼요? 그 말이 듣고 싶은 거예요.”
자녀가 부모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도 동일합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 걸까요? 아니에요.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만나면 자꾸만 정답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아내의 얼굴이 빛나기를 원합니까? 남편의 얼굴이 빛나기를 원합니까? 내 자녀의 얼굴이 환해지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경청의 마음입니다. 듣기를 원할 때, 우리의 가정이 넉넉해지고, 가족들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감사가 샘솟고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해결부터 하려고 하지 마시고 우선 듣기부터 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내 아내와 남편의 말을 경청하고, 자녀의 말을 듣겠습니다. 제가 말을 멈추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그러면 상대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하고 내 얼굴에도 빛이 날 것입니다. 좋은 친구가 되어, 열정을 넘어서 경청의 친구가 되어 가정을 꾸려 나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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