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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일주일전에 일본에서 리히터 규모 9.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무려 27,000배에 이르는 강진이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거대한 해일인 쓰나미가 발생했습니다. 큰 배들이 일편주처럼 휩쓸려갔고 집들이 마치 모형 집처럼 무너졌습니다. 또한 수많은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물에 쓸려갔습니다. 이 재난으로 인해 수만 명의 인명피해가 났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동시에 원전의 핵 위험도 발생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방사능의 두려움 때문에 여기저기로 피신했던 것을 우리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어떤 나라입니까? 최고의 문명국이자 최대 경제대국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뛰어난 재난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서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자연의 재난 앞에 인간은 참으로 별 것 없구나.’ 라는 인간의 한계를 뼈아프게 느낀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충격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일본국민들이 하루빨리 용기를 얻고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일본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일본 땅에 새로운 영적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우리 삶에도 저렇게 거대한 재난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수많은 어려움이 쓰나미처럼 우리의 삶에 휘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살면서 두려움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포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phobia’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전을 찾아봤더니 ‘phobia’가 붙은 단어들이 수백 가지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공포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내가 왜 근심하고 있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다가 두려움의 대상 목록을 적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가에 대해서 하나씩 적다보니 어느새 1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공포증이 있지만, 때로는 마음 속 깊숙이 숨어 있는 공포증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 밖의 두려움도 마음속으로부터 느끼고 있습니다. 자연현상 혹은 천재지변입니다. 지진, 태풍, 홍수, 해일, 기근, 역병,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구제역 또는 조류독감, 이런 것들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입니다. 또한 정치, 종교, 이념적인 갈등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북한의 정권과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고상하게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아가는 독재자들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장소와 환경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곳을 못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씩씩하고 용기가 있는 사람 같은데 높은 곳에만 올라가자고 하면 두 손을 들고 못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넓은 광장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폐쇄된 공간에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이 있을 때에는 이야기를 그렇게 잘하다가도 무대 위에 나가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무대공포증으로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이런 것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몸이 아픈 것, 즉 질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감기몸살만 걸려도 마음속에 두려움이 덜컥 나타납니다. 자동차를 몰면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 중에 하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귀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존재도 귀합니다만, 본래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사람에게 말을 걸다가 퇴짜당하면 어떻게 할까? 대화를 하다가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까? 인간관계는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까? 이런 수많은 두려움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들을 하나하나 적어본다면 우리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두려움들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습니다. 더욱 근본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본질적인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정신적 두려움이고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양심에 위반된 일을 하면 가슴이 콩닥콩닥 거립니다. 이것은 좋은 두려움입니다. 만약 양심에 위반되는 일을 하고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썩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다움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참답게 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를 늘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 속에 그대로 자기를 방치해두면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서 침범해오기 시작합니다. 내가 갖고 있던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두려움을 방치해두면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두려워하는 자를 좋아합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더 큰 두려움으로 사람을 몰아갑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이용해서 우리를 공포증환자로 만듭니다. 우리의 두려움을 확대시킵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우리를 몰아칩니다. 때로는 공갈하고 협박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우리를 몰아가면서 우리를 사탄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부터 계속된 사탄의 장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때 긍휼히 여기십니다. 마귀는 그것을 조롱하고 조소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에게 평안과 용기를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넘어가는 영적인 건강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생기는 두려움이란 괜찮은 것입니다. 인간이라서 생기는 두려움이기 때문에 너무 공포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려움을 사탄에게 주면 어두운 길목이 되지만, 이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면 빛의 역사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육체의 건강을 기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건강지수는 의사를 통해서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제 생각에는 두 가지만 있으면 기본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식사를 할 때 밥을 보면 먹고 싶은 사람, 밥맛이 도는 사람,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라 맛있게 먹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밥맛이 있습니까? 밥맛이 없으면 무언가 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을 하려고 하면 몸이 쑤시고 아픈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욕이 생기고 활력이 생겨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는 어떨까요? 제 생각에는 영적으로도 2가지가 확실하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첫째는 육체에 밥맛이 있듯이 영혼에도 밥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영혼의 밥이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아 좋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참 기쁘다.’라고 느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내 영혼의 즐거움이 된다면 그 영혼은 건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을 때 내 마음이 기쁘면 영혼의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밥맛이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아, 감사하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고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영혼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뜨면 불평이 나오고 남을 탓하게 되고 마음속에 미움이 생기고 이것을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워야 속이 시원하다면 그의 영혼은 병들어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영혼이 즐거워하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합니다.” 라는 영혼의 즐거운 고백이 내안에 있습니까? 물론 영혼의 건강지수를 여러 가지로 판단해야 하겠습니다만 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래도 우리의 영혼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으면 우리의 영혼은 지금 문제가 있고 병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두려움을 이겨내십시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함을 넘어서려고 하면 먼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삶인가? 나의 삶에 어떤 두려움이 있는가? 얼마나 수많은 사탄의 공격이 우리를 향해 있는 현장인가를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 상황의 위기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적건강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물음표와 동시에 느낌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란 이 말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두려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에게 “난 아무도 안 두려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 시인은 참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것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왕이 되고나서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고통을 겪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까지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늘 마음속에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자기의 빛이 되시고 자기의 구원이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수많은 대적들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갔던 것입니다. 2절과 3절의 말씀은 그 위기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우리들에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편 27:2~3)
그는 말합니다. “악인들이, 대적들이, 원수들이, 군대가, 전쟁이 일어나도 나는 태연하리라.” “I’m confident!” 나는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게 서있겠다는 표현입니다. 나를 넘어뜨리려는 대적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달려들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일들을 이겨나가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을 대적하십시오
우리는 사탄을 전근대적이고 신화적인 언어로 생각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활동하는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도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인간의 마음을 붙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낙심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미움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좌절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좌절과 더 큰 미움과 더 큰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몰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베드로전서 5:8~9上)
사탄은 대적해야 할 존재입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대적합니까?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사탄아, 너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패배했다! 사탄아, 그리스도의 보혈로 네 능력은 사라졌다! 네가 사람들에게 주는 두려움과 절망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4)
이 두려움을 이겨나가는 것과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빛이요 내 인생의 생명인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믿음의 역사를 얻게 됩니다.
저는 지난 1월에 병원에 있으면서 오랜만에 위 내시경 검사를 했습니다. 약 23~4년 만에 한 내시경검사입니다. 의사선생님이 매번 저보고 위 내시경 검사를 하라고 하지만 싫다고 하지 않았었습니다. 밥 잘 먹고 소화도 잘 되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하겠느냐고 했지요. 하지만 속으로는 찜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검사를 하고 나서 괜찮다는 판정을 받으니 마음속에 평안함을 생겼습니다.
영적인 것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이것 좀 들어주세요. 다른 것은 간섭하지 마세요.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런데 이 문제는 해결이 잘 안 되네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만을 요구하고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더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불신앙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네 문제를 내게 맡기지 말고 너 자신을 내게 맡겨라! 네가 갖고 있는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오지 말고 너의 전체를 맡겨보아라! 그러면 네 문제까지 내가 해결해주겠다.”
그래서 두려움이 있으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 두려움이 하나도 없으면 ‘내가 죽었구나.’ 라고 생각해도 옳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낄 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 문제를 맡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일 큰 것은 무엇일까요?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아시고 그것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내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깨어 기도하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나가게 하옵소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세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27: 1 ~ 6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일주일전에 일본에서 리히터 규모 9.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무려 27,000배에 이르는 강진이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거대한 해일인 쓰나미가 발생했습니다. 큰 배들이 일편주처럼 휩쓸려갔고 집들이 마치 모형 집처럼 무너졌습니다. 또한 수많은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물에 쓸려갔습니다. 이 재난으로 인해 수만 명의 인명피해가 났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동시에 원전의 핵 위험도 발생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방사능의 두려움 때문에 여기저기로 피신했던 것을 우리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어떤 나라입니까? 최고의 문명국이자 최대 경제대국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뛰어난 재난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서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자연의 재난 앞에 인간은 참으로 별 것 없구나.’ 라는 인간의 한계를 뼈아프게 느낀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충격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일본국민들이 하루빨리 용기를 얻고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일본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일본 땅에 새로운 영적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우리 삶에도 저렇게 거대한 재난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수많은 어려움이 쓰나미처럼 우리의 삶에 휘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살면서 두려움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포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phobia’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전을 찾아봤더니 ‘phobia’가 붙은 단어들이 수백 가지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공포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내가 왜 근심하고 있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다가 두려움의 대상 목록을 적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가에 대해서 하나씩 적다보니 어느새 1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공포증이 있지만, 때로는 마음 속 깊숙이 숨어 있는 공포증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 밖의 두려움도 마음속으로부터 느끼고 있습니다. 자연현상 혹은 천재지변입니다. 지진, 태풍, 홍수, 해일, 기근, 역병,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구제역 또는 조류독감, 이런 것들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입니다. 또한 정치, 종교, 이념적인 갈등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북한의 정권과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고상하게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아가는 독재자들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장소와 환경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곳을 못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씩씩하고 용기가 있는 사람 같은데 높은 곳에만 올라가자고 하면 두 손을 들고 못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넓은 광장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폐쇄된 공간에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이 있을 때에는 이야기를 그렇게 잘하다가도 무대 위에 나가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무대공포증으로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이런 것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몸이 아픈 것, 즉 질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감기몸살만 걸려도 마음속에 두려움이 덜컥 나타납니다. 자동차를 몰면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 중에 하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귀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존재도 귀합니다만, 본래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사람에게 말을 걸다가 퇴짜당하면 어떻게 할까? 대화를 하다가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까? 인간관계는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까? 이런 수많은 두려움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들을 하나하나 적어본다면 우리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두려움들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습니다. 더욱 근본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본질적인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정신적 두려움이고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양심에 위반된 일을 하면 가슴이 콩닥콩닥 거립니다. 이것은 좋은 두려움입니다. 만약 양심에 위반되는 일을 하고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썩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다움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참답게 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를 늘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 속에 그대로 자기를 방치해두면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서 침범해오기 시작합니다. 내가 갖고 있던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두려움을 방치해두면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두려워하는 자를 좋아합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더 큰 두려움으로 사람을 몰아갑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이용해서 우리를 공포증환자로 만듭니다. 우리의 두려움을 확대시킵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우리를 몰아칩니다. 때로는 공갈하고 협박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우리를 몰아가면서 우리를 사탄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부터 계속된 사탄의 장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때 긍휼히 여기십니다. 마귀는 그것을 조롱하고 조소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에게 평안과 용기를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넘어가는 영적인 건강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생기는 두려움이란 괜찮은 것입니다. 인간이라서 생기는 두려움이기 때문에 너무 공포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려움을 사탄에게 주면 어두운 길목이 되지만, 이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면 빛의 역사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육체의 건강을 기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건강지수는 의사를 통해서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제 생각에는 두 가지만 있으면 기본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식사를 할 때 밥을 보면 먹고 싶은 사람, 밥맛이 도는 사람,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라 맛있게 먹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밥맛이 있습니까? 밥맛이 없으면 무언가 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을 하려고 하면 몸이 쑤시고 아픈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욕이 생기고 활력이 생겨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는 어떨까요? 제 생각에는 영적으로도 2가지가 확실하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첫째는 육체에 밥맛이 있듯이 영혼에도 밥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영혼의 밥이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아 좋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참 기쁘다.’라고 느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내 영혼의 즐거움이 된다면 그 영혼은 건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을 때 내 마음이 기쁘면 영혼의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밥맛이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아, 감사하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고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영혼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뜨면 불평이 나오고 남을 탓하게 되고 마음속에 미움이 생기고 이것을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워야 속이 시원하다면 그의 영혼은 병들어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영혼이 즐거워하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합니다.” 라는 영혼의 즐거운 고백이 내안에 있습니까? 물론 영혼의 건강지수를 여러 가지로 판단해야 하겠습니다만 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래도 우리의 영혼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으면 우리의 영혼은 지금 문제가 있고 병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두려움을 이겨내십시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함을 넘어서려고 하면 먼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삶인가? 나의 삶에 어떤 두려움이 있는가? 얼마나 수많은 사탄의 공격이 우리를 향해 있는 현장인가를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 상황의 위기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적건강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물음표와 동시에 느낌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란 이 말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두려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에게 “난 아무도 안 두려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 시인은 참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것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왕이 되고나서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고통을 겪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까지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늘 마음속에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자기의 빛이 되시고 자기의 구원이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수많은 대적들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갔던 것입니다. 2절과 3절의 말씀은 그 위기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우리들에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편 27:2~3)
그는 말합니다. “악인들이, 대적들이, 원수들이, 군대가, 전쟁이 일어나도 나는 태연하리라.” “I’m confident!” 나는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게 서있겠다는 표현입니다. 나를 넘어뜨리려는 대적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달려들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일들을 이겨나가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을 대적하십시오
우리는 사탄을 전근대적이고 신화적인 언어로 생각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활동하는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도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인간의 마음을 붙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낙심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미움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좌절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좌절과 더 큰 미움과 더 큰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몰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베드로전서 5:8~9上)
사탄은 대적해야 할 존재입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대적합니까?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사탄아, 너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패배했다! 사탄아, 그리스도의 보혈로 네 능력은 사라졌다! 네가 사람들에게 주는 두려움과 절망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4)
이 두려움을 이겨나가는 것과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빛이요 내 인생의 생명인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믿음의 역사를 얻게 됩니다.
저는 지난 1월에 병원에 있으면서 오랜만에 위 내시경 검사를 했습니다. 약 23~4년 만에 한 내시경검사입니다. 의사선생님이 매번 저보고 위 내시경 검사를 하라고 하지만 싫다고 하지 않았었습니다. 밥 잘 먹고 소화도 잘 되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하겠느냐고 했지요. 하지만 속으로는 찜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검사를 하고 나서 괜찮다는 판정을 받으니 마음속에 평안함을 생겼습니다.
영적인 것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이것 좀 들어주세요. 다른 것은 간섭하지 마세요.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런데 이 문제는 해결이 잘 안 되네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만을 요구하고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더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불신앙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네 문제를 내게 맡기지 말고 너 자신을 내게 맡겨라! 네가 갖고 있는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오지 말고 너의 전체를 맡겨보아라! 그러면 네 문제까지 내가 해결해주겠다.”
그래서 두려움이 있으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 두려움이 하나도 없으면 ‘내가 죽었구나.’ 라고 생각해도 옳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낄 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 문제를 맡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일 큰 것은 무엇일까요?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아시고 그것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내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깨어 기도하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나가게 하옵소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세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