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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새 시대를 기대하던 자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흔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20대 청년이었을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일 나이가 어렸던 요한은 10대였을 것 같기도 하고, 처자식을 거느렸던 베드로는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식수준은 결코 높지 않았습니다. 유대 율법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정도의 평범한 종교지식, 평범한 삶의 지식을 갖고 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직업과 삶의 배경은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말씀을 증거하시며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어부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그러했고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벳세다 출신의 빌립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두에게는 한 가지 강력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한계에 부딪힌 삶을 변화시킬 메시아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던 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모든 열정을 쏟아부으며 예수님을 쫓아갈 수 있었습니다.
호기심은 질문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등장하는 빌립도 이러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호기심과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영적인 호기심이 가득한 인물이었습니다. 호기심이란 무엇일까요?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관심이며 욕구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호기심이 사라진다면, 그 순간 우리는 삶에 대해 싫증을 느낄 것입니다. 무료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호기심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동물 세계의 호기심이란 오직 먹을 것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먹는 것을 향해 모든 것을 집중하고 그것을 향해서 내달리는 것이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이러한 육체적인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을 뛰어넘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한 호기심, 생명에 대한 호기심, 자유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러한 호기심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내 속에 질문이 있으면 호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질문이 있다는 것은 아직 배우고 싶고 더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자연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 자연 과학자가 됩니다. 돈과 재물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 근로자나, 금융가가 되고, 사업을 시작하게도 됩니다. 생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 의료종사자가 됩니다. 그림과 조각, 소리와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호기심입니다. 바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호기심, 진리를 찾는 호기심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종 ‘구도자’라는 말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영적인 호기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리를 향해서 더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마음의 욕구와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영적인 호기심을 설명하자면, 나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또 앞으로 어떤 것을 위해 살아야 될는지를 묻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인 호기심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보통 육하원칙을 갖고 질문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에 대해 질문하라는 것입니다. 앞에 다섯 가지 질문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질문의 의미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노력하고 땀을 흘려서 인생의 목표를 성취한 것처럼 보여도,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으면 내가 수고하여 가진 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을 했어도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은 모든 질문의 종착역이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빌립은 이 질문을 합니다. 궁극적인 하나님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도 빌립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우리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를 택하신 후,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빌립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놀랍게도 빌립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빌립의 영적 호기심이 진정한 호기심인지 시험해 보려고 하셨습니다. 호기심이 호기심으로만 끝나는지, 아니면 호기심이 질문으로 바뀔 수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찾기를 원하는지, 대답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향해 결단할 수 있는지, 결단할 뿐만 아니라 행동하고 헌신할 수 있는지 예수님은 보고 싶으셨습니다.
빌립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 위해 다시 성경을 읽어보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이야기가 들어있는 요한복음 6장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6:6)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려 하시면서 먼저 제자들의 동태를 살피셨습니다. 여기에 두 제자가 나옵니다. 한 명은 빌립이고, 다른 한 명은 안드레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의 시험은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시험(test)입니다.
‘시험’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중·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시험만 없으면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 만큼 우리에게는 시험에 대한 억압된 기억이 있습니다. 여전히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시험 때문에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시험 때문에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세상 시험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시험은 합격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떨어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너는 안 돼. 너는 자격이 없어.”라고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두 번 정도 떨어진 경험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시험들을 지나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험은 세상 시험과는 다릅니다.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우기 위한 시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를 되묻게 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이 상태를 만족하는지, 아니면 성장과 성숙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가야 될는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쓰실 만한 존재로 바꿔 주신다는 것입니다.
좋은 호기심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님은 빌립을 세 번에 걸쳐서 시험하십니다. 첫째 시험은, 빌립이 지녔던 호기심이 결단과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좋은 호기심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쁜 호기심이야 그것에 대한 관심을 멈춰서면 됩니다. 그러나 좋은 호기심은 내 삶의 무언가를 내놓아야 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진리에 대한 질문, 생명에 대한 질문, 자유에 대한 질문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온 인류가 정성을 쏟고, 때로는 생명을 걸면서까지 좋은 호기심을 지키려 애써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빌립에게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 놀랍게도 빌립은 다른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는 감이 그에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장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이야기한 그 메시아를 자신이 만났다고 말입니다. 본래 헬라어 성경에는 “내가 찾았다(I have found!)!”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갈릴리 나사렛 예수’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말합니다. “나사렛 같은 그런 촌 동네에서 선한 것이 난 것을 네가 봤느냐?” 이때 빌립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직접 와서 봐.”
빌립은 전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 본 것, 옳다고 여기는 것을 혼자만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이에게 다가가 너도 함께 참여하면 좋겠다는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은 일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알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보통 다음과 같은 변명을 합니다. 첫 번째, 좋은 것을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함께 나누라는 복음의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믿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깊은 깨달음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고민과 고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기에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들어야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어야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들어야 예수님께 인생을 걸든지 말든지 결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스스로의 모습을 보니 전혀 예수님과 닮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때문에 친구들이 “너는 예수 믿고 그것밖에 못 되었냐?” 지적할까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보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빌립을 보십시오.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한 번 와서 예배 드려보라는 것입니다. 네 손으로 말씀을 펴서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담겨진 예수님의 인격을 네가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네 인생을 맡겨도 괜찮은지 직접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현실을 뛰어넘는 믿음을 바라십니다.
빌립이 받은 두 번째 시험은 좀 전에 읽은 오병이어 사건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요한복음 6:5)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씀만 듣고 있는 것이 마음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려고 하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직접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빌립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빌립을 시험하려 하셨을까요? 빌립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보이는 것에 민감했습니다. 만지는 것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숫자에 강했습니다. 무엇보다 돈을 계산하는 데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을 듣자마자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대충 몇 명이 앉아 있는지, 그들을 다 먹이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금방 계산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볼 때는 한 200데나리온이 필요해요.” 그것은 근로자가 약 일 년 동안 일하고 받는 봉급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정확한 분석이었고, 명백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속에는 어떤 마음이 들어 있을까요? ‘예수님, 이걸 어떻게 합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못 하실 걸요?’라는 부정과 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주의자 빌립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과연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문제 제기는 있으되 해답이 없습니다. 분석은 날카롭고 뛰어나지만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적극적인 응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 또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바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어디에 먹을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를 가진 어린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얘야, 우리 예수님에게로 가자!” 안드레는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려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속은 불안합니다. “예수님, 여기 떡이 있기는 한데,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지 않나요? 하지만 일단 제가 가져왔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빌립아, 너도 안드레가 갖고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없겠느냐. 네가 가진 믿음은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다.” 지레짐작하여 실망하고, 당황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시도조차 하지 않는 비관적 현실주의에서 머물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을 해라.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벽이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그때도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아라. 숨을 쉴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지 않느냐. 여전히 너에게 있는 그 작은 것을 가지고 한 번 시도해 보아라.” 예수님은 빌립에게 안드레의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 번째 시험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 도마의 질문에 이어서 나타나는 빌립의 요구입니다. 그는 어떤 요구를 했습니까?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한복음 14:8)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당혹스럽게 하기 위한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빌립은 유대인이라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보게 해 주세요. 만지게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배반하지 않겠어요!” 가장 원초적이고 기초적인 우리의 욕구입니다.
믿음의 출발은 ‘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초보적인 믿음이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물을 볼 때는 그렇습니다. 이 세상 자연만물을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격을 볼 때는, 영적인 세계를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듣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압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인생을 어떻게 살려고 하는지, 과거에 어떤 아픔을 갖고 있는지,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격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보이는 세계 속에 신앙을 머물게 하지 말고, 보이는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면, 이미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기를 원하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4:9)
보이는 것에 믿음과 생각을 제한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줄기가 돋고 가지가 자라서 새들이 깃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시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각적 감각 속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계산되어지는 것에 모든 것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세계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깨닫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영적 호기심을 사모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우리의 호기심은 어디에 멈춰서 있습니까? 호기심을 가지면 질문합니까? 그 질문에 대답이 있기를 열망합니까? 대답이 말씀으로 주어지면 그 말씀에 내 생애를 드리고 싶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알도록 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라. 그러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알려주겠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4: 8 ~ 12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은 새 시대를 기대하던 자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흔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20대 청년이었을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일 나이가 어렸던 요한은 10대였을 것 같기도 하고, 처자식을 거느렸던 베드로는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식수준은 결코 높지 않았습니다. 유대 율법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정도의 평범한 종교지식, 평범한 삶의 지식을 갖고 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직업과 삶의 배경은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말씀을 증거하시며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어부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그러했고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벳세다 출신의 빌립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두에게는 한 가지 강력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한계에 부딪힌 삶을 변화시킬 메시아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던 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모든 열정을 쏟아부으며 예수님을 쫓아갈 수 있었습니다.
호기심은 질문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등장하는 빌립도 이러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호기심과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영적인 호기심이 가득한 인물이었습니다. 호기심이란 무엇일까요?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관심이며 욕구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호기심이 사라진다면, 그 순간 우리는 삶에 대해 싫증을 느낄 것입니다. 무료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호기심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동물 세계의 호기심이란 오직 먹을 것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먹는 것을 향해 모든 것을 집중하고 그것을 향해서 내달리는 것이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이러한 육체적인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을 뛰어넘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한 호기심, 생명에 대한 호기심, 자유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러한 호기심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내 속에 질문이 있으면 호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질문이 있다는 것은 아직 배우고 싶고 더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자연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 자연 과학자가 됩니다. 돈과 재물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 근로자나, 금융가가 되고, 사업을 시작하게도 됩니다. 생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 의료종사자가 됩니다. 그림과 조각, 소리와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면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호기심입니다. 바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호기심, 진리를 찾는 호기심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종 ‘구도자’라는 말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영적인 호기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리를 향해서 더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마음의 욕구와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영적인 호기심을 설명하자면, 나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또 앞으로 어떤 것을 위해 살아야 될는지를 묻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인 호기심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보통 육하원칙을 갖고 질문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에 대해 질문하라는 것입니다. 앞에 다섯 가지 질문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질문의 의미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노력하고 땀을 흘려서 인생의 목표를 성취한 것처럼 보여도,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으면 내가 수고하여 가진 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을 했어도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은 모든 질문의 종착역이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빌립은 이 질문을 합니다. 궁극적인 하나님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도 빌립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우리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를 택하신 후,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빌립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놀랍게도 빌립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빌립의 영적 호기심이 진정한 호기심인지 시험해 보려고 하셨습니다. 호기심이 호기심으로만 끝나는지, 아니면 호기심이 질문으로 바뀔 수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찾기를 원하는지, 대답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향해 결단할 수 있는지, 결단할 뿐만 아니라 행동하고 헌신할 수 있는지 예수님은 보고 싶으셨습니다.
빌립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 위해 다시 성경을 읽어보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이야기가 들어있는 요한복음 6장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6:6)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려 하시면서 먼저 제자들의 동태를 살피셨습니다. 여기에 두 제자가 나옵니다. 한 명은 빌립이고, 다른 한 명은 안드레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의 시험은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시험(test)입니다.
‘시험’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중·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시험만 없으면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 만큼 우리에게는 시험에 대한 억압된 기억이 있습니다. 여전히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시험 때문에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시험 때문에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세상 시험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시험은 합격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떨어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너는 안 돼. 너는 자격이 없어.”라고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두 번 정도 떨어진 경험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시험들을 지나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험은 세상 시험과는 다릅니다.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우기 위한 시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를 되묻게 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이 상태를 만족하는지, 아니면 성장과 성숙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가야 될는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쓰실 만한 존재로 바꿔 주신다는 것입니다.
좋은 호기심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님은 빌립을 세 번에 걸쳐서 시험하십니다. 첫째 시험은, 빌립이 지녔던 호기심이 결단과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좋은 호기심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쁜 호기심이야 그것에 대한 관심을 멈춰서면 됩니다. 그러나 좋은 호기심은 내 삶의 무언가를 내놓아야 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진리에 대한 질문, 생명에 대한 질문, 자유에 대한 질문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온 인류가 정성을 쏟고, 때로는 생명을 걸면서까지 좋은 호기심을 지키려 애써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빌립에게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 놀랍게도 빌립은 다른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는 감이 그에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장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이야기한 그 메시아를 자신이 만났다고 말입니다. 본래 헬라어 성경에는 “내가 찾았다(I have found!)!”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갈릴리 나사렛 예수’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말합니다. “나사렛 같은 그런 촌 동네에서 선한 것이 난 것을 네가 봤느냐?” 이때 빌립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직접 와서 봐.”
빌립은 전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 본 것, 옳다고 여기는 것을 혼자만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이에게 다가가 너도 함께 참여하면 좋겠다는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은 일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알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보통 다음과 같은 변명을 합니다. 첫 번째, 좋은 것을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함께 나누라는 복음의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믿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깊은 깨달음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고민과 고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기에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들어야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어야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들어야 예수님께 인생을 걸든지 말든지 결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스스로의 모습을 보니 전혀 예수님과 닮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때문에 친구들이 “너는 예수 믿고 그것밖에 못 되었냐?” 지적할까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보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빌립을 보십시오.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한 번 와서 예배 드려보라는 것입니다. 네 손으로 말씀을 펴서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담겨진 예수님의 인격을 네가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네 인생을 맡겨도 괜찮은지 직접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현실을 뛰어넘는 믿음을 바라십니다.
빌립이 받은 두 번째 시험은 좀 전에 읽은 오병이어 사건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요한복음 6:5)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씀만 듣고 있는 것이 마음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려고 하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직접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빌립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빌립을 시험하려 하셨을까요? 빌립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보이는 것에 민감했습니다. 만지는 것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숫자에 강했습니다. 무엇보다 돈을 계산하는 데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을 듣자마자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대충 몇 명이 앉아 있는지, 그들을 다 먹이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금방 계산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볼 때는 한 200데나리온이 필요해요.” 그것은 근로자가 약 일 년 동안 일하고 받는 봉급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정확한 분석이었고, 명백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속에는 어떤 마음이 들어 있을까요? ‘예수님, 이걸 어떻게 합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못 하실 걸요?’라는 부정과 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주의자 빌립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과연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문제 제기는 있으되 해답이 없습니다. 분석은 날카롭고 뛰어나지만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적극적인 응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 또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바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어디에 먹을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를 가진 어린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얘야, 우리 예수님에게로 가자!” 안드레는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려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속은 불안합니다. “예수님, 여기 떡이 있기는 한데,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지 않나요? 하지만 일단 제가 가져왔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빌립아, 너도 안드레가 갖고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없겠느냐. 네가 가진 믿음은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다.” 지레짐작하여 실망하고, 당황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시도조차 하지 않는 비관적 현실주의에서 머물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을 해라.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벽이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그때도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아라. 숨을 쉴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지 않느냐. 여전히 너에게 있는 그 작은 것을 가지고 한 번 시도해 보아라.” 예수님은 빌립에게 안드레의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 번째 시험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 도마의 질문에 이어서 나타나는 빌립의 요구입니다. 그는 어떤 요구를 했습니까?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한복음 14:8)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당혹스럽게 하기 위한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빌립은 유대인이라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보게 해 주세요. 만지게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배반하지 않겠어요!” 가장 원초적이고 기초적인 우리의 욕구입니다.
믿음의 출발은 ‘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초보적인 믿음이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물을 볼 때는 그렇습니다. 이 세상 자연만물을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격을 볼 때는, 영적인 세계를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듣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압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인생을 어떻게 살려고 하는지, 과거에 어떤 아픔을 갖고 있는지,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격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보이는 세계 속에 신앙을 머물게 하지 말고, 보이는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면, 이미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기를 원하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4:9)
보이는 것에 믿음과 생각을 제한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줄기가 돋고 가지가 자라서 새들이 깃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시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각적 감각 속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계산되어지는 것에 모든 것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세계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깨닫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영적 호기심을 사모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우리의 호기심은 어디에 멈춰서 있습니까? 호기심을 가지면 질문합니까? 그 질문에 대답이 있기를 열망합니까? 대답이 말씀으로 주어지면 그 말씀에 내 생애를 드리고 싶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알도록 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라. 그러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알려주겠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