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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라는 이름의 도피처
<예레미야는 한탄스러웠던 유다의 상황을 마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레미야서입니다. 예레미야서는 제가 설교하면서 많이 소개하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 말기,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본래는 매우 내성적이고 여린 성품이었지만, 민족의 멸망을 선포해야 하는 가혹한 사명을 받아들였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간절히 전하였지만, 동족들에게 거부당하며 핍박도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했기에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가올 심판의 엄중함을 몸소 보여 주라고 하시면서 결혼도 하지 말고, 자녀도 낳지 말고, 집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참으로 슬픈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처음 예언을 시작했던 시기는 유다 왕 요시야의 치세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왕이 다스린 지 13년이 되던 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사역을 시작합니다. 성경은 그의 사역의 시작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렘 1:2)
그가 사역을 시작했던 시기는 선한 왕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요시야왕은 유다의 왕 중에서도 드물게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선한 왕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이 두 사람의 개혁 시기가 거의 일치하며, 그들의 활동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 (대하 34:3)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와 요시야왕의 개혁 활동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요시야가 바알의 제단을 헐고 제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없애며 아세라의 목상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 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영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혁의 시간은 잠시였습니다. 요시야가 애굽 왕 느고에게 대항하던 도중,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서 모든 개혁의 활동도 멈추어 서게 됩니다. 이를 슬퍼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불렀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대하 35:25)
요시야는 유다의 마지막 영적 보루와도 같은 왕이었기에, 예레미야가 단순히 그의 죽음만을 슬퍼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요시야의 죽음과 함께 다가올 유다의 멸망의 길을 슬퍼했습니다. 이 애가는 성경에 나오는 예레미야애가와는 다른 책입니다. 지금은 사라져서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안에는 예레미야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예레미야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참으로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들이었습니다. 요시야 이후의 왕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던 왕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아하스(3개월), 여호야김(11년), 여호야긴(3개월), 그리고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11년)까지 이후의 모든 왕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던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습을 보면서 한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 떠난 유다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한없이 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지, 예레미야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묘사합니다.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렘 7:17~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렘 7:30~31)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백성들의 타락을 말씀하십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모습을 보는 예레미야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짐작해 봅니다. 끝까지 돌아오기를 원했지만, 유다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예레미야서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장인 52장은 예루살렘의 함락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처참한 유다인들의 운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며 안주하던 신앙을 가진 백성들에게 충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서의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배경 아래서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서 7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렘 7:1~2)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언제쯤 받았을지 생각해 봅니다. 어느 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유다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받은 말씀인지 궁금해집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때가 어느 시기였는지 알 수 있는 평행 본문이 성경에 하나 있습니다. 26장 말씀입니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렘 26:1~2)
이어서 나오는 말씀들도 7장의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 말씀인 7장 1절 이후의 말씀은 여호야김왕이 다스리기 시작하던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개혁을 단행하던 선한 왕 요시야가 전사하고, 백성들이 세운 여호아하스가 3개월 만에 축출당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아닌 애굽의 힘에 의해 세워진 왕, 여호야김이 통치를 시작하고 있던 시점입니다. 요시야의 영적 개혁이 멈추고 다시 우상숭배가 고개를 들고 있던 시점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야김이 즉위한 후에 상황은 많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해지고 있었습니다. 겉모습은 여전히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들은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여호와께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이 말씀은 매우 놀랍고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문 앞에 있고, 사람들은 예배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아마도 예배자들은 이런 기대를 가지고 성전까지의 먼 길을 왔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유다의 오래된 전통이었으며, 성경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내용입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출 29:42~43, 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전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갈 때마다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듣는 사람도 난감하고, 그것을 전해야 하는 예레미야도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로 대입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예배당 문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마치 1인 시위를 하듯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교회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믿지 말라.” 만약 이런 말을 외친다면 어떤 느낌이 드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그런 내용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안전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에서 말하는 거짓말은 무슨 거짓말을 말하는 것입니까? 8절은 이 거짓말에 대해 다시 말문을 엽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렘 7:8)
이어서 그 거짓말의 내용이 살짝 비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렘 7:10)
이 말씀이 왜 거짓말이라는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문장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참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재물을 드리고 구원을 얻고 나옵니다. 그리고 ‘내가 구원을 받았나이다’라는 감격 속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당연한 예배자의 모습인데, 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도 예배를 드리고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거짓이라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에게는 성전 불가침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 가운데 있기에,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입니다. 설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 도성이 무너지도록 그냥 두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성전 건물을 일종의 부적처럼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성전 안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의 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확신에 얼마나 강하게 중독되어 있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까지 강력하게 도전하십니다. 성전이 안전의 보장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전 자체가 구원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이따금 뉴스를 보면 수백 년 동안 교회로 사용되던 건물이 팔려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는 예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튀르키예에 가면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 비잔틴제국이 멸망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날이 5월 29일 새벽이었습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고 오스만 군대가 시내로 들이닥쳤을 때, 공포에 질린 수만 명의 시민이 성당 안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전쟁이 진행되면서 시민들 사이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적군이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도달하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불 칼을 휘두르며 침략자들을 무찔러 줄 것이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적군들이 쳐들어오자 사람들은 모두 그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청동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기도하며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성당만큼은 폐허가 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스만 군대는 도끼로 성당 문을 쉽게 부수고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붙잡아 갔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당일 오후 메흐메트 2세는 성당으로 들어와서 그곳을 이슬람 사원으로 명합니다.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지금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고처럼 성전이 우리의 방어막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건물로서의 예배당뿐만 아니라 ‘이 정도 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지’라는 맹목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만 또는 800만이나 되는 기독교인들이 있으니, 이 나라는 잘될 거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또한 우리가 날마다 새벽 기도를 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망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때로 숫자나 데이터, 여러 현상과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 테두리 안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들도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지를 보여 주려고 합니다. 이 정도 많이 모이는데 이게 가짜겠느냐고 증명하듯이 제시합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신앙은 우상 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이 건물이든, 숫자이든, 어떠한 것이든지 말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말씀은 이러한 의미를 전해 줍니다.
<예배를 드려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참된 예배자로 서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말씀은 “내가 예배를 잘 드리고 정성스럽게 재물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나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신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제사를 잘 드리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고, 헌금을 많이 드리면 더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 절기를 잘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등은 ‘예배라는 이름의 도피처’에 몸을 숨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려야지, 교회를 잘 나와야지…” 마치 자기최면이나 정신 무장을 위해 주문을 외우듯이 자기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렘 7:9~10, 새번역)
삶의 변화 없이 예배를 드리며 안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둑질과 살인, 음행과 거짓 맹세를 일삼고,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다시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며 “이것이 나의 성전이다. 내가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경고하십니다. “너희의 그 믿음이 결국 거짓으로 판명 날 것이다”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죄 용서받기 위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배척하신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 말씀이 마치 작은 죄만 지은 사람들만 하나님께 나오라는 말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무엇입니까?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듯이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와 구원을 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예배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예레미야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엄중하게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 가운데 있습니다. 성경은 참다운 예배자와 아닌 예배자의 차이를 이렇게 구별합니다.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렘 7:10b)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거짓말, 살인, 간음, 그리고 바알을 섬기는 등의 죄를 가지고도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는 자세는 달라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라면 이단자도, 살인자도, 간음한 자도, 도둑질한 자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그야말로 진정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 회개가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회개하는 척하지만 진정한 되돌림이 없는 자들을 향해 성경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렘 7:10b, 새번역)
이것이 참다운 예배자와 거짓 예배자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참다운 예배자는 예배를 드리고 변화되어 돌아갑니다.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돌아갑니다. 하지만 거짓 예배자는 회개하는 듯하지만 돌이킴이 없습니다. 그저 마음 편하게 죄를 다시 짓기 위해 나왔을 뿐입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고 마음의 안타까움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예배는 다시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게 해 주는 한 장의 허가증, 면죄부를 받아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껏 죄를 짓고 성전에서 “내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배 한 번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방어해 보려는 가성비 좋은 하나의 전략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예배라는 도피처에 숨어든 도둑과도 같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회개하는 죄인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는 죄인, 도리어 다음에 지을 죄를 계획하고 돌아가는 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 예배는 거짓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의 모습을 예레미야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부릅니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렘 7:11, 새번역)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의 예배 자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말기에 성전을 정화하실 때, 예레미야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배당을 죄를 세탁하는 장소로 전락시킨 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는 순간, 하나님은 그 강도들의 두목이 되고 말 뿐입니다. 이 말씀이 이 문장 하나에 들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매일 새벽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배가 정말 나의 삶을 바꾸어 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나의 삶이 바뀌지 않고 늘 똑같다면, 죄를 짓고 돌아와 또다시 같은 죄를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강단에서 성도님들에게 가능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번영 신학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달픈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이 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순절 기간에는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예배를 드리고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기간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변화하고 있습니까? 예배의 자리가 나를 변화시키는 자리입니까? 이 물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귀한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레미야 7:1~7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예레미야는 한탄스러웠던 유다의 상황을 마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레미야서입니다. 예레미야서는 제가 설교하면서 많이 소개하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 말기,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본래는 매우 내성적이고 여린 성품이었지만, 민족의 멸망을 선포해야 하는 가혹한 사명을 받아들였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간절히 전하였지만, 동족들에게 거부당하며 핍박도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했기에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가올 심판의 엄중함을 몸소 보여 주라고 하시면서 결혼도 하지 말고, 자녀도 낳지 말고, 집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참으로 슬픈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처음 예언을 시작했던 시기는 유다 왕 요시야의 치세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왕이 다스린 지 13년이 되던 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사역을 시작합니다. 성경은 그의 사역의 시작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렘 1:2)
그가 사역을 시작했던 시기는 선한 왕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요시야왕은 유다의 왕 중에서도 드물게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선한 왕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이 두 사람의 개혁 시기가 거의 일치하며, 그들의 활동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 (대하 34:3)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와 요시야왕의 개혁 활동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요시야가 바알의 제단을 헐고 제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없애며 아세라의 목상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 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영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혁의 시간은 잠시였습니다. 요시야가 애굽 왕 느고에게 대항하던 도중,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서 모든 개혁의 활동도 멈추어 서게 됩니다. 이를 슬퍼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불렀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대하 35:25)
요시야는 유다의 마지막 영적 보루와도 같은 왕이었기에, 예레미야가 단순히 그의 죽음만을 슬퍼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요시야의 죽음과 함께 다가올 유다의 멸망의 길을 슬퍼했습니다. 이 애가는 성경에 나오는 예레미야애가와는 다른 책입니다. 지금은 사라져서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안에는 예레미야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예레미야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참으로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들이었습니다. 요시야 이후의 왕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던 왕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아하스(3개월), 여호야김(11년), 여호야긴(3개월), 그리고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11년)까지 이후의 모든 왕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던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습을 보면서 한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 떠난 유다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한없이 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지, 예레미야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묘사합니다.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렘 7:17~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렘 7:30~31)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백성들의 타락을 말씀하십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모습을 보는 예레미야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짐작해 봅니다. 끝까지 돌아오기를 원했지만, 유다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예레미야서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장인 52장은 예루살렘의 함락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처참한 유다인들의 운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며 안주하던 신앙을 가진 백성들에게 충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서의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배경 아래서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서 7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렘 7:1~2)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언제쯤 받았을지 생각해 봅니다. 어느 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유다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받은 말씀인지 궁금해집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때가 어느 시기였는지 알 수 있는 평행 본문이 성경에 하나 있습니다. 26장 말씀입니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렘 26:1~2)
이어서 나오는 말씀들도 7장의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 말씀인 7장 1절 이후의 말씀은 여호야김왕이 다스리기 시작하던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개혁을 단행하던 선한 왕 요시야가 전사하고, 백성들이 세운 여호아하스가 3개월 만에 축출당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아닌 애굽의 힘에 의해 세워진 왕, 여호야김이 통치를 시작하고 있던 시점입니다. 요시야의 영적 개혁이 멈추고 다시 우상숭배가 고개를 들고 있던 시점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야김이 즉위한 후에 상황은 많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해지고 있었습니다. 겉모습은 여전히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들은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여호와께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이 말씀은 매우 놀랍고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문 앞에 있고, 사람들은 예배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아마도 예배자들은 이런 기대를 가지고 성전까지의 먼 길을 왔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유다의 오래된 전통이었으며, 성경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내용입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출 29:42~43, 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전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갈 때마다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듣는 사람도 난감하고, 그것을 전해야 하는 예레미야도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로 대입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예배당 문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마치 1인 시위를 하듯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교회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믿지 말라.” 만약 이런 말을 외친다면 어떤 느낌이 드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그런 내용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안전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에서 말하는 거짓말은 무슨 거짓말을 말하는 것입니까? 8절은 이 거짓말에 대해 다시 말문을 엽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렘 7:8)
이어서 그 거짓말의 내용이 살짝 비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렘 7:10)
이 말씀이 왜 거짓말이라는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문장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참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재물을 드리고 구원을 얻고 나옵니다. 그리고 ‘내가 구원을 받았나이다’라는 감격 속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당연한 예배자의 모습인데, 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도 예배를 드리고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거짓이라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에게는 성전 불가침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 가운데 있기에,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입니다. 설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 도성이 무너지도록 그냥 두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성전 건물을 일종의 부적처럼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성전 안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의 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확신에 얼마나 강하게 중독되어 있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까지 강력하게 도전하십니다. 성전이 안전의 보장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전 자체가 구원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이따금 뉴스를 보면 수백 년 동안 교회로 사용되던 건물이 팔려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는 예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튀르키예에 가면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 비잔틴제국이 멸망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날이 5월 29일 새벽이었습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고 오스만 군대가 시내로 들이닥쳤을 때, 공포에 질린 수만 명의 시민이 성당 안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전쟁이 진행되면서 시민들 사이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적군이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도달하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불 칼을 휘두르며 침략자들을 무찔러 줄 것이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적군들이 쳐들어오자 사람들은 모두 그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청동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기도하며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성당만큼은 폐허가 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스만 군대는 도끼로 성당 문을 쉽게 부수고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붙잡아 갔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당일 오후 메흐메트 2세는 성당으로 들어와서 그곳을 이슬람 사원으로 명합니다.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지금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고처럼 성전이 우리의 방어막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건물로서의 예배당뿐만 아니라 ‘이 정도 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지’라는 맹목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만 또는 800만이나 되는 기독교인들이 있으니, 이 나라는 잘될 거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또한 우리가 날마다 새벽 기도를 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망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때로 숫자나 데이터, 여러 현상과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 테두리 안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들도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지를 보여 주려고 합니다. 이 정도 많이 모이는데 이게 가짜겠느냐고 증명하듯이 제시합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신앙은 우상 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이 건물이든, 숫자이든, 어떠한 것이든지 말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말씀은 이러한 의미를 전해 줍니다.
<예배를 드려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참된 예배자로 서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말씀은 “내가 예배를 잘 드리고 정성스럽게 재물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나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신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제사를 잘 드리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고, 헌금을 많이 드리면 더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 절기를 잘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등은 ‘예배라는 이름의 도피처’에 몸을 숨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려야지, 교회를 잘 나와야지…” 마치 자기최면이나 정신 무장을 위해 주문을 외우듯이 자기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렘 7:9~10, 새번역)
삶의 변화 없이 예배를 드리며 안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둑질과 살인, 음행과 거짓 맹세를 일삼고,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다시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며 “이것이 나의 성전이다. 내가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경고하십니다. “너희의 그 믿음이 결국 거짓으로 판명 날 것이다”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죄 용서받기 위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배척하신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 말씀이 마치 작은 죄만 지은 사람들만 하나님께 나오라는 말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무엇입니까?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듯이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와 구원을 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예배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예레미야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엄중하게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 가운데 있습니다. 성경은 참다운 예배자와 아닌 예배자의 차이를 이렇게 구별합니다.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렘 7:10b)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거짓말, 살인, 간음, 그리고 바알을 섬기는 등의 죄를 가지고도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는 자세는 달라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라면 이단자도, 살인자도, 간음한 자도, 도둑질한 자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그야말로 진정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 회개가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회개하는 척하지만 진정한 되돌림이 없는 자들을 향해 성경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렘 7:10b, 새번역)
이것이 참다운 예배자와 거짓 예배자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참다운 예배자는 예배를 드리고 변화되어 돌아갑니다.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돌아갑니다. 하지만 거짓 예배자는 회개하는 듯하지만 돌이킴이 없습니다. 그저 마음 편하게 죄를 다시 짓기 위해 나왔을 뿐입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고 마음의 안타까움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예배는 다시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게 해 주는 한 장의 허가증, 면죄부를 받아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껏 죄를 짓고 성전에서 “내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배 한 번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방어해 보려는 가성비 좋은 하나의 전략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예배라는 도피처에 숨어든 도둑과도 같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회개하는 죄인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는 죄인, 도리어 다음에 지을 죄를 계획하고 돌아가는 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 예배는 거짓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의 모습을 예레미야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부릅니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렘 7:11, 새번역)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의 예배 자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말기에 성전을 정화하실 때, 예레미야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배당을 죄를 세탁하는 장소로 전락시킨 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는 순간, 하나님은 그 강도들의 두목이 되고 말 뿐입니다. 이 말씀이 이 문장 하나에 들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매일 새벽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배가 정말 나의 삶을 바꾸어 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나의 삶이 바뀌지 않고 늘 똑같다면, 죄를 짓고 돌아와 또다시 같은 죄를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강단에서 성도님들에게 가능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번영 신학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달픈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이 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순절 기간에는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예배를 드리고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기간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변화하고 있습니까? 예배의 자리가 나를 변화시키는 자리입니까? 이 물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귀한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배라는 이름의 도피처” (렘7:1~7)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14, 272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예배 시간과 일상의 삶이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예레미야는 유다 말기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선한 왕 요시야가 개혁을 단행하며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예배를 회복했을 때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영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자 개혁도 멈추었고, 이후의 왕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로 여호야김이 즉위하여 다시 우상숭배가 고개를 들던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 앞에 서서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예배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는 성전 불가침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 가운데 있으니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고, 성전을 일종의 부적처럼 여기며 성전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전이 우리의 방어막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삶이 따라가지 않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음행하고, 거짓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도 성전으로 들어와서 “우리는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배는 드리되 회개가 없었고, 성전에서 나가면 다시 똑같은 죄를 반복할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예배 잘 드려야지, 교회 잘 나와야지”라고 주문처럼 말하며 “예배 드리면 괜찮을 거야. 좋은 일이 생길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삶의 변화가 없다면 예배는 죄를 마음 편히 짓기 위한 허가증에 불과합니다.
참된 예배자와 거짓 예배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변화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예배를 드리고 회개하며 변화되어 돌아갑니다. 하지만 거짓 예배자는 회개하는 척하지만, 실은 다시 죄를 마음 편히 짓기 위해서 돌아갑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불렀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마지막에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가 나의 삶을 정말 바꾸고 있는가입니다. 나를 돌아보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의 자리가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누기>
1. 참된 예배자와 거짓 예배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변화”라는 말씀이 주는 도전을 나누어 봅시다.
2. 사순절을 보내며, 예배를 통해 구체적으로 변화받고 싶은 삶의 영역은 무엇인지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외형과 예배의 형식 뒤에 숨어, 정작 하나님께 서 원하시는 정의와 사랑의 삶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우리의 예배가 죄를 덮는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껍데기뿐인 신앙을 벗고, 우리 마음 중심에 주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하는 참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참된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