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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 안에서 일어난 신비
<구약성경 속에 이해하기 어렵지만 반복해서 나타나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 내용이 성경에 들어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장면입니다. 아이가 죽자, 어머니는 울면서 엘리야에게 호소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에게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어머니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죽은 아이를 누입니다. 그러고는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왕상 17:20)
그리고 흥미로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왕상 17:21~22)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왜 죽은 아이를 안고 자기 침상으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부터 의문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왜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개어 세 번이나 엎드렸는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는 살아나지 못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이를 살리고자 하신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살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특별한 행동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연적인 행동일까요?
생각해 보면 이 행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미 아이가 죽어 있습니다. 죽은 자를 만지는 것은 율법적으로 부정해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문제를 넘어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매우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싸늘하게 식은 주검 위에 자신의 살아 있는 몸을 포개어 올려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저온증 환자였다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할 테니 몸을 녹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아이는 죽어서 이미 차갑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죽은 몸에 자기 몸을 포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를 살려 내었습니다. 이야기를 읽어 갈수록 성경은 왜 이런 내용을 남기고 있는지, 이 본문이 전하려는 내용은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독특한 이야기가 성경에 또 반복됩니다. 엘리사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의 행동은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격한 모습을 보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는 아이의 침상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행동을 합니다. 자신의 입을 아이의 입에, 자신의 눈을 아이의 눈에, 자신의 손을 아이의 손에 일일이 맞대고 엎드립니다.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왕하 4:32~35)
왜 엘리사는 죽은 아이 위에 올라가서 몸을 포개고 엎드렸을까요?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선지자들만의 특별한 의료 방책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는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저에게도 이 두 이야기는 늘 궁금증을 자아내는 주제였습니다. 죽은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눕혀 몸을 밀착시키는 행동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저의 마음속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이 궁금증을 풀어 주는 작은 힌트가 오늘 본문에 살짝 등장합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의 첫 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마치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오케스트라의 서곡 같은 내용이 1절부터 18절까지 이어집니다. 첫 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요한복음은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πρὸς τὸν Θεόν[pros ton Theon])”라는 표현은 단순히 곁에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프로스(πρὸς)’라는 말은 ‘향하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상태, 인격적인 교감과 상호 교환이 일어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태초부터 그렇게 계셨으니, 하나님과 예수님은 창조의 모든 과정에서도 함께 의논하며 소통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서곡의 마지막 18절에서 이런 표현으로 마무리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모세일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자신과 가깝고 신뢰했던 모세에게조차도 자기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등만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 가운데는 하나님을 뵈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온전히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던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모세도 선지자들도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말씀과 뜻을 받고 전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세상에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있는 한 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앞서서 요한은 “그분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의논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지막에서 이 말을 고쳐 “그분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품속에 있다’라는 말은 매우 드물고 상당히 복합적인 뜻이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언뜻 하나님이 예수님을 두 팔 안에 안고 계시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용하는 ‘품’의 헬라어 ‘콜포스(κόλπος)’는 단순히 팔과 팔 사이에 있는 신체적인 공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의 존재와 다른 존재가 완전히 포개지는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깊이 안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특히 어린 자녀를 안았을 때 느낌이 어떻습니까? 아이를 품에 안고 재우다 보면 아이가 힘을 놓고 완전히 의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품에 아주 밀착하여 잠에 듭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고 온도가 느껴지며 심장 소리가 들립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아마 그때처럼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와 깊이 교감하고 일체가 된 느낌이 듭니다. 이런 느낌의 상태가 요한이 말하는 ‘품’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품에 안겨 있었다고 말합니다. “온몸을 포개어 숨소리를 나누는 듯이, 하나님과 함께 교류를 나누고 일치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있으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품에 계셨다’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요한은 ‘품’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은 사랑의 관계와 연합의 신비 가운데 있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일찍이 교부들은 이러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로운 관계를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 단어는 각 존재가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에게 ‘상호 침투’하며 완전한 하나가 되는 ‘역동적인 공존’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사귐과 교류, 소통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페리코레시스’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다는 말씀이 바로 이와 같은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 죄인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본문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된 헬라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단순히 ‘외아들’의 의미를 넘어 ‘유일무이한 존재’, ‘가장 특별하고 고유한 관계’를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서로를 포개어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한 몸을 이루신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도 설 수 없는 자리에 계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셨고 서로 모든 것을 소통하며 공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품속에서 기쁨과 행복만을 공유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품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과 고통도 함께 공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이 죽음으로 치달으며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운명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시며 절절한 마음으로 애통하셨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도 똑같이 느끼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이들을 안타까워하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깨지고 부서진 세상을 누가 건지러 갈 것인가?”라고 묻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교통 속에 인간을 향해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아늑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 땅으로 오시기로 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일어난 사랑의 깊은 교제는 결국 예수님을 고통의 땅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온 세상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 보이시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너른 품과 깊이와 온기를 모든 이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초대해 주셨습니다. 또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인간을 기다리고 계시는지를 낱낱이 실감 나게 풀어 주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이 말씀을 전하시며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과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긍휼하심에 대해서 설명하며 죄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화를 내는 분노의 모습으로, 때로는 따뜻한 사랑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품을 열어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슬픔에 함께하심으로 모든 인간을 품으려 하셨습니다.
‘품’의 헬라어 단어 ‘콜포스(κόλπος)’가 존재와 존재가 완전히 포개어 하나 됨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아파하는 사람들, 배고파하는 사람들,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밀착되어 하나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그 품으로 이 땅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 죄 많은 사람들을 품에 안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으시고 그들을 깊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들의 삶에 밀착하고 포개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는 비난까지도 들으셨습니다(마 11:19). 예수님은 세리장 삭개오와도 함께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다가가 숨겨진 외로움과 죄의식까지도 알아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죄인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마 9:12).
예수님의 품은 그런 품이었습니다. 아픈 자, 병든 자의 손에 손을 포개어 주시며 안수하여 주셨고,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안아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밀착되어 계셨던 분이 이 땅에 오셔서 귀신 들린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죄인, 병자들과 함께 밀착하여 하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고통 위에 자신을 온전히 포개어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토록 3년여의 긴 시간 동안 다니는 곳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품을 열어 보이셨던 예수님께서 마침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환호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이기적인 품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류를 통째로 껴안아야 할 ‘마지막 품’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십니다.
이제 주님은 ‘밀착’과 ‘포개어짐’이라고 하는 품의 신비가 완성되는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십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은 두 팔을 넓게 벌리십니다. 그것은 “이제 내가 너희 모두를 품으리라”라는 주님의 위대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큰 포옹의 자세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두 팔을 벌린 자세로 거칠고 차가운 십자가 나무 위에 누우십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을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이제 주님은 인류의 가장 참혹한 형벌의 상징인 십자가 위에 자신의 전 존재를 완전히 밀착시키십니다. 대못이 주님의 손과 발을 뚫고 지나갈 때, 주님은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와 하나가 되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 위에 몸을 포개어 얹었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래전 그들은 죽은 자 위에 몸을 포개어 생기가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다시 발현됩니다.
왜 그렇게까지 밀착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마땅한 이들과 한 몸으로 포개기 위함이었습니다. 절망과 죄악 속에서 결국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할 우리 인생 위에 주님의 생명을 포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팔을 넓게 벌리십니다. 그 벌려진 팔은 우리를 향한 거대한 포옹입니다. “내가 너의 죽음과 밀착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생명이 너의 죽음과 포개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내가 죽음을 삼키고 새로운 생명을 낳을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와 우리와 밀착하셨습니다. 엘리사의 온기에 아이의 살이 조금씩 따뜻해졌던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에 다시 생명의 온기가 솟아올라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벌려진 예수님의 품은 절대로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에 대못이 박히기까지 자신의 열린 품을 닫지 않으시겠다는 결의를 보여 주십니다. 어떤 죄인이 주님께 다가가든지 그 품은 결코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벌리신 두 팔은 온 인류의 죄를 다 품겠다고 하시는 희생적인 사랑의 선포였습니다. 끝까지 열어 놓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품기 위해 십자가에서 두 팔 벌리신 예수님의 너른 품 안으로 깊이 들어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의 신비 앞에 서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아버지의 가장 깊은 품속에서 심장 소리를 공유하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영광스러운 하늘의 품에만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차갑게 식어 버린 우리의 비참한 몸, 소망 없는 죄인의 품으로 오셔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음까지도 들어주셨습니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 위에 자신의 입과 눈과 손을 맞대어 엎드렸듯이, 주님은 골고다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의 악하고 허물 많은 인생과 완전히 밀착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자신의 전 존재를 포개어 누우셨고, 찢어진 두 팔 사이로 흐르는 뜨거운 생명의 온기를 우리의 죽어 가는 영혼 속에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그것은 절망 속에서 죽어 마땅한 우리를 주님의 품에 꽉 껴안으심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품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주님께서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벌려 놓으신 팔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본향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그리고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품이기도 합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달리신 고난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그저 예수님을 처형한 하나의 형틀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어떤 묵상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 십자가는 내가 달려 있어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달린 십자가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미 그 십자가 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사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우리를 생명 되시는 주님이 품에 안아 주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죄인으로서 죽을 운명인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이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감싸 포개어 안아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해야 할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번 한 주, 우리를 품으러 오신 예수님의 그 너른 품 안으로 깊숙이 들어갑시다. 그분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차가워진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온기로 다시 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 내가 달려 있습니다. 내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아파하고 있습니다. 내가 절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린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꼭 안아 주시고, 입과 눈과 손을 대고 함께해 주시는 은혜를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 깊이 누리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he Mystery in His Bosom
John 1:18
As we read the Bible we often find many incomprehensible scenes. One of them is 1 Kings 17.
In this story, the son of the widow at Zarephath is raised from the dead. When the boy dies, his mother, the widow at Zarephath, pleads with Elijah in tears. At this, Elijah asks for the boy’s body and takes him from his mother’s arms to the attic where he was staying. There, Elijah lays the dead boy on his bed and cries out to God:
“Then he cried out to the Lord, ‘Lord my God, have you brought tragedy even on this widow I am staying with, by causing her son to die?’” (1 Kings 17:20 NIV)
What is interesting is the scene that follows:
“Then he stretched himself out on the boy three times and cried out to the Lord, ‘Lord my God, let this boy’s life return to him!’ The Lord heard Elijah’s cry, and the boy’s life returned to him, and he lived.” (1 Kings 17:21–22 NIV)
The interesting point is that Elijah took the dead boy and laid him on his bed. Why? And why did he stretch himself out on the dead boy three times? Would he not have been able to raise him from the dead if he hadn’t? If the God Almighty is the One resurrecting the boy, what can be impossible for Him? Yet Elijah performs a special act in the course of healing the boy.
Come to think of it, this work is by far an easy task. The boy is already dead. Touching a dead body would defile the prophet. He would become unclean—in terms of the law. But, even from a physical and psychological point of view, Elijah’s actions would have been very hard to do. Imagine stretching yourself on a cold corpse. How nasty and chilling! Even if it was someone you really loved, lying on top of a corpse would be hard. Yet, Elijah did so and saved the boy.
It is hard to understand why Elijah stretched himself on the dead boy’s body which had already gone cold—unless, perhaps, the boy were not dead and had hypothermia. What is this passage trying to tell us? No matter how hard we think, it is hard to find the answer.
Yet, this anomalous story appears again in the Bible—in Elisha’s story. However, Elisha goes even further than his mentor Elijah.
When the Shunammite’s son dies, Elisha gets on the bed where the dead boy was lying and performs more specific actions: he “lay on the boy, mouth to mouth, eyes to eyes, hands to hands.”
“When Elisha reached the house, there was the boy lying dead on his couch. He went in, shut the door on the two of them and prayed to the Lord. Then he got on the bed and lay on the boy, mouth to mouth, eyes to eyes, hands to hands. As he stretched himself out on him, the boy’s body grew warm. Elisha turned away and walked back and forth in the room and then got on the bed and stretched out on him once more. The boy sneezed seven times and opened his eyes.” (2 Kings 4:32-35 NIV)
Why did Elisha lie on the boy like this? Was it some kind of special, unknown medical practice for reviving the dead? That seems unlikely. If not, then why did Elisha do it?
These two stories have always been a source of curiosity for me. What does it mean to lie down with your body pressed against a dead person—what does that action signify? That question remained in my heart for a long time.
And the Old Testament itself gave us no clue about the reason for a long time—until the coming of Jesus.
One clue appears subtly in today’s passage: John 1:18.
Many of you may have felt the majestic, grand ambience that begins from the very first chapter of John. It feels like an orchestral overture announcing the start of a performance: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John 1:1 NIV)
John begins his Gospel with the phrase “In the beginning.” From that point he begins to tell the story of the Word, Jesus Christ, who was with God from the beginning.
Here the phrase “was with God (πρὸς τὸν Θεόν)” goes beyond simply sitting beside God, that is, beyond merely being near Him. It denotes a face-to-face state, a personal communion. In short, it means that God and Jesus deliberated and communed together in the process of creating the universe.
The account of the Word, Jesus Christ—who is God, who existed from the beginning, and who was with God—is brought to a close in the final part of John’s overture with this expression:
“No man hath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John 1:18 KJV)
If you were to name the person in the Old Testament who was closest to God, Moses would undoubtedly be at the top of the list. Yet in Exodus 33 God would not allow even Moses—so favored and trusted—to see His face; Moses was permitted only to see God’s back.
Thus, among humans no one had seen God. No one could fully know, experience, or comprehend what God is like. But John introduces to us the One who did fully know and experience that God.
Earlier John said the Word was with God. Now he rephrases it: the Word was “in the bosom of the Father.” Saying that the Word was “in the bosom” is a striking expression. What does that mean? One immediate thought that arises is: did the Father hold him in His arms?
However, the word “bosom” used here—the Greek kolpos (κόλπος)—does not simply mean the physical space between the arms or the chest area. It signifies a oneness in which one person and another are completely overlapped and become one.
Have you ever been held in someone’s arms? Have you ever held someone in your arms? If you have rocked a child to sleep in your arms, you know: after a little while the child settles snugly into your embrace, and you gradually sense his warmth. In that embrace you can hear his breathing; you may even hear the sound of his heartbeat.
In other words, saying that Jesus was “in the Father’s bosom” means that God and Jesus were so completely overlapped and united that they were one in body and being.
John here uses the word “bosom” to express how deep the loving relationship and mysterious union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are.
The Church Fathers once described this mysterious relationship of Father, Son, and Spirit with the term “perichoresis (περιχώρησις).” Simply put, perichoresis means mutual indwelling or dynamic coexistence in which each person preserves his distinctiveness while being fully interpenetrated. It denotes perfect communion, exchange, and communication.
Is this something that happens often or to anyone? No.
The Greek word “monogenēs (μονογενής),” translated “only begotten Son,” goes beyond merely “only Son”; it denotes a unique, unparalleled existence and a most intimate, exclusive relationship. Thus Jesus is the unparalleled One who shares a deep overlapped communion with the Father—something no one else in the world can do.
The Word, Jesus, shared and communed with God regarding all things from the beginning.
But our Jesus did not share only the Father’s joy and delight while in that bosom. He also shared the Father’s sorrow and suffering. He came to know the Father’s aching heart as the Creator watched the world plunge into sin and death, trapped in a destiny of suffering from which it could not free itself. The Father’s love for the world and His longing to save it became one with Jesus’ own heart.
“Who will go and rescue this broken, shattered world?”
In the Father’s bosom Jesus felt the Father’s heart. In that perfect fellowship and communion, He felt the compassion of the Father who saw the reality of human suffering. This is the reason our Lord left that warm, intimate bosom to come into this world.
The deep loving communion that took place in the Father’s bosom ultimately led Jesus to this land of suffering.
So, having left the Father’s bosom and taken on a body in this world, what did Jesus do?
Jesus’ life was itself an unveiling of the Father’s heart like the world had never seen. Jesus invited everyone to experience the vastness and warmth of the Father’s embrace.
In first-century Jewish society many boundaries had been drawn under the names of religion and law. Lines were drawn to separate the righteous and the sinner, the clean and the unclean, the Jew and the Gentile, creating a world of isolation and exclusion where people could not cross those lines.
But Jesus was different. He invited everyone into the Father’s bosom with no barriers, no discrimination, no boundaries.
He spent long nights in conversation with Nicodemus, a Pharisee and teacher of the law and a member of the Sanhedrin.
He crossed into Samaria, a region long marked by deep, ancient divisions, and there he met a woman whom everyone had shunned. He listened again and again to her story of prolonged conflict and pain, and in doing so showed how tender and warm the Father’s embrace is.
Jesus also showed how rich and abundant the Father’s bosom is. That bosom fed over five thousand people with two fish and five loaves.
It was this bosom that enabled a man born blind to see clearly by being created anew, and it was this embrace that could call the dead back from beyond death, a realm that no one could ever overcome. This bosom was literally the bosom of life.
There is no end to enumerating the ways Jesus revealed the Father’s bosom in this world.
Not only did Jesus reveal to us the unseen bosom of God, He embraced the people of this world by being closely intertwined with them and being with them in their pain and grief.
Just as the Greek word “kolpos (κόλπος)” implies a complete overlapping and oneness of one person with another, Jesus became one with the suffering, hungry, and fearful people of this earth.
Now, the One who once rested in the Father’s bosom opened that bosom to us—so that we, who are weak, wicked, and sinful, may be held in it.
First, Jesus did not turn away little children. Children were socially marginalized in that time, yet He took them in His arms and loved them deeply.
He drew close to sinners by entering their homes to eat and drink with them, embracing them. For this He was even mocked as a glutton and a drunkard and calle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He was also a friend to prostitutes.
Jesus drew close to Zacchaeus, the tax collector. He recognized Zacchaeus’s hidden loneliness and sense of guilt.
Saying that 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 Jesus drew close to sinners and held their hands. He went to the sick and the afflicted, put His hands on theirs, and laid His hands on them; He embraced those who wept before death. Such was the bosom of Jesus.
Throughout those roughly three years, wherever He went Jesus revealed God’s mysterious bosom. At last He entered Jerusalem riding a colt. Though many cheered, the Lord did not entrust Himself to their selfish embraces. Rather, He walked toward the “ultimate bosom” that would embrace all humanity.
Now the Lord moves toward Golgotha, where the mystery of this close, overlapping embrace will be consummated.
On the Cross set up on Golgotha, our Lord stretched out His arms. It was the great act of the Lord saying, “Now I will embrace you all.”
Jesus then lay upon the rough, cold wood of the Cross with His arms outstretched. What is the Cross? It is an instrument for executing sinners—the very scaffold on which criminals die. Now the Lord completely attached His whole being to that most horrendous emblem of human punishment. When the nails pierced His hands and feet, He became one with that instrument of death.
In this scene we recall Elijah who stretched himself on the dead boy. The prophets Elijah and Elisha foreshadow the Son of God who is to come. Their actions prophesied what Jesus would do when He came.
Long ago they lay upon the dead to revive them, showing us the wondrous miracle of resurrection. This is exactly what we see in Jesus today as He lies on the Cross.
Why did our Lord have to attach Himself so completely to the Cross? It was to lie as one with those who deserved to die on the Cross. It was to overlay His life on ours—on lives that, in despair and sin, were destined to bear the Cross and die on it.
But what happened when the Lord became one with the Cross?
Elisha pressed his mouth on the mouth of the dead boy. That act was not just artificial respiration. It was an event in which God’s agent, Elisha, transmitted God’s life to one who had died and lost breath. In other words, that action foreshadowed the great final breath by which Jesus on the Cross would transmit life toward all death.
John chapter 1 already told us that life was in the Word, and that nothing came into being without him.
Therefore, when Elisha pressed his mouth to the boy’s mouth and the boy’s flesh grew warm, that mysterious scene prefigures the grand moment of recreation when the risen Lord later breathed on His disciples and said,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the Lord’s warm breath touches our cold, lifeless souls, we are brought back to life.
Now, let’s reflect again on the Lord’s Cross. The arms of Jesus on the Cross are stretched wide. With arms spread wide He says: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Matthew 11:28 NIV)
“‘Come now, let us settle the matter,’ says the Lord. ‘Though your sins are like scarlet, they shall be as white as snow; though they are red as crimson, they shall be like wool.’” (Isaiah 1:18 NIV)
On the Cross the Lord stretched His arms wide. With those outstretched arms He embraced us.
I will attach Myself to your death. I will overlap your curse. By doing so, I will overlay My life and body on your death. Thus, I will swallow death and create new life.
Our Lord descended to the lowliest of places, the Cross, and attached Himself to us. Just as Elisha’s warmth warmed the flesh of the dead boy, the ardent love of our Lord who overlay Himself on us warms us, giving our souls, dead in sin, life again.
And the bosom of that Jesus will never be closed. By allowing nails to be driven into His hands and by being hung on the Cross, Jesus showed that He would not close His embrace even to the end.
Those two arms stretched wide to be nailed to the Cross were therefore a sacrificial declaration of His intent to embrace the sins of all humanity. They were an expression of His will to keep His bosom open to the last.
Dear friends, we now stand before this mystery of love.
Though no one has ever seen God, His only begotten Son—who shared the heartbeat of the Father in the deepest place of the Father’s bosom—came to us. The Lord did not remain only in that glorious heavenly embrace. He came into our wretched bodies, chilled by sin and death; He came to the bosom of hopeless sinners; He humbled Himself again and again.
Just as Elisha lay on the boy, mouth to mouth, eyes to eyes, hands to hands, our Lord at the terrible place of death on Golgotha became completely attached to our wicked, sinful lives. On the Cross He overlaid His whole being upon us, pouring the warm life that flowed between those outstretched, torn arms into our dying souls. Truly, He took us into His “bosom (kolpos, κόλπος).”
Why did He go so far? It was to hold us—who deserved to die in despair—tight in His arms so that He might finally bring us back into the Father’s bosom. He did it to take us to the Father’s bosom where He Himself had belonged.
Therefore, the outstretched arms of our Lord on the Cross are the only door to the eternal homeland we have lost. They are God’s bosom, thrown wide open.
This week, let us enter deeply into that wide bosom of Jesus who came to embrace us. As we hear His heartbeat in His embrace, may we fully experience the wonderful mystery of love that takes place in His bosom, that mystery of His holy love that warms our once-cold souls to life by His warmth.
요한복음 1:18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구약성경 속에 이해하기 어렵지만 반복해서 나타나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 내용이 성경에 들어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장면입니다. 아이가 죽자, 어머니는 울면서 엘리야에게 호소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에게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어머니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죽은 아이를 누입니다. 그러고는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왕상 17:20)
그리고 흥미로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왕상 17:21~22)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왜 죽은 아이를 안고 자기 침상으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부터 의문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왜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개어 세 번이나 엎드렸는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는 살아나지 못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이를 살리고자 하신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살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특별한 행동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연적인 행동일까요?
생각해 보면 이 행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미 아이가 죽어 있습니다. 죽은 자를 만지는 것은 율법적으로 부정해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문제를 넘어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매우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싸늘하게 식은 주검 위에 자신의 살아 있는 몸을 포개어 올려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저온증 환자였다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할 테니 몸을 녹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아이는 죽어서 이미 차갑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죽은 몸에 자기 몸을 포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를 살려 내었습니다. 이야기를 읽어 갈수록 성경은 왜 이런 내용을 남기고 있는지, 이 본문이 전하려는 내용은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독특한 이야기가 성경에 또 반복됩니다. 엘리사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의 행동은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격한 모습을 보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는 아이의 침상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행동을 합니다. 자신의 입을 아이의 입에, 자신의 눈을 아이의 눈에, 자신의 손을 아이의 손에 일일이 맞대고 엎드립니다.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왕하 4:32~35)
왜 엘리사는 죽은 아이 위에 올라가서 몸을 포개고 엎드렸을까요?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선지자들만의 특별한 의료 방책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는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저에게도 이 두 이야기는 늘 궁금증을 자아내는 주제였습니다. 죽은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눕혀 몸을 밀착시키는 행동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저의 마음속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이 궁금증을 풀어 주는 작은 힌트가 오늘 본문에 살짝 등장합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의 첫 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마치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오케스트라의 서곡 같은 내용이 1절부터 18절까지 이어집니다. 첫 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요한복음은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πρὸς τὸν Θεόν[pros ton Theon])”라는 표현은 단순히 곁에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프로스(πρὸς)’라는 말은 ‘향하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상태, 인격적인 교감과 상호 교환이 일어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태초부터 그렇게 계셨으니, 하나님과 예수님은 창조의 모든 과정에서도 함께 의논하며 소통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서곡의 마지막 18절에서 이런 표현으로 마무리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모세일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자신과 가깝고 신뢰했던 모세에게조차도 자기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등만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 가운데는 하나님을 뵈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온전히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던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모세도 선지자들도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말씀과 뜻을 받고 전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세상에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있는 한 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앞서서 요한은 “그분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의논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지막에서 이 말을 고쳐 “그분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품속에 있다’라는 말은 매우 드물고 상당히 복합적인 뜻이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언뜻 하나님이 예수님을 두 팔 안에 안고 계시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용하는 ‘품’의 헬라어 ‘콜포스(κόλπος)’는 단순히 팔과 팔 사이에 있는 신체적인 공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의 존재와 다른 존재가 완전히 포개지는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깊이 안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특히 어린 자녀를 안았을 때 느낌이 어떻습니까? 아이를 품에 안고 재우다 보면 아이가 힘을 놓고 완전히 의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품에 아주 밀착하여 잠에 듭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고 온도가 느껴지며 심장 소리가 들립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아마 그때처럼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와 깊이 교감하고 일체가 된 느낌이 듭니다. 이런 느낌의 상태가 요한이 말하는 ‘품’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품에 안겨 있었다고 말합니다. “온몸을 포개어 숨소리를 나누는 듯이, 하나님과 함께 교류를 나누고 일치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있으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품에 계셨다’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요한은 ‘품’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은 사랑의 관계와 연합의 신비 가운데 있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일찍이 교부들은 이러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로운 관계를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 단어는 각 존재가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에게 ‘상호 침투’하며 완전한 하나가 되는 ‘역동적인 공존’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사귐과 교류, 소통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페리코레시스’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다는 말씀이 바로 이와 같은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 죄인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본문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된 헬라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단순히 ‘외아들’의 의미를 넘어 ‘유일무이한 존재’, ‘가장 특별하고 고유한 관계’를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서로를 포개어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한 몸을 이루신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도 설 수 없는 자리에 계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셨고 서로 모든 것을 소통하며 공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품속에서 기쁨과 행복만을 공유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품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과 고통도 함께 공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이 죽음으로 치달으며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운명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시며 절절한 마음으로 애통하셨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도 똑같이 느끼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이들을 안타까워하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깨지고 부서진 세상을 누가 건지러 갈 것인가?”라고 묻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교통 속에 인간을 향해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아늑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 땅으로 오시기로 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일어난 사랑의 깊은 교제는 결국 예수님을 고통의 땅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온 세상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 보이시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너른 품과 깊이와 온기를 모든 이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초대해 주셨습니다. 또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인간을 기다리고 계시는지를 낱낱이 실감 나게 풀어 주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이 말씀을 전하시며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과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긍휼하심에 대해서 설명하며 죄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화를 내는 분노의 모습으로, 때로는 따뜻한 사랑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품을 열어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슬픔에 함께하심으로 모든 인간을 품으려 하셨습니다.
‘품’의 헬라어 단어 ‘콜포스(κόλπος)’가 존재와 존재가 완전히 포개어 하나 됨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아파하는 사람들, 배고파하는 사람들,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밀착되어 하나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그 품으로 이 땅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 죄 많은 사람들을 품에 안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으시고 그들을 깊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들의 삶에 밀착하고 포개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는 비난까지도 들으셨습니다(마 11:19). 예수님은 세리장 삭개오와도 함께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다가가 숨겨진 외로움과 죄의식까지도 알아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죄인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마 9:12).
예수님의 품은 그런 품이었습니다. 아픈 자, 병든 자의 손에 손을 포개어 주시며 안수하여 주셨고,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안아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밀착되어 계셨던 분이 이 땅에 오셔서 귀신 들린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죄인, 병자들과 함께 밀착하여 하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고통 위에 자신을 온전히 포개어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토록 3년여의 긴 시간 동안 다니는 곳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품을 열어 보이셨던 예수님께서 마침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환호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이기적인 품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류를 통째로 껴안아야 할 ‘마지막 품’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십니다.
이제 주님은 ‘밀착’과 ‘포개어짐’이라고 하는 품의 신비가 완성되는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십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은 두 팔을 넓게 벌리십니다. 그것은 “이제 내가 너희 모두를 품으리라”라는 주님의 위대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큰 포옹의 자세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두 팔을 벌린 자세로 거칠고 차가운 십자가 나무 위에 누우십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을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이제 주님은 인류의 가장 참혹한 형벌의 상징인 십자가 위에 자신의 전 존재를 완전히 밀착시키십니다. 대못이 주님의 손과 발을 뚫고 지나갈 때, 주님은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와 하나가 되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 위에 몸을 포개어 얹었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래전 그들은 죽은 자 위에 몸을 포개어 생기가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다시 발현됩니다.
왜 그렇게까지 밀착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마땅한 이들과 한 몸으로 포개기 위함이었습니다. 절망과 죄악 속에서 결국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할 우리 인생 위에 주님의 생명을 포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팔을 넓게 벌리십니다. 그 벌려진 팔은 우리를 향한 거대한 포옹입니다. “내가 너의 죽음과 밀착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생명이 너의 죽음과 포개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내가 죽음을 삼키고 새로운 생명을 낳을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와 우리와 밀착하셨습니다. 엘리사의 온기에 아이의 살이 조금씩 따뜻해졌던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에 다시 생명의 온기가 솟아올라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벌려진 예수님의 품은 절대로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에 대못이 박히기까지 자신의 열린 품을 닫지 않으시겠다는 결의를 보여 주십니다. 어떤 죄인이 주님께 다가가든지 그 품은 결코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벌리신 두 팔은 온 인류의 죄를 다 품겠다고 하시는 희생적인 사랑의 선포였습니다. 끝까지 열어 놓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품기 위해 십자가에서 두 팔 벌리신 예수님의 너른 품 안으로 깊이 들어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의 신비 앞에 서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아버지의 가장 깊은 품속에서 심장 소리를 공유하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영광스러운 하늘의 품에만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차갑게 식어 버린 우리의 비참한 몸, 소망 없는 죄인의 품으로 오셔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음까지도 들어주셨습니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 위에 자신의 입과 눈과 손을 맞대어 엎드렸듯이, 주님은 골고다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의 악하고 허물 많은 인생과 완전히 밀착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자신의 전 존재를 포개어 누우셨고, 찢어진 두 팔 사이로 흐르는 뜨거운 생명의 온기를 우리의 죽어 가는 영혼 속에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그것은 절망 속에서 죽어 마땅한 우리를 주님의 품에 꽉 껴안으심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품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주님께서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벌려 놓으신 팔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본향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그리고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품이기도 합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달리신 고난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그저 예수님을 처형한 하나의 형틀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어떤 묵상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 십자가는 내가 달려 있어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달린 십자가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미 그 십자가 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사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우리를 생명 되시는 주님이 품에 안아 주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죄인으로서 죽을 운명인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이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감싸 포개어 안아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해야 할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번 한 주, 우리를 품으러 오신 예수님의 그 너른 품 안으로 깊숙이 들어갑시다. 그분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차가워진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온기로 다시 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 내가 달려 있습니다. 내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아파하고 있습니다. 내가 절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린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꼭 안아 주시고, 입과 눈과 손을 대고 함께해 주시는 은혜를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 깊이 누리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품 안에서 일어난 신비” (요1:18)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54, 417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누군가를 품에 안았을 때, 혹은 누군가의 품에 안겼을 때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성경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세 번 몸을 포개어 엎드린 장면(왕상 17:21-22), 엘리사가 죽은 아이의 입에 자신의 입을, 눈에 눈을, 손에 손을 맞대고 엎드린 장면(왕하 4:32-35)이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구약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 실마리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서 ‘품’으로 번역된 헬라어 ‘콜포스(κόλπος)’는 단순히 신체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두 존재가 완전히 포개어지는 하나 됨을 뜻합니다. 요한은 바로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은 사랑의 관계와 연합의 신비 가운데 계셨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그 품 안에서 아버지의 기쁨뿐 아니라 아픔과 고통도 함께 나누셨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고, 그 품을 떠나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은 아버지의 마음을 열어 보이시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율법이 그어놓은 모든 선을 지우시며, 사마리아 여인의 오래된 아픔을 끝까지 들어 주셨고, 삭개오의 숨겨진 외로움까지 알아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밀착하셨고, 병든 자들에게 손을 포개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골고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넓게 벌리셨습니다. 대못이 손과 발을 뚫고 지나갈 때, 주님은 죽음의 형틀과 자신의 전 존재를 완전히 포개어 하나가 되셨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행동이 무엇을 예표하고 있었는지 드러납니다.
엘리사의 온기에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듯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와 포개어지신 주님의 온기 때문에, 죄로 차갑게 식어버린 우리 영혼에 다시 생명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골고다 십자가가 그 품의 신비가 완성된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빈 십자가를 바라보지 맙시다. 빈 십자가 위에 내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예수님께서 나를 품고 계십니다.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나를 품으시고,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을 이 고난주간에 더욱 깊이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엘리야·엘리사의 행동이 십자가 장면과 연결될 때 어떤 감동이 있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2. 내가 누군가의 아픔에 나를 포개어 줄 수 있는 한 가지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죄로 인해 차갑게 식어버린 우리를 살리시려 아늑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죽음의 형틀 위에 당신의 전 존재를 포개어 누우셨습니다. 우리의 저주와 밀착하셨고, 그 넓은 품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습니다. 그 희생의 온기가 우리 영혼에 닿아 비로소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번 고난주간, 우리도 주님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심장 소리를 닮아, 이제는 우리가 세상의 차가운 아픔 위로 자신을 포개어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영원히 품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