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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살리라

요한복음 12:24~26

김경진목사

2026.04.05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보이신 진정한 삶의 방식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큽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오는 이 환호로 오늘을 맞이합니다. 예수 부활의 소식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전해진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소망의 소식입니다.
또한 예수 부활의 소식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땅속에 묻힌 자들에게 주시는 회복과 위로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죄 없이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 거짓 증언으로 누명을 쓴 사람들, 악한 자들의 술수에 속절없이 당한 사람들, 그리고 사고와 병으로 이 땅에서 생명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소식은 위로이며, 달콤한 보상이자, 멋진 보복의 선언입니다. 예수 부활의 소식은 정의가 살아 있으며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소식이며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은 우리에게 또 어떤 메시지를 전해 줄까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정의의 승리와 영생의 소망, 억울한 자에게 주시는 위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된 소식을 넘어서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삶의 지침이요 삶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2026년의 부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수 부활 사건이 전해 주는 삶의 지혜와 방식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단 1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유일하고 소중한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혹시나 힘에 부치면 반칙을 사용해서라도 살아남는 법을 가르칩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정의와 공정, 예의, 윤리를 가르치지만, 실상 마음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분쟁, 그리고 정치적인 투쟁의 모습들을 보면 우리는 세상의 길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최대한 영토를 확장하고, 자원을 독점하며, 약한 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삶의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활의 사건을 통해 전해 주시는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방향입니다. 성경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죽어야 산다”, “죽으면 산다”라는 역설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26년 부활절은 어느 때보다도 의미가 큽니다.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강 대 강, 힘 대 힘, 보복과 응징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 속에서 주님은 부활절을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실까요? 우리가 이번 부활절을 보내면서 깊이 생각하며 회개해야 해야 할 주제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어야 사는” 그리고 “죽으면 사는” 비밀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후에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3b~24)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그곳에서 발아된 줄기와 가지, 뿌리가 결국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원리가 이미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라는 말씀과 함께 죽으심과 부활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보여 주실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은 물론 기적적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죽고 다시 사는 원리는 하나님께서 여러 곳에서 그 현상을 볼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잘 기억하여 너희도 삶 속에 이 원리를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25)

너희의 생명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생명을 희생할 수 있어야 진정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 길을 먼저 갈 것이니 그 길을 따라오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6)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조차도 그 길을 가시는 것이 쉽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주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 12:27~28a)

괴롭고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누가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내어놓고 싶겠습니까? “이때를 면하게 해 주십시오.” 이것 역시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자신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도 인지하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죽지 않으시고 그저 한 알의 밀알 그대로 계셨다면, 인류 역사에 구원이라는 큰 선물은 주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음을 뚫고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는 부활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이러한 “죽어야 사는” 그리고 “죽으면 사는” 비밀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진정한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삶의 지혜입니다. 죽으면 산다는 말씀은 남편과 아내, 자식과 부모, 이웃, 사업, 정치, 그리고 모든 관계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삶은 한 알의 밀알처럼 사라지는 듯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 길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분의 이야기를 오늘의 예화로 드리는 이유는, 오늘 4월 5일이 그분이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꼭 136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1889년 10월 4일,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Rev. Joseph Henry Davies)와 그의 누이 메리 타보르 데이비스(Miss Mary Tabor Davies)가 제물포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호주 시드니를 떠난 지 40여 일 만에 조선 땅을 밟은 첫 번째 호주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후 약 5개월 동안 두 사람은 서울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글을 어느 정도 쓸 수 있고, 설교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선교 지역을 부산으로 결정합니다. 1890년 3월 14일, 데이비스 선교사는 자신이 맡은 선교지인 부산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는 배를 타지 않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기로 결정합니다. 한국의 지형도 살피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순회 전도도 하며 가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길은 20여 일간의 기간이 예상되었습니다. 수원, 용인 공주를 거쳐 경상도에 이르는 500여 킬로미터의 긴 여정이었습니다.
3월에 출발하여 날이 좀 따뜻할 줄 알았는데, 그해는 생각보다 날씨가 매우 추웠다고 합니다. 또한 잦은 비가 내려서 이동하기에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게다가 136년여 전 조선 땅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여관도 제대로 없었을 것이고, 길도 척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벽안(碧眼)의 선교사가 그러한 곳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전도 활동을 하면서 내려가던 중에, 뜻밖의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도중에 그가 천연두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폐렴으로 번져 갔습니다. 부산에 도착하기 전 5일 동안은 이미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그는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부산에 마침내 도착한 날은 4월 4일이었습니다.
부산에 홀로 있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Dr. J. S. Gale)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가 그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 갑니다. 그리고 일본인 의사를 급히 불러서 치료해 보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부산에 도착한 지 꼭 하루 만인 4월 5일, 바로 136년 전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산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알고 떠났는데, 정작 부산에서는 단 하루만을 머무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선교지에서 “예수 믿으십시오”라는 한마디도 해 보지 못한 채 떠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훌륭하고 소명감이 넘치는 사람을 선교지에 단 하루만 두고 데려가셨을까요? 그는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선교사는 그가 택한 사역의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 법이다. 선교사의 길이야말로 내가 어릴 적부터 꿈꾸어 왔던 희망이며, 나의 청년기의 목표이며,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서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이렇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간절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열심히 선교사 준비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했던 부산에서 단 하루의 사역을 감당한 채, 그는 나이 서른세 살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 백팔십삼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의 누이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합니다. 의사 헤론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그는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호주 멜버른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첫 호주 선교사인 두 사람은 모두 한국을 떠나고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허무하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길은 막힌 길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길,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데이비스의 안타까운 죽음은 호주 교회의 한국 선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를 파송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에는 데이비스가 시작한 ‘조선 선교’의 사역을 이어 가겠다는 청년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해 1891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제임스 맥케이 목사(Rev. J. H. Mackay) 부부와 여선교사인 멘지스 양(Miss B. Menzies), 페리 양(Miss J. Perry) 그리고 퍼셋 양(Miss Fawcett) 등 제2진 선교사 5명을 한국으로 파송합니다. 이후 호주 교회는 120여 명 이상의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합니다.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항이 보이는 부산진 뒷산에 우선 안장했습니다. 하지만 후일 그의 장지인 부산은 호주 장로교회 한국 선교부의 약속의 땅이 됩니다. 수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부산을 밟았고, 끊임없이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펼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데이비스의 가족 중에서도 선교사로 한국에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데이비스의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Margaret Sandiman Davies)와 진 데이비스(Dr. Jean Davies)입니다. 마가렛은 일신 여학교의 교장으로 오랫동안 섬겼고, 진은 의사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마가렛 데이비스는 자신의 한국어 이름을 대마가례(代瑪嘉禮)로 지었습니다. ‘대’는 ‘데이비스’를 성으로 만든 것이기도 하지만, 한자로는 삼촌을 대신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삼촌의 뒤를 이어 자신이 선교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이 땅에서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은 그날이 1890년으로는 부활절 바로 전날인 성토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 올해로는 부활절인 4월 5일, 바로 오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진정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막힌 길, 죽음의 길, 패망의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열려 있는 생명의 길이며 소망의 길, 가장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길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막힌 것 같은 이 길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죽으면 살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말씀이 우리의 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길을 따라갑니다.>

우리는 오늘 부활절에 세례 예식을 베풉니다. 이것은 오랜 교회의 전통입니다. 과거의 세례는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방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물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거행된 세례 예식은 밀알의 원리를 삶에 적용하고 정착하는 시간입니다. 물속에 잠긴 것은 나의 옛 자가 땅에 묻어 죽는 것이고, 물에서 일어나는 것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6)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제 주님처럼 기꺼이 죽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가장 귀하게 여겨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사역 중에 극심한 우울증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사탄 정죄의 시달림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탄이 그의 귀에 대고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너는 실패자다”라고 속삭이며 절망의 무덤에 그를 집어넣을 때, 루터는 책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Baptizatus sum!”(밥티자투스 숨!, 나는 세례받았다!)

루터가 “나는 세례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세례 예식을 치른 사람이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선포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의 옛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부활의 생명에 연합된 자이기에 너는 결코 나를 정죄할 수 없다!” 이것이 루터의 고백입니다.
오늘 세례받는 여러분, 그리고 이미 세례받고 부활의 길을 걷고 있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때로 우리를 실패한 밀알처럼 볼지도 모릅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처럼 허무하게 죽으면 끝이 아니냐고 조롱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루터처럼 함께 외칩시다. “나는 세례 받은 사람이다!” 이 외침은 곧 “나는 부활의 사람이다”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께서 가신 길, 죽을 길을 따라갑니다. 그것이 진정 사는 길임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갑니다.
부활절은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날을 넘어, 내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시 확인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의 꽃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며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날입니다. 성도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죽으면 살리라.” 이 길이 진정 우리를 살리는 길임을 믿고 새로운 출발하는 복된 주님의 성도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He Who Dies Will Live

John 12:24-26

Jesus has risen. Truly He has risen.

We greet this day with the same shout that has been passed down from the early church.

The news of Jesus’ resurrection is like a beacon of light reaching a world spiraling toward despair. It is the message of hope given to everyone living in fear and the terror of death.

The news of Jesus’ resurrection is also a proclamation of restoration and consolation to those who suffered unjustly and were buried in the ground. The news of Jesus’ resurrection is consolation, sweet compensation, and a glorious declaration of vindication to innocent people who died in an unjust world; to those falsely accused by perjury; to those fallen prey to the dirty schemes and tricks of the wicked; and most unfortunately to those who suffered accidents or diseases and could not fully enjoy life on earth.

It is also a declaration that justice lives and that God rules the world with righteousness.

This world is full of contradictions. You may want to protest why the world God made is in such a state, but Scripture tells us that all these errors, sins, and contradictions come from sinful humans.

This is a world ruled by Satan, where evil triumphs and the wicked boast of their strength; the weak and powerless are plundered and killed, and many innocent people bear the cross like Jesus. Yet the news of Jesus’ resurrection tells us that nevertheless God will ultimately establish justice, judge the wicked, and comfort the wronged.

Therefore, the Easter we celebrate today cannot but be news of joy and hope for all living in this world of despair.

What other message do Jesus’ death and resurrection give us?

Jesus’ resurrection is not only the victory of justice, the hope of eternal life beyond death, consolation for the wronged, or the blessed news that we are reconciled to God and saved by faith. The resurrection event is also a guide to how we are to live on this earth.

Today, as we observe Easter 2026, we will consider through Scripture the way of life that Jesus’ resurrection teaches us.

Every person lives the one life given to them. Everyone wants that unique and precious life to be valuable, meaningful, and successful.

The world teaches us how we must survive no matter what. It teaches us to win competitions, to dominate by skill, and if you lack strength, even to cheat to survive. Of course it speaks of justice, fairness, courtesy, and ethics, but the true voice whispered to people’s hearts is that they must survive in this world at all costs, must not be a loser, and must be a victor who is not taken advantage of or deceived.

How does one survive? How can one survive?

Looking at the wars breaking out everywhere today, we can clearly see the path the world teaches. Use power when you have it, crush your enemy when you can, expand your territory, monopolize resources, and take from the weak—this is the way of life the world teaches us.

But the way of life our Lord teaches us through His resurrection is completely the opposite.

Through Jesu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the Bible proclaims the paradox “You must die to live,” “He who dies will live.” It tells us that this is the true wisdom for living in this world.

In this sense, Easter 2026 is more meaningful than ever.

In a world where missiles fly, where power is met with power, where strength is opposed by strength, and where revenge and retaliation rule, what is the Lord saying to us through this Easter? As we observe Easter 2026, what should we deeply consider and repent of?

Today’s passage records what Jesus said to the people after He entered Jerusalem, knowing He would soon be put to death:

“The hour has come for the Son of Man to be glorified. Very truly I tell you,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 (John 12:23–24 NIV)

Jesus knew He would be crucified and would rise again. But when He explained it, He did not describe His death and resurrection as some extraordinary miracle; He spoke of it by using a common, everyday phenomenon.

He is in effect saying, “Don’t you see that many fruits are produced by a kernel of wheat th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Doesn’t this kernel of wheat produce stalks, branches, roots, and many fruits? Don’t you know that this principle exists in many places in this world?”

Jesus’ forthcoming death on the Cross and His resurrection are surely miraculous events—undoubtedly the marvelous act of the Son of God—but the principle of dying and rising again is something God has already made visible in many places in this world so that we might understand it.

Remembering this principle, Jesus tells us that we too must live according to it:

“Anyone who loves their life will lose it, while anyone who hates their life in this world will keep it for eternal life.” (John 12:25 NIV)

In other words, Jesus is saying that we must be prepared to lose our life and be willing to sacrifice it in order to gain true life—a greater life, eternal life.

And Jesus says that He will go that way ahead of us and set the example; He calls us to follow that path.

“Whoever serves me must follow me; and where I am, my servant also will be. My Father will honor the one who serves me.” (John 12:26 NIV)

Yet even Jesus knew that walking that path would not be easy. He knew well how difficult it is to give up one’s life.

So the Lord goes on to say:

“Now my soul is troubled, and what shall I say? ‘Father, save me from this hour’? No, it was for this very reason I came to this hour. Father, glorify your name!” (John 12:27–28a NIV)

It is a painful path—a road that one would truly wish to avoid. Who wants to give up the precious life given to them? “Spare me this hour.” Everyone has a nature that wants to preserve life. How can one abandon that?

Yet the Lord knew that giving up His life would ultimately bring glory to God. He was certain this task had been entrusted to Him. And so He proceeded toward the Cross.

What was the outcome? By dying on the Cross He accomplished the astonishing work of saving all humanity. If the Lord had remained as a single grain and not died, there would have been no salvation for mankind. Because He died, His death made the way for countless lives to be born, producing the fruits of resurrection. Therefore, Jesus’ Cross was not a failure but a essential process for bearing life.

This secret of “dying to live,” or “he who dies will live,” is true wisdom for everyone living on earth.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the Lord taught us the true way to live on this earth.

Many have followed this way. I will tell the story of one such person. I share this story today because April 5 is the day he passed away—exactly 136 years ago.

On October 4, 1889, Reverend Joseph Henry Davies and his sister Miss Mary Tabor Davies arrived in Korea through Jemulpo Port. They were the first Australian missionaries to set foot on Joseon soil, arriving about forty days after leaving Sydney.

For about five months they studied Korean diligently in Seoul. In that short time, Reverend Davies could already write some Hangul and was able to preach.

After meeting missionary Underwood, they decided their mission field would be Busan. On March 14, 1890, Reverend Davies set out for Busan, his assigned field. He decided not to take a ship but to walk from Seoul to Busan, doing itinerant evangelism, surveying the land, and meeting people along the way.

The journey took about twenty days, passing through Suwon and Gongju toward Gyeongsang Province. Although it was March, the weather was colder than expected and frequent rain made travel difficult. Nevertheless, Davies continued his evangelistic work and made some progress as he went toward Busan.

But along the way he contracted smallpox, which developed into pneumonia. For five days before reaching Busan he was so ill he could not eat.

He arrived in Busan on April 4. Doctor J. S. Gale, a Canadian missionary who was alone in Busan, received word that Davies was in critical condition, rushed him to his home, and summoned a Japanese doctor. However, on April 5 exactly one day after his arrival—or 136 years ago today—Reverand Davies was called to his eternal home by God.

He had accepted Busan as his mission field and left knowing it was the calling God had given him, yet he spent only one day in Busan—the very place he was sent to—and then departed this life.

Why did this happen? Why did God take such a great man armed with a deep sense of calling from his mission field after only a single day there?

Doctor Davies wrote that a missionary never regrets the path of ministry he has chosen. He wrote that the path of a missionary was his hope and dream since childhood. It was the goal of his youth, and his earnest desire was to work for the Lord among those who do not yet know Him.

Yet that earnest desire—the missionary life—was fulfilled in Busan for only one day.

At the time of Davies’ death, his sister Mary also suffered from pneumonia for a while, but with Doctor Heron’s treatment she recovered and left Korea, returning to Melbourne on July 18 of that year.

It seemed the Victoria 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s mission to Korea had ended in vain. But something remarkable happened: Davies’s tragic death sparked a great interest in Korea missions within the Australian church.

In Victoria Presbyterian Church that had sent Davies to Korea, young people lined up to continue the “Joseon mission” Davies had begun. In the following year, 1891, the Victoria Presbyterian Church sent a second group of five missionaries to Korea: Reverend J. H. Mackay and his wife, Miss B. Menzies, Miss J. Perry, and Miss Fawcett.

Doctor Gale initially buried missionary Davies on the hill behind Busanjin overlooking Busan Harbor. Later, Busan became the “Promised Land” of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to Korea.

Later members of Davies’ family also came to Korea as missionaries: his niece Margaret Sandiman Davies and Doctor Jean Davies. The former served as principal of Ilshin School, while the latter served as a physician.

Particularly, Margaret Davies took a Korean name, Dae Ma-ga-rye (대마가례, 代瑪嘉禮). As the Chinese characters suggest, the name expressed that she would continue the mission legacy of her uncle, Reverend Davies.

The day a kernel of wheat fell and died was the day before Easter in 1890 and in 2026 it is exactly today, April 5 Easter.

Dear Friends, this is the way of life for those wh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and the path of disciples who follow the Lord. It may seem difficult, but it is the way that gives life to us; what looks like a blocked path, a dead end, a path of death and defeat becomes the way of true life and hope that produces the most abundant fruit.

Today we will have a baptism ceremony during this Easter service. This is an ancient church tradition. In the past, baptism was performed by full immersion. Going into the water signifies death, and rising from the water signifies the birth of new life.

The baptism that will be performed shortly is the time to adopt and apply the principle of the kernel of wheat in my life. Being immersed in water means my old self is buried and dies, like Reverend Davies. Rising from the water is participating in the resurrection, being reborn into the life of Jesus.

The Lord said:

“Whoever serves me must follow me; […] My Father will honor the one who serves me.” (John 12:26 NIV)

Those wh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now willingly choose the path of dying like the Lord. When they do so, God will esteem their lives most highly.

Reformer Martin Luther reportedly suffered severe depression and attacks of Satan’s condemnation during his ministry. When Satan whispered in his ear, “How can a sinner like you do the work of God? You are a failure,” driving him toward the grave of despair, Luther would strike his desk and shout loudly:

“Baptizatus sum! (I am baptized!)”

When Luther cried, “I am baptized,” it was not mere pride in having performed a ritual. It was a proclamation: “Begone, Satan! My old self has already died with Christ on the Cross and been buried!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who lives in me! Since I am already united with the life of the resurrection, you can never condemn me!”

To those who receive baptism today, and to all who have already been baptized and are walking the path of resurrection: The world may sometimes treat us like failed kernels of wheat. It may mock us, as it mocked missionary Davies, saying, “If you die so pointlessly, isn’t that the end?” But each time, cry out like Luther: “I am baptized!” That cry is a declaration: “I am a resurrection person.” It is a confession of faith that death is not the end but the beginning of life.

The Easter we celebrate today is not merely a day to recall a past event. It is the day for us to believe that when we become “a kernel of wheat” and die in our homes and workplaces, the flower of resurrection will blossom there. Beloved saints, the Lord who conquered death and rose is with us forever. “He who dies will live.” May we all believe that this is the way that truly saves us and make a new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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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4~26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보이신 진정한 삶의 방식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큽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오는 이 환호로 오늘을 맞이합니다. 예수 부활의 소식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전해진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소망의 소식입니다.
또한 예수 부활의 소식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땅속에 묻힌 자들에게 주시는 회복과 위로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죄 없이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 거짓 증언으로 누명을 쓴 사람들, 악한 자들의 술수에 속절없이 당한 사람들, 그리고 사고와 병으로 이 땅에서 생명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소식은 위로이며, 달콤한 보상이자, 멋진 보복의 선언입니다. 예수 부활의 소식은 정의가 살아 있으며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소식이며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은 우리에게 또 어떤 메시지를 전해 줄까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정의의 승리와 영생의 소망, 억울한 자에게 주시는 위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된 소식을 넘어서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삶의 지침이요 삶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2026년의 부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수 부활 사건이 전해 주는 삶의 지혜와 방식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단 1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유일하고 소중한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혹시나 힘에 부치면 반칙을 사용해서라도 살아남는 법을 가르칩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정의와 공정, 예의, 윤리를 가르치지만, 실상 마음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분쟁, 그리고 정치적인 투쟁의 모습들을 보면 우리는 세상의 길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최대한 영토를 확장하고, 자원을 독점하며, 약한 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삶의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활의 사건을 통해 전해 주시는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방향입니다. 성경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죽어야 산다”, “죽으면 산다”라는 역설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26년 부활절은 어느 때보다도 의미가 큽니다.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강 대 강, 힘 대 힘, 보복과 응징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 속에서 주님은 부활절을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실까요? 우리가 이번 부활절을 보내면서 깊이 생각하며 회개해야 해야 할 주제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어야 사는” 그리고 “죽으면 사는” 비밀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후에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3b~24)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그곳에서 발아된 줄기와 가지, 뿌리가 결국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원리가 이미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라는 말씀과 함께 죽으심과 부활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보여 주실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은 물론 기적적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죽고 다시 사는 원리는 하나님께서 여러 곳에서 그 현상을 볼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잘 기억하여 너희도 삶 속에 이 원리를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25)

너희의 생명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생명을 희생할 수 있어야 진정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 길을 먼저 갈 것이니 그 길을 따라오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6)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조차도 그 길을 가시는 것이 쉽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주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 12:27~28a)

괴롭고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누가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내어놓고 싶겠습니까? “이때를 면하게 해 주십시오.” 이것 역시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자신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도 인지하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죽지 않으시고 그저 한 알의 밀알 그대로 계셨다면, 인류 역사에 구원이라는 큰 선물은 주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음을 뚫고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는 부활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이러한 “죽어야 사는” 그리고 “죽으면 사는” 비밀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진정한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삶의 지혜입니다. 죽으면 산다는 말씀은 남편과 아내, 자식과 부모, 이웃, 사업, 정치, 그리고 모든 관계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삶은 한 알의 밀알처럼 사라지는 듯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 길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분의 이야기를 오늘의 예화로 드리는 이유는, 오늘 4월 5일이 그분이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꼭 136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1889년 10월 4일,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Rev. Joseph Henry Davies)와 그의 누이 메리 타보르 데이비스(Miss Mary Tabor Davies)가 제물포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호주 시드니를 떠난 지 40여 일 만에 조선 땅을 밟은 첫 번째 호주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후 약 5개월 동안 두 사람은 서울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글을 어느 정도 쓸 수 있고, 설교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선교 지역을 부산으로 결정합니다. 1890년 3월 14일, 데이비스 선교사는 자신이 맡은 선교지인 부산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는 배를 타지 않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기로 결정합니다. 한국의 지형도 살피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순회 전도도 하며 가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길은 20여 일간의 기간이 예상되었습니다. 수원, 용인 공주를 거쳐 경상도에 이르는 500여 킬로미터의 긴 여정이었습니다.
3월에 출발하여 날이 좀 따뜻할 줄 알았는데, 그해는 생각보다 날씨가 매우 추웠다고 합니다. 또한 잦은 비가 내려서 이동하기에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게다가 136년여 전 조선 땅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여관도 제대로 없었을 것이고, 길도 척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벽안(碧眼)의 선교사가 그러한 곳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전도 활동을 하면서 내려가던 중에, 뜻밖의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도중에 그가 천연두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폐렴으로 번져 갔습니다. 부산에 도착하기 전 5일 동안은 이미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그는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부산에 마침내 도착한 날은 4월 4일이었습니다.
부산에 홀로 있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Dr. J. S. Gale)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가 그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 갑니다. 그리고 일본인 의사를 급히 불러서 치료해 보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부산에 도착한 지 꼭 하루 만인 4월 5일, 바로 136년 전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산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알고 떠났는데, 정작 부산에서는 단 하루만을 머무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선교지에서 “예수 믿으십시오”라는 한마디도 해 보지 못한 채 떠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훌륭하고 소명감이 넘치는 사람을 선교지에 단 하루만 두고 데려가셨을까요? 그는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선교사는 그가 택한 사역의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 법이다. 선교사의 길이야말로 내가 어릴 적부터 꿈꾸어 왔던 희망이며, 나의 청년기의 목표이며,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서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이렇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간절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열심히 선교사 준비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했던 부산에서 단 하루의 사역을 감당한 채, 그는 나이 서른세 살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 백팔십삼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의 누이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합니다. 의사 헤론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그는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호주 멜버른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첫 호주 선교사인 두 사람은 모두 한국을 떠나고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허무하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길은 막힌 길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길,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데이비스의 안타까운 죽음은 호주 교회의 한국 선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를 파송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에는 데이비스가 시작한 ‘조선 선교’의 사역을 이어 가겠다는 청년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해 1891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제임스 맥케이 목사(Rev. J. H. Mackay) 부부와 여선교사인 멘지스 양(Miss B. Menzies), 페리 양(Miss J. Perry) 그리고 퍼셋 양(Miss Fawcett) 등 제2진 선교사 5명을 한국으로 파송합니다. 이후 호주 교회는 120여 명 이상의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합니다.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항이 보이는 부산진 뒷산에 우선 안장했습니다. 하지만 후일 그의 장지인 부산은 호주 장로교회 한국 선교부의 약속의 땅이 됩니다. 수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부산을 밟았고, 끊임없이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펼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데이비스의 가족 중에서도 선교사로 한국에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데이비스의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Margaret Sandiman Davies)와 진 데이비스(Dr. Jean Davies)입니다. 마가렛은 일신 여학교의 교장으로 오랫동안 섬겼고, 진은 의사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마가렛 데이비스는 자신의 한국어 이름을 대마가례(代瑪嘉禮)로 지었습니다. ‘대’는 ‘데이비스’를 성으로 만든 것이기도 하지만, 한자로는 삼촌을 대신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삼촌의 뒤를 이어 자신이 선교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이 땅에서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은 그날이 1890년으로는 부활절 바로 전날인 성토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 올해로는 부활절인 4월 5일, 바로 오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진정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막힌 길, 죽음의 길, 패망의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열려 있는 생명의 길이며 소망의 길, 가장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길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막힌 것 같은 이 길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죽으면 살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말씀이 우리의 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길을 따라갑니다.>

우리는 오늘 부활절에 세례 예식을 베풉니다. 이것은 오랜 교회의 전통입니다. 과거의 세례는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방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물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거행된 세례 예식은 밀알의 원리를 삶에 적용하고 정착하는 시간입니다. 물속에 잠긴 것은 나의 옛 자가 땅에 묻어 죽는 것이고, 물에서 일어나는 것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6)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제 주님처럼 기꺼이 죽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가장 귀하게 여겨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사역 중에 극심한 우울증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사탄 정죄의 시달림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탄이 그의 귀에 대고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너는 실패자다”라고 속삭이며 절망의 무덤에 그를 집어넣을 때, 루터는 책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Baptizatus sum!”(밥티자투스 숨!, 나는 세례받았다!)

루터가 “나는 세례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세례 예식을 치른 사람이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선포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의 옛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부활의 생명에 연합된 자이기에 너는 결코 나를 정죄할 수 없다!” 이것이 루터의 고백입니다.
오늘 세례받는 여러분, 그리고 이미 세례받고 부활의 길을 걷고 있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때로 우리를 실패한 밀알처럼 볼지도 모릅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처럼 허무하게 죽으면 끝이 아니냐고 조롱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루터처럼 함께 외칩시다. “나는 세례 받은 사람이다!” 이 외침은 곧 “나는 부활의 사람이다”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께서 가신 길, 죽을 길을 따라갑니다. 그것이 진정 사는 길임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갑니다.
부활절은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날을 넘어, 내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시 확인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의 꽃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며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날입니다. 성도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죽으면 살리라.” 이 길이 진정 우리를 살리는 길임을 믿고 새로운 출발하는 복된 주님의 성도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죽으면 살리라” (요12:24~26)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65, 160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내 것을 내어놓거나 포기했을 때 오히려 더 큰 것을 얻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세상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을 가르칩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실력으로 누르고, 힘이 있을 때 두드려 부수는 것이 세상이 알려주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의 사건을 통해 전해주시는 삶의 방식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죽어야 산다, 죽으면 산다”는 역설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지혜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특별한 기적적 사건이 아닌, 일상의 현상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생명을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도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라고 고백하실 만큼 이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며 결국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고, 그 죽음을 뚫고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는 부활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이 길을 따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입니다. 그는 조선 땅을 밟은 첫 번째 호주 선교사로, 부산을 향해 서울에서 걸어 내려오던 중 천연두와 폐렴에 걸렸고, 부산에 도착한 지 단 하루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허무한 죽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호주 교회에 한국 선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듬해 5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으며, 그의 가족들까지 조선 땅을 밟는 놀라운 열매로 이어졌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은 그날이, 1890년으로는 부활절 전날이었고, 2026년 오늘로는 부활절 당일입니다.

죽어야 사는, 죽으면 사는 비밀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진정한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베푸는 세례 예식은 바로 이 밀알의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는 시간입니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나의 옛 자아가 땅에 묻혀 죽는 것이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동참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탄의 정죄가 극심할 때마다 책상을 치며 외쳤습니다. “나는 세례받았다!” 이것은 “나의 옛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내 안에 사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포였습니다. 오늘 부활절은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날이 아닙니다. 나의 가정과 일터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가겠다고 결단하는 날이 바로 오늘 부활절입니다. “죽으면 살리라.” 바로 이 길이 진정 우리를 살리는 길임을 믿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데이비스 선교사의 이야기에서 어떤 도전을 받았는지 나누어 봅시다.

2. 내 가정과 일터에서 내가 밀알이 되어 죽어질 수 있는 한 가지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 오늘 이 부활절에 우리는 “죽어야 산다”는 하늘의 역설을 듣습니다.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님처럼, 그리고 이 땅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던진 데이비스 선교사처럼, 우리 또한 나를 내어주어 남을 살리는 부활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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