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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신앙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으로 상징되는 상수리나무를 베어 버리시겠다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과 그가 전해야 할 고통스러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8)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하지만 그가 받은 소명은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계획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9~10)
놀랍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사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1~12)
하나님은 이 심판을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이미지로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그루터기는 남겨 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는 가지와 잎사귀가 많고 높게 자라 숲을 이루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들의 이미지는 화려함과 무성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을 베어 버리시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앞선 이사야 1장 말씀에서도 상수리나무의 이미지를 사용하셨습니다.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사 1:28~30)
상수리나무는 백성들이 자랑으로 여기며 의지하고 기뻐하는 나무였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요? 에스겔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죽임 당한 시체들이 그 우상들 사이에, 제단 사방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겔 6:13)
상수리나무의 아래에는 백성들이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던 자리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상수리나무는 우상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또한 상수리나무는 백성들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와 군사력, 그리고 화려한 삶을 상징했습니다. 당시 유다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웠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가옥에 가옥을, 땅에 땅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재물이 늘어나고 있었을 때, 성경은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사 2:7)
당시 여인들은 귀고리와 코고리, 머리 망사, 발목 고리, 세마포 옷, 머릿수건과 너울까지 사용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3장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상수리나무는 백성들이 의지하고 자랑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같이 섬기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상수리나무를 베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사야가 받은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은 때로 소중히 여기던 상수리나무가 베이는 아픔을 겪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여기까지 상수리나무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짚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황폐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기뻐하던 상수리나무와 밤나무는 베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겠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그들이 알게 될까 봐 염려하신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10)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해졌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일까요? 한 가지 더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사 6:9)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가서 백성에게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명하시는 이 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저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확정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깨닫게 될 때 돌아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백성이 깨닫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어 깨달을까 봐 염려하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사야가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속에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읍이 황폐해지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할”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깨닫지 못할 기간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할 때까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여지고, 가옥에 사람이 없어지며,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베임을 당하면, 그때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말씀은 그때라도 꼭 깨달으라는 초청의 말씀입니다. 그때라도 꼭 돌아와서 이 기회마저 놓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재난이 닥치기 전에 미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삶의 방향을 바꾸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죄의 길로 가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매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풍요롭게 살아갈 때는 그 말씀이 제대로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보기는 보지만, 그 말씀을 알 길이 없습니다. 눈이 열리지 않고, 마음이 열리지 않고, 귀가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릴 뿐입니다. 마음이 둔하게 되어서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으로, 나에게 사랑스럽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내리시는 형벌이 아니라, 유다 백성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속성이며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까지일까요? 내가 자랑하던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베임을 당할 때까지입니다.
인생이라는 숲을 가꾸다 보면 뜻하지 않은 도끼질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평화롭던 나의 숲이 일순간에 황폐해지고, 내가 공들여 키운 상수리나무가 힘없이 쓰러지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건강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위기와 재난, 장애, 사업의 실패 등을 경험할 때 우리는 상수리나무의 쓰러짐을 경험합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진정 현실을 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래 무신론자였습니다. 하지만 회심 후에 기독교를 변호하는 변증가로 수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매우 논리적이었고 당당한 ‘울창한 나무’ 같았습니다. 심지어 고통에 대해서도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1940)라는 책을 쓸 만큼 지성적으로 완벽한 신앙의 답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에 많이 들어 보셨을 한 문장이 있습니다. “고통은 잠자는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문장입니다. 이 표현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문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인생의 도끼날이 닥치게 됩니다. 뒤늦게 만나 깊이 사랑했던 아내 조이(Joy)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내를 잃은 루이스는 자신이 썼던 수많은 신앙의 글들이 무색해질 만큼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집이 단 한 번의 타격에 무너졌다면, 그것은 그것이 카드로 만든 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가 쌓아 올렸던 신앙은 카드로 만들어진 집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일기는 후에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 1961)이라는 책으로 출판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의 본명이 아닌 N.W. 클러크(N.W. Clerk)라는 가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신앙적 회의가 너무나 적나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사후에야 그의 저서임이 밝혀진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신랄한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절규하며, 그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잔인한 ‘우주의 가학자(Cosmic Sadist)’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야말로 잎사귀와 가지가 모두 잘려 나간 비참한 그루터기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밑동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그동안 믿어 왔던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상상하고 만들어 낸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의 화려한 가지였던 지성적인 논리와 명성이 잘려 나간 후에, 비로소 그는 ‘장식 없는 하나님’,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의 신앙은 이전처럼 화려해지진 않았지만, 훨씬 더 깊고 단단해져 갔습니다. 그는 고통에 관한 책을 쓸 정도로 고통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이 고난을 겪고 나서야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상수리나무를 베어 내시는 것은 우리를 살리고 더 귀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가지치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수리나무가 잘려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자 저주일까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예를 하는 분들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은 때로 가지를 자르는 일을 합니다. 이를 원예학에서는 ‘전정(Pruning, 가지치기)’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무를 자르는 행위가 아니라, 에너지를 재분배하여서 나무의 수명을 늘리고 결실을 극대화하는 고도의 전략입니다. 나무의 가지가 너무 무성하면 뿌리에서 흡수한 양분이 모든 잎사귀와 잔가지로 흩어집니다. 이를 ‘정단우성(Apical dominance)’의 분산이라고 합니다.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열매를 맺거나 줄기를 굵게 만드는 데 쓸 에너지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가지를 치면 가지들로 가던 양분이 남아 있는 핵심 줄기와 뿌리 근저의 ‘잠재아(Latent bud, 숨은 눈)’로 집중됩니다. 이것은 양분의 집중과 관련되어 있는데, 종자가 좋지 못할 때는 나무를 완전히 베어 내고 새순을 붙여서 새로운 종자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사야 5장에는 포도원의 노래가 나옵니다. 한 농부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그만 들포도를 낸 것을 한탄하는 노래입니다. 만약 이렇게 포도나무가 좋지 않은 열매를 맺는다면 농부는 어떻게 할까요? 나무줄기를 모두 베어 새 나무를 접붙이거나, 다시 새순을 내어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무를 베시는 것은 언뜻 보기에 심판과 절망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선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랑하고 기뻐하지만 결국 들포도를 내는 나무는 베어 버리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무를 베어 내시는 이유입니다.
사실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당하는 입장에는 너무나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것은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C.S. 루이스도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의 가지치기를 통해 남겨진 자신의 그루터기에 대하여 말한 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그루터기를 설명하면서, 그는 이것이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가지가 잘리는 고통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렇게도 아끼던 나무가 베이는 경험은 내 사지가 잘려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일 것입니다.
그루터기만 남겨지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며 처절하고 견디기 힘든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얻고자 우리의 가지를 치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나무 밑동까지도 도끼로 내리치십니다. 암이 번져 갈 때 아낌없이 신체 일부를 도려내야 하듯,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모든 것을 도려내십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사랑하는 상수리나무를 베어 내십니다.
<그루터기만 남은 때는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시간이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순이 돋아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루터기를 남겨 두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루터기는 남겨진 아무런 나무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그루터기들이 남겨지겠지만, 모든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잘려 나가 결국 죽게 되는 나무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린 그루터기들 중에서 생명의 싹이 솟아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뿌리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의 씨앗이 들어 있을 때입니다.
뿌리가 살아 있으면, 그 나무는 잘려 나갈 때 도리어 강력한 활동을 시작합니다. 열심히 양분을 빨아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뿌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무성한 사회적인 관계, 분주한 행동들, 세속적인 욕심의 가지가 잘려 나갈 때,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내면의 본질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나무에 생명을 공급하는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양분을 빨아올려 생명을 이어 갑니다.
이 뿌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뿌리는 기도와 말씀, 찬송, 감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때가 되면 말씀이 깨달아지고 보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다시 나의 말씀으로 들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게 되며,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 가게 됩니다. 이것이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 그루터기 신앙이란, 그저 남아 있는 어떤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나는 그루터기는 뿌리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루터기의 마지막 희망은 뿌리를 깊이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다시 바꾸어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베어져 아무 힘이 없을 때, 땅은 그루터기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은 더 단단히 그것을 움켜쥐고 뿌리에 영양을 공급합니다.
혹시 그루터기만 남은 것 같은 상황 속에 있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붙잡고 집중하며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뿌리가 땅을 붙들고 있는 것일까요? 땅이 뿌리를 붙들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은 땅이 뿌리를 힘차게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껏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붙잡아 주고 계십니다.
또한 그루터기는 ‘기다림의 상징’입니다.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만 합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는 성도 여러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의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하시며, 생명 줄을 연결시켜 주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돋아나게 하실 새싹은 무엇일까요? 이사야서 1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 11:1~2)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생명의 나무가 우리 안에서 싹이 나고 자랄 것입니다. 못된 들포도를 내는 나의 옛 자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포도나무가 되어 주셔서 우리에게 새싹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고통의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며, 공의로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에 띠를 삼으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루터기 신앙입니다.
나무의 베임은 멸망 같지만 살리는 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고난과 절망스러운 현실은 도리어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게 되는 역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며 그루터기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 설 때,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이며 우리를 살리시는 마지막 가지치기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때 믿음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립시다. 이것이 부활의 믿음이자 그루터기의 신앙이며, 고난과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Faith of the Stump
Isaiah 6:8–13
Today’s passage contains the scene of God calling Isaiah as a prophet and the painful message he had to deliver.
Isaiah hears the voice of God saying, “Whom shall I send, and who will go for us?” and responds to God’s call: “Here am I. Send me!” (Isaiah 6:8 NIV)
Sadly, however, his commission was to proclaim God’s judgment against the people.
First, Isaiah hears God’s plan to dull the people’s hearts so that they will not understand:
“He said, ‘Go and tell this people: Be ever hearing, but never understanding; be ever seeing, but never perceiving.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calloused; make their ears dull and close their eyes. Otherwise they might see with their eyes, hear with their ears,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turn and be healed.’” (Isaiah 6:9–10 NIV)
After hearing these shocking, hard-to-understand words, Isaiah asks God, “For how long, Lord?” And the Lord answers:
“Until the cities lie ruined and without inhabitant, until the houses are left deserted and the fields ruined and ravaged, until the Lord has sent everyone far away and the land is utterly forsaken.” (Isaiah 6:11–12 NIV)
God then explains this judgment with the image of terebinth and oak trees being cut down. Yet He says He will leave stumps.
Terebinth and oak are tall, broad, leafy trees that form forests. The image of these trees symbolizes splendor and abundance. But God says He will cut those trees down.
God had already used the image of the oak in Isaiah 1:29:
“But rebels and sinners will both be broken, and those who forsake the Lord will perish. You will be ashamed because of the sacred oaks in which you have delighted; you will be disgraced because of the gardens that you have chosen. You will be like an oak with fading leaves, like a garden without water.” (Isaiah 1:28–30 NIV)
The oak was something that the people of Israel had taken pride in, relied upon, and delighted in.
What was it? Ezekiel gives a similar description:
“[…] when their people lie slain among their idols around their altars, on every high hill and on all the mountaintops, under every spreading tree and every leafy oak—places where they offered fragrant incense to all their idols.” (Ezekiel 6:13 NIV)
Under the oaks, the people worshiped foreign gods and idols. In short, the oak was the object of their faith.
Furthermore, the oak symbolized the material prosperity, military strength, and lavish lifestyle that the people enjoyed. At that time Judah was materially prosperous; the wealthy increased their wealth to the point of adding houses to houses:
“Their land is full of silver and gold; there is no end to their treasures. Their land is full of horses; there is no end to their chariots.” (Isaiah 2:7 NIV)
Women of the time adorned themselves with earrings, nose rings, hairnets, ankle chains, fine linen garments, headscarves, and veils, living in splendor. Their luxurious lives are described in detail in Isaiah 3.
In short, the oak stands for everything the people depended on, loved, and took pride in. But God declares He will cut down that oak. This is the very message of judgment that Isaiah received from God.
So far, I’ve given a primary summary of today’s passage. Now let’s examine the parts of the text that are difficult to understand.
God told Isaiah that His judgment was certain. The people would be laid waste, and the terebinth and oak trees they delighted in would be cut down.
But God’s words to Isaiah before that are hard to grasp. God says He will make this people hear but never understand, see but never perceive. He even says, “Otherwise they might see with their eyes, hear with their ears,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turn and be healed.”
Why would God say this? Does it mean God’s judgment is so certain?
There is another puzzling aspect. God commands Isaiah to deliver exactly this message to the people: “Go and tell this people: ‘Be ever hearing, but never understanding; be ever seeing, but never perceiving.’”
We can accept that God’s will is that they not understand; but why does God tell Isaiah to proclaim it? What on earth is the meaning of this task that God gives to Isaiah?
As I meditated on this passage, I discovered something amazing. This message is not God’s proclamation of His certain judgment; it is actually His invitation to perceive and to return.
God did say He would make the people unable to understand. But then, Isaiah asks, “For how long, Lord?” This question contains a critical clue.
God answers, “Until the cities lie ruined and without inhabitant, until the houses are left deserted and the fields ruined and ravaged.”
Read in reverse, this means: when your cities lie waste, when houses are empty, when the terebinth and oak you delighted in are cut down, then you will understand — or rather, you must understand.
Therefore, these words of God are His invitation to understand at all costs at that time. He is telling His people to not miss that opportunity.
Looking at our lives, it’s the same.
How good it would be if we could hear God’s word before disaster strikes, realize it, change course, and live! To meditate on God’s word daily, avoid paths of sin, not be swayed by evil, and live to please God — how good that would be! But our lives are not like that.
We hear God’s word but we do not truly understand. We see but do not really perceive. It sounds like a message for others, and our hearts grow dull so that we do not recognize the warnings given to us. That is our everyday reality.
Therefore, the command God gave Isaiah — that they see but not perceive, hear but not understand — is not a punishment uniquely imposed on Israel; rather, it describes the people’s condition, our common human tendency. We see but do not perceive; we hear but don’t understand. Until when? Until we see our oaks cut down.
In life, we sometimes face such experiences. If we compare life to a forest, we sometimes meet unexpected axes. We meet times when our peaceful forest becomes desolate, when the trees we so dearly grew and the oaks we delighted in fall lifelessly.
When we lose our health, when we lose our loved ones, when we face crises at work, when great disasters strike, when accidents occur, when business fails — then we experience the felling of our oaks. Only then do we truly see our reality. Only then do we perceive God’s will and heart for us. We come to understand the Word. We begin to hear the Lord’s voice.
Let me tell you about C. S. Lewis, the author of The Chronicles of Narnia, whom you may well know of.
Lewis had been an atheist but, after his conversion, wrote many books defending Christianity. He was like a strong, flourishing tree in terms of faith, for his writings were extremely logical and confident. Intellectually, he gave the most perfect answer to the problem of suffering, as is evidenced in his book The Problem of Pain (1940). This famous sentence from his book may sound familiar to you: “Pain is God’s megaphone to rouse a deaf world.” This statement continues to inspire many to this day.
Yet the axe finally fell on him. Joy, the wife he met later in life and loved deeply, died of cancer. This loss shattered Lewis so completely that his many writings on faith seemed to pale before his personal devastation.
He wrote in his journal: “If my house has collapsed at one blow, that is because it was a house of cards.” When suffering finally came, the faith he had built collapsed like a house of cards.
That journal was later published as A Grief Observed (1961). At first it was issued under the pseudonym N. W. Clerk because his spiritual doubts were so raw. After his death it became known that Lewis was the author.
In A Grief Observed, Lewis asks, “Where is God?” and even calls God not a God of love but a “Cosmic Sadist.” Lewis had been reduced to a miserable stump with all its leaves and branches cut away.
But from that stump of despair a change began. Lewis realized that what he had been believing in was not the real God but the image of God he had imagined and created. Only after his splendid branches—his intellectual reasoning and reputation—had been cut away did he finally face God as He is, God without any ornamentation.
His faith, though no longer glamorous, became far deeper and firmer. From that broken stump he developed a genuine empathetic faith that truly understood the suffering of others.
Although he had seemed to understand suffering well enough to write about it, he gained real insight only after experiencing his own affliction. He came to see God in a new light; he came to see the Word in a new light and understand it. This is the benefit we gain from experiencing the cutting down of our oak.
Now, let’s ask this question: is the cutting down of our oak God’s judgment and curse? On the surface, yes.
But there is another reason God uses the image of trees to deliver His message.
We can learn wisdom from horticulture. Those who cultivate trees sometimes cut or trim them.
In horticulture this is called pruning: it is not merely cutting but a refined strategy to redistribute life energy, extend the tree’s life, and maximize fruit. When a tree’s branches are overly abundant, the nutrients taken up by the roots are dispersed through all the leaves and twigs. This dispersal of apical dominance makes the tree look lush outwardly but leaves insufficient energy for producing fruit or thickening the main stem. When branches are cut, however, nutrients that were going to those parts immediately stop going there; instead they concentrate in the remaining main stem and the latent buds near the root.
Pruning is done merely to concentrate resources; but when the seed is poor, a tree may be completely cut down and a new shoot grafted to produce a new variety.
Isaiah contains The Song of the Vineyard. This song is a lament about a farmer planting an excellent vine only to see it produce wild grapes. What should be done if a vine produces bad fruit? Won’t the farmer have to cut the trunk and graft a new vine, or hope that new shoots will bud to bear good fruit?
Thus, God’s cutting down of all trees may at first seem like judgment and despair. But in truth it is God’s last choice to open new possibilities. God cuts down the tree we love, boast in, and delight in—the tree that eventually produces only wild grapes—in order to open new possibilities. This the very reason that God cuts our trees.
This is never easy to bear. From the tree’s perspective it is even harder. Leaving only the stump is unbearable.
In his book, Lewis also speaks of the stump left by God’s pruning. In describing the stump God left in him after losing his beloved wife, he writes that it was as if his arms and legs had been chopped off.
Being cut to the stump is an extremely painful, devastating, and unbearable trial.
Yet God prunes our branches and even puts an axe to the base of our trunk to get good fruit. Just as we need to decisively remove parts of our organs to stop the spread of cancer, God sometimes takes away everything to save us. He cuts and fells the oak we love and delight in.
So what should we do when that happens? What does it mean that God leaves a stump?
A stump is not merely a leftover piece. When trees are cut, many stumps will remain; but not every stump produces new shoots. More often the stump will die.
However, sometimes shoots of life spring from a remaining stump. When does that happen? When the roots are alive. When the roots remain healthy. And when the seed of life remains.
If the roots are alive, the tree, when cut, will vigorously draw up nutrients. It will pull moisture and nutrients from the ground.
Similarly, when the branches of our lives are cut away—such as our luxuriant social relationships, busy activities, and worldly desires—our spiritual energy concentrates on a vertical relationship with God and on the essence of our inner self.
Our roots sink deeply into the soil that supplies life, drawing up nutrients to continue life.
What are those roots? Aren’t they prayer, the Word, praise, and thanksgiving? As we read the Word, we understand and perceive it. As we praise and pray, we learn the heart of God. This is to put down roots.
The faith of the stump does not merely mean what is left behind.
A stump that comes back to life needs healthy roots. Roots must be actively put down into the ground to rise again. Only then can true life be raised up.
Dear friends, as we have seen, we cannot properly understand until we experience desolation, the loss of branches, and the felling of our oaks. Until then, we cannot see life clearly or know God properly. We can neither understand the heart of God.
When our oak is cut and we experience desolation, then we finally come to know and understand. But not everyone does. This happens only by God’s grace given to those He has chosen.
What should we do then? We must put down our roots to the one place, the source of life. That is the only way to live. We must cling to the Lord who is life, hold fast to the Word, pray, and deepen our faith through praise, thanksgiving, dedication, and service. Only then will we have hope.
The last hope of the stump is to sink its roots deeply into the ground.
But this expression needs to be rephrased.
The ground here is “God’s faithfulness.” When a tree is cut and powerless, the ground does not push the stump away; rather the ground grips it more tightly and supplies nutrients to its roots.
Are there any among you who have become stumps because of a disaster?
You are not the one clinging to the ground. You are not the one gripping God. It is God’s faithful hand—the ground—that is holding your roots tightly. When the roots yield to the ground, the ground gives all its nutrients to the roots.
When we hold fast to the Word, pray, sing praises, and entrust ourselves to God’s hand, the Lord will provide us with life.
One more thing: the stump is a symbol of waiting. Until a new shoot sprouts from the stump, one must endure a time of silence that seems as if nothing is happening outwardly. Those of you who are suffering now, do you feel as if nothing is changing? But even at this moment our faithful God is powerfully supplying the nourishment of life to our souls. Through the Word and prayer, our Lord touches our hearts and breathes life into our souls.
So, what is the new shoot that God grows in us?
Let’s look at Isaiah 11:
“A shoot will come up from the stump of Jesse; from his roots a Branch will bear fruit. The Spirit of the Lord will rest on him—the Spirit of wisdom and of understanding, the Spirit of counsel and of might, the Spirit of the knowledge and fear of the Lord—” (Isaiah 11:1–2 NIV)
It is none other than our Lord Jesus Christ, the tree of life, who grows and sprouts within us. Not our old self, but the Lord comes to us as the true vine.
Therefore, the culmination of our suffering and the painful felling of our oak is union with Jesus Christ within us.
This is to fear the Lord, delight in Him, and to clothe ourselves with His righteousness. The Lord clothed in faithfulness will be with us; and we will become the branches of the vine, Jesus, and live a life that bears fruit.
This is the faith of the stump. The cutting may seem like destruction, but it is the path that saves. Our suffering, disaster, and hopeless reality drive us to put down deeper roots of faith, leading Christ to dwell in us. This is the mystery of faith and the benefit of the faith of the stump.
Beloved saints, when you stand in the place of suffering and despair, recognize that this is God’s warning and His final pruning to save you, and become wise believers who put down roots of faith more deeply. This is the faith of resurrection, the faith of the stump, and the attitude we must have amidst suffering and despair.
이사야 6:8~13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으로 상징되는 상수리나무를 베어 버리시겠다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과 그가 전해야 할 고통스러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8)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하지만 그가 받은 소명은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계획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9~10)
놀랍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사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1~12)
하나님은 이 심판을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이미지로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그루터기는 남겨 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는 가지와 잎사귀가 많고 높게 자라 숲을 이루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들의 이미지는 화려함과 무성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을 베어 버리시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앞선 이사야 1장 말씀에서도 상수리나무의 이미지를 사용하셨습니다.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사 1:28~30)
상수리나무는 백성들이 자랑으로 여기며 의지하고 기뻐하는 나무였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요? 에스겔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죽임 당한 시체들이 그 우상들 사이에, 제단 사방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겔 6:13)
상수리나무의 아래에는 백성들이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던 자리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상수리나무는 우상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또한 상수리나무는 백성들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와 군사력, 그리고 화려한 삶을 상징했습니다. 당시 유다는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웠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가옥에 가옥을, 땅에 땅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재물이 늘어나고 있었을 때, 성경은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사 2:7)
당시 여인들은 귀고리와 코고리, 머리 망사, 발목 고리, 세마포 옷, 머릿수건과 너울까지 사용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3장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상수리나무는 백성들이 의지하고 자랑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같이 섬기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상수리나무를 베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사야가 받은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은 때로 소중히 여기던 상수리나무가 베이는 아픔을 겪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여기까지 상수리나무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짚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황폐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기뻐하던 상수리나무와 밤나무는 베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겠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그들이 알게 될까 봐 염려하신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10)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해졌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일까요? 한 가지 더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사 6:9)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가서 백성에게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명하시는 이 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저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확정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깨닫게 될 때 돌아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백성이 깨닫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어 깨달을까 봐 염려하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사야가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속에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읍이 황폐해지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할”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깨닫지 못할 기간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할 때까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여지고, 가옥에 사람이 없어지며,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베임을 당하면, 그때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말씀은 그때라도 꼭 깨달으라는 초청의 말씀입니다. 그때라도 꼭 돌아와서 이 기회마저 놓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재난이 닥치기 전에 미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삶의 방향을 바꾸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죄의 길로 가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매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풍요롭게 살아갈 때는 그 말씀이 제대로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보기는 보지만, 그 말씀을 알 길이 없습니다. 눈이 열리지 않고, 마음이 열리지 않고, 귀가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릴 뿐입니다. 마음이 둔하게 되어서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으로, 나에게 사랑스럽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내리시는 형벌이 아니라, 유다 백성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속성이며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까지일까요? 내가 자랑하던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베임을 당할 때까지입니다.
인생이라는 숲을 가꾸다 보면 뜻하지 않은 도끼질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평화롭던 나의 숲이 일순간에 황폐해지고, 내가 공들여 키운 상수리나무가 힘없이 쓰러지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건강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위기와 재난, 장애, 사업의 실패 등을 경험할 때 우리는 상수리나무의 쓰러짐을 경험합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진정 현실을 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래 무신론자였습니다. 하지만 회심 후에 기독교를 변호하는 변증가로 수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매우 논리적이었고 당당한 ‘울창한 나무’ 같았습니다. 심지어 고통에 대해서도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1940)라는 책을 쓸 만큼 지성적으로 완벽한 신앙의 답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에 많이 들어 보셨을 한 문장이 있습니다. “고통은 잠자는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문장입니다. 이 표현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문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인생의 도끼날이 닥치게 됩니다. 뒤늦게 만나 깊이 사랑했던 아내 조이(Joy)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내를 잃은 루이스는 자신이 썼던 수많은 신앙의 글들이 무색해질 만큼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집이 단 한 번의 타격에 무너졌다면, 그것은 그것이 카드로 만든 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가 쌓아 올렸던 신앙은 카드로 만들어진 집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일기는 후에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 1961)이라는 책으로 출판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의 본명이 아닌 N.W. 클러크(N.W. Clerk)라는 가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신앙적 회의가 너무나 적나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사후에야 그의 저서임이 밝혀진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신랄한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절규하며, 그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잔인한 ‘우주의 가학자(Cosmic Sadist)’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야말로 잎사귀와 가지가 모두 잘려 나간 비참한 그루터기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밑동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그동안 믿어 왔던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상상하고 만들어 낸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의 화려한 가지였던 지성적인 논리와 명성이 잘려 나간 후에, 비로소 그는 ‘장식 없는 하나님’,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의 신앙은 이전처럼 화려해지진 않았지만, 훨씬 더 깊고 단단해져 갔습니다. 그는 고통에 관한 책을 쓸 정도로 고통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이 고난을 겪고 나서야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상수리나무를 베어 내시는 것은 우리를 살리고 더 귀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가지치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수리나무가 잘려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자 저주일까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예를 하는 분들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은 때로 가지를 자르는 일을 합니다. 이를 원예학에서는 ‘전정(Pruning, 가지치기)’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무를 자르는 행위가 아니라, 에너지를 재분배하여서 나무의 수명을 늘리고 결실을 극대화하는 고도의 전략입니다. 나무의 가지가 너무 무성하면 뿌리에서 흡수한 양분이 모든 잎사귀와 잔가지로 흩어집니다. 이를 ‘정단우성(Apical dominance)’의 분산이라고 합니다.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열매를 맺거나 줄기를 굵게 만드는 데 쓸 에너지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가지를 치면 가지들로 가던 양분이 남아 있는 핵심 줄기와 뿌리 근저의 ‘잠재아(Latent bud, 숨은 눈)’로 집중됩니다. 이것은 양분의 집중과 관련되어 있는데, 종자가 좋지 못할 때는 나무를 완전히 베어 내고 새순을 붙여서 새로운 종자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사야 5장에는 포도원의 노래가 나옵니다. 한 농부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그만 들포도를 낸 것을 한탄하는 노래입니다. 만약 이렇게 포도나무가 좋지 않은 열매를 맺는다면 농부는 어떻게 할까요? 나무줄기를 모두 베어 새 나무를 접붙이거나, 다시 새순을 내어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무를 베시는 것은 언뜻 보기에 심판과 절망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선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랑하고 기뻐하지만 결국 들포도를 내는 나무는 베어 버리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무를 베어 내시는 이유입니다.
사실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당하는 입장에는 너무나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것은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C.S. 루이스도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의 가지치기를 통해 남겨진 자신의 그루터기에 대하여 말한 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그루터기를 설명하면서, 그는 이것이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가지가 잘리는 고통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렇게도 아끼던 나무가 베이는 경험은 내 사지가 잘려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일 것입니다.
그루터기만 남겨지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며 처절하고 견디기 힘든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얻고자 우리의 가지를 치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나무 밑동까지도 도끼로 내리치십니다. 암이 번져 갈 때 아낌없이 신체 일부를 도려내야 하듯,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모든 것을 도려내십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사랑하는 상수리나무를 베어 내십니다.
<그루터기만 남은 때는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시간이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순이 돋아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루터기를 남겨 두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루터기는 남겨진 아무런 나무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그루터기들이 남겨지겠지만, 모든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잘려 나가 결국 죽게 되는 나무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린 그루터기들 중에서 생명의 싹이 솟아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뿌리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의 씨앗이 들어 있을 때입니다.
뿌리가 살아 있으면, 그 나무는 잘려 나갈 때 도리어 강력한 활동을 시작합니다. 열심히 양분을 빨아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뿌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무성한 사회적인 관계, 분주한 행동들, 세속적인 욕심의 가지가 잘려 나갈 때,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내면의 본질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나무에 생명을 공급하는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양분을 빨아올려 생명을 이어 갑니다.
이 뿌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뿌리는 기도와 말씀, 찬송, 감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때가 되면 말씀이 깨달아지고 보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다시 나의 말씀으로 들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게 되며,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 가게 됩니다. 이것이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 그루터기 신앙이란, 그저 남아 있는 어떤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나는 그루터기는 뿌리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루터기의 마지막 희망은 뿌리를 깊이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다시 바꾸어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베어져 아무 힘이 없을 때, 땅은 그루터기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은 더 단단히 그것을 움켜쥐고 뿌리에 영양을 공급합니다.
혹시 그루터기만 남은 것 같은 상황 속에 있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붙잡고 집중하며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뿌리가 땅을 붙들고 있는 것일까요? 땅이 뿌리를 붙들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은 땅이 뿌리를 힘차게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껏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붙잡아 주고 계십니다.
또한 그루터기는 ‘기다림의 상징’입니다.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만 합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는 성도 여러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의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하시며, 생명 줄을 연결시켜 주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돋아나게 하실 새싹은 무엇일까요? 이사야서 1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 11:1~2)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생명의 나무가 우리 안에서 싹이 나고 자랄 것입니다. 못된 들포도를 내는 나의 옛 자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포도나무가 되어 주셔서 우리에게 새싹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고통의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며, 공의로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에 띠를 삼으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루터기 신앙입니다.
나무의 베임은 멸망 같지만 살리는 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고난과 절망스러운 현실은 도리어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게 되는 역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며 그루터기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 설 때,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이며 우리를 살리시는 마지막 가지치기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때 믿음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립시다. 이것이 부활의 믿음이자 그루터기의 신앙이며, 고난과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그루터기 신앙” (사 6 :8~13)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67, 442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인생이라는 숲을 가꾸다 뜻하지 않은 ‘도끼질’을 만나 내가 공들여 키운 나무가 쓰러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설교의 요약>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며 유다 백성을 향한 고통스러운 심판의 메시지를 맡기셨습니다.
그 심판은 백성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의지하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상수리나무는 단순히 나무가 아니라, 당시 백성들이 탐닉하던 물질적 풍요와 군사력, 그리고 이방 신을 섬기던 우상숭배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준엄한 심판은 역설적이게도 백성들을 향한 ‘간절한 회복의 초청’입니다.
평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건강이나 성공처럼 내가 의지하던 ‘인생의 상수리나무’가 베어지는 황폐함을 경험할 때, 비로소 닫혔던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지성적 확신에 가득 찼던 C.S. 루이스가 아내를 잃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자신이 만든 허상을 깨뜨리고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대면했던 것처럼,
고난은 우리를 참된 진리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메가폰이 됩니다
나무를 베는 행위는 원예학적으로 ‘전정(가지치기)’이라 불리며, 이는 생존 에너지를 재분배하여 열매를 극대화하려는 고도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놓는 ‘들포도’ 같은 삶의 가지들을 치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때로는 밑동까지 도려내시는 아픔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루터기만 남은 절망적인 순간에도 ‘뿌리’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영적 에너지가 세속적 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기도, 말씀, 찬송)에 집중될 때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땅처럼 우리의 뿌리를 꽉 움켜쥐고 계십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견딜 때,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나듯 우리 안에서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나누기>
1.하나님의 ‘거룩한 전정(가지치기)’이 나를 죽이려는 심판이 아니라, 새 생명을 살리려는 은혜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그 이유를 나누어 봅시다.
2.현재 고난 중에 있다면, 내가 땅(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더 깊이 내려야 할 ‘믿음의 뿌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무성한 잎사귀에 가려 주님을 보지 못했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삶의 상수리나무가 베어지는 고통 중에도 우리 뿌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계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합니다.
이제는 세상이 아닌 주님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시고, 우리 삶의 그루터기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망의 새순이 돋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