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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한 몸이 된 사람들 – 예수의 고난1 –

마가복음 14: 22 ~ 26

김지철 목사

2016.02.28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순절 셋째주간을 지내며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고난을 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기록 중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것을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전체 분량의 1/2 정도를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4~15)

혈과 육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또 마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우리 대신 죽는 속죄제물로 드림으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권세인 죽음 속에 당신 자신을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죽음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사탄이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기억과 기다림입니다.

당신이 죽으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 22:15)

누구보다 예수님이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함께 먹어야 제자들이 예수님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이스라엘 민족의 유월절과 관련시키셨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면서 먹은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식사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늘 두 가지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하나는 ‘기억’입니다. 본래 자유자가 아니라 억압받던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억압의 땅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해방의 역사를 끊임없이 기억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현재 삶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소망이었습니다. 즉, 앞으로를 향한 기대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자 메시아를 보내실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식사의 양식은, 먼저 집안의 가장이 하나님께 앞에서 축복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쓴 나물과 열매죽을 먹습니다. 이때 주된 음식이 들어오기 전에 가족 중 가장 어린 사람이 가장에게 묻습니다. “이 예식이 무슨 뜻입니까? 이 밤은 다른 날과 왜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은 왜 특별합니까?” 그러면 가장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 즉 출애굽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기념일이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 등 우리가 특별한 의미를 두는 날,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던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전망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내 부모가 내게 해 준 것처럼 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억과 대망은 우리 삶에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바로 이런 잔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버려졌을 때,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안으시고 내 눈물을 닦으시고 내 마음속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신다는 것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사랑의 잔치를 대망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그런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할 때, 떡과 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감사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 당신은 복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땅으로부터 빵을 생산해 내십니다.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 당신은 복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창조해 내십니다.”(미드라쉬, Berakoth Ⅵ.1)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가장은 떡을 들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 하나님. 떡을 땅에서 생산하게 하신 세상의 왕이시여, 높임을 받으소서.” 그러면 다른 모든 가족들이 “아멘. 아멘. 그렇습니다. 맞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만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유월절 만찬을 직접 행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주어가 되는 행동의 동사가 네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 (마가복음 14:22)

떡을 ‘취하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 예식의 전체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둘로 나누면, 먼저 떡을 ‘취해서 축복하시고’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전의 다른 유월절과 동일하게 진행되다가 예수님께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누시면서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신 말씀입니다.

…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가복음 14:22)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가복음 14:24)

예수님은 떡을 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나누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떡처럼 예수님의 몸은 부스러지고, 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처럼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갑자기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몸’과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몸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것은 생명이 파괴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찢어지고 몸과 쏟아지는 피를 통해 너희에게 축복의 역사가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무엇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으셨던 걸까요? 첫 번째는 “얘들아 떡과 잔을 받아라. 나와 함께 죽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에 초대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로마서 6:4)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도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도 우리가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므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죽는 것일까요?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는 본래 죽고 싶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죽음이라는 그림자에 눌려 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인생의 허무와 자신의 무기력함과 실패를 통한 좌절로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인생 아니었습니까?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해 보겠다는 결심은 쉽게 무너지고, 심신은 지쳐 탄식하며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내가 축복의 빛으로 옮겨지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죽자.” 너의 열등감, 교만함, 너를 누르는 죄책감, 낙심과 자기연민 모두 예수님과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의 심정을 알고 있다. 나도 너처럼 힘든 적이 있었다. 나도 세상에서 조롱받았다.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편이 되어 줄 테니 우리의 허물과 부끄러움, 우리를 신음하게 하고 억눌렀던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와서 예수님과 함께 죽자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6)

죄의 몸이 죽어 앞으로는 더 이상 죄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를 가치 없게 여기며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이번에는 생명으로의 초대입니다. 부활로의 초대입니다. 옛 자아가 죽었으니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로마서 6:8)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생명을 얻어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살 사이트를 보면 함께 죽자는 글들이 올라옵니다. 거기서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의 초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내게 오셔서 옛 자아를 버리고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참된 생명을 위해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인지 깨닫기 위해서 옛 자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덧입고 새로운 자아로 살아나라는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종교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사탄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내 죄를 거기에 투영하라는 것입니다. 내 죄와 나를 억누르는 어둠의 세력들은 다 죽었다고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잔치 속에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삶에 찌들어 피곤한 몸,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움, 나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죄책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을 모두 가지고 나와 주님과 함께 죽자고 하십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까요? 옛 자아가 죽지 않고 자꾸 살아 움직여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옛 자아를 주님과 함께 못 박아야 참된 생명을 얻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대신 죽고 대신 피 흘린다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며칠 후면 삼일절 97주년을 맞이합니다.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살리기 위해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죽음도 불사한 애국민족투사들, 순국열사들, 신앙의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내놓은 생명으로 인해 후대에 이런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원했던 민족시인 윤동주는 조선의 독립이 달성되기를 열망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이것을 알고 그를 정치사상범으로 몰아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결국 그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됩니다.
그에 대한 교토 재판소의 판결문은 이렇습니다. “(윤동주는)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하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 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수밖에 없으며…” 일본 재판관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애쓴 우리 선배들의 희생이, 살림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넘겨준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완벽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배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 새 생명의 은혜를 누립시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죽는 법을 알아야 나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를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한반도에 위기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더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수고하고 땀 흘리고 헌신하고, 때로는 고난에 참여할 준비도 해야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죽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 옛 자아를 죽이자. 그래야 네가 다시 새 생명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마음으로 가정과 직장, 사회,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새 생명의 역사를 풍성하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이 믿음의 법칙, 곧 죽어야 사는 생명의 법칙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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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 22 ~ 26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순절 셋째주간을 지내며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고난을 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기록 중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것을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전체 분량의 1/2 정도를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4~15)

혈과 육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또 마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우리 대신 죽는 속죄제물로 드림으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권세인 죽음 속에 당신 자신을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죽음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사탄이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기억과 기다림입니다.

당신이 죽으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 22:15)

누구보다 예수님이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함께 먹어야 제자들이 예수님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이스라엘 민족의 유월절과 관련시키셨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면서 먹은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식사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늘 두 가지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하나는 ‘기억’입니다. 본래 자유자가 아니라 억압받던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억압의 땅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해방의 역사를 끊임없이 기억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현재 삶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소망이었습니다. 즉, 앞으로를 향한 기대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자 메시아를 보내실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식사의 양식은, 먼저 집안의 가장이 하나님께 앞에서 축복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쓴 나물과 열매죽을 먹습니다. 이때 주된 음식이 들어오기 전에 가족 중 가장 어린 사람이 가장에게 묻습니다. “이 예식이 무슨 뜻입니까? 이 밤은 다른 날과 왜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은 왜 특별합니까?” 그러면 가장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 즉 출애굽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기념일이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 등 우리가 특별한 의미를 두는 날,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던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전망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내 부모가 내게 해 준 것처럼 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억과 대망은 우리 삶에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바로 이런 잔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버려졌을 때,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안으시고 내 눈물을 닦으시고 내 마음속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신다는 것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사랑의 잔치를 대망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그런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할 때, 떡과 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감사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 당신은 복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땅으로부터 빵을 생산해 내십니다.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 당신은 복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창조해 내십니다.”(미드라쉬, Berakoth Ⅵ.1)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가장은 떡을 들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 하나님. 떡을 땅에서 생산하게 하신 세상의 왕이시여, 높임을 받으소서.” 그러면 다른 모든 가족들이 “아멘. 아멘. 그렇습니다. 맞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만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유월절 만찬을 직접 행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주어가 되는 행동의 동사가 네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 (마가복음 14:22)

떡을 ‘취하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 예식의 전체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둘로 나누면, 먼저 떡을 ‘취해서 축복하시고’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전의 다른 유월절과 동일하게 진행되다가 예수님께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누시면서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신 말씀입니다.

…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가복음 14:22)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가복음 14:24)

예수님은 떡을 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나누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떡처럼 예수님의 몸은 부스러지고, 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처럼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갑자기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몸’과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몸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것은 생명이 파괴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찢어지고 몸과 쏟아지는 피를 통해 너희에게 축복의 역사가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무엇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으셨던 걸까요? 첫 번째는 “얘들아 떡과 잔을 받아라. 나와 함께 죽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에 초대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로마서 6:4)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도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도 우리가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므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죽는 것일까요?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는 본래 죽고 싶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죽음이라는 그림자에 눌려 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인생의 허무와 자신의 무기력함과 실패를 통한 좌절로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인생 아니었습니까?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해 보겠다는 결심은 쉽게 무너지고, 심신은 지쳐 탄식하며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내가 축복의 빛으로 옮겨지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죽자.” 너의 열등감, 교만함, 너를 누르는 죄책감, 낙심과 자기연민 모두 예수님과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의 심정을 알고 있다. 나도 너처럼 힘든 적이 있었다. 나도 세상에서 조롱받았다.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편이 되어 줄 테니 우리의 허물과 부끄러움, 우리를 신음하게 하고 억눌렀던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와서 예수님과 함께 죽자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6)

죄의 몸이 죽어 앞으로는 더 이상 죄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를 가치 없게 여기며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이번에는 생명으로의 초대입니다. 부활로의 초대입니다. 옛 자아가 죽었으니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로마서 6:8)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생명을 얻어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살 사이트를 보면 함께 죽자는 글들이 올라옵니다. 거기서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의 초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내게 오셔서 옛 자아를 버리고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참된 생명을 위해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인지 깨닫기 위해서 옛 자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덧입고 새로운 자아로 살아나라는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종교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사탄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내 죄를 거기에 투영하라는 것입니다. 내 죄와 나를 억누르는 어둠의 세력들은 다 죽었다고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잔치 속에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삶에 찌들어 피곤한 몸,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움, 나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죄책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을 모두 가지고 나와 주님과 함께 죽자고 하십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까요? 옛 자아가 죽지 않고 자꾸 살아 움직여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옛 자아를 주님과 함께 못 박아야 참된 생명을 얻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대신 죽고 대신 피 흘린다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며칠 후면 삼일절 97주년을 맞이합니다.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살리기 위해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죽음도 불사한 애국민족투사들, 순국열사들, 신앙의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내놓은 생명으로 인해 후대에 이런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원했던 민족시인 윤동주는 조선의 독립이 달성되기를 열망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이것을 알고 그를 정치사상범으로 몰아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결국 그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됩니다.
그에 대한 교토 재판소의 판결문은 이렇습니다. “(윤동주는) 우리(일본)의 조선 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절멸하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 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수밖에 없으며…” 일본 재판관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애쓴 우리 선배들의 희생이, 살림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넘겨준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완벽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배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 새 생명의 은혜를 누립시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죽는 법을 알아야 나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를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한반도에 위기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더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수고하고 땀 흘리고 헌신하고, 때로는 고난에 참여할 준비도 해야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죽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 옛 자아를 죽이자. 그래야 네가 다시 새 생명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마음으로 가정과 직장, 사회,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새 생명의 역사를 풍성하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이 믿음의 법칙, 곧 죽어야 사는 생명의 법칙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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