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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하는 부활의 식탁

누가복음 24: 28 ~ 35

김지철 목사

2015.04.12

먹는 일’은 모두의 관심사입니다.

요즘 먹거리에 관련된 예능 프로그램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본래 맛있는 음식과 음식점을 소개하는 방송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이런 ‘음식 먹는 방송’을 줄여 ‘먹방’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먹방들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먹는 방송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서 직접 요리를 합니다. 이렇게 요리하는 과정까지 다루는 프로그램을 ‘쿡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라도의 작은 섬에서 ‘자급자족’이라는 전제하에 갖가지 요리를 만들어 보여준 ‘삼시세끼’, 연예인들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냉장고 속 재료들로 음식을 만드는 ‘냉장고를 부탁해’, 연예인들이 나와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요리의 레시피를 제공하는 ‘오늘 뭐 먹지?’ 등등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프로그램들이 인기가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이고, 또 우리 인생의 큰 즐거움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 누구나 다 하는 일이고, 이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자 연예인들이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유명 연예인들은 우리와 사는 집도 다르고, 입는 옷도 다른 것 같은데 먹는 것은 비슷하다는 안도감과 동질감도 느낍니다.
먹는 것이 무엇입니까? 연인들이 데이트를 할 때도 처음에는 차 한 잔 마시다가 조금 더 친해지면 밥을 함께 먹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으면 더 가까워집니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옛날에 가족을 ‘가족’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식구’라고 불렀습니다. 식구라는 한자어를 그대로 풀자면, ‘먹는 구멍’, ‘먹는 입’입니다. 즉 먹는 입의 숫자가 곧 가족의 수였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나 대학 시절의 인사말은 요즘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반갑습니다”가 아니라 “아침 드셨습니까?” 혹은 “야, 밥 먹었냐?”였습니다. 이것이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만큼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성경은 먹고 마시는 일의 소중함을 가르칩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먹는 것을 즐거워하십니까? 분명히 탐식은 좋은 것이 아니지만, 기쁘게 먹는 것, 감사하게 먹는 것은 아주 중요한 자세입니다. 성경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첫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먹는 계명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된다. 그런데 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거리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먹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것도 절제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마음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준 것이 만나였고, 메추라기였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이었습니다.
구약의 전도서가 인생의 헛됨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무상하고 허무한 인생 속에서 우리가 즐거워할 것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먹는 일입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 (전도서 9: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으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앞에 놓고 타박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음식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들어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면서도 먹고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일으키신 기적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입니다. 말씀을 들으려 따라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자,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셨던 겁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세리나 죄인들을 초청하셔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했던 바리세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참 먹는 것을 좋아하고 마시는 것을 즐겨. 탐식가인가봐.”
예수님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에는 여섯 개의 간구문이 있는데 세 개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간구문이고, 그 다음 세 개는 인간을 위한 간구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위한 간구문 중 첫 번째가 ‘먹거리’입니다. 일용할 양식, 즉 하루하루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먹고 마시는 것은 생존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임을 하나님도 예수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달릴 것을 아시면서도 마지막 날 밤 제자들을 초청해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이제 나는 나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가장 먼저 하신 일도 먹고 마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새 생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사흘이 되었습니다. 삼년 동안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고 허무하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자 당혹스러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하지?’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10여 킬로 떨어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예수님을 눈여겨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누가복음 24:16~17)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매우 참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찬란한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영광스러운 메시아는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바닥으로 추락한 실패자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것은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이었고, 고난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곁에 다가온 사람을 정확히 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부활한 예수님이시기에, 보았어도 잘 몰랐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누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복음 24:30)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고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눈이 밝아져 지금까지 자신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누가복음 24:32)

“맞아, 맞아! 말씀을 들을 때 우리 가슴이 뜨거워졌었는데, 바로 그분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셨어!”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자리에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을까요? 우리도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슬픈 마음을 품고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살았지만 열매 없는 삶에 지치고, 그런 삶을 지겨워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상적인 삶이란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삶입니다. 이런 곳에서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생명의 자리로 옮겨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일까요? 예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내놓으시고 피를 흘리신 그 식탁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초청하셔서 그들의 삶의 자리에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 식탁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의 식탁, 생명의 식탁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배란 우리가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 죽음의 땅, 절망의 땅, 우리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삶의 자리에서, 생명의 땅으로, 소망의 땅으로, 기쁨이 회복되고 눈물이 멈추는 자리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축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으면서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1년 52주는 모두 부활의 아침인 것입니다. 아니 1년 365일이 전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보면 1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1회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의 식탁에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매일, 매순간 내 삶의 자리를 부활의 자리로 바꾸십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우리를 새 생명의 자리로 부르시는 걸까요? 이제 슬픔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눈물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절망에서 벗어나 주님 주신 생명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초대를 전해야 합니다.

4월 16일이 되면 세월호 참사 1주년입니다.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누구나 가만히 입을 닫습니다. 쉽게 꺼낼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랫동안 흘렸던 그 눈물을 거둘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정부도, 국민도, 교회도 이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딸, 형제자매를 잃어버린 유가족들을 살펴야 합니다. 특히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해 ‘유가족’이라고 불리지 못하고 그저 가슴을 치며 아파하는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일 년 동안 함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봤습니다. 바다에서 시신을 찾으면 가족들이 와서 확인을 한다고 합니다. 모두가 함께 울지요. 그런데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해 ‘실종자’로 불리는 이들의 가족들이 그 유가족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축하합니다.” 시신을 찾은 것이 축하할 일입니까? 죽음을 축하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나도 제발 내 아들, 내 딸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입니다. 실종자의 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이라는 칭호를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땅에 사는 아픔을 종식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가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한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이 나서야 할 것입니다. 정치를 담당하는 이들이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실종자 가족과 함께, 유족들과 함께 엄숙한 장례식을 치러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참사로 인한 슬픔을 이제는 종결시켜야 합니다.
물론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특별 위원회는 계속되어야 하고, 어른들의 잘못과 욕심에 의한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애써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들의 슬픔의 눈물을 이제는 거둘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죽음의 땅에서 사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제는 그들을 생명의 땅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이제 죽은 자는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그의 죽은 몸에 갇혀 있지 않음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알기에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를 땅 속에 묻거나 때로는 화장을 해서 한 줌의 재로 땅에 뿌리지 않습니까? 해군 장병들은 동료가 바다에서 죽으면 바다 물속에 그 시신을 수장시킨다고 합니다. 누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은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죽은 이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시신을 찾지 못해도 함께 애도하며 장례식을 치를 수 있고 눈물을 멈출 수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너희의 눈물을 내가 닦겠다. 너희의 슬픔을 멈추게 하겠다. 너희의 탄식이 그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와 불의와 죽음 앞에서 떨고 있는 우리에게 새 생명과 소망과 생명의 약속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기억합시다.

살아있는 자들은 생명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삶을 열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나누실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를 행하셨습니다. 첫째는 감사하면서 축복하셨고, 둘째는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이 초대하신 식탁과 예배와 잔치에서 해야 할 것도 이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앞에 설 때마다 감사하고,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발로 딛는 곳마다 감사하고 축복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깨닫게 된 복음, 우리가 먼저 경험하게 된 새 생명과 기쁨을 아직 경험하기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활의 식탁으로 초대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땅으로 초청하신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생명의 땅으로 초청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왜 기쁜 소식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오열하고 슬픔에 멈춰 섰을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예수님과 함께, 죽어도 예수님이 주신 생명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축복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우리에게 허락된 축복의 선물을 깨달아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생명의 기쁨을 그들에게 나누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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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 28 ~ 35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먹는 일’은 모두의 관심사입니다.

요즘 먹거리에 관련된 예능 프로그램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본래 맛있는 음식과 음식점을 소개하는 방송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이런 ‘음식 먹는 방송’을 줄여 ‘먹방’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먹방들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먹는 방송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서 직접 요리를 합니다. 이렇게 요리하는 과정까지 다루는 프로그램을 ‘쿡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라도의 작은 섬에서 ‘자급자족’이라는 전제하에 갖가지 요리를 만들어 보여준 ‘삼시세끼’, 연예인들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냉장고 속 재료들로 음식을 만드는 ‘냉장고를 부탁해’, 연예인들이 나와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요리의 레시피를 제공하는 ‘오늘 뭐 먹지?’ 등등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프로그램들이 인기가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이고, 또 우리 인생의 큰 즐거움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 누구나 다 하는 일이고, 이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자 연예인들이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유명 연예인들은 우리와 사는 집도 다르고, 입는 옷도 다른 것 같은데 먹는 것은 비슷하다는 안도감과 동질감도 느낍니다.
먹는 것이 무엇입니까? 연인들이 데이트를 할 때도 처음에는 차 한 잔 마시다가 조금 더 친해지면 밥을 함께 먹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으면 더 가까워집니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옛날에 가족을 ‘가족’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식구’라고 불렀습니다. 식구라는 한자어를 그대로 풀자면, ‘먹는 구멍’, ‘먹는 입’입니다. 즉 먹는 입의 숫자가 곧 가족의 수였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나 대학 시절의 인사말은 요즘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반갑습니다”가 아니라 “아침 드셨습니까?” 혹은 “야, 밥 먹었냐?”였습니다. 이것이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만큼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성경은 먹고 마시는 일의 소중함을 가르칩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먹는 것을 즐거워하십니까? 분명히 탐식은 좋은 것이 아니지만, 기쁘게 먹는 것, 감사하게 먹는 것은 아주 중요한 자세입니다. 성경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첫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먹는 계명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된다. 그런데 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거리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먹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것도 절제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마음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준 것이 만나였고, 메추라기였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이었습니다.
구약의 전도서가 인생의 헛됨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무상하고 허무한 인생 속에서 우리가 즐거워할 것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먹는 일입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 (전도서 9: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으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앞에 놓고 타박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음식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들어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면서도 먹고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일으키신 기적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입니다. 말씀을 들으려 따라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자,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셨던 겁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세리나 죄인들을 초청하셔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했던 바리세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참 먹는 것을 좋아하고 마시는 것을 즐겨. 탐식가인가봐.”
예수님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에는 여섯 개의 간구문이 있는데 세 개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간구문이고, 그 다음 세 개는 인간을 위한 간구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위한 간구문 중 첫 번째가 ‘먹거리’입니다. 일용할 양식, 즉 하루하루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먹고 마시는 것은 생존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임을 하나님도 예수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달릴 것을 아시면서도 마지막 날 밤 제자들을 초청해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이제 나는 나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가장 먼저 하신 일도 먹고 마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새 생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사흘이 되었습니다. 삼년 동안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고 허무하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자 당혹스러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하지?’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10여 킬로 떨어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예수님을 눈여겨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누가복음 24:16~17)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매우 참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찬란한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영광스러운 메시아는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바닥으로 추락한 실패자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것은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이었고, 고난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곁에 다가온 사람을 정확히 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부활한 예수님이시기에, 보았어도 잘 몰랐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누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복음 24:30)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고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눈이 밝아져 지금까지 자신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누가복음 24:32)

“맞아, 맞아! 말씀을 들을 때 우리 가슴이 뜨거워졌었는데, 바로 그분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셨어!”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자리에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을까요? 우리도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슬픈 마음을 품고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살았지만 열매 없는 삶에 지치고, 그런 삶을 지겨워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상적인 삶이란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삶입니다. 이런 곳에서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생명의 자리로 옮겨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일까요? 예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내놓으시고 피를 흘리신 그 식탁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초청하셔서 그들의 삶의 자리에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 식탁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의 식탁, 생명의 식탁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배란 우리가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 죽음의 땅, 절망의 땅, 우리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삶의 자리에서, 생명의 땅으로, 소망의 땅으로, 기쁨이 회복되고 눈물이 멈추는 자리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축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으면서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1년 52주는 모두 부활의 아침인 것입니다. 아니 1년 365일이 전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보면 1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1회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의 식탁에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매일, 매순간 내 삶의 자리를 부활의 자리로 바꾸십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우리를 새 생명의 자리로 부르시는 걸까요? 이제 슬픔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눈물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절망에서 벗어나 주님 주신 생명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초대를 전해야 합니다.

4월 16일이 되면 세월호 참사 1주년입니다.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누구나 가만히 입을 닫습니다. 쉽게 꺼낼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랫동안 흘렸던 그 눈물을 거둘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정부도, 국민도, 교회도 이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딸, 형제자매를 잃어버린 유가족들을 살펴야 합니다. 특히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해 ‘유가족’이라고 불리지 못하고 그저 가슴을 치며 아파하는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일 년 동안 함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봤습니다. 바다에서 시신을 찾으면 가족들이 와서 확인을 한다고 합니다. 모두가 함께 울지요. 그런데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해 ‘실종자’로 불리는 이들의 가족들이 그 유가족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축하합니다.” 시신을 찾은 것이 축하할 일입니까? 죽음을 축하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나도 제발 내 아들, 내 딸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입니다. 실종자의 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이라는 칭호를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땅에 사는 아픔을 종식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가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한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이 나서야 할 것입니다. 정치를 담당하는 이들이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실종자 가족과 함께, 유족들과 함께 엄숙한 장례식을 치러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참사로 인한 슬픔을 이제는 종결시켜야 합니다.
물론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특별 위원회는 계속되어야 하고, 어른들의 잘못과 욕심에 의한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애써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들의 슬픔의 눈물을 이제는 거둘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죽음의 땅에서 사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제는 그들을 생명의 땅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이제 죽은 자는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그의 죽은 몸에 갇혀 있지 않음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알기에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를 땅 속에 묻거나 때로는 화장을 해서 한 줌의 재로 땅에 뿌리지 않습니까? 해군 장병들은 동료가 바다에서 죽으면 바다 물속에 그 시신을 수장시킨다고 합니다. 누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은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죽은 이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시신을 찾지 못해도 함께 애도하며 장례식을 치를 수 있고 눈물을 멈출 수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너희의 눈물을 내가 닦겠다. 너희의 슬픔을 멈추게 하겠다. 너희의 탄식이 그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와 불의와 죽음 앞에서 떨고 있는 우리에게 새 생명과 소망과 생명의 약속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기억합시다.

살아있는 자들은 생명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삶을 열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나누실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를 행하셨습니다. 첫째는 감사하면서 축복하셨고, 둘째는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이 초대하신 식탁과 예배와 잔치에서 해야 할 것도 이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앞에 설 때마다 감사하고,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발로 딛는 곳마다 감사하고 축복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깨닫게 된 복음, 우리가 먼저 경험하게 된 새 생명과 기쁨을 아직 경험하기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활의 식탁으로 초대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땅으로 초청하신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생명의 땅으로 초청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왜 기쁜 소식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오열하고 슬픔에 멈춰 섰을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예수님과 함께, 죽어도 예수님이 주신 생명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축복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우리에게 허락된 축복의 선물을 깨달아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생명의 기쁨을 그들에게 나누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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