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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닮아가는 교회

고린도전서 10:30~11:1:

김지철 목사

2011.03.27

오늘날 기독교는 위기 속에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았습니다.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교회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긍정적인 대답도 있었지만 몇몇 부정적인 대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3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기독교인은 마치 타이타닉 호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곧 침몰할 예정임에도 아직 위기적 사항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잔치를 벌이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자기고집과 집착과 고정관념이 너무 강하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는 대화하기가 싫다고 합니다. 세 번째입니다. 기독교는 매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지루하고 따분하고 앞뒤가 꽉 막힌 구닥다리와 같은 사람들, 시대에 뒤쳐진 사람들의 모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좋은데 기독교는 싫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 이르기도 전에 외형적인 형상만을 보고서 신앙의 자리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시대적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매력적인 종교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대학생 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요즘 대학생들이 비판하는 것과는 반대로 저는 기독교 신앙이 너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 분 안에서 내 죄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했던 모습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그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 때문에 내 안에 있었던 수많은 응어리들이 하나하나 풀리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분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예수님만큼 멋진 자유자가 있는가! 예수님만큼 매력적인 분이 있는가!”를 느낍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분,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당신의 가슴에 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죄와 어둠의 권세인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분, 그 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레고 벅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두운 모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어둡고 우울한 잿빛 기독교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잿빛과 같은 우중충함이 아니라 실록의 계절인 봄의 빛깔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초록의 생명력의 빛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밝은 신앙의 모습이야말로 신앙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기독교를 거절합니다. 겸손하고 포용적인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우리의 손을 벌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분노로 소리치며 비난하는 기독교를 거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은 사랑이었고 긍휼이었고 용서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기독교를 참으로 매력적인 종교로, 아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매력적인 인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만큼 생명력 있고, 기독교만큼 인간의 실존과 미래의 대해서 꿈을 꾸고, 기독교만큼 하늘의 세계에 열려있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내용들은 참으로 복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도 그러하고 나이 드신 분에게도 똑같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자유자입니다

본문 속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헬라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써 상업이 발달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우상이 가득하고 타락한 음란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음란한 사람, 타락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고린도는 아주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화와 환경, 사고가 아직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의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우상 앞에다가 제물들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에 바쳐졌던 동물들은 다시 시장에서 팔렸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그것을 사서 먹었는데 그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가정에서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눌 때 그 음식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샀는가? 이것은 우상에게 드린 제물이 아닌가? 이것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지 않은가? 불결한 음식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음식이 아닌가?” 그리하여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음식들은 율법에서 규정한 불결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바울에게 의논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음식이 필요하면 먹고 필요하지 않으면 먹지 마십시오.” 바울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자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먹을 수 있는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음식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생각하면 먹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먹는 것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신앙인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까’의 삶의 원칙, 생각의 원칙, 사물과 인간을 대하는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유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자가 됩니다. 죽음의 권세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자가 됩니다. 죄책감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자가 됩니다. 사탄의 위협으로부터 자유자가 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10:25~26)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고기가 그렇고, 짐승이 그렇고, 채소가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기에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근본적인 자유에 대한 정신을 잃어버리면 기독교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감사함으로 참여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씻지 않고 그냥 음식을 나눠먹었습니다. 이때 정결예법에 익숙했던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왜 당신을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습니까? 그러면 음식이 부정해지는데 그 음식을 먹으면 당신도 부정을 하게 되는 것을 모릅니까? 당신이 정말 랍비입니까? 당신은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먹는 문제에 대해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000년 전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던 정신을 뒤바꿔놓습니다. 일종의 사고의 혁명입니다. 패러다임쉬프트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5:17~20)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불결한 음식을 먹었다고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를 타파합니다. 형식주의에 대해서 거절합니다. 물질주의를 비판합니다. “물질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물질을 다스리는 것이다! 먹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마음이 나를 깨끗하게 하고 나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어냐?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 내 속에서 나올 때 더러워지는 것이지, 먹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서 뒤로 배설되면 그것이 끝인 것이다. 물건이 더러우면 씻으면 되는 것이고, 손이 더러우면 씻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의 정결과 부정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있었던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바르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고린도전서 10:30)

거룩해지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거룩해지고 음식도 거룩해집니다. 마실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감사함으로 받겠습니다.” 그러면 그 음식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면 그것이 새로워지고, 그것이 깨끗해지고,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외모를 꾸미고 형식을 꾸미고 규정을 지키는 것이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이것을 배우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지 알고 받아먹으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받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자기절제를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자가 될 때 한 가지 제한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자이지만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어야 참된 자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제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유는 나만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자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살리는 자유, 이웃을 세우는 자유, 이웃을 격려하고 이웃을 구원하는 자유에 들어갈 때에 참된 자유자로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유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만 자기절제능력과 자기통제능력이 사라진 자유는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같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방종이고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린도전서 10:23)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유보하겠다는 것입니다. 덕을 위해서, 남을 세워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고 통제하면 마음이 기쁘고 홀가분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 자신만만해집니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누군가에게 혹은 율법에 의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받게 되면 괜히 억울해집니다. 씁쓸해집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억압받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억압을 받으며 일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다녔던 신학교에는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젊고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못 먹는다고 하니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먹을 수 있는 사람인데 먹지 않는다. 왜?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이라면 나는 먹지 않겠다.’ 그렇게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자유가 생깁니다. 우리의 가정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강제적이라면 다른 곳을 이리저리 기웃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가 결단해서 내 가정을 지키면 그것은 자유자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를 주실 때에 우리에게 자기통제능력을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웃을 위한 자유로 승화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우리의 자유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십시오

세 번째 자유에 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구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세워나가는 자유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고린도전서 10:33)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이 말은 사람에게 아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격려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보면 바울이 오늘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10)

이 말은 비위를 맞추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눈치를 보고 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세우고 그 사람을 축복하고 그 사람을 구원의 자리에 초청하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정한 자유자의 특권을 알려줍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이제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먹을 때 감사하면서 먹습니까? 마실 때 감사합니까? 가정에 들어갈 때 감사합니까? 직장을 나갈 때 감사합니까? 내 모든 삶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유자가 됐다고 선언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주신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삶을 감사함으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먹을 때 감사하고, 마실 때 감사하고, 사람을 만날 때 감사하고, 일할 때 감사하고, 걸을 때 감사하고, 섰을 때 감사하고, 누웠을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내면세계에 참된 자유가 있는가? 우리는 이 자유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억압받으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중충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중충한 것은 예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내속에는 있는 어두운 것들은 예수님께 맡기고 우리는 더 밝은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다른 사람을 세우는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가질 때에야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매력적인 모습이 살아납니다.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는 삶의 핵심은 한가지입니다. 감사하면서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을 감사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복된 자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아름다움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이 세 가지를 누리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내면세계의 자유의 특권을 매일 매일 경험하길 원합니다. “나는 자유자다. 나는 사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자다. 나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자다. 나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자다. 나는 세상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이 선언을 하실 수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이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합니다.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하십시오. 그때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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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30~11:1:

오늘날 기독교는 위기 속에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았습니다.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교회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긍정적인 대답도 있었지만 몇몇 부정적인 대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3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기독교인은 마치 타이타닉 호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곧 침몰할 예정임에도 아직 위기적 사항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잔치를 벌이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자기고집과 집착과 고정관념이 너무 강하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는 대화하기가 싫다고 합니다. 세 번째입니다. 기독교는 매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지루하고 따분하고 앞뒤가 꽉 막힌 구닥다리와 같은 사람들, 시대에 뒤쳐진 사람들의 모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좋은데 기독교는 싫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 이르기도 전에 외형적인 형상만을 보고서 신앙의 자리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시대적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매력적인 종교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대학생 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요즘 대학생들이 비판하는 것과는 반대로 저는 기독교 신앙이 너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 분 안에서 내 죄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했던 모습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그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 때문에 내 안에 있었던 수많은 응어리들이 하나하나 풀리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분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예수님만큼 멋진 자유자가 있는가! 예수님만큼 매력적인 분이 있는가!”를 느낍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분,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당신의 가슴에 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죄와 어둠의 권세인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분, 그 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레고 벅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두운 모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어둡고 우울한 잿빛 기독교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잿빛과 같은 우중충함이 아니라 실록의 계절인 봄의 빛깔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초록의 생명력의 빛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밝은 신앙의 모습이야말로 신앙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기독교를 거절합니다. 겸손하고 포용적인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우리의 손을 벌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분노로 소리치며 비난하는 기독교를 거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은 사랑이었고 긍휼이었고 용서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기독교를 참으로 매력적인 종교로, 아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매력적인 인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만큼 생명력 있고, 기독교만큼 인간의 실존과 미래의 대해서 꿈을 꾸고, 기독교만큼 하늘의 세계에 열려있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내용들은 참으로 복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도 그러하고 나이 드신 분에게도 똑같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자유자입니다

본문 속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헬라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써 상업이 발달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우상이 가득하고 타락한 음란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음란한 사람, 타락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고린도는 아주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화와 환경, 사고가 아직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의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우상 앞에다가 제물들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에 바쳐졌던 동물들은 다시 시장에서 팔렸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그것을 사서 먹었는데 그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가정에서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눌 때 그 음식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샀는가? 이것은 우상에게 드린 제물이 아닌가? 이것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지 않은가? 불결한 음식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음식이 아닌가?” 그리하여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음식들은 율법에서 규정한 불결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바울에게 의논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음식이 필요하면 먹고 필요하지 않으면 먹지 마십시오.” 바울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자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먹을 수 있는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음식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생각하면 먹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먹는 것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신앙인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까’의 삶의 원칙, 생각의 원칙, 사물과 인간을 대하는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유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자가 됩니다. 죽음의 권세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자가 됩니다. 죄책감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자가 됩니다. 사탄의 위협으로부터 자유자가 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10:25~26)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고기가 그렇고, 짐승이 그렇고, 채소가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기에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근본적인 자유에 대한 정신을 잃어버리면 기독교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감사함으로 참여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씻지 않고 그냥 음식을 나눠먹었습니다. 이때 정결예법에 익숙했던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왜 당신을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습니까? 그러면 음식이 부정해지는데 그 음식을 먹으면 당신도 부정을 하게 되는 것을 모릅니까? 당신이 정말 랍비입니까? 당신은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먹는 문제에 대해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000년 전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던 정신을 뒤바꿔놓습니다. 일종의 사고의 혁명입니다. 패러다임쉬프트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5:17~20)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불결한 음식을 먹었다고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를 타파합니다. 형식주의에 대해서 거절합니다. 물질주의를 비판합니다. “물질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물질을 다스리는 것이다! 먹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마음이 나를 깨끗하게 하고 나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어냐?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 내 속에서 나올 때 더러워지는 것이지, 먹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서 뒤로 배설되면 그것이 끝인 것이다. 물건이 더러우면 씻으면 되는 것이고, 손이 더러우면 씻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의 정결과 부정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있었던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바르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고린도전서 10:30)

거룩해지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거룩해지고 음식도 거룩해집니다. 마실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감사함으로 받겠습니다.” 그러면 그 음식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면 그것이 새로워지고, 그것이 깨끗해지고,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외모를 꾸미고 형식을 꾸미고 규정을 지키는 것이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이것을 배우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지 알고 받아먹으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받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자기절제를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자가 될 때 한 가지 제한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자이지만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어야 참된 자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제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유는 나만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자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살리는 자유, 이웃을 세우는 자유, 이웃을 격려하고 이웃을 구원하는 자유에 들어갈 때에 참된 자유자로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유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만 자기절제능력과 자기통제능력이 사라진 자유는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같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방종이고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린도전서 10:23)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유보하겠다는 것입니다. 덕을 위해서, 남을 세워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고 통제하면 마음이 기쁘고 홀가분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 자신만만해집니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누군가에게 혹은 율법에 의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받게 되면 괜히 억울해집니다. 씁쓸해집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억압받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억압을 받으며 일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다녔던 신학교에는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젊고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못 먹는다고 하니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먹을 수 있는 사람인데 먹지 않는다. 왜?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이라면 나는 먹지 않겠다.’ 그렇게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자유가 생깁니다. 우리의 가정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강제적이라면 다른 곳을 이리저리 기웃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가 결단해서 내 가정을 지키면 그것은 자유자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를 주실 때에 우리에게 자기통제능력을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웃을 위한 자유로 승화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우리의 자유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십시오

세 번째 자유에 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구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세워나가는 자유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고린도전서 10:33)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이 말은 사람에게 아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격려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보면 바울이 오늘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10)

이 말은 비위를 맞추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눈치를 보고 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세우고 그 사람을 축복하고 그 사람을 구원의 자리에 초청하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정한 자유자의 특권을 알려줍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이제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먹을 때 감사하면서 먹습니까? 마실 때 감사합니까? 가정에 들어갈 때 감사합니까? 직장을 나갈 때 감사합니까? 내 모든 삶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유자가 됐다고 선언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주신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삶을 감사함으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먹을 때 감사하고, 마실 때 감사하고, 사람을 만날 때 감사하고, 일할 때 감사하고, 걸을 때 감사하고, 섰을 때 감사하고, 누웠을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내면세계에 참된 자유가 있는가? 우리는 이 자유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억압받으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중충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중충한 것은 예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내속에는 있는 어두운 것들은 예수님께 맡기고 우리는 더 밝은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다른 사람을 세우는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가질 때에야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매력적인 모습이 살아납니다.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는 삶의 핵심은 한가지입니다. 감사하면서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을 감사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복된 자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아름다움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이 세 가지를 누리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내면세계의 자유의 특권을 매일 매일 경험하길 원합니다. “나는 자유자다. 나는 사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자다. 나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자다. 나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자다. 나는 세상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이 선언을 하실 수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이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합니다.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하십시오. 그때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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