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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위한 자발적인 고난

사도행전 5: 40 ~ 42

김지철 목사

2014.06.15

모두에게 한 가지 고백이 있었습니다.

브라질에게 열린 남미 선교사 대회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선교사님과 목회자들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그곳까지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 그들의 눈물도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이민하신 분들, 사업차 잠시 들른 분들 그리고 2∼3년씩 머무는 주재원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고향을 떠난 나그네와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는 똑같은 고백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갔던 것처럼 하나님이 인도해주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눈물 흘릴 때도 있었고 탄식할 때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은혜였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의 복덩이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덩이들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이 복 받고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곳까지 가는데 비행기로 25∼30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태평양을 지나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을 하루 이틀이면 갈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 생각을 하자 130여 년 전 우리 땅을 찾아왔던 선교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왔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 땅을 밟게 되었을까?’
미국에서 이 땅에 오는 길은 배편이었습니다. 두 달 혹은 석 달이 걸리는 먼 길이었습니다. 뜨거운 태양도 만나고 때로는 폭풍우 속에서 배 멀미를 하면서 도대체 이 땅에 왜 왔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뜨거운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선교사들의 열전을 읽어보면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풍토병에 걸려 어떠한 사역도 하지 못하고 금방 죽어 이 땅에 묻힌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낳았지만 어릴 때에 그 자녀를 땅 속에 묻어야 했던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냉대와 비난을 받으면서, 아픔과 슬픔을 겪으면서 복음을 증거했던 그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절망하며 통곡했을까?’
마포에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고향을 가지 못하고 이 대한민국에서, 조선 땅에서 죽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처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기에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조선 땅을 보니 이곳의 백성들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 같습니다. 바보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 힘들어도 고난 받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이 땅에서 복음을 증거했던 그들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축복을 받는 것, 우리가 이렇게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신앙의 선배들이 예수님을 향한 고난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고난에 참여했던 원조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를 만들어갔던 믿음의 인물,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왕관을 쓰는 화려한 자리를 얻기 위해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고 복음 때문에 매를 맞았습니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갔고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비난과 조롱과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여겼을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고난의 중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영광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죄인된 사람을 만나셨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으셨고, 버려진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고,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저 십자가에 달리면서까지 인간의 비참함과 절망의 문제를 가슴으로 껴안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어리석음을 대신 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지시고, 내가 조롱 받을 것을 대신 받으시며 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가 죽음으로 우리가 죽고, 그가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다시 사는 새 생명의 약속을 우리는 다시 마음속으로부터 기억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고난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은 것은 왜일까요? 당대 종교인들이나 정치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제자들의 말이 모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반역의 언어처럼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삶의 질서를 깨뜨리는 미련한 자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제자들의 삶도 예수님의 생애처럼 수없이 체포를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매를 맞게 된 기록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시기심과 질투도 포함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행전 5:17)

자신들의 말에는 백성들이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니 그들이 귀를 세우고 들었던 것입니다. ‘저것이야말로 새 소식이구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고 다가섰던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습은 저항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종교·정치 기득권자들에 대한 반항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감옥에 들어갔고 처음부터 매를 맞았고 처음부터 채찍질을 당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행전 5:40)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자기들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착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으니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들여 채찍질을 했습니다. 더 이상 떠들지 말라고, 평범하게 살라고, 이 사회를 시끄럽게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 4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행전 5:41)

신기하지 않습니까? 고난 받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고난 받을 만한 자격이 있구나 하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반전을 통해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본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따랐지만 고난 받기 위해서 따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지만 “고난을 받으라!” 하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내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하면 응답받고, 뭔가 넉넉해지는 축복을 받고, 그래서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먼저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면 안 된다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이 종교·정치지도자들의 간계에 의해 붙잡히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제 우리도 고난당하게 되겠구나. 우리도 잘못하면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되겠구나.’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 도망을 갔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 몰라!” 하며 부인했던 인물이 바로 제자 중에 제자라고 했던 베드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무너졌습니다. 신뢰가 무너졌고,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무너졌습니다. 무력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지금 본 제자들의 이 앞부분에만 머문다면 주님을 따라가는 데 늘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어떻게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고난을 불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그들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전달된 것일까요? 하나님의 반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그대로 내놓지 않으셨습니다. 죽음 속에 가둬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반전, 인생의 모든 길을 새롭게 반전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세상에 없던 일, 인류역사상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이 사건이 바로 우리가 지금도 믿고 있는 사건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 동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셨다는 부활의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죽음을 불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는 것은, 죽음 너머의 세계 즉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왜 용기가 생깁니까? 때로는 고난 속에서 생명을 거는 위험한 일이라도 왜 거기에 달려들게 되어 있습니까? 왜 기독교는 순교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사건을 친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남아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한 가지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성령의 약속이셨습니다. 생명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으면 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 되는 영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에는 자의식이 약했습니다. 그저 누구의 아들,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의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하나님 아버지의 딸’이라는 자의식이 그들에게 새로운 자존감을 주었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의 소유물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에 의해서 내 인격의 존엄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으로 제자들은 담대하게 선포하게 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사도행전 5:30∼31)

이제 이들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본래 할 말이 없었던 사람이었고, 고난 앞에서 두려워 도망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실을 받게 된 후 그들은 변했습니다. 할 말이 생겼습니다. 고난 받는 예수님을 부끄러워했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가 놀라워서 세상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이 예수님의 소중함을 모르는가!’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우리 인생에도 역전 중에 역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에 시작하는 역전입니다. 내 인생이 마치 구렁텅이 속에 빠져 한 걸음도 나갈 길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실망하시고 나보다 더 아파하시고 나보다 더 낮은 자리에 내려가셨던 분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의 길이라도 감사하면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가 마음으로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도 자처하겠다, 자원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에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던져 놓으면 물결을 따라 흘러 내려갈 뿐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의 흐름을 역류하여 거슬러가는 힘을 갖습니다. 만약 탁류라면 더 저항하면서 생명의 물을 향해 앞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생명을 가진 물고기의 자유란 이처럼 저항하는 자유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거짓과 불의와 어두움에 저항하는 생명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거짓에 부딪히면 충돌이 생기고 고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들어가려고 하면, 고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의 역사와 맞부딪히면 고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마태복음 5:10∼12)

고난 받을 때에 두려워하며 도망가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내 인생을 보장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인생의 말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씁니다.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21)

도대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이 나에게 자랑스러운 분이십니까? 우리가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영혼이 즐거워집니까? 사람들이 보든 안보든 식사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내게 행복입니까? 직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알려지는 게 고마운 일입니까, 아니면 창피하고 체면이 깎이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봉사를 하고 선교현장에 나가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저처럼 목사로 부름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랑스러운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하기에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이 기쁨이 되는 것, 그리고 나는 비록 연약하지만 예수님은 소중한 분이기에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싶은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세상에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어떤 고난을 받아보셨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돈과 재물에 손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이름이 손상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욕을 받을 때 우리 가슴이 아픕니까? 예수님 때문에 몸이 상하도록 고생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타들어가야 빛이 나기 시작하고, 내가 녹아져야 소금의 맛이 납니다.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부딪혀 나가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내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소중함을 깨닫고, 나의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억지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여자 친구가 가자하니까, 혹은 아내가 가자하니까 겨우 예배에 참석하고 계십니까? 억지로 헌금을 합니까? 헌금하는 것이 아까워 죽겠습니까? 봉사할 때 억지로 합니까?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부모님은 가족을 위해서 고난 받기를 자처하신 분들입니다. 아침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가족들을 챙기는 분이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세상에 나가서 뼈가 빠지도록 일하면서 가족들이 바르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아버지들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누구보다 먼저 나와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차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찬양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고통 받는 사람 곁에 가서 그들을 섬기고 위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돈을 받고 합니까? 아닙니다. 자원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역사, 모든 치유와 회복의 역사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고난 받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모든 자리가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고, 우리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내 속에는 소중하고 대단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가슴을 펴세요.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을 자랑하세요.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세상에 드러내세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나의 기쁨이고 축복인 것을 이 세상에 마음껏 증거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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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 40 ~ 42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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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모두에게 한 가지 고백이 있었습니다.

브라질에게 열린 남미 선교사 대회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선교사님과 목회자들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그곳까지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 그들의 눈물도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이민하신 분들, 사업차 잠시 들른 분들 그리고 2∼3년씩 머무는 주재원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고향을 떠난 나그네와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는 똑같은 고백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갔던 것처럼 하나님이 인도해주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눈물 흘릴 때도 있었고 탄식할 때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은혜였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의 복덩이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덩이들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이 복 받고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곳까지 가는데 비행기로 25∼30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태평양을 지나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을 하루 이틀이면 갈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 생각을 하자 130여 년 전 우리 땅을 찾아왔던 선교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왔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 땅을 밟게 되었을까?’
미국에서 이 땅에 오는 길은 배편이었습니다. 두 달 혹은 석 달이 걸리는 먼 길이었습니다. 뜨거운 태양도 만나고 때로는 폭풍우 속에서 배 멀미를 하면서 도대체 이 땅에 왜 왔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뜨거운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선교사들의 열전을 읽어보면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풍토병에 걸려 어떠한 사역도 하지 못하고 금방 죽어 이 땅에 묻힌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낳았지만 어릴 때에 그 자녀를 땅 속에 묻어야 했던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냉대와 비난을 받으면서, 아픔과 슬픔을 겪으면서 복음을 증거했던 그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절망하며 통곡했을까?’
마포에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고향을 가지 못하고 이 대한민국에서, 조선 땅에서 죽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처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기에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조선 땅을 보니 이곳의 백성들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 같습니다. 바보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 힘들어도 고난 받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이 땅에서 복음을 증거했던 그들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축복을 받는 것, 우리가 이렇게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신앙의 선배들이 예수님을 향한 고난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고난에 참여했던 원조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를 만들어갔던 믿음의 인물,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왕관을 쓰는 화려한 자리를 얻기 위해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고 복음 때문에 매를 맞았습니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갔고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비난과 조롱과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여겼을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고난의 중심으로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영광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죄인된 사람을 만나셨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으셨고, 버려진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고,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저 십자가에 달리면서까지 인간의 비참함과 절망의 문제를 가슴으로 껴안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어리석음을 대신 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지시고, 내가 조롱 받을 것을 대신 받으시며 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가 죽음으로 우리가 죽고, 그가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다시 사는 새 생명의 약속을 우리는 다시 마음속으로부터 기억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고난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은 것은 왜일까요? 당대 종교인들이나 정치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제자들의 말이 모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반역의 언어처럼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삶의 질서를 깨뜨리는 미련한 자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제자들의 삶도 예수님의 생애처럼 수없이 체포를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매를 맞게 된 기록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시기심과 질투도 포함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행전 5:17)

자신들의 말에는 백성들이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니 그들이 귀를 세우고 들었던 것입니다. ‘저것이야말로 새 소식이구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고 다가섰던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습은 저항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종교·정치 기득권자들에 대한 반항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감옥에 들어갔고 처음부터 매를 맞았고 처음부터 채찍질을 당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행전 5:40)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자기들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착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으니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들여 채찍질을 했습니다. 더 이상 떠들지 말라고, 평범하게 살라고, 이 사회를 시끄럽게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 4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행전 5:41)

신기하지 않습니까? 고난 받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고난 받을 만한 자격이 있구나 하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반전을 통해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본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따랐지만 고난 받기 위해서 따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지만 “고난을 받으라!” 하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내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하면 응답받고, 뭔가 넉넉해지는 축복을 받고, 그래서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먼저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면 안 된다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이 종교·정치지도자들의 간계에 의해 붙잡히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제 우리도 고난당하게 되겠구나. 우리도 잘못하면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되겠구나.’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 도망을 갔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 몰라!” 하며 부인했던 인물이 바로 제자 중에 제자라고 했던 베드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무너졌습니다. 신뢰가 무너졌고,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무너졌습니다. 무력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지금 본 제자들의 이 앞부분에만 머문다면 주님을 따라가는 데 늘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어떻게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고난을 불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그들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전달된 것일까요? 하나님의 반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그대로 내놓지 않으셨습니다. 죽음 속에 가둬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반전, 인생의 모든 길을 새롭게 반전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세상에 없던 일, 인류역사상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이 사건이 바로 우리가 지금도 믿고 있는 사건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 동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일어서셨다는 부활의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죽음을 불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는 것은, 죽음 너머의 세계 즉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왜 용기가 생깁니까? 때로는 고난 속에서 생명을 거는 위험한 일이라도 왜 거기에 달려들게 되어 있습니까? 왜 기독교는 순교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사건을 친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남아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한 가지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성령의 약속이셨습니다. 생명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으면 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 되는 영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에는 자의식이 약했습니다. 그저 누구의 아들,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의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하나님 아버지의 딸’이라는 자의식이 그들에게 새로운 자존감을 주었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의 소유물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에 의해서 내 인격의 존엄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으로 제자들은 담대하게 선포하게 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사도행전 5:30∼31)

이제 이들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본래 할 말이 없었던 사람이었고, 고난 앞에서 두려워 도망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실을 받게 된 후 그들은 변했습니다. 할 말이 생겼습니다. 고난 받는 예수님을 부끄러워했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가 놀라워서 세상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이 예수님의 소중함을 모르는가!’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우리 인생에도 역전 중에 역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에 시작하는 역전입니다. 내 인생이 마치 구렁텅이 속에 빠져 한 걸음도 나갈 길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실망하시고 나보다 더 아파하시고 나보다 더 낮은 자리에 내려가셨던 분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의 길이라도 감사하면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가 마음으로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도 자처하겠다, 자원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에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던져 놓으면 물결을 따라 흘러 내려갈 뿐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의 흐름을 역류하여 거슬러가는 힘을 갖습니다. 만약 탁류라면 더 저항하면서 생명의 물을 향해 앞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생명을 가진 물고기의 자유란 이처럼 저항하는 자유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거짓과 불의와 어두움에 저항하는 생명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거짓에 부딪히면 충돌이 생기고 고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들어가려고 하면, 고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의 역사와 맞부딪히면 고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마태복음 5:10∼12)

고난 받을 때에 두려워하며 도망가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내 인생을 보장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인생의 말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씁니다.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21)

도대체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이 나에게 자랑스러운 분이십니까? 우리가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영혼이 즐거워집니까? 사람들이 보든 안보든 식사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내게 행복입니까? 직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알려지는 게 고마운 일입니까, 아니면 창피하고 체면이 깎이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봉사를 하고 선교현장에 나가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은 저처럼 목사로 부름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랑스러운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하기에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이 기쁨이 되는 것, 그리고 나는 비록 연약하지만 예수님은 소중한 분이기에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싶은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세상에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어떤 고난을 받아보셨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돈과 재물에 손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이름이 손상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욕을 받을 때 우리 가슴이 아픕니까? 예수님 때문에 몸이 상하도록 고생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타들어가야 빛이 나기 시작하고, 내가 녹아져야 소금의 맛이 납니다.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부딪혀 나가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내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소중함을 깨닫고, 나의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억지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여자 친구가 가자하니까, 혹은 아내가 가자하니까 겨우 예배에 참석하고 계십니까? 억지로 헌금을 합니까? 헌금하는 것이 아까워 죽겠습니까? 봉사할 때 억지로 합니까?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부모님은 가족을 위해서 고난 받기를 자처하신 분들입니다. 아침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가족들을 챙기는 분이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세상에 나가서 뼈가 빠지도록 일하면서 가족들이 바르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아버지들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누구보다 먼저 나와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차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찬양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고통 받는 사람 곁에 가서 그들을 섬기고 위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돈을 받고 합니까? 아닙니다. 자원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역사, 모든 치유와 회복의 역사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고난 받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모든 자리가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고, 우리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내 속에는 소중하고 대단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가슴을 펴세요.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을 자랑하세요.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세상에 드러내세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나의 기쁨이고 축복인 것을 이 세상에 마음껏 증거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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