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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에바다’!
우리는 대화가 단절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어둡고 부정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거칠어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말이 잘 안통하고 소통이 부재하고 대화의 단절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앉아서 대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학생과 선생님의 대화가 막혀 있습니다. 근로자와 기업 간에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곳곳에서 아우성칩니다. 국민들과 정치가의 소통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목사와의 대화도 단절이 되고 있지 않은가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귀가 있습니다. 입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섬김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남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도 듣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일종의 자폐증 같은 것이 우리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폐증이란 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자폐증을 다음과 같이 깊은 우물에 빠진 아이로 비유했습니다. 한아이가 우물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다행히 외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또 바닥에 먹을 것도 있고, 공기도 있고, 잠 잘 곳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빛이 부족해서 약간 어두웠습니다. 우물은 매우 깊었습니다. 처음에 아이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는 곧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침묵했습니다. 그를 찾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자폐를 앓게 되면 분명히 듣기는 듣습니다. 귀가 온전합니다. 그런데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의 마음이 없습니다. 소리는 들리는데 뜻과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입은 있는데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홀로 깊은 상처 안에 가두어져 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자폐증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절망이 있습니다. 아픔도 있습니다. 외로움도 우리를 붙잡습니다. 내 소리를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남이 내 소리를 안 들으니까 나도 남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내속에 갇혀서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귀도 정상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듣고는 있으나 아무 들림이 없는 빈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본문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일종의 자폐증 증세의 고통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말 더듬는 자.’ 뭔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한 인물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마가복음 7:32)
듣지 못하는 게 얼마나 갑갑한 일일까요? 뭔가 소리가 들려오는데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가슴이 답답할까요? 소리의 세계에 동참하는 권리를 상실한 아픔이 너무나 컸을 것입니다. 게다가 듣지 못하니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농아에게 장애가 생기는 것은 입이 잘못되거나 혀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듣는 것만큼 말할 수 있고 듣는 것만큼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강제적으로 자폐적인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동안 일체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하면 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요? 하루는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혼자서 있어보라고 한다면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 내가 듣고 말할 권리를 빼앗겨야 하는가?” 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중죄인을 독방에 가둬두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차단을 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어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평생 이런 고통 가운데서 산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가슴이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마가복음 7:34)
여기 보면 먼저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움에 지금 참여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이렇게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이렇게 무지 속에 있습니다. 듣고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안타까움이 가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마음속에 연민의 정이 일어났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사람의 답답함을 저도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가슴이 미어져서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하는 하나님의 깊은 탄식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에바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음역이 된 말입니다.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듣지 못했던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에도 명령하셨고 그의 육체에도 명령하셨습니다. “닫힌 것들아, 더 이상 네 권리가 끝났다. 열려라! 맺혀진 것들아, 네 권리가 끝났다. 풀려라!” 그의 마음과 육체를 얽어맸던 모든 것들을 풀어주시고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 닫힐 수가 없고 막힐 수가 없고 숨겨진 채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 이 사람의 마음이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의 몸이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막혔던 것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마가복음 7:35)
성경은 그의 귀는 열려졌다고 말합니다. 닫힌 것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혀가 맺혀진 것이 풀려졌다고 말합니다. 그 옛날 한 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한 번도 제대로 듣지 못한 그 말이 명백하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리라는 것은 자체의 힘이 있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만드신 소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연 속에 들어가서 새소리와 물소리를 듣고 바람 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쉼을 얻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소리에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능력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될 때 거기에서 치유와 회복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 속에는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의미와 우리의 정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 어떻게 찬양합니까? 가사를 기억하면서 그 가사에 동참해야 치유와 회복의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사를 생각하지 않고 찬양을 하면 그저 음정의 높낮이만 있을 뿐입니다.
1960년대의 일입니다. 제 2바티칸 총회가 끝난 후에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내규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보통 수도원에 가면 수도사들이 6시간 이상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장은 이렇게 오랫동안 노래 부르는 것이 쓸모없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찬양을 부르는 대신에 다른 일들을 할 것을 제안했고 그렇게 대체를 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불렀던 성가를 부르는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나쁜 변화였습니다. 수도사들이 식물인간처럼 비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생기가 떨어졌습니다. 점차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모임을 갖기도 싫었습니다. 식사에 문제가 있는 걸까? 잠을 적게 자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런데 식욕도 사라졌습니다.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분석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찬양이 그들의 입에서 사라지고 목소리에서부터 오는 에너지를 받지 못해서 생긴 생기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전의 활동력과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잠을 몇 시간만 자고서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마음속에 자신의 기도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으로 기도할 때도 조용히 자기 입으로 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혀가 움직이지 않고 들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기도할 때에도 그 기도소리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저분이 대표로 기도하는데 그것은 바로 저의 기도입니다. 제 생각과 같습니다. 제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받아주세요.’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 말씀이 내 귀에 들려야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고 찬양도 함께 불러야 우리 속에 생기가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공동체가 바로 그런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함께 찬양을 듣고, 내입으로 부르고, 기도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총을 기억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속에 막혔던 것이 다시 풀려지는 것입니다. 내속에 닫힌 것이 다시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인 것입니다.
막혔던 것을 향해 “에바다!” 선포하십시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소리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특별한 치유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마가복음 7:33)
수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는데 그 무리를 떠났습니다. 들리지 않는 질병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장애입니다. 가장 조용한 곳에 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만 관심을 두시고 계시다는 사랑과 배려를 그 사람이 함께 공감할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접촉했습니다. 만졌습니다. 사랑의 터치였습니다. 그의 육체의 가장 연약한 곳인 귀에 두 손가락을 대셨습니다. 연약한 곳을 고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나도 너의 고통을 안다. 나도 너의 연약함과 고통받아왔던 그 모습을 아파한다. 이제 듣고 싶었던 너의 귀를 내가 만지겠다.’ 두 손가락을 이 사람의 귀에 갖다 대셨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은 약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지는 것은 정말로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다가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랐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는 제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저를 불러서는 자기 앞에 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누우면 제 배를 걷어놓고서는 제 배를 쓰다듬으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할머니 손은 약손, 지철이 배은 똥배” 그러면 신기하게도 금방 아픈 것이 사라져 다시 일어나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손에 치유의 효과를 허락해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침을 발라서 혀에 갖다 대셨습니다. 침이란 당시 물, 피, 술, 기름과 같이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길에서 넘어지거나 벌레에 물리면 어머니들이 어떻게 합니까? 침을 묻혀서 자녀들의 상처나 벌레 물린 곳에 바릅니다. 그때 자녀들이 더럽다고 그래도 “야 이놈아 이게 바로 약이다” 하고 발라주었던 모습을 우리들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친근하게 이 사람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연약한 자의 몸과 마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만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에바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던 사건과도 비슷합니다. “빛이 있으라!” 라고 선포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열려라!” 하고 선포하셨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속에 나를 얽어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육체 안에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의 자존감을 깨트려버리고 나를 파괴하는 못된 습관들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자신을 향해서 선포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향해서 선포하고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아픔을 향해서 선포하십시오. 그때 반드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처럼 가슴에 같이 아파하면서 선포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안타깝게 여기면서 선포해야 합니다. 가슴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마가복음 7: 31 ~ 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우리는 대화가 단절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어둡고 부정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거칠어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말이 잘 안통하고 소통이 부재하고 대화의 단절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앉아서 대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학생과 선생님의 대화가 막혀 있습니다. 근로자와 기업 간에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곳곳에서 아우성칩니다. 국민들과 정치가의 소통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목사와의 대화도 단절이 되고 있지 않은가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귀가 있습니다. 입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섬김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남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도 듣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일종의 자폐증 같은 것이 우리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폐증이란 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자폐증을 다음과 같이 깊은 우물에 빠진 아이로 비유했습니다. 한아이가 우물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다행히 외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또 바닥에 먹을 것도 있고, 공기도 있고, 잠 잘 곳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빛이 부족해서 약간 어두웠습니다. 우물은 매우 깊었습니다. 처음에 아이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는 곧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침묵했습니다. 그를 찾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자폐를 앓게 되면 분명히 듣기는 듣습니다. 귀가 온전합니다. 그런데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의 마음이 없습니다. 소리는 들리는데 뜻과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입은 있는데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홀로 깊은 상처 안에 가두어져 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자폐증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절망이 있습니다. 아픔도 있습니다. 외로움도 우리를 붙잡습니다. 내 소리를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남이 내 소리를 안 들으니까 나도 남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내속에 갇혀서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귀도 정상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듣고는 있으나 아무 들림이 없는 빈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본문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일종의 자폐증 증세의 고통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말 더듬는 자.’ 뭔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한 인물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마가복음 7:32)
듣지 못하는 게 얼마나 갑갑한 일일까요? 뭔가 소리가 들려오는데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가슴이 답답할까요? 소리의 세계에 동참하는 권리를 상실한 아픔이 너무나 컸을 것입니다. 게다가 듣지 못하니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농아에게 장애가 생기는 것은 입이 잘못되거나 혀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듣는 것만큼 말할 수 있고 듣는 것만큼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강제적으로 자폐적인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동안 일체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하면 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요? 하루는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혼자서 있어보라고 한다면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 내가 듣고 말할 권리를 빼앗겨야 하는가?” 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중죄인을 독방에 가둬두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차단을 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어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평생 이런 고통 가운데서 산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가슴이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마가복음 7:34)
여기 보면 먼저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움에 지금 참여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이렇게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이렇게 무지 속에 있습니다. 듣고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안타까움이 가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마음속에 연민의 정이 일어났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사람의 답답함을 저도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가슴이 미어져서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하는 하나님의 깊은 탄식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에바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음역이 된 말입니다.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듣지 못했던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에도 명령하셨고 그의 육체에도 명령하셨습니다. “닫힌 것들아, 더 이상 네 권리가 끝났다. 열려라! 맺혀진 것들아, 네 권리가 끝났다. 풀려라!” 그의 마음과 육체를 얽어맸던 모든 것들을 풀어주시고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 닫힐 수가 없고 막힐 수가 없고 숨겨진 채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 이 사람의 마음이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의 몸이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막혔던 것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마가복음 7:35)
성경은 그의 귀는 열려졌다고 말합니다. 닫힌 것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혀가 맺혀진 것이 풀려졌다고 말합니다. 그 옛날 한 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한 번도 제대로 듣지 못한 그 말이 명백하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리라는 것은 자체의 힘이 있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만드신 소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연 속에 들어가서 새소리와 물소리를 듣고 바람 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쉼을 얻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소리에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능력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될 때 거기에서 치유와 회복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 속에는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의미와 우리의 정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 어떻게 찬양합니까? 가사를 기억하면서 그 가사에 동참해야 치유와 회복의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사를 생각하지 않고 찬양을 하면 그저 음정의 높낮이만 있을 뿐입니다.
1960년대의 일입니다. 제 2바티칸 총회가 끝난 후에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내규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보통 수도원에 가면 수도사들이 6시간 이상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장은 이렇게 오랫동안 노래 부르는 것이 쓸모없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찬양을 부르는 대신에 다른 일들을 할 것을 제안했고 그렇게 대체를 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불렀던 성가를 부르는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나쁜 변화였습니다. 수도사들이 식물인간처럼 비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생기가 떨어졌습니다. 점차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모임을 갖기도 싫었습니다. 식사에 문제가 있는 걸까? 잠을 적게 자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런데 식욕도 사라졌습니다.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분석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찬양이 그들의 입에서 사라지고 목소리에서부터 오는 에너지를 받지 못해서 생긴 생기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전의 활동력과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잠을 몇 시간만 자고서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마음속에 자신의 기도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으로 기도할 때도 조용히 자기 입으로 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혀가 움직이지 않고 들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기도할 때에도 그 기도소리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저분이 대표로 기도하는데 그것은 바로 저의 기도입니다. 제 생각과 같습니다. 제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받아주세요.’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 말씀이 내 귀에 들려야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고 찬양도 함께 불러야 우리 속에 생기가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공동체가 바로 그런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함께 찬양을 듣고, 내입으로 부르고, 기도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총을 기억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속에 막혔던 것이 다시 풀려지는 것입니다. 내속에 닫힌 것이 다시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인 것입니다.
막혔던 것을 향해 “에바다!” 선포하십시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소리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특별한 치유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마가복음 7:33)
수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는데 그 무리를 떠났습니다. 들리지 않는 질병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장애입니다. 가장 조용한 곳에 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만 관심을 두시고 계시다는 사랑과 배려를 그 사람이 함께 공감할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접촉했습니다. 만졌습니다. 사랑의 터치였습니다. 그의 육체의 가장 연약한 곳인 귀에 두 손가락을 대셨습니다. 연약한 곳을 고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나도 너의 고통을 안다. 나도 너의 연약함과 고통받아왔던 그 모습을 아파한다. 이제 듣고 싶었던 너의 귀를 내가 만지겠다.’ 두 손가락을 이 사람의 귀에 갖다 대셨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은 약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지는 것은 정말로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다가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랐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는 제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저를 불러서는 자기 앞에 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누우면 제 배를 걷어놓고서는 제 배를 쓰다듬으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할머니 손은 약손, 지철이 배은 똥배” 그러면 신기하게도 금방 아픈 것이 사라져 다시 일어나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손에 치유의 효과를 허락해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침을 발라서 혀에 갖다 대셨습니다. 침이란 당시 물, 피, 술, 기름과 같이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길에서 넘어지거나 벌레에 물리면 어머니들이 어떻게 합니까? 침을 묻혀서 자녀들의 상처나 벌레 물린 곳에 바릅니다. 그때 자녀들이 더럽다고 그래도 “야 이놈아 이게 바로 약이다” 하고 발라주었던 모습을 우리들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친근하게 이 사람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연약한 자의 몸과 마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만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에바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던 사건과도 비슷합니다. “빛이 있으라!” 라고 선포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열려라!” 하고 선포하셨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속에 나를 얽어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육체 안에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의 자존감을 깨트려버리고 나를 파괴하는 못된 습관들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자신을 향해서 선포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향해서 선포하고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아픔을 향해서 선포하십시오. 그때 반드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처럼 가슴에 같이 아파하면서 선포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안타깝게 여기면서 선포해야 합니다. 가슴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