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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침묵

누가복음 23: 1 ~ 12

김지철 목사

2010.03.28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은 너희의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스가랴 9장에 예언된 메시아로 여기고 기뻐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서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한복음 12:13)라고 외치면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예수님의 생애를 보아온 많은 무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민중들이 여기에 함께 참여하여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이것은 한순간의 사건으로 그치고 맙니다. 곧 이어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의 삶을 보면 마치 드라마가 전개되듯이 몰락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영광의 길인 줄 알았는데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토록 환호하고 예수님을 찬양했던 민중들은 며칠이 못가서 예수님을 고발했고 저주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사 복음서는 이 사실을 동시에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분은 외로운 길을 걸었던 분이었습니다. 상처받은 분이었습니다. 배반당한 분이었습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민중들은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려는 음모가 곳곳에서 정교하게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제일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민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 권력자, 종교 권력자들에게 세뇌되고 맙니다. 최근에 종영한 ‘추노’라는 드라마는 노비들의 운명, 그들의 비애와 사랑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도 노비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자신의 권력에 이용하려했던 권력층의 모습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결국 노비들은 모두 무참히 죽어갑니다. 민중들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들은 소중하지만 권력에 의해서 쉽게 무너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시 지도자들도 민중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노래하고 찬양했던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게 됩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누가복음 23:1~2)

여기서 무리는 민중입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개인은 없고 집단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사람의 말만 들려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소리에 부화뇌동합니다. 이것이 민중의 위험성입니다.
그 무리들은 소리 높여 예수님을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권력자인 빌라도에게 고발했습니다. “로마제국을 뒤엎으려는 저 사람은 반란자입니다. 혹세무민하는 거짓예언자입니다. 국가에 세금을 내지 말고 저항하라고 가르쳤던 자입니다. 스스로를 왕이라 말하고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인물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쳐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며칠 만에 예수님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와 정치 권력자들도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누가복음 23:10)

그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인기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 싫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영향력을 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가 없어야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똑같이 고발했습니다.
정치적인 권력자들은 어떠했을까요? 두 명의 정치 권력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빌라도입니다. 그는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헤롯입니다. 그는 유대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권력 다툼 때문에 갈등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서로 원수였으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같이 협력하여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빌라도와 헤롯왕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반란자라고 말하는가?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질문과 더불어 조롱하고 비난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치려고 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질문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에게 질문을 합니다. “엄마, 저건 왜 푸르지? 엄마, 아이는 어디서 나와? 엄마, 이 색깔은 왜 빨갛지?”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아이가 자라난다는 증거입니다. 질문이 멈추었다는 것은 성장이 그친 것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자기 결론을 내리고 하는 질문입니다. 또 하나는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입니다. 빌라도와 헤롯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그들은 이미 질문에 대한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낮은 자리에서 질문할 때 그 질문은 빛이 납니다. 이러한 질문에는 호기심이 들어있습니다. 배우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성숙하고 변화하고자하는 마음의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질문하면 교만한 질문이 됩니다. 이미 자기 대답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대답이 나오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그 질문은 상대방을 조롱하는 질문이 됩니다. 사람을 흠집 나게 하고, 무너뜨리려는 질문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정치적 권력자들인 빌라도와 헤롯왕이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하면 그것에 꼬리를 물고 또 질문합니다. 그리고 다시 대답을 하면 또 꼬리를 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침묵하십니다. 말로 하는 것도 자기생각의 표현이지만, 침묵하는 것도 자기생각의 표현입니다.
침묵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지한 침묵입니다. 알지 못하기에 하는 침묵입니다. 듣지 못했기에 하는 침묵도 있습니다. 이런 침묵은 가르치면 됩니다. 그리하면 그 침묵은 변하여 말이 됩니다. 그러나 비겁한 침묵이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숨기 위해서 하는 침묵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굴한 침묵입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달리 긍정적인 침묵도 있습니다. 이것은 준비하는 침묵입니다. 듣고 배우기 위한 침묵입니다. 내가 더욱 성숙해지기 위해서 열린 마음으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을 가질 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한 여인이 수도사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제가 남편과 너무 자주 말다툼을 하는데 이 말다툼이 끊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때 수도사가 말합니다. “우리 수도원에 아주 신비로운 물이 있습니다. 이 물 한 병을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말다툼을 시작하면 이 신비한 물을 입 안에 집어넣으십시오. 그리고 삼키지는 말고 1분 정도 가만히 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말다툼이 시작되었을 때 여인은 그 신비로운 물을 입에 넣고 삼키지 않은 채 입 속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다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관계가 좋아졌습니다. 여인은 너무나 기뻐서 수도사에게 찾아갔습니다. “그 물은 정말 신비로운 물이네요!” 그러자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이건 보통 물입니다. 물이 신비한 것이 아니라 침묵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잠 잘 때까지 소음과 굉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 끊임없이 들어와서 우리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최근에 방송 앵커인 백지연이 「뜨거운 침묵」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녀는 말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내면세계를 뜨거운 침묵으로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좋은 스피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말하기 전에 침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소중한 말을 하기 위해서 지금은 침묵하겠다는 것을 뜨거운 침묵이라고 표현합니다.
옛 어른들이 우리에게 종종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침묵이 금이다!” 이 것은 우리 삶에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하지만, 때로는 깊은 침묵 속에 들어가야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셨던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깨닫지 못했기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상의 권력자가 두 명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이고, 하나는 헤롯왕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면 안 될 것이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권력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두 존재가 맞닥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태복음 26:53)

예수님께서는 당장에라도 하늘의 천사들을 불러내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침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예수님의 침묵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모두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와 헤롯왕이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7)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받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모든 멸시를 받기로 하셨습니다. 모든 조롱을 수용하기로 하셨습니다. 세상의 침 뱉음과 모든 모욕을 당신이 받기로 결정하시면서 침묵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땅의 억울한 사람들, 신음하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이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가슴을 앓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할 말이 있지만 침묵한다. 나도 너의 고통에 연대하고 있다. 내 고통 속에 함께 내려놓아라.”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참여입니다.
예수님의 침묵 속에는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면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 길이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이라도, 어느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결심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침묵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세상과 세상의 권력자에 대한 저항과 심판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질문은 정직한 질문이 아니다.” 헤롯왕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질문에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와 이야기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침묵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로 떠들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 말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침묵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듣겠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제가 마음을 열겠습니다. 제가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제 입을 닫겠습니다. 이제는 제 혀에 재갈을 물리겠습니다. 이제는 내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침묵할 때 우리의 귀와 마음이 듣는 귀와 듣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면 우리에게는 고통이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마음을 열어 다시 주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나의 소리를 줄이고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고난주간에 여러분에게 두 가지 권면의 말로 부탁합니다. 먼저 우리는 내 소리, 내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를 줄이는 결심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3시간 보던 사람은 2시간 보시고, 2시간 보던 사람은 1시간 보시고, 인터넷으로 게임을 하던 사람은 그 시간을 조금 줄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내 말이 너무 컸습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을 침묵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몸이 침묵하는 것을 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끼씩 금식하시던지, 아니면 일주일 중에 하루를 택해서 세끼 전체를 금식해보시기 바랍니다. 병이 있으신 분들은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우리가 금식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우리의 생각이 모아집니다. 내 언어가 침묵할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처럼, 내 육체의 욕망이 멈추어 설 때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내게 가까이 다가옵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영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침묵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소리를 줄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끼 금식하면서 모은 돈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주님께서 침묵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침묵하셨지만 사실은 말씀하시기 위해서 침묵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침묵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침묵할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오셔서 말씀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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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 1 ~ 12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은 너희의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스가랴 9장에 예언된 메시아로 여기고 기뻐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서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한복음 12:13)라고 외치면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예수님의 생애를 보아온 많은 무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민중들이 여기에 함께 참여하여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이것은 한순간의 사건으로 그치고 맙니다. 곧 이어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의 삶을 보면 마치 드라마가 전개되듯이 몰락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영광의 길인 줄 알았는데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토록 환호하고 예수님을 찬양했던 민중들은 며칠이 못가서 예수님을 고발했고 저주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사 복음서는 이 사실을 동시에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분은 외로운 길을 걸었던 분이었습니다. 상처받은 분이었습니다. 배반당한 분이었습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민중들은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려는 음모가 곳곳에서 정교하게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제일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민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 권력자, 종교 권력자들에게 세뇌되고 맙니다. 최근에 종영한 ‘추노’라는 드라마는 노비들의 운명, 그들의 비애와 사랑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도 노비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자신의 권력에 이용하려했던 권력층의 모습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결국 노비들은 모두 무참히 죽어갑니다. 민중들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들은 소중하지만 권력에 의해서 쉽게 무너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시 지도자들도 민중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노래하고 찬양했던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게 됩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누가복음 23:1~2)

여기서 무리는 민중입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개인은 없고 집단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사람의 말만 들려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소리에 부화뇌동합니다. 이것이 민중의 위험성입니다.
그 무리들은 소리 높여 예수님을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권력자인 빌라도에게 고발했습니다. “로마제국을 뒤엎으려는 저 사람은 반란자입니다. 혹세무민하는 거짓예언자입니다. 국가에 세금을 내지 말고 저항하라고 가르쳤던 자입니다. 스스로를 왕이라 말하고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인물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쳐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며칠 만에 예수님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와 정치 권력자들도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누가복음 23:10)

그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인기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 싫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영향력을 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가 없어야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똑같이 고발했습니다.
정치적인 권력자들은 어떠했을까요? 두 명의 정치 권력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빌라도입니다. 그는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헤롯입니다. 그는 유대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권력 다툼 때문에 갈등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서로 원수였으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같이 협력하여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빌라도와 헤롯왕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반란자라고 말하는가?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질문과 더불어 조롱하고 비난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치려고 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질문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에게 질문을 합니다. “엄마, 저건 왜 푸르지? 엄마, 아이는 어디서 나와? 엄마, 이 색깔은 왜 빨갛지?”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아이가 자라난다는 증거입니다. 질문이 멈추었다는 것은 성장이 그친 것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자기 결론을 내리고 하는 질문입니다. 또 하나는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입니다. 빌라도와 헤롯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그들은 이미 질문에 대한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낮은 자리에서 질문할 때 그 질문은 빛이 납니다. 이러한 질문에는 호기심이 들어있습니다. 배우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성숙하고 변화하고자하는 마음의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질문하면 교만한 질문이 됩니다. 이미 자기 대답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대답이 나오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그 질문은 상대방을 조롱하는 질문이 됩니다. 사람을 흠집 나게 하고, 무너뜨리려는 질문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정치적 권력자들인 빌라도와 헤롯왕이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하면 그것에 꼬리를 물고 또 질문합니다. 그리고 다시 대답을 하면 또 꼬리를 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침묵하십니다. 말로 하는 것도 자기생각의 표현이지만, 침묵하는 것도 자기생각의 표현입니다.
침묵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지한 침묵입니다. 알지 못하기에 하는 침묵입니다. 듣지 못했기에 하는 침묵도 있습니다. 이런 침묵은 가르치면 됩니다. 그리하면 그 침묵은 변하여 말이 됩니다. 그러나 비겁한 침묵이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숨기 위해서 하는 침묵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굴한 침묵입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달리 긍정적인 침묵도 있습니다. 이것은 준비하는 침묵입니다. 듣고 배우기 위한 침묵입니다. 내가 더욱 성숙해지기 위해서 열린 마음으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을 가질 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한 여인이 수도사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제가 남편과 너무 자주 말다툼을 하는데 이 말다툼이 끊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때 수도사가 말합니다. “우리 수도원에 아주 신비로운 물이 있습니다. 이 물 한 병을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말다툼을 시작하면 이 신비한 물을 입 안에 집어넣으십시오. 그리고 삼키지는 말고 1분 정도 가만히 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말다툼이 시작되었을 때 여인은 그 신비로운 물을 입에 넣고 삼키지 않은 채 입 속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다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관계가 좋아졌습니다. 여인은 너무나 기뻐서 수도사에게 찾아갔습니다. “그 물은 정말 신비로운 물이네요!” 그러자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이건 보통 물입니다. 물이 신비한 것이 아니라 침묵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잠 잘 때까지 소음과 굉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 끊임없이 들어와서 우리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최근에 방송 앵커인 백지연이 「뜨거운 침묵」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녀는 말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내면세계를 뜨거운 침묵으로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좋은 스피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말하기 전에 침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소중한 말을 하기 위해서 지금은 침묵하겠다는 것을 뜨거운 침묵이라고 표현합니다.
옛 어른들이 우리에게 종종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침묵이 금이다!” 이 것은 우리 삶에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하지만, 때로는 깊은 침묵 속에 들어가야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셨던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깨닫지 못했기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상의 권력자가 두 명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이고, 하나는 헤롯왕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면 안 될 것이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권력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두 존재가 맞닥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태복음 26:53)

예수님께서는 당장에라도 하늘의 천사들을 불러내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침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예수님의 침묵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모두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와 헤롯왕이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7)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받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모든 멸시를 받기로 하셨습니다. 모든 조롱을 수용하기로 하셨습니다. 세상의 침 뱉음과 모든 모욕을 당신이 받기로 결정하시면서 침묵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땅의 억울한 사람들, 신음하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이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가슴을 앓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할 말이 있지만 침묵한다. 나도 너의 고통에 연대하고 있다. 내 고통 속에 함께 내려놓아라.”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참여입니다.
예수님의 침묵 속에는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면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 길이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이라도, 어느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결심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침묵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세상과 세상의 권력자에 대한 저항과 심판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질문은 정직한 질문이 아니다.” 헤롯왕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질문에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와 이야기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침묵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로 떠들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 말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침묵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듣겠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제가 마음을 열겠습니다. 제가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제 입을 닫겠습니다. 이제는 제 혀에 재갈을 물리겠습니다. 이제는 내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침묵할 때 우리의 귀와 마음이 듣는 귀와 듣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면 우리에게는 고통이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마음을 열어 다시 주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나의 소리를 줄이고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고난주간에 여러분에게 두 가지 권면의 말로 부탁합니다. 먼저 우리는 내 소리, 내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를 줄이는 결심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3시간 보던 사람은 2시간 보시고, 2시간 보던 사람은 1시간 보시고, 인터넷으로 게임을 하던 사람은 그 시간을 조금 줄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내 말이 너무 컸습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을 침묵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몸이 침묵하는 것을 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끼씩 금식하시던지, 아니면 일주일 중에 하루를 택해서 세끼 전체를 금식해보시기 바랍니다. 병이 있으신 분들은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우리가 금식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우리의 생각이 모아집니다. 내 언어가 침묵할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처럼, 내 육체의 욕망이 멈추어 설 때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내게 가까이 다가옵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영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침묵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소리를 줄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끼 금식하면서 모은 돈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주님께서 침묵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침묵하셨지만 사실은 말씀하시기 위해서 침묵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침묵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침묵할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오셔서 말씀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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