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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평화

시편 85: 8 ~ 13

김지철 목사

2013.06.23

정의가 사라진 곳에는 인간의 존엄성도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블레인 하든(Blaine Harden)이라는 언론기자가 북한 청년 신동혁과 2년 여 동안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14호 수용소 탈출』입니다. 소위 정치적 반동분자들이 거주한다는 북한 수용소 이야기입니다.
신동혁은 1982년 북한 정치 수용소인 camp 14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23살 때인 2005년 중국으로 탈출했고, 일 년 뒤인 2006년에 한국에 입국하게 됩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출에 성공한 신동혁의 증언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살았는가 싶어 그저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고, 멍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짐승처럼 굴레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3살이 되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좀 더 대우를 받기 위해서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도모했다는 것을 14호 간수에게 고발합니다. 그가 배운 것은 어머니나 아버지라도, 형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발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잘못된 것’은 바로 탈출 모의였습니다.
결국 그의 어머니와 형은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어머니는 교수형을, 형은 총살형을 당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런데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도모한 일은 저렇게 죽어야 마땅한 일이라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이 고생하게 된 것에 화를 냈다고 책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북한 청년이 고발하는 북한 정권의 잔혹한 실체입니다.
그는 자기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머릿속에 든 단 하나의 생각은, 나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전혀 감정 없는 동물처럼 젊은 시절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동정이나 슬픔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이 없었습니다. 수용소를 나온 지금 저는 감정을 느끼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수용소의 주민들을, 또 제 동료들을, 제 가족들을 생각하면 제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사치스럽고 죄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블레인 하든이 이 내용을 영어로 엮어냈을 때 모든 세계의 언론들이 특필을 했고, 특히 미국, 영국과 같은 자유국가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인권의 존엄성이 말살되고 있는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비굴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독재자 한 사람이 살려고 북한의 이천 만 이상 되는 백성들이 볼모로 이용된다는 사실 앞에 분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인간을 비도덕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6.25라는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은 지 63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대한민국이 받은 축복을 생각해 봅니다,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를 추구했고, 경제적인 풍요까지 받은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 북한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더 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잔인하게 백성을 억압하는 저 어둠의 세력, 저 독재의 세력이 언제 변화될까? 저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자리 잡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또 한 번 해보게 됩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충분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개인이 집단으로 들어가고, 사회적 자리, 정치적 권력의 자리로 들어가면 비도덕적이 되고 만다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합니다. 쉽게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으로는 훌륭해도 집단 안에서 정치⋅사회적 문제, 권력의 문제와 만나게 되면 예외 없이 비도덕적으로 변하게 되고, 집단 또한 불의한 집단으로까지 전락할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괜찮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품도 괜찮고, 생각과 가치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집단 속에만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기 생각을 멈추고, 집단적인 이기주의 속에 매몰되는 현상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탄식했습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자유, 인권, 평화도 언어의 유희에 머무르고 말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평화를 이룬 두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20세기에는 참으로 많은 제국주의적 형태의 독재국가들과 왜곡된 이데올로기들이 있었습니다. 히틀러 나치와 레닌, 스탈린의 공산주의 운동까지, 그 암울한 시기를 우리는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왜곡된 이데올로기와 거대한 제국주의적 사고를 독특한 자기 방식으로 극복하고, 저항했던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였고, 또 하나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개인적인 삶에서 사회, 정치적인 삶에로 자유와 평화 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이 한 것은, 스스로의 삶을 정결하게 하면서 비폭력주의적인 저항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1999년 4월 18일자 미국의 뉴욕 타임즈는 지난 1천 년 간에 있었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선정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비폭력운동을 전개한 인물입니다. 그는 아주 명백히 비폭력이어야 이 폭력적인 권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폭력은 마음대로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겉옷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의 자리는 우리 가슴 속에 있어서 우리 존재 자체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비폭력은 그래서 가슴의 문제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자기정화를 뜻한다.”
비폭력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비폭력이 될 때 가능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룬 사람만이 진정으로 남과의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남한테 사납고, 남과 다투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과 평화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폭력적인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언어와 행동 속에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도 표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디의 비폭력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그는 힌두교인이었지만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영성가는 간디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간디의 비폭력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진 영적인 통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간디는 자기 내면의 폭력을 뿌리 뽑았고 밖으로 비폭력을 주장했다. 그래서 전쟁으로 멍든 세상에 평화를 내뿜었다.’
결국 간디의 이러한 비폭력 저항운동은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부터 해방시키는 놀라운 정치적,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떠했나요? 그는 미국 안에 존재하던 흑백차별의 아픔을 흑인이기에 더욱 절감하고 그것 때문에 비통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도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에 힘입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내걸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폭력은 적을 파괴하지만, 비폭력은 적을 친구를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오직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만이 비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미워합니다,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잘 모릅니다,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습니다, 나뉘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사랑은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면 더 큰 폭력을 낳습니다. 이미 별들이 없어진 밤에 더 깊은 어둠만 더할 뿐입니다. 어둠은 어둠을 내쫓지 못합니다. 오직 빛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내몰지 못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비폭력을 통해 미국의 백인과 흑인이 함께 즐거워하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꿈이 있음을 선포하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행했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의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흑인 대통령이 미국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렇듯 놀라운 사실이 역사적 현장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타나고 있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서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과 자비의 평화입니다.

이 땅에서의 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로마 제국의 한 귀퉁이에 있는 팔레스틴이라는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막강한 정치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군사력에 기반을 둔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곳의 평화는 적대자들을 억압하고 잔인하게 제압하는 폭력이 동반된 평화였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평화를 ‘팍스로마나’라고 부릅니다. 정치력과 군사력을 통한 로마의 평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로마의 평화를 칭하는 로마의 형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로마의 폭력을 그대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무력으로 다스리는 로마제국이 아닌, 사랑과 정의로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새로운 평화를 우리에게 약속해 주십니다. 이것은 사랑과 자비에 기초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폭력성에 그대로 노출이 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비난과 억압 속에 방치된 것처럼 그대로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 받으셨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폭력을 당하셨습니다. 폭력을 비폭력으로 잠재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기를 원하셨고, 자비를 베풀기 원하셨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미움의 영, 증오의 영을 사랑의 영, 배려의 영, 자비의 영으로 바꾸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이 세상의 모든 장벽과 폭력성을 허무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85편 10절에서는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시편 85:10)

인애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가 입을 맞출 정도로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6.25를 다시 맞이하면서 이 한반도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가 없는 통일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전쟁 없이, 폭력 없이 이루어질 평화입니다. .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것처럼 평화는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정의와 공의를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의와 공의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차디찬 정의, 무자비한 정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안에 정의와 공의에 진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거기에 인애와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있어야 진정한 정의가 나타나고, 그럴 때 비로소 평화의 역사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을 삶으로, 인격으로 삶 속에서 담당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화평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인애와 사랑과 자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평화로 부름 받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공동체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우리 교회요 성도들인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평화를 심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과 같지 않기에 예수님처럼 온전한 평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해야 됩니다. 가장 작은 것부터 평화의 씨앗을 심어 나가는 것입니다.
박노해가 쓴 ‘평화 나누기’라는 시를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하나님께서 내 안에 주신 이 평화의 씨앗을 우리의 가정과 직장, 삶의 모든 현장에서 심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통일’이라는, 한반도의 매우 중차대한 과제를 소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갈 길이 너무 먼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북한의 정치적, 사회적 가치관의 차이가 우리와는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북한의 인간 이해는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사람을 만나면 서로 믿지 못하게 하고 불신과 의심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고발하게 하고 인간다움의 따뜻함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북한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언어가 있습니다. 바로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언어를 그들은 어려서부터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참화가 없게 하시옵소서. 우리 마음속에 드리우고 있는 미움의 영, 증오의 영을 사랑과 배려와 자비의 영으로 바꿔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려고 하면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손해 볼 각오를 하시고 이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사랑의 축복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제가 내 가정과 직장, 이 사회, 이 교회 그리고 이 민족사 앞에 하나님의 사랑의 영을 통해서 평화의 씨앗을 심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나가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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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5: 8 ~ 13

8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11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2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3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정의가 사라진 곳에는 인간의 존엄성도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블레인 하든(Blaine Harden)이라는 언론기자가 북한 청년 신동혁과 2년 여 동안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14호 수용소 탈출』입니다. 소위 정치적 반동분자들이 거주한다는 북한 수용소 이야기입니다.
신동혁은 1982년 북한 정치 수용소인 camp 14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23살 때인 2005년 중국으로 탈출했고, 일 년 뒤인 2006년에 한국에 입국하게 됩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출에 성공한 신동혁의 증언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살았는가 싶어 그저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고, 멍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짐승처럼 굴레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3살이 되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좀 더 대우를 받기 위해서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도모했다는 것을 14호 간수에게 고발합니다. 그가 배운 것은 어머니나 아버지라도, 형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발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잘못된 것’은 바로 탈출 모의였습니다.
결국 그의 어머니와 형은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어머니는 교수형을, 형은 총살형을 당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런데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도모한 일은 저렇게 죽어야 마땅한 일이라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이 고생하게 된 것에 화를 냈다고 책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북한 청년이 고발하는 북한 정권의 잔혹한 실체입니다.
그는 자기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머릿속에 든 단 하나의 생각은, 나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전혀 감정 없는 동물처럼 젊은 시절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동정이나 슬픔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이 없었습니다. 수용소를 나온 지금 저는 감정을 느끼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수용소의 주민들을, 또 제 동료들을, 제 가족들을 생각하면 제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사치스럽고 죄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블레인 하든이 이 내용을 영어로 엮어냈을 때 모든 세계의 언론들이 특필을 했고, 특히 미국, 영국과 같은 자유국가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인권의 존엄성이 말살되고 있는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비굴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독재자 한 사람이 살려고 북한의 이천 만 이상 되는 백성들이 볼모로 이용된다는 사실 앞에 분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인간을 비도덕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6.25라는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은 지 63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대한민국이 받은 축복을 생각해 봅니다,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를 추구했고, 경제적인 풍요까지 받은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 북한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더 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잔인하게 백성을 억압하는 저 어둠의 세력, 저 독재의 세력이 언제 변화될까? 저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자리 잡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또 한 번 해보게 됩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충분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개인이 집단으로 들어가고, 사회적 자리, 정치적 권력의 자리로 들어가면 비도덕적이 되고 만다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합니다. 쉽게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으로는 훌륭해도 집단 안에서 정치⋅사회적 문제, 권력의 문제와 만나게 되면 예외 없이 비도덕적으로 변하게 되고, 집단 또한 불의한 집단으로까지 전락할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괜찮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품도 괜찮고, 생각과 가치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집단 속에만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기 생각을 멈추고, 집단적인 이기주의 속에 매몰되는 현상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탄식했습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자유, 인권, 평화도 언어의 유희에 머무르고 말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평화를 이룬 두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20세기에는 참으로 많은 제국주의적 형태의 독재국가들과 왜곡된 이데올로기들이 있었습니다. 히틀러 나치와 레닌, 스탈린의 공산주의 운동까지, 그 암울한 시기를 우리는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왜곡된 이데올로기와 거대한 제국주의적 사고를 독특한 자기 방식으로 극복하고, 저항했던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였고, 또 하나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개인적인 삶에서 사회, 정치적인 삶에로 자유와 평화 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이 한 것은, 스스로의 삶을 정결하게 하면서 비폭력주의적인 저항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1999년 4월 18일자 미국의 뉴욕 타임즈는 지난 1천 년 간에 있었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선정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비폭력운동을 전개한 인물입니다. 그는 아주 명백히 비폭력이어야 이 폭력적인 권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폭력은 마음대로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겉옷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의 자리는 우리 가슴 속에 있어서 우리 존재 자체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비폭력은 그래서 가슴의 문제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자기정화를 뜻한다.”
비폭력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비폭력이 될 때 가능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룬 사람만이 진정으로 남과의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남한테 사납고, 남과 다투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과 평화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폭력적인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언어와 행동 속에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도 표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디의 비폭력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그는 힌두교인이었지만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영성가는 간디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간디의 비폭력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진 영적인 통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간디는 자기 내면의 폭력을 뿌리 뽑았고 밖으로 비폭력을 주장했다. 그래서 전쟁으로 멍든 세상에 평화를 내뿜었다.’
결국 간디의 이러한 비폭력 저항운동은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부터 해방시키는 놀라운 정치적,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떠했나요? 그는 미국 안에 존재하던 흑백차별의 아픔을 흑인이기에 더욱 절감하고 그것 때문에 비통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도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에 힘입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내걸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폭력은 적을 파괴하지만, 비폭력은 적을 친구를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오직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만이 비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미워합니다,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잘 모릅니다,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습니다, 나뉘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사랑은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면 더 큰 폭력을 낳습니다. 이미 별들이 없어진 밤에 더 깊은 어둠만 더할 뿐입니다. 어둠은 어둠을 내쫓지 못합니다. 오직 빛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내몰지 못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비폭력을 통해 미국의 백인과 흑인이 함께 즐거워하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꿈이 있음을 선포하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행했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의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흑인 대통령이 미국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렇듯 놀라운 사실이 역사적 현장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타나고 있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서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과 자비의 평화입니다.

이 땅에서의 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로마 제국의 한 귀퉁이에 있는 팔레스틴이라는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막강한 정치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군사력에 기반을 둔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곳의 평화는 적대자들을 억압하고 잔인하게 제압하는 폭력이 동반된 평화였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평화를 ‘팍스로마나’라고 부릅니다. 정치력과 군사력을 통한 로마의 평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로마의 평화를 칭하는 로마의 형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로마의 폭력을 그대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무력으로 다스리는 로마제국이 아닌, 사랑과 정의로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새로운 평화를 우리에게 약속해 주십니다. 이것은 사랑과 자비에 기초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폭력성에 그대로 노출이 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비난과 억압 속에 방치된 것처럼 그대로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 받으셨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폭력을 당하셨습니다. 폭력을 비폭력으로 잠재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기를 원하셨고, 자비를 베풀기 원하셨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미움의 영, 증오의 영을 사랑의 영, 배려의 영, 자비의 영으로 바꾸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이 세상의 모든 장벽과 폭력성을 허무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85편 10절에서는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시편 85:10)

인애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가 입을 맞출 정도로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6.25를 다시 맞이하면서 이 한반도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가 없는 통일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전쟁 없이, 폭력 없이 이루어질 평화입니다. .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것처럼 평화는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정의와 공의를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의와 공의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차디찬 정의, 무자비한 정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안에 정의와 공의에 진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거기에 인애와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있어야 진정한 정의가 나타나고, 그럴 때 비로소 평화의 역사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을 삶으로, 인격으로 삶 속에서 담당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화평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인애와 사랑과 자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평화로 부름 받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공동체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우리 교회요 성도들인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평화를 심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과 같지 않기에 예수님처럼 온전한 평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해야 됩니다. 가장 작은 것부터 평화의 씨앗을 심어 나가는 것입니다.
박노해가 쓴 ‘평화 나누기’라는 시를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하나님께서 내 안에 주신 이 평화의 씨앗을 우리의 가정과 직장, 삶의 모든 현장에서 심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통일’이라는, 한반도의 매우 중차대한 과제를 소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갈 길이 너무 먼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북한의 정치적, 사회적 가치관의 차이가 우리와는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북한의 인간 이해는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사람을 만나면 서로 믿지 못하게 하고 불신과 의심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고발하게 하고 인간다움의 따뜻함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북한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언어가 있습니다. 바로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언어를 그들은 어려서부터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참화가 없게 하시옵소서. 우리 마음속에 드리우고 있는 미움의 영, 증오의 영을 사랑과 배려와 자비의 영으로 바꿔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려고 하면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손해 볼 각오를 하시고 이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사랑의 축복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제가 내 가정과 직장, 이 사회, 이 교회 그리고 이 민족사 앞에 하나님의 사랑의 영을 통해서 평화의 씨앗을 심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나가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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