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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보여주신 교육

요한복음 7: 15 ~ 17

김지철 목사

2015.10.11

우리는 부모로부터 신앙을 배웁니다.

소망교회 창립 38주년을 맞이하여, 지난주에는 우리 교회의 첫 번째 가치는 ‘예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두 번째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교육’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과 교역자들이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인도하는지 먼저 동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영 상 –

교회학교 교사들과 교역자들은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으로 세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교사들과 교역자들을 만날 때, 감사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더욱 힘을 낼 수 있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삶의 많은 영역 중에서도 특히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부모님, 교사, 목회자 혹은 친구가 떠오를 것입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누구를 이야기할 것 같습니까?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교사, 학부모, 청소년과 초등학생 등 총 3,48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교사의 어려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문성이 없어서’, ‘열정이 부족해서’, ‘세상일에 바빠 시간이 모자라서’,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서’라는 답변들이 비슷비슷하게 나왔습니다.
실제적인 공과공부 시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초등학생 부서나 청소년부나 10분에서 20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공과공부는 일반교육, 주입식 교육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교사와의 관계나 수업만족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엇보다 누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냐는 질문에는 아이들이나 교사, 목회자들이 동일하게 ‘부모’라고 대답했습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도 부모들은 신앙교육에 적극적이거나 열정을 쏟아붓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의 첫 번째 목표가 ‘어떻게 하면 학교 성적을 높일 것인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집중하기 때문에 신앙교육은 등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아주 막강합니다. 좋은 영향력뿐만 아니라 나쁜 영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인 내가 기도하면, 자녀들도 따라합니다. 부모인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똑같이 기도하기를 싫어합니다. 부모가 주일에 교회를 쉽게 빠지면, 자녀도 교회에 갈 이유와 필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에 스스로 열심을 내기보다 위탁교육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 못하는 것 같으면, 학원에 보냅니다. 신앙의 교육이 잘 안 되는 것 같으면, 교회가 다 해결해 준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보냅니다. 과연 이러한 보냄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의 첫 번째 장소는 가정입니다. 자녀가 매일 만나는 사람이 부모라는 사실을 부모는 종종 잊습니다. 교회가 자녀들을 열심히 가르치지만, 교회교육과 가정교육이 연계가 되어야 자녀들이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자녀가 교회의 교사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가정에서 부모와 보내는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우리 아들의, 딸의 선생님이다. 내 자녀의 지성과 인성과 영성은 학교와 학원, 교회가 아니라 부모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자녀들은 위탁기관이나 세상에 방치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자녀교육을 잘못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제사장이었던 엘리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아버지가 죽는 날만 기다리는 탐욕스럽고 사악한 아들들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사무엘상 3장 13절에는 그의 잘못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사무엘상 3:13)

자녀가 못된 짓을 골라 하는데도, 엘리는 바르게 꾸짖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열왕기상 1장 6절에는, 아들 아도니야를 향한 다윗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본문에 나타난 ‘그’는 바로 아도니야입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열왕기상 1:6)

“도대체 왜 그런 악한 일을 하느냐?”는 말로 한 번도 아들을 야단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들의 마음이 섭섭할까봐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들에게 아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기쁨을 주었던 왕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기의 아들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를 반역했습니다. 아도니야는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자신이 왕이라며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압살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자신이 왕이라며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왜 자녀 교육에 실패한 부모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버지들이여, 자녀를 이렇게 키워서는 안 된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 예언자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백성들을 가르치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면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집니다. 왕이나 제사장, 예언자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배우는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당대의 랍비들이었습니다.
랍비들은 회당에서 끊임없이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각인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책의 백성, 성경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배움의 힘은, 초대교회에서도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힘이 당대 가장 강력한 군대의 나라였던 로마 제국을 이겨나가게 했고, 문화와 철학의 나라였던 헬라 문명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전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신약의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대의 다른 랍비들과는 달랐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는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전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그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의 반응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마태복음 7:28)

다른 랍비들이 가르칠 때는 놀라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가르치시니 놀랐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새것, 예수님만의 언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시작하실 때 자주 사용하신 틀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의 말을 들으라. 내 말은 진리다. 진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라는 강력한 권고의 표현도 종종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삶의 문제가 얼마나 곤고하고 무거운지, 네가 얼마나 외로운지, 네가 얼마나 슬퍼하며 아파하는지, 네가 얼마나 미워하고 분노하고 탄식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나는 갖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인간 지혜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디에서도 “나는 모른다”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너희가 방향성이 없어서 흔들리느냐? 내가 길이다. 너희가 진리를 찾고 있느냐? 구도자적인 마음을 갖고 있느냐? 내가 진리다. 너희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느냐?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 이렇게 선언하신 분은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이처럼 가장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사랑과 겸손으로 연약한 자, 병든 자, 외로운 자를 찾아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하늘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분에게 지혜가 있구나. 이분이 선한 일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구나’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님은 스승이 아니라 스승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이상의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와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선언하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님 앞에서 경험한 내용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로새서 2:3)

당대의 최고 지성인인 바울은, 예수님 안에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늘의 계시적인 지혜와 총명과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 있던 권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경탄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한복음 7:15)

“도대체 이 사람이 어디서 배웠지? 어떻게 이런 지혜의 말씀이 나타나지?” 사람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안식일 논쟁이 있을 때도 예수님은 당대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먹고 마시는 것을 이야기하실 때,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실 때,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이러한 놀람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일어난 사건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열두 살이나 되었으니 따라오고 있겠지 생각하며 내려오다 보니, 아들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러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이 당대의 석학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2장 4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46)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랍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묻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서 이러한 놀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놀라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아직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모든 위인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아브라함과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나면서 무릎을 꿇었겠습니까?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무릎을 꿇었겠습니까? 왜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메섹 도상에서 거꾸러졌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놀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한복음 7:16)

“내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있다. 바로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주신 것, 보여 주신 것, 깨닫게 하신 것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계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가르침을 통해 이어집니다.

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이야기할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 능력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전혀 몰랐던 것,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새로운 것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을 전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을 내가 제자인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으니 이제 너희가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라.”
신앙은 가르침이 없으면 단절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어도 자녀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그 신앙은 부모에게서 멈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예수님을 믿고 내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예배드릴 때에 내게 어떤 기쁨이 있는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셨는지를 자녀와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움을 청하러 우리에게 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실 겁니다.”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불충하는 말이며 불성실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그들을 돕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무태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이 아이를 하나님이 지켜 주세요’라고 기도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하는데도 꾸짖거나 경계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바꿔 주시겠지’ 생각하는 것은 직무태만입니다.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부모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했을 때 꾸중하고, 옳은 일을 했을 때 칭찬하는 것, 이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키우라고 우리에게 자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정을 부양한다는 이유로 자녀와 대화할 시간까지 없애면서 바쁘게 살고 있다면, 그러한 바쁨은 당장 멈춰야 합니다. 일과 자녀 중 어느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자녀들이 진심으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잘 버는 아버지나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아버지? 잠깐은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랑은, “우리 아버지는 내가 힘들 때 늘 내 옆에 계셔. 내가 대화하고 싶을 때 나와 이야기를 나누셔”일 것입니다. 만약 이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다면, 자녀는 영혼의 자랑거리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하는 시간에서 가정교육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일주일에 자녀를 위해서 15분만 내 보십시오. 자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함께하는 15분의 9/10는 자녀가 이야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저 “그래? 힘들었겠구나.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니?” 장단을 맞추며 묻기만 하세요. 그리고 자녀의 손을 잡고 기도해 보세요.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보다 더 잘하고 계신 분들이 아니라,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시는 분들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15분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점차 20분이 되고, 30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자녀들이 아버지를,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주고, 나를 사랑하기에 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 아버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합니다.
물론 교회는 교회대로 맡은 역할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와 가정의 교육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자녀들이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자녀들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며, 함께 노력하는 부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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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 15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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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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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우리는 부모로부터 신앙을 배웁니다.

소망교회 창립 38주년을 맞이하여, 지난주에는 우리 교회의 첫 번째 가치는 ‘예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두 번째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교육’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과 교역자들이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인도하는지 먼저 동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영 상 –

교회학교 교사들과 교역자들은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으로 세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교사들과 교역자들을 만날 때, 감사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더욱 힘을 낼 수 있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삶의 많은 영역 중에서도 특히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부모님, 교사, 목회자 혹은 친구가 떠오를 것입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누구를 이야기할 것 같습니까?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교사, 학부모, 청소년과 초등학생 등 총 3,48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교사의 어려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문성이 없어서’, ‘열정이 부족해서’, ‘세상일에 바빠 시간이 모자라서’,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서’라는 답변들이 비슷비슷하게 나왔습니다.
실제적인 공과공부 시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초등학생 부서나 청소년부나 10분에서 20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공과공부는 일반교육, 주입식 교육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교사와의 관계나 수업만족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엇보다 누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냐는 질문에는 아이들이나 교사, 목회자들이 동일하게 ‘부모’라고 대답했습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도 부모들은 신앙교육에 적극적이거나 열정을 쏟아붓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의 첫 번째 목표가 ‘어떻게 하면 학교 성적을 높일 것인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집중하기 때문에 신앙교육은 등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아주 막강합니다. 좋은 영향력뿐만 아니라 나쁜 영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인 내가 기도하면, 자녀들도 따라합니다. 부모인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똑같이 기도하기를 싫어합니다. 부모가 주일에 교회를 쉽게 빠지면, 자녀도 교회에 갈 이유와 필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에 스스로 열심을 내기보다 위탁교육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 못하는 것 같으면, 학원에 보냅니다. 신앙의 교육이 잘 안 되는 것 같으면, 교회가 다 해결해 준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보냅니다. 과연 이러한 보냄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의 첫 번째 장소는 가정입니다. 자녀가 매일 만나는 사람이 부모라는 사실을 부모는 종종 잊습니다. 교회가 자녀들을 열심히 가르치지만, 교회교육과 가정교육이 연계가 되어야 자녀들이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자녀가 교회의 교사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가정에서 부모와 보내는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우리 아들의, 딸의 선생님이다. 내 자녀의 지성과 인성과 영성은 학교와 학원, 교회가 아니라 부모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자녀들은 위탁기관이나 세상에 방치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자녀교육을 잘못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제사장이었던 엘리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아버지가 죽는 날만 기다리는 탐욕스럽고 사악한 아들들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사무엘상 3장 13절에는 그의 잘못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사무엘상 3:13)

자녀가 못된 짓을 골라 하는데도, 엘리는 바르게 꾸짖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열왕기상 1장 6절에는, 아들 아도니야를 향한 다윗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본문에 나타난 ‘그’는 바로 아도니야입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열왕기상 1:6)

“도대체 왜 그런 악한 일을 하느냐?”는 말로 한 번도 아들을 야단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들의 마음이 섭섭할까봐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들에게 아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기쁨을 주었던 왕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기의 아들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를 반역했습니다. 아도니야는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자신이 왕이라며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압살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자신이 왕이라며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왜 자녀 교육에 실패한 부모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버지들이여, 자녀를 이렇게 키워서는 안 된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 예언자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백성들을 가르치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면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집니다. 왕이나 제사장, 예언자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배우는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당대의 랍비들이었습니다.
랍비들은 회당에서 끊임없이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각인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책의 백성, 성경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배움의 힘은, 초대교회에서도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힘이 당대 가장 강력한 군대의 나라였던 로마 제국을 이겨나가게 했고, 문화와 철학의 나라였던 헬라 문명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전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신약의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대의 다른 랍비들과는 달랐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는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전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그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의 반응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마태복음 7:28)

다른 랍비들이 가르칠 때는 놀라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가르치시니 놀랐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새것, 예수님만의 언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시작하실 때 자주 사용하신 틀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의 말을 들으라. 내 말은 진리다. 진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라는 강력한 권고의 표현도 종종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삶의 문제가 얼마나 곤고하고 무거운지, 네가 얼마나 외로운지, 네가 얼마나 슬퍼하며 아파하는지, 네가 얼마나 미워하고 분노하고 탄식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나는 갖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인간 지혜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디에서도 “나는 모른다”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너희가 방향성이 없어서 흔들리느냐? 내가 길이다. 너희가 진리를 찾고 있느냐? 구도자적인 마음을 갖고 있느냐? 내가 진리다. 너희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느냐?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 이렇게 선언하신 분은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이처럼 가장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사랑과 겸손으로 연약한 자, 병든 자, 외로운 자를 찾아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하늘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분에게 지혜가 있구나. 이분이 선한 일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구나’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님은 스승이 아니라 스승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이상의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와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선언하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님 앞에서 경험한 내용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로새서 2:3)

당대의 최고 지성인인 바울은, 예수님 안에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늘의 계시적인 지혜와 총명과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 있던 권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경탄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한복음 7:15)

“도대체 이 사람이 어디서 배웠지? 어떻게 이런 지혜의 말씀이 나타나지?” 사람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안식일 논쟁이 있을 때도 예수님은 당대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먹고 마시는 것을 이야기하실 때,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실 때,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이러한 놀람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일어난 사건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열두 살이나 되었으니 따라오고 있겠지 생각하며 내려오다 보니, 아들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러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이 당대의 석학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2장 4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46)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랍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묻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서 이러한 놀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놀라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아직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모든 위인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아브라함과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나면서 무릎을 꿇었겠습니까?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무릎을 꿇었겠습니까? 왜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메섹 도상에서 거꾸러졌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놀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한복음 7:16)

“내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있다. 바로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주신 것, 보여 주신 것, 깨닫게 하신 것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계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가르침을 통해 이어집니다.

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이야기할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 능력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전혀 몰랐던 것,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새로운 것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을 전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을 내가 제자인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으니 이제 너희가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라.”
신앙은 가르침이 없으면 단절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어도 자녀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그 신앙은 부모에게서 멈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예수님을 믿고 내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예배드릴 때에 내게 어떤 기쁨이 있는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셨는지를 자녀와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움을 청하러 우리에게 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실 겁니다.”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불충하는 말이며 불성실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그들을 돕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무태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이 아이를 하나님이 지켜 주세요’라고 기도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하는데도 꾸짖거나 경계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바꿔 주시겠지’ 생각하는 것은 직무태만입니다.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부모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했을 때 꾸중하고, 옳은 일을 했을 때 칭찬하는 것, 이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키우라고 우리에게 자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정을 부양한다는 이유로 자녀와 대화할 시간까지 없애면서 바쁘게 살고 있다면, 그러한 바쁨은 당장 멈춰야 합니다. 일과 자녀 중 어느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자녀들이 진심으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잘 버는 아버지나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아버지? 잠깐은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랑은, “우리 아버지는 내가 힘들 때 늘 내 옆에 계셔. 내가 대화하고 싶을 때 나와 이야기를 나누셔”일 것입니다. 만약 이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다면, 자녀는 영혼의 자랑거리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하는 시간에서 가정교육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일주일에 자녀를 위해서 15분만 내 보십시오. 자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함께하는 15분의 9/10는 자녀가 이야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저 “그래? 힘들었겠구나.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니?” 장단을 맞추며 묻기만 하세요. 그리고 자녀의 손을 잡고 기도해 보세요.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보다 더 잘하고 계신 분들이 아니라,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시는 분들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15분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점차 20분이 되고, 30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자녀들이 아버지를,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주고, 나를 사랑하기에 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 아버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합니다.
물론 교회는 교회대로 맡은 역할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와 가정의 교육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자녀들이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자녀들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며, 함께 노력하는 부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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