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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처음 믿었던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
올해 1월 한 달을 병상에 누워있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해본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나 자신과 섬기는 교회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들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내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교회였습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이요 나를 위로해주시고 내게 소망을 주신 분인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얼마나 마음으로부터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나를 향해서 질문했습니다. ‘너를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그 설렘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가? 너무 기뻐서 감격하던 그 눈물이 마음속에 지금도 흐르고 있는가? 주님께 헌신하기로 한 그 약속이 나의 가슴을 아직도 울리고 있는가? 주님의 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선포하고 있는가?’ 그러고는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다시 영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바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본래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지 않습니까. 이제 더욱 주님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와 성도님들을 사랑하면서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가 기억이 났습니다. 젊은 나이 때에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끊임없이 나 자신을 괴롭혔던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회의와 의심의 그림자였습니다. 둘째는 불안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셋째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끊임없이 방해했던 자기부인에 대한 어려움이었습니다.
의심과 믿음은 우리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으려할 때마다 의심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가 묻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었으나 하나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많은 의심과 질문들이 내 머리를 끊임없이 휩쓸었고 이것 때문에 잠 못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한 로마인이 유대랍비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때 이 유대랍비는 믿지 않는 로마인을 밖으로 데려갔습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바깥에서 로마사람에게 말합니다. “저 태양을 한번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태양을 한번 찡긋하며 바라보고서는 랍비에게 쏘아붙이면서 말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인간이 저 이글거리는 태양을 어떻게 바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때 랍비가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하나인 태양조차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감히 쳐다보겠다고 말한단 말이오?”
저도 그랬습니다. 어느 날 나의 한계성을 절감했습니다. ‘보이는 세계의 내용도 잘 모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겠다고 질문만 해서는 되겠는가?’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만 하면서 쳇바퀴처럼 돌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속에 있는 의심이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다시 돌아보게 됐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는 나갔기 때문에 의심 많던 도마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직도 의심이 많이 있었지만 믿음에로 한걸음씩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믿으면서 행동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면 언제든지 믿음으로부터 도망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며 전도도 해보았습니다. 그때 내속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의심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의심이 80%였고 믿음이 20%였습니다. 그러다가 의심이 70%가 되었고 믿음이 30%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비슷해졌습니다. 의심 50%와 믿음 50%가 치열하게 맞섰습니다. 그 순간 저는 믿음 속으로 나 자신을 던졌습니다.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의심이 49%, 믿음이 51%인 것을 깨달으면서 제 마음의 방향을 믿음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생겼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충만한 희열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저를 어렵게 했던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정작 예수님을 믿으려하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인생에 주인인가? 주인인 예수님께 내 모든 것을 바쳐야 되는데 그래도 괜찮은가? 그분이 나를 노예처럼 함부로 부리면 어떻게 하는가? 내가 지금까지 누렸던 자유가 억압당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으면 내 죄책감이 사라지고 자유해질 수 있는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내게 주어지는 것일까?’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신명기 7:21)
인생은 두려워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크시고 가장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외에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고 해방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인으로 다가오신 이유는 나를 억눌림과 세상의 두려움에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영적 요새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문제가 계속해서 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것이 한번은 괜찮은데, 하루도 괜찮은데, 때로는 일주일도 괜찮은데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옛 자아를 내려놓아라. 십자가에 옛 자아를 매달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자아로 나아오라.”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만 이것을 멈추면 내 안에 교만이 다시 살아납니다. 저는 내 안에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질투가 나를 강력하게 붙잡고 있는 것을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탄식했습니다. 내 못된 습관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있는 사탄의 영적 요새들이라고 지칭한 바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이 있는 것 같은데 조금만 뒤집어보면 신앙이 결여되어있습니다. 매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 같은데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생각에 변화가 없고 말에 변화가 없고 행동에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수없이 되 뇌이지만 자기욕심이 먼저 앞서나갑니다. 내속에 악한 마귀의 전략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작년에 연평도 무력공격을 한 북한 해안가를 멀리서 바라보니까 평온했습니다. 그냥 아름다운 자연의 산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까이서 가니까 굴이 파여져 있습니다. 요새화됐습니다. 그리고 가끔 남쪽을 향해서 대포를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세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마귀가 내 영혼 깊은 곳에 요새처럼 꽉 박혀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연약하게 될 때 나를 미혹합니다. 나를 장악합니다. 파괴적인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미움의 생각들을 집어넣었습니다. 음란한 생각들, 오만한 생각들로 내 인생전체를 뒤흔들어놓습니다. 내 속에서 빠지지 않는 쓴 뿌리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안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넘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입에 욕설이 가득 차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런 파괴적인 생각이 내 마음에 들어가서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고 자기 신념처럼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에 분노를 일으키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힙니다. 고운 말이 아니라 사나운 말이 나옵니다. 남을 살리는 말이 아니라 남을 무너뜨리는 말이 생겨납니다. 진실이 아닌 거짓말로 남을 호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찰거머리처럼 우리의 가슴 속 어딘가에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요새와도 같이, 쓴 뿌리와도 같이 내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내 삶이 영적으로 흔들리게 되면 내 삶을 서서히 초토화시킵니다.
교회공동체에도 연약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모습이 교회공동체에도 똑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신데 교회 안에 의심의 세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두려움의 세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거짓된 영의 세력이 있습니다. 사탄이 영적 요새를 틀어놓고 거기에 도사리고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미움의 영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어딘가 연약한 부분을 발견하면 거짓말과 파괴적인 생각으로 사람들을 이간질합니다. 분열시킵니다. 다툼을 조장합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현실입니다. 아니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교회의 마음 아픈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실망합니다. 목사에 대해서 실망하고 성도들에 대해서 낙담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별 수 없다며 교회를 등지고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통탄해해야 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합니다.
여러분께 두 가지 말을 인용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였던 폴 트루니의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없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나 혼자 고고히 예수를 믿는 것이 참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함께 있으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고, 문제가 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로 만나야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역사를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기독교 사상가인 필립 얀시의 말입니다. 그는 교회의 위선을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생겨난 많은 문제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남아있는 마지막 보루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복음이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을 향해서 새롭게 되려는 발버둥이 교회공동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가 사명에 실패하고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에 늘 미달일수밖에 없는 인간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때로는 과오를 범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교회가 생긴 것이 하나님께서 감행하신 모험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문제인 것을 알고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공동체로 모이기 원하시고 교회라는 귀한 공동체를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험적인 결단입니다.
교회의 주인인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십시오
우리 안에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해결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문제와 아픔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교회공동체를 만드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결혼은 이제부터 참된 사랑을 해보라고 둘에게 맡겨진 장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종착역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향해서 여정을 시작하는 곳이 이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아픔과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내 사랑으로 알고, 내 아픔으로 알고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린도전서 8:5~7)
이 지식은 계시의 지식입니다. 성령의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안에 사탄이 만들어놓은 영적인 요새들이 있습니까? 깨부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사랑과 믿음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인 것을 만천하에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 5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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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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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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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예수님을 처음 믿었던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
올해 1월 한 달을 병상에 누워있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해본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나 자신과 섬기는 교회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들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내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교회였습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이요 나를 위로해주시고 내게 소망을 주신 분인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얼마나 마음으로부터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나를 향해서 질문했습니다. ‘너를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그 설렘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가? 너무 기뻐서 감격하던 그 눈물이 마음속에 지금도 흐르고 있는가? 주님께 헌신하기로 한 그 약속이 나의 가슴을 아직도 울리고 있는가? 주님의 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선포하고 있는가?’ 그러고는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다시 영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바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본래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지 않습니까. 이제 더욱 주님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와 성도님들을 사랑하면서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가 기억이 났습니다. 젊은 나이 때에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끊임없이 나 자신을 괴롭혔던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회의와 의심의 그림자였습니다. 둘째는 불안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셋째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끊임없이 방해했던 자기부인에 대한 어려움이었습니다.
의심과 믿음은 우리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으려할 때마다 의심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가 묻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었으나 하나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많은 의심과 질문들이 내 머리를 끊임없이 휩쓸었고 이것 때문에 잠 못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한 로마인이 유대랍비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때 이 유대랍비는 믿지 않는 로마인을 밖으로 데려갔습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바깥에서 로마사람에게 말합니다. “저 태양을 한번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태양을 한번 찡긋하며 바라보고서는 랍비에게 쏘아붙이면서 말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인간이 저 이글거리는 태양을 어떻게 바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때 랍비가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하나인 태양조차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감히 쳐다보겠다고 말한단 말이오?”
저도 그랬습니다. 어느 날 나의 한계성을 절감했습니다. ‘보이는 세계의 내용도 잘 모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겠다고 질문만 해서는 되겠는가?’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만 하면서 쳇바퀴처럼 돌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속에 있는 의심이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다시 돌아보게 됐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는 나갔기 때문에 의심 많던 도마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직도 의심이 많이 있었지만 믿음에로 한걸음씩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믿으면서 행동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면 언제든지 믿음으로부터 도망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며 전도도 해보았습니다. 그때 내속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의심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의심이 80%였고 믿음이 20%였습니다. 그러다가 의심이 70%가 되었고 믿음이 30%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비슷해졌습니다. 의심 50%와 믿음 50%가 치열하게 맞섰습니다. 그 순간 저는 믿음 속으로 나 자신을 던졌습니다.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의심이 49%, 믿음이 51%인 것을 깨달으면서 제 마음의 방향을 믿음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생겼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충만한 희열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저를 어렵게 했던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정작 예수님을 믿으려하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인생에 주인인가? 주인인 예수님께 내 모든 것을 바쳐야 되는데 그래도 괜찮은가? 그분이 나를 노예처럼 함부로 부리면 어떻게 하는가? 내가 지금까지 누렸던 자유가 억압당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으면 내 죄책감이 사라지고 자유해질 수 있는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내게 주어지는 것일까?’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신명기 7:21)
인생은 두려워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크시고 가장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외에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고 해방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인으로 다가오신 이유는 나를 억눌림과 세상의 두려움에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영적 요새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문제가 계속해서 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것이 한번은 괜찮은데, 하루도 괜찮은데, 때로는 일주일도 괜찮은데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옛 자아를 내려놓아라. 십자가에 옛 자아를 매달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자아로 나아오라.”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만 이것을 멈추면 내 안에 교만이 다시 살아납니다. 저는 내 안에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질투가 나를 강력하게 붙잡고 있는 것을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탄식했습니다. 내 못된 습관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있는 사탄의 영적 요새들이라고 지칭한 바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이 있는 것 같은데 조금만 뒤집어보면 신앙이 결여되어있습니다. 매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 같은데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생각에 변화가 없고 말에 변화가 없고 행동에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수없이 되 뇌이지만 자기욕심이 먼저 앞서나갑니다. 내속에 악한 마귀의 전략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작년에 연평도 무력공격을 한 북한 해안가를 멀리서 바라보니까 평온했습니다. 그냥 아름다운 자연의 산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까이서 가니까 굴이 파여져 있습니다. 요새화됐습니다. 그리고 가끔 남쪽을 향해서 대포를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세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마귀가 내 영혼 깊은 곳에 요새처럼 꽉 박혀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연약하게 될 때 나를 미혹합니다. 나를 장악합니다. 파괴적인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미움의 생각들을 집어넣었습니다. 음란한 생각들, 오만한 생각들로 내 인생전체를 뒤흔들어놓습니다. 내 속에서 빠지지 않는 쓴 뿌리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안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넘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입에 욕설이 가득 차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런 파괴적인 생각이 내 마음에 들어가서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고 자기 신념처럼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에 분노를 일으키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힙니다. 고운 말이 아니라 사나운 말이 나옵니다. 남을 살리는 말이 아니라 남을 무너뜨리는 말이 생겨납니다. 진실이 아닌 거짓말로 남을 호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찰거머리처럼 우리의 가슴 속 어딘가에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요새와도 같이, 쓴 뿌리와도 같이 내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내 삶이 영적으로 흔들리게 되면 내 삶을 서서히 초토화시킵니다.
교회공동체에도 연약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모습이 교회공동체에도 똑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신데 교회 안에 의심의 세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두려움의 세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거짓된 영의 세력이 있습니다. 사탄이 영적 요새를 틀어놓고 거기에 도사리고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미움의 영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어딘가 연약한 부분을 발견하면 거짓말과 파괴적인 생각으로 사람들을 이간질합니다. 분열시킵니다. 다툼을 조장합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현실입니다. 아니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교회의 마음 아픈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실망합니다. 목사에 대해서 실망하고 성도들에 대해서 낙담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별 수 없다며 교회를 등지고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통탄해해야 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합니다.
여러분께 두 가지 말을 인용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였던 폴 트루니의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없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나 혼자 고고히 예수를 믿는 것이 참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함께 있으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고, 문제가 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로 만나야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역사를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기독교 사상가인 필립 얀시의 말입니다. 그는 교회의 위선을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생겨난 많은 문제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남아있는 마지막 보루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복음이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을 향해서 새롭게 되려는 발버둥이 교회공동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가 사명에 실패하고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에 늘 미달일수밖에 없는 인간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때로는 과오를 범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교회가 생긴 것이 하나님께서 감행하신 모험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문제인 것을 알고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공동체로 모이기 원하시고 교회라는 귀한 공동체를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험적인 결단입니다.
교회의 주인인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십시오
우리 안에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해결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문제와 아픔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교회공동체를 만드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결혼은 이제부터 참된 사랑을 해보라고 둘에게 맡겨진 장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종착역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향해서 여정을 시작하는 곳이 이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아픔과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내 사랑으로 알고, 내 아픔으로 알고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린도전서 8:5~7)
이 지식은 계시의 지식입니다. 성령의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안에 사탄이 만들어놓은 영적인 요새들이 있습니까? 깨부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사랑과 믿음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인 것을 만천하에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