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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은 곧 소망입니다.
최근 통계청에서 ‘2012년 한국사회 동향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한 항목이 있었습니다. ‘내가 한국인으로 사는 것이 자랑스러운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2003년에는 응답자의 73.8%가 “예”라고 대답을 했고, 2010년 조사에서는 85.7%가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한국인으로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응답자의 수가 7년 동안 12%가 늘어난 것입니다. 고무적인 숫자입니다. 대한민국 사람 100명 중에 86명이 대한민국 백성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결코 녹녹하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아주 척박하게 보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고, 한 아파트에서는 위층과 아래층 사이에 다툼이 있습니다. 산업현장에는 근로자와 경영자 사이, 정치현장에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 타협하기 어려운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도 목사와 장로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통계청의 보고를 보면서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대한민국에 가능성이 있구나, 대한민국에 소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기대감과 가능성, 그리고 소망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책무일 것입니다.
민족의 아픔에 동참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이 이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한민국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에게는 나라를 잃어버린 비통한 아픔과 애통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로 그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3.1절이 94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1926년 6월 ‘개벽(開闢)’이라는 잡지에는 민족주권을 잃어버린 슬픔을 표현한 이상화의 시가 실립니다. 시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은 따뜻한 햇살로 다가온 봄의 찬란함을 노래하면서도 시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멋진 봄을 만끽하려 하면서도 내 민족, 내 나라, 내 백성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면 봄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빼앗긴 돌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도산 안창호는 나라 잃은 슬픔을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이 민족이 이렇게 저를 위해 주는데, 저는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
1925년 1월 25일자 동아일보에서 안창호는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 물으며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 괜찮습니다. 그 민족사회의 일을 분초에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족하든지 부족하든지, 다만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위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때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백성들이 억압받고 있는 자리에서 그저 무관심으로 ‘아, 할 수 없구나.’ 하며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인의식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독립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3.1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단하며 이렇게 스스로 다짐합니다. ‘안방 내 자리에서 편히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찾았구나!’
그는 이 서명 때문에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출옥을 하게 되는데, 그 때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출옥되고 나만 남아 있었는데, 나는 실로 조석으로 기도하기를 이와 같이 나오게 되지 말고 하루라도 더 있으면서 우리 형제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소. 지금 경성 감옥에 있는 정치범이 수백 명인데 그 중에 종신 징역이 22명이요, 그 외에 10년 이상의 징역을 받은 사람이 수십 명이라. 그들을 불덩이 같이 뜨거운 옥 속에 두고 감옥문을 나서자니 더욱 눈물이 앞을 가리어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못하였소.”
이승훈 선생에게는 자신보다 형제가 더 귀중했습니다. 자신보다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바로 이것이 민족과 백성을 위해서 내 생명까지 바쳐도 괜찮겠다는 민족지사의 모습입니다.
그 기도와 헌신이 우리를 이곳까지 이끌어 주었습니다.
일본 제국의 억압과 핍박이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일본 백성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에게도 신사참배를 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신사참배가 무엇입니까? 죽은 귀신을 모셔둔 사당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것은 민족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며, 우상을 섬기는 것이요, 신앙에 위반이 되는 것으로 여겨 저항하고 항쟁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기철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세 번씩이나 검거되고 투옥되기까지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투옥되기 전에 목사님은 시무하시던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5중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의 다섯 가지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그는 순교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순교를 각오했다 하더라도 너무 오랜 고난에 혹시라도 신앙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셨습니다.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가 목사이지, 내 어머니가 목사인가? 내 아내와 내 자식들이 목사인가? 내가 목사인 이유로 고통을 받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애틋한 사랑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그의 목표는 명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그도 함께 고백했습니다.
특별히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라는 기도에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 구구도생이 어찌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이 복 받고, 우리가 이렇게 풍요롭게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의 선배들, 이 나라를 사랑했던 순국열사들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고, 하나님이 이 땅에 은혜를 주셨기에 우리에게 이런 축복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너진 예루살렘의 모습에 예수님은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을 보셨을 때, 그곳은 통곡할 수밖에 없는 어둠과 슬픔, 타락의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본래 예루살렘이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 이름에는 ‘평화의 도시’, ‘샬롬(shalom)의 도성’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그곳은 더 이상 평화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살육과 전쟁의 위협 속에 놓여있는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사라지고, 음란과 우상숭배와 거짓으로 가득 찬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그곳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며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4절을 보면, 그 시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누가복음 13:34∼35)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고 부르셨는데 이스라엘은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못들은 체 했다는 것입니다. 암탉이 자기 새끼를 그 날개 아래 모으는 것 같이 이스라엘을 모으려 선지자들을 보내고 보냈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께 거역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의 중심에는 백성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내버려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보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구나” 말씀하시며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도성이 심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이제 마지막 한계에 부딪치게 됐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누가복음 19:41∼42)
예수님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들, 목이 굳어서 마음으로부터 깨닫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탄식함으로 눈물 흘리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예루살렘 성을 멋있게 지었느냐? 장엄하게 지었느냐? 아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죽었다. 이미 가능성이 없다. 이미 회복의 능력을 상실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찌 그것을 모르고 있는가?”
소위 영적인 지도자들은 위기 속에서도 평화다, 평화다, 괜찮다, 괜찮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짓위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미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거짓위로들에 부화뇌동하며 옛 질서, 옛 습관, 옛 가치관에 안주하려 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장도 개혁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재앙이고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혁명을 거부하는 예루살렘 백성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탄식하시며 우셨습니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치 망나니 같은 아들이 부모를 떠나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으로부터 흘리는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내가 기다린다. 기다린다, 아들아.” 예수님은 그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사랑의 눈물이고, 하나님의 고통의 눈물입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기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민족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 예레미야 9장 1절에 그 비통한 심정을 이렇게 토해내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 9:1)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을 품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에는 두 가지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대를 향한 비판입니다.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람들, 자기 기득권에 안주하는 사람들, 변화와 성숙을 거부하는 사람들, 우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젖어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통한 눈물은 옛 질서를 향한 조소입니다. 옛 가치관을 끝장내겠다는 표지입니다.
실제로 AD 70년에 로마의 공격에 의해서 예루살렘성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초토화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눈물이 가진 첫 번째 능력인 심판입니다.
둘째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겠다는 결심입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린다는 건, 아직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며,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포기하게 되면 눈물이 멈추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눈물이 있는 한, 포기하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들을 결심하면서도 자주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결심을 반복하게 되는 걸까요? 내 속에 애통하는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눈물이 있으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새로운 시작을 가져왔습니다. 그 눈물을 보았던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예루살렘 성,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을 제자들을 통해 만들어가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것이 곧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뜨거운 눈물이 있습니까?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이 교회를 생각하면 눈물로 기도하게 됩니까? 갈라져 있는 이 백성과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차오릅니까? 그러면 우리나라에 소망이 있고, 우리의 교회에 소망이 있고, 우리의 가정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역사를 이끄는 힘입니다.
94주년 3.1절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이 민족을 생각해 봅니다. 저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한국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멀리서 조소하듯 비난하는 것으로는 역사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아픔으로, 내 슬픔과 내 문제로 여기며 눈물로 기도하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모두 이 귀한 일을 감당하시기를 원합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9: 41 ~ 44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자부심은 곧 소망입니다.
최근 통계청에서 ‘2012년 한국사회 동향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한 항목이 있었습니다. ‘내가 한국인으로 사는 것이 자랑스러운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2003년에는 응답자의 73.8%가 “예”라고 대답을 했고, 2010년 조사에서는 85.7%가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한국인으로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응답자의 수가 7년 동안 12%가 늘어난 것입니다. 고무적인 숫자입니다. 대한민국 사람 100명 중에 86명이 대한민국 백성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결코 녹녹하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아주 척박하게 보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고, 한 아파트에서는 위층과 아래층 사이에 다툼이 있습니다. 산업현장에는 근로자와 경영자 사이, 정치현장에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 타협하기 어려운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도 목사와 장로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통계청의 보고를 보면서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대한민국에 가능성이 있구나, 대한민국에 소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기대감과 가능성, 그리고 소망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책무일 것입니다.
민족의 아픔에 동참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이 이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한민국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에게는 나라를 잃어버린 비통한 아픔과 애통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로 그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3.1절이 94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1926년 6월 ‘개벽(開闢)’이라는 잡지에는 민족주권을 잃어버린 슬픔을 표현한 이상화의 시가 실립니다. 시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은 따뜻한 햇살로 다가온 봄의 찬란함을 노래하면서도 시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멋진 봄을 만끽하려 하면서도 내 민족, 내 나라, 내 백성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면 봄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빼앗긴 돌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도산 안창호는 나라 잃은 슬픔을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이 민족이 이렇게 저를 위해 주는데, 저는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
1925년 1월 25일자 동아일보에서 안창호는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 물으며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 괜찮습니다. 그 민족사회의 일을 분초에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족하든지 부족하든지, 다만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위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때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백성들이 억압받고 있는 자리에서 그저 무관심으로 ‘아, 할 수 없구나.’ 하며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인의식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독립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3.1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단하며 이렇게 스스로 다짐합니다. ‘안방 내 자리에서 편히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찾았구나!’
그는 이 서명 때문에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출옥을 하게 되는데, 그 때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출옥되고 나만 남아 있었는데, 나는 실로 조석으로 기도하기를 이와 같이 나오게 되지 말고 하루라도 더 있으면서 우리 형제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소. 지금 경성 감옥에 있는 정치범이 수백 명인데 그 중에 종신 징역이 22명이요, 그 외에 10년 이상의 징역을 받은 사람이 수십 명이라. 그들을 불덩이 같이 뜨거운 옥 속에 두고 감옥문을 나서자니 더욱 눈물이 앞을 가리어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못하였소.”
이승훈 선생에게는 자신보다 형제가 더 귀중했습니다. 자신보다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바로 이것이 민족과 백성을 위해서 내 생명까지 바쳐도 괜찮겠다는 민족지사의 모습입니다.
그 기도와 헌신이 우리를 이곳까지 이끌어 주었습니다.
일본 제국의 억압과 핍박이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일본 백성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에게도 신사참배를 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신사참배가 무엇입니까? 죽은 귀신을 모셔둔 사당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것은 민족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며, 우상을 섬기는 것이요, 신앙에 위반이 되는 것으로 여겨 저항하고 항쟁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기철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세 번씩이나 검거되고 투옥되기까지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투옥되기 전에 목사님은 시무하시던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5중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의 다섯 가지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그는 순교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순교를 각오했다 하더라도 너무 오랜 고난에 혹시라도 신앙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셨습니다.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가 목사이지, 내 어머니가 목사인가? 내 아내와 내 자식들이 목사인가? 내가 목사인 이유로 고통을 받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애틋한 사랑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그의 목표는 명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그도 함께 고백했습니다.
특별히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라는 기도에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 구구도생이 어찌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이 복 받고, 우리가 이렇게 풍요롭게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의 선배들, 이 나라를 사랑했던 순국열사들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고, 하나님이 이 땅에 은혜를 주셨기에 우리에게 이런 축복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너진 예루살렘의 모습에 예수님은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을 보셨을 때, 그곳은 통곡할 수밖에 없는 어둠과 슬픔, 타락의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본래 예루살렘이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 이름에는 ‘평화의 도시’, ‘샬롬(shalom)의 도성’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그곳은 더 이상 평화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살육과 전쟁의 위협 속에 놓여있는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사라지고, 음란과 우상숭배와 거짓으로 가득 찬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그곳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며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4절을 보면, 그 시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누가복음 13:34∼35)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고 부르셨는데 이스라엘은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못들은 체 했다는 것입니다. 암탉이 자기 새끼를 그 날개 아래 모으는 것 같이 이스라엘을 모으려 선지자들을 보내고 보냈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께 거역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의 중심에는 백성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내버려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보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구나” 말씀하시며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도성이 심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이제 마지막 한계에 부딪치게 됐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누가복음 19:41∼42)
예수님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들, 목이 굳어서 마음으로부터 깨닫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탄식함으로 눈물 흘리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예루살렘 성을 멋있게 지었느냐? 장엄하게 지었느냐? 아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죽었다. 이미 가능성이 없다. 이미 회복의 능력을 상실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찌 그것을 모르고 있는가?”
소위 영적인 지도자들은 위기 속에서도 평화다, 평화다, 괜찮다, 괜찮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짓위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미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거짓위로들에 부화뇌동하며 옛 질서, 옛 습관, 옛 가치관에 안주하려 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장도 개혁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재앙이고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혁명을 거부하는 예루살렘 백성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탄식하시며 우셨습니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치 망나니 같은 아들이 부모를 떠나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으로부터 흘리는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내가 기다린다. 기다린다, 아들아.” 예수님은 그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사랑의 눈물이고, 하나님의 고통의 눈물입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기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민족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 예레미야 9장 1절에 그 비통한 심정을 이렇게 토해내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 9:1)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을 품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에는 두 가지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대를 향한 비판입니다.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람들, 자기 기득권에 안주하는 사람들, 변화와 성숙을 거부하는 사람들, 우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젖어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통한 눈물은 옛 질서를 향한 조소입니다. 옛 가치관을 끝장내겠다는 표지입니다.
실제로 AD 70년에 로마의 공격에 의해서 예루살렘성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초토화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눈물이 가진 첫 번째 능력인 심판입니다.
둘째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겠다는 결심입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린다는 건, 아직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며,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포기하게 되면 눈물이 멈추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눈물이 있는 한, 포기하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들을 결심하면서도 자주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결심을 반복하게 되는 걸까요? 내 속에 애통하는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눈물이 있으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새로운 시작을 가져왔습니다. 그 눈물을 보았던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예루살렘 성,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을 제자들을 통해 만들어가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것이 곧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뜨거운 눈물이 있습니까?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이 교회를 생각하면 눈물로 기도하게 됩니까? 갈라져 있는 이 백성과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차오릅니까? 그러면 우리나라에 소망이 있고, 우리의 교회에 소망이 있고, 우리의 가정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역사를 이끄는 힘입니다.
94주년 3.1절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이 민족을 생각해 봅니다. 저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한국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멀리서 조소하듯 비난하는 것으로는 역사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아픔으로, 내 슬픔과 내 문제로 여기며 눈물로 기도하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모두 이 귀한 일을 감당하시기를 원합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