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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다!

마가복음 16: 1 ~ 8

김지철 목사

2016.03.27

예수님의 부활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천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그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또 예수님의 부활을 가슴에 담고 오늘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본문 말씀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돌아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활신앙이란 놀라움을 경험하는 신앙입니다. 신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는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하고 낯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 (마가복음 16:5∼6)

여기서의 ‘놀라지 말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그동안 네가 헛된 것에 놀라고 두려움을 느꼈구나. 이제는 진정한 신비로 인해 놀랄 차례다’라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것은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부활 사건과 관련지어서는,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 무덤의 돌이 굴러져 있는 것에 놀랍니다. 이 두려움은 겁나서 도망가게 만드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여인들도 처음에는 이것을 목격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듣자, 그것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놀라지 말라’는 천사의 말은,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사건이 아닌 다른 것들에는 놀라지 말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의 두려움은 주님의 신비의 세계에 초대받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기대와 소망과 기쁨이 함께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는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외 속에는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기쁨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오늘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며 기쁨이 동반한 두려움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마태복음 28:8)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동시에 큰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계시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마가복음 16:6)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 죽음을 넘어서셨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아니하다.” 빈 무덤을 보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를 받으면서 여인들은 놀라고 두렵고 동시에 기뻤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낯선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특별한 것은 둘 중 어느 하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죽음처럼 낯선 것 또한 없습니다. 가깝지 않은 사람이 죽는 것은 일상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사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서 나를 떠나는 것은 참으로 낯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은 어떨까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모두에게 낯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낯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 인류 역사상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낯설어서 기대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기대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지상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부터 온 사건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기에 놀라움이 있고, 또 오랫동안 기대했던 것이기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부활의 경험을 하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가슴을 뛰게 합니까? 부활 사건을 믿는 것이 내게 기쁨이 됩니까? 놀라움과 기쁨이 내 속에서 움직일 때 내 신앙이 역동적인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부활사건은 변화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특징은, 뒤집기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세를 격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죽었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어 놓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들을 낱낱이 보여 주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사건이 부활사건입니다.
이 부활사건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였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버림받았던 여인들이 부활의 복음을 가장 먼저 듣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이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역전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섭리이자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신비하게 감추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에게나 다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며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소리 없이 조용히 기다림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첫 대상이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자라고 불리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변적인 인물, 예수님을 따랐지만 소외된 존재이던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결코 남자와 동지가 될 수 없었던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그들을 믿음의 친구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뒤집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내표된 것입니다.
남자 제자들과 여자 제자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사랑 차이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을 향한 기대의 차이가 아니었을까요? 남자들의 문제는, 남의 시선에 묶여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에게는 자신을 밑바닥에서부터 온전히 내어놓지 못하게 만드는 담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대부분 발동이 늦게 걸립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한번 발동이 걸리면 누구보다 열심히 애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성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자 제자들에게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활의 기쁨을 제일 먼저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은 힘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힘들고 아프게 살아가는 사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탈북민일 수 있습니다. 다문화가정의 아이일 수 있습니다. 돈벌이 없는 장애우, 독거노인,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일 수 있습니다. 또한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 병상에 누워서 생명의 기쁨을 소망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를 먼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신비는 예수님을 사모하고 기대하는 사람,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려는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활사건은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보여 줍니다.

세 번째 특징은 사명자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미래가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즉 현실에서 무너지지 말고 희망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0)

제자들은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죽음으로 삶의 의욕이 끊어졌습니다. 기대와 소망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곳이며, 이 땅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면서 살지 말라. 네가 세상을 향해 말하라. 주저앉은 자들에게 일어섬의 희망을 주고,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 용기와 담대함과 희망을 주어라. 죽음 앞에서 겁먹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전하여라. 우리에게는 현재를 뛰어넘는 희망이 있다. 혼자 무력하게 있지 말고 믿음의 공동체들과 연합해라. 그것은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다.”
우리에게 부활의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신비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동시에 기쁨과 감사로 기도한 경험이 있습니까? 교만할 때는 끌어 내리시고, 구렁텅이 속에서 신음할 때는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전의 섭리를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내 인생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부활의 예수님 앞에서 한편으로는 두려워 떨고, 한편으로는 큰 기쁨으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경험을 소중히 여깁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될 것은 경험보다 앞선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사건은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축을 붙들고 갑니다. 십자가가 고난이라면, 부활은 영광입니다. 십자가가 무능이라면, 부활은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삶의 진부함을 깨뜨리는 혁명이라면, 부활은 삶의 갈급함에서 생수를 주는 혁명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단절과 허무와 탄식과 불가능의 현장이었다면, 부활은 그들에게 놀람과 경이의 자리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역사의 종말로 인도했다면, 부활은 우리를 창조의 세계로부터 출발시킵니다. 십자가가 예수의 제자 공동체를 산산이 부수어 놓았다면, 부활은 ‘다시 모여서 시작해라. 다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나누라’는 부탁이며,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입니다.

부활사건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자리에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그의 인생을 달려갔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11)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으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주의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로 이 부활의 아침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다가 부활의 날로 예배드리는 날을 바꿨습니다.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Lord’s Day, 주님의 날이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는 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사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 영원한 것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증거하는 날이 부활의 아침입니다.
어떠한 일로 화가 나거나 우울했던 적이 있습니까? 남을 미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슬퍼하며 탄식하고 절망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의 슬픔과 좌절, 탄식과 절망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신비가 훨씬 더 크니 하나님께로 오라고 말입니다. 와서 부활의 신비, 생명의 신비, 사랑의 신비를 맛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맛보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할 때,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때로 우리가 십자가와 같은 고난의 길을 갈 때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둠의 골짜기에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이 인생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사건의 감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는 신비를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아니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면서도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게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그분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새 길을 여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경이감을 잃어버리면 삶이 지루해지고 무료해집니다. 어제나 오늘과 다르지 않을 똑같은 날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를 견디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 경이감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사건 속에서, 예수님의 사건 속에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깊은 사랑에 대한 경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해져서 경이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경이감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하나님의 자녀군요. 제 죄가 용서받았군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거군요. 산다는 것이 참 아름다운 것이군요. 제가 영원한 세계를 이 땅에 당겨 와서 살겠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아가라. 저 어둠을 밝은 빛으로 비추어라.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소망이 있다고 말해라. 불의한 세력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결국 진리와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가르쳐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러한 담대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워 나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예수님을 무덤 속에 가둬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속에 놔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무덤 속에 들어가셨다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생명의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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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 1 ~ 8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부활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천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그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또 예수님의 부활을 가슴에 담고 오늘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본문 말씀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돌아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활신앙이란 놀라움을 경험하는 신앙입니다. 신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는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하고 낯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 (마가복음 16:5∼6)

여기서의 ‘놀라지 말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그동안 네가 헛된 것에 놀라고 두려움을 느꼈구나. 이제는 진정한 신비로 인해 놀랄 차례다’라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것은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부활 사건과 관련지어서는,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 무덤의 돌이 굴러져 있는 것에 놀랍니다. 이 두려움은 겁나서 도망가게 만드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여인들도 처음에는 이것을 목격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듣자, 그것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놀라지 말라’는 천사의 말은,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사건이 아닌 다른 것들에는 놀라지 말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의 두려움은 주님의 신비의 세계에 초대받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기대와 소망과 기쁨이 함께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는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외 속에는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기쁨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오늘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며 기쁨이 동반한 두려움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마태복음 28:8)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동시에 큰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계시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마가복음 16:6)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 죽음을 넘어서셨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아니하다.” 빈 무덤을 보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를 받으면서 여인들은 놀라고 두렵고 동시에 기뻤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낯선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특별한 것은 둘 중 어느 하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죽음처럼 낯선 것 또한 없습니다. 가깝지 않은 사람이 죽는 것은 일상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사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서 나를 떠나는 것은 참으로 낯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은 어떨까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모두에게 낯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낯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 인류 역사상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낯설어서 기대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기대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지상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부터 온 사건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기에 놀라움이 있고, 또 오랫동안 기대했던 것이기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부활의 경험을 하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가슴을 뛰게 합니까? 부활 사건을 믿는 것이 내게 기쁨이 됩니까? 놀라움과 기쁨이 내 속에서 움직일 때 내 신앙이 역동적인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부활사건은 변화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특징은, 뒤집기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세를 격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죽었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어 놓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들을 낱낱이 보여 주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사건이 부활사건입니다.
이 부활사건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였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버림받았던 여인들이 부활의 복음을 가장 먼저 듣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이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역전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섭리이자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신비하게 감추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에게나 다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며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소리 없이 조용히 기다림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첫 대상이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자라고 불리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변적인 인물, 예수님을 따랐지만 소외된 존재이던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결코 남자와 동지가 될 수 없었던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그들을 믿음의 친구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뒤집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내표된 것입니다.
남자 제자들과 여자 제자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사랑 차이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을 향한 기대의 차이가 아니었을까요? 남자들의 문제는, 남의 시선에 묶여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에게는 자신을 밑바닥에서부터 온전히 내어놓지 못하게 만드는 담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대부분 발동이 늦게 걸립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한번 발동이 걸리면 누구보다 열심히 애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성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자 제자들에게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활의 기쁨을 제일 먼저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은 힘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힘들고 아프게 살아가는 사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탈북민일 수 있습니다. 다문화가정의 아이일 수 있습니다. 돈벌이 없는 장애우, 독거노인,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일 수 있습니다. 또한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 병상에 누워서 생명의 기쁨을 소망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를 먼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신비는 예수님을 사모하고 기대하는 사람,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려는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활사건은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보여 줍니다.

세 번째 특징은 사명자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미래가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즉 현실에서 무너지지 말고 희망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0)

제자들은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죽음으로 삶의 의욕이 끊어졌습니다. 기대와 소망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곳이며, 이 땅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면서 살지 말라. 네가 세상을 향해 말하라. 주저앉은 자들에게 일어섬의 희망을 주고,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 용기와 담대함과 희망을 주어라. 죽음 앞에서 겁먹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전하여라. 우리에게는 현재를 뛰어넘는 희망이 있다. 혼자 무력하게 있지 말고 믿음의 공동체들과 연합해라. 그것은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다.”
우리에게 부활의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신비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동시에 기쁨과 감사로 기도한 경험이 있습니까? 교만할 때는 끌어 내리시고, 구렁텅이 속에서 신음할 때는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전의 섭리를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내 인생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부활의 예수님 앞에서 한편으로는 두려워 떨고, 한편으로는 큰 기쁨으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경험을 소중히 여깁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될 것은 경험보다 앞선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사건은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축을 붙들고 갑니다. 십자가가 고난이라면, 부활은 영광입니다. 십자가가 무능이라면, 부활은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삶의 진부함을 깨뜨리는 혁명이라면, 부활은 삶의 갈급함에서 생수를 주는 혁명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단절과 허무와 탄식과 불가능의 현장이었다면, 부활은 그들에게 놀람과 경이의 자리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역사의 종말로 인도했다면, 부활은 우리를 창조의 세계로부터 출발시킵니다. 십자가가 예수의 제자 공동체를 산산이 부수어 놓았다면, 부활은 ‘다시 모여서 시작해라. 다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나누라’는 부탁이며,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입니다.

부활사건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자리에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그의 인생을 달려갔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11)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으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주의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로 이 부활의 아침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다가 부활의 날로 예배드리는 날을 바꿨습니다.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Lord’s Day, 주님의 날이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는 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사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 영원한 것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증거하는 날이 부활의 아침입니다.
어떠한 일로 화가 나거나 우울했던 적이 있습니까? 남을 미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슬퍼하며 탄식하고 절망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의 슬픔과 좌절, 탄식과 절망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신비가 훨씬 더 크니 하나님께로 오라고 말입니다. 와서 부활의 신비, 생명의 신비, 사랑의 신비를 맛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맛보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할 때,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때로 우리가 십자가와 같은 고난의 길을 갈 때도,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둠의 골짜기에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이 인생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사건의 감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는 신비를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아니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면서도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게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그분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새 길을 여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경이감을 잃어버리면 삶이 지루해지고 무료해집니다. 어제나 오늘과 다르지 않을 똑같은 날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를 견디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 경이감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사건 속에서, 예수님의 사건 속에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깊은 사랑에 대한 경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해져서 경이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경이감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하나님의 자녀군요. 제 죄가 용서받았군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거군요. 산다는 것이 참 아름다운 것이군요. 제가 영원한 세계를 이 땅에 당겨 와서 살겠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아가라. 저 어둠을 밝은 빛으로 비추어라.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소망이 있다고 말해라. 불의한 세력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결국 진리와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가르쳐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러한 담대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워 나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예수님을 무덤 속에 가둬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속에 놔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무덤 속에 들어가셨다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생명의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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