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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듣고 묻다

누가복음 2: 41 ~ 52

김지철 목사

2013.01.06

청소년기는 불안정한 시기입니다.

“만약 청소년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철부지였지만 순수한 우정이 있었던 그 때를 추억하며 가슴이 따뜻해지십니까? 아니면 요사이 날씨처럼 시베리아 찬바람의 오싹한 기분이 드십니까? ‘절대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매번 시험을 치르는 악몽, 치열한 경쟁, 끔찍한 학창시절… 떠올리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청소년 시절은 위험한 시기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성장통을 앓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때는 혼자 있어도 속에서 부글대는 갈등을 경험합니다. 사람 사이에서 치이고 시달리는 까닭에 스스로를 샌드위치 신세라고 여기며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갈등들 때문에 그 시절을 지나고 있는 이들은 방황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위대함과 비천함을 동시에 보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지만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탓하고, 활활 타오르는 육체적 욕망을 실현할 길이 없어 답답해합니다. 부모 밑에 있어야 자기의 삶이 영위된다는 것과 개인적인 힘으로 세상 속에 뛰어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청소년기는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과 위기는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겪는 성숙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그들도 인간 못지않게 자신의 새끼들을 소중하게 키웁니다. 부모는 새끼들에게 생존능력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새끼들이 자라게 되면 부모는 새끼들을 매몰차게 내쫓습니다. 마치 “이제 독자적으로 살아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조금 다릅니다. 자녀가 청소년만큼 자라도 부모가 보기에는 그저 아이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유치하고 미숙합니다. 그렇다고 어린 아이라고 하기에는 어른 티가 납니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부모에게 대들기도 합니다.

부모의 진정한 목표는 자녀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저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아이들이 어떻게 청소년 시기를 잘 극복하게 할까’ 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저는 늘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위축되지 않고 자율적, 자발적 인간으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키우실 때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얘야, 너 하나님 좀 알아라. 하나님을 경배해라.’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늘 바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며 하나님이 주신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너무 오랫동안 쥐고, 자녀가 꼼짝 못하기를 알게 모르게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자라면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성숙해집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겠다는 말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배신자야.” 또 다른 여자가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자녀들이 떠나는 것을 더 크게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언젠가 자녀들이 떠나는 것을 늘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을 준비하며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사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일까요? 내 아들과 딸이 어떻게 성숙한 인간이 될까? 어떻게 자기 삶을 스스로 영위할 줄 아는 인간이 될까? 어떻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존재가 될까? 그것이 부모가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갖게 되는 진정한 소원일 것입니다. 자녀의 성장과 성숙이 모든 부모의 목표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성숙의 과정에 대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도 청소년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된 예수님의 열두 살 모습, 즉 소년 시절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처음부터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했다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냥 어린 아이였습니다. “으앙”하고 우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해서,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랐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즉 예수님도 우리처럼 성숙의 과정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청소년 시절을 극복하는 비결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을까요? 먼저, 예수님에게는 멋진 신앙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누추한 곳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셨지만,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녀를 영적으로 키웠던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장 비결은 신앙의 부모였습니다.

유명한 독재자인 히틀러(Adolf Hitler)나 스탈린(Joseph Stalin)같은 사람들의 생애를 연구한 이들은, 그들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지독하게 채찍질 당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보복적인 심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악한 독재자로 만들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아마 맞을 것입니다. 물론 어렸을 때 부모에게 채찍으로 맞았다고 모두 다 악독한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부모를 대신하는 대체 보호자가 있다면, 마음이 왜곡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부모가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입니다. 바로 그 축복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젊은 시절을 보면, 부모님이 예수님을 신앙 가운데로 이끌어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누가복음 2:41~42)

유대 율법에 의하면 세 절기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무조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월절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주일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여섯 살이 되면 ‘쉐마(Shema)’라고 하는 신명기 6장의 ‘너는 들으라’ 말씀처럼, 말씀을 듣고 시편 중에 중요한 구절들을 암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 살이 되면 율법의 해석서인 미쉬나(Mishnah)를 읽고 배우게 됩니다. 그 다음 열세 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율법을 배울 수 있는 ‘율법의 아들’이 됩니다. 보통 남자 아이들은 열세 살이 되기 1~2년 전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율법의 아들’이 되었을 때 취해야 할 행동들을 미리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도 열세 살이 되기 한 해 전인 열두 살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아들 예수님에게 신앙을 전승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이 그리하셨다면, 우리는 더욱 더 그리해야 합니다.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은 첫번째로 부모의 책임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을 읽게 하고, 예배를 드리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많은 부모들이 종종 자녀들에게 “너 오늘은 교회 가는 것보다 학원가는 것이 좋겠다. 말씀 읽는 것보다 일단 네 책이나 다 읽어라.”라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라고 자녀들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된 자녀는, 그것이 마음에 남게 됩니다. ‘아, 하나님보다 세상 출세가 먼저구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구나.’ 이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확신이 어린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자율권이었습니다. 유월절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받았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동안 계속되는 축제 기간 동안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방임했습니다. “너 스스로 한번 돌아다녀 봐라. 친구들과 성전에도 들어가 보고, 랍비들이 어떻게 가르치는지, 제사는 어떻게 드리는지 가서 보라.” 그래서 일주일 동안 소년 예수님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일곱 날이 지나고, 예수님의 부모님은 함께 온 동료들과 함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과 함께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걸어 잠자리에 들려고 보니 아들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들이 같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자율성은 위험한 것입니다. 책임 없이 주어진 자율성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자유가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 주거 이전의 자유, 소유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 자유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방종이 되고, 때론 남을 향한 위협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부모는 아들 예수를 찾기 위해 하룻길을 되돌아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난지 삼일 째 되던 날, 드디어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랍비들과 함께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누가복음 2:46)

예수님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선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자녀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애간장이 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누가복음 2:48)

“너 어찌해서 이랬느냐? 우리가 얼마나 너를 염려했는지 알고 있느냐?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네가 아느냐?” 하면서 꾸중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마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대견했습니다. 열두 살 난 아이가 랍비들과 함께 대화하는데 막힘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화난 어머니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라고 묻는 어머니를 향해서 “어머니 어찌하여”라고 되묻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누가복음 2:49)

어떻게 보면 젊은 소년의 반항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부모와 아들의 충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꾸짖음에 잘못했다고 대답하지 않고, “어찌해서 나를 찾았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 그것이 옳은지 모르셨습니까?”하고 되묻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항도 충돌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맞아. 네가 의지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시지.’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보다 더 큰 아버지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적인 독자성이고, 영적인 민감성이고, 영적인 확신이었습니다.
부모를 만난 후 예수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계속 성전에 머물러 계셨을까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누가복음 2:51)

예수님에게는 자발성도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있었지만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더 자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 속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나사렛에 이르러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는 효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이해는 공감과 참여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랍비들과 마주했을 때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다’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랍비들과 함께 앉아서 율법에 대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대답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랍비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47)

예수님의 지혜가 놀랄 만큼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이 랍비들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대로 몰입했기 때문에 말씀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했기 때문에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학자인 칼 퍼포(Karl Popper)는 새로운 이해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사람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공감적 직관’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본다. 문제 속으로 들어가서 그 문제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 속에 들어가 함께하는 것, 그 느낌에 참여하는 것이 공감적 직관, 혹은 감정이입입니다. 즉, 이러한 것을 통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겉다리만 만져보게 됩니다.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그 문제가 곧 내 문제가 되는 것, 그 때 비로소 새로운 인생론의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 당신 자신을 집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성경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의 이야기를 읽을 때, 모세의 심정으로 그 안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경 읽기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 베드로의 마음으로 그 속에 들어가야 예수님이 내게 다가오시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겉핥기입니다. 수박이 아무리 잘 익었어도 겉만 만지고 핥아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운데를 잘라 빨갛게 익은 것을 한 입 먹어야 수박을 진짜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어린 열두 살 아이의 말이 랍비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성장의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 성인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청소년기를 지나는 아이와도 같습니다. 아침에 굳게 결심했다가도 점심에는 그 결심들을 폐기처분합니다. 아침엔 거룩해졌다가 저녁에는 탐욕스러운 인간이 됩니다. 이런 내 삶의 모습이 얼마나 뒤죽박죽일까요? 하나님이 눈에는 우리가 아주 위험천만한 아기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부모인 분들은 아실 겁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어렵던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 같은 인간을 만나시고,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내가 나를 보면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원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나를 인정해라. 너를 사랑하는 내게 예배드려라. 내가 네게 모든 축복을 주었으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고 즐거워하며 자율적으로 살아라.” 두 번째는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을까 겁내고 두려워하며 나를 섬기지 말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준 내 사랑을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자유자로, 성숙한 자로, 내가 기뻐하는 대로 살아가라”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계속 자라야 합니다. 성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올 한해는 이런 신앙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성숙하리라. 영적으로 성숙하리라. 내가 말씀 속에 들어가리라. 공감적 직관을 가지고 성령을 보리라. 그래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접촉하리라’
어정쩡하게 인생을 보내지 마시고, 어정쩡하게 신앙생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으십시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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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41 ~ 52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청소년기는 불안정한 시기입니다.

“만약 청소년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철부지였지만 순수한 우정이 있었던 그 때를 추억하며 가슴이 따뜻해지십니까? 아니면 요사이 날씨처럼 시베리아 찬바람의 오싹한 기분이 드십니까? ‘절대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매번 시험을 치르는 악몽, 치열한 경쟁, 끔찍한 학창시절… 떠올리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청소년 시절은 위험한 시기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성장통을 앓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때는 혼자 있어도 속에서 부글대는 갈등을 경험합니다. 사람 사이에서 치이고 시달리는 까닭에 스스로를 샌드위치 신세라고 여기며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갈등들 때문에 그 시절을 지나고 있는 이들은 방황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위대함과 비천함을 동시에 보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지만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탓하고, 활활 타오르는 육체적 욕망을 실현할 길이 없어 답답해합니다. 부모 밑에 있어야 자기의 삶이 영위된다는 것과 개인적인 힘으로 세상 속에 뛰어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청소년기는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과 위기는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겪는 성숙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그들도 인간 못지않게 자신의 새끼들을 소중하게 키웁니다. 부모는 새끼들에게 생존능력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새끼들이 자라게 되면 부모는 새끼들을 매몰차게 내쫓습니다. 마치 “이제 독자적으로 살아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조금 다릅니다. 자녀가 청소년만큼 자라도 부모가 보기에는 그저 아이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유치하고 미숙합니다. 그렇다고 어린 아이라고 하기에는 어른 티가 납니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부모에게 대들기도 합니다.

부모의 진정한 목표는 자녀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저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아이들이 어떻게 청소년 시기를 잘 극복하게 할까’ 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저는 늘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위축되지 않고 자율적, 자발적 인간으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키우실 때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얘야, 너 하나님 좀 알아라. 하나님을 경배해라.’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늘 바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며 하나님이 주신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너무 오랫동안 쥐고, 자녀가 꼼짝 못하기를 알게 모르게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자라면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성숙해집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겠다는 말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배신자야.” 또 다른 여자가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자녀들이 떠나는 것을 더 크게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언젠가 자녀들이 떠나는 것을 늘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을 준비하며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사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일까요? 내 아들과 딸이 어떻게 성숙한 인간이 될까? 어떻게 자기 삶을 스스로 영위할 줄 아는 인간이 될까? 어떻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존재가 될까? 그것이 부모가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갖게 되는 진정한 소원일 것입니다. 자녀의 성장과 성숙이 모든 부모의 목표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성숙의 과정에 대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도 청소년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된 예수님의 열두 살 모습, 즉 소년 시절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처음부터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했다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냥 어린 아이였습니다. “으앙”하고 우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해서,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랐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즉 예수님도 우리처럼 성숙의 과정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청소년 시절을 극복하는 비결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을까요? 먼저, 예수님에게는 멋진 신앙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누추한 곳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셨지만,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녀를 영적으로 키웠던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장 비결은 신앙의 부모였습니다.

유명한 독재자인 히틀러(Adolf Hitler)나 스탈린(Joseph Stalin)같은 사람들의 생애를 연구한 이들은, 그들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지독하게 채찍질 당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보복적인 심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악한 독재자로 만들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아마 맞을 것입니다. 물론 어렸을 때 부모에게 채찍으로 맞았다고 모두 다 악독한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부모를 대신하는 대체 보호자가 있다면, 마음이 왜곡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부모가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입니다. 바로 그 축복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젊은 시절을 보면, 부모님이 예수님을 신앙 가운데로 이끌어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누가복음 2:41~42)

유대 율법에 의하면 세 절기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무조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월절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주일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여섯 살이 되면 ‘쉐마(Shema)’라고 하는 신명기 6장의 ‘너는 들으라’ 말씀처럼, 말씀을 듣고 시편 중에 중요한 구절들을 암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 살이 되면 율법의 해석서인 미쉬나(Mishnah)를 읽고 배우게 됩니다. 그 다음 열세 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율법을 배울 수 있는 ‘율법의 아들’이 됩니다. 보통 남자 아이들은 열세 살이 되기 1~2년 전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율법의 아들’이 되었을 때 취해야 할 행동들을 미리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도 열세 살이 되기 한 해 전인 열두 살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아들 예수님에게 신앙을 전승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이 그리하셨다면, 우리는 더욱 더 그리해야 합니다.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은 첫번째로 부모의 책임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을 읽게 하고, 예배를 드리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많은 부모들이 종종 자녀들에게 “너 오늘은 교회 가는 것보다 학원가는 것이 좋겠다. 말씀 읽는 것보다 일단 네 책이나 다 읽어라.”라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라고 자녀들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된 자녀는, 그것이 마음에 남게 됩니다. ‘아, 하나님보다 세상 출세가 먼저구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구나.’ 이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확신이 어린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자율권이었습니다. 유월절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받았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동안 계속되는 축제 기간 동안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방임했습니다. “너 스스로 한번 돌아다녀 봐라. 친구들과 성전에도 들어가 보고, 랍비들이 어떻게 가르치는지, 제사는 어떻게 드리는지 가서 보라.” 그래서 일주일 동안 소년 예수님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일곱 날이 지나고, 예수님의 부모님은 함께 온 동료들과 함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과 함께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걸어 잠자리에 들려고 보니 아들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들이 같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자율성은 위험한 것입니다. 책임 없이 주어진 자율성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자유가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 주거 이전의 자유, 소유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 자유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방종이 되고, 때론 남을 향한 위협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부모는 아들 예수를 찾기 위해 하룻길을 되돌아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난지 삼일 째 되던 날, 드디어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랍비들과 함께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누가복음 2:46)

예수님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선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자녀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애간장이 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누가복음 2:48)

“너 어찌해서 이랬느냐? 우리가 얼마나 너를 염려했는지 알고 있느냐?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네가 아느냐?” 하면서 꾸중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마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대견했습니다. 열두 살 난 아이가 랍비들과 함께 대화하는데 막힘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화난 어머니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라고 묻는 어머니를 향해서 “어머니 어찌하여”라고 되묻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누가복음 2:49)

어떻게 보면 젊은 소년의 반항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부모와 아들의 충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꾸짖음에 잘못했다고 대답하지 않고, “어찌해서 나를 찾았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 그것이 옳은지 모르셨습니까?”하고 되묻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항도 충돌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맞아. 네가 의지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시지.’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보다 더 큰 아버지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적인 독자성이고, 영적인 민감성이고, 영적인 확신이었습니다.
부모를 만난 후 예수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계속 성전에 머물러 계셨을까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누가복음 2:51)

예수님에게는 자발성도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있었지만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더 자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 속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나사렛에 이르러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는 효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이해는 공감과 참여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랍비들과 마주했을 때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다’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랍비들과 함께 앉아서 율법에 대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대답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랍비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47)

예수님의 지혜가 놀랄 만큼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이 랍비들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대로 몰입했기 때문에 말씀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했기 때문에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학자인 칼 퍼포(Karl Popper)는 새로운 이해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사람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공감적 직관’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본다. 문제 속으로 들어가서 그 문제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 속에 들어가 함께하는 것, 그 느낌에 참여하는 것이 공감적 직관, 혹은 감정이입입니다. 즉, 이러한 것을 통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겉다리만 만져보게 됩니다.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그 문제가 곧 내 문제가 되는 것, 그 때 비로소 새로운 인생론의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 당신 자신을 집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성경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의 이야기를 읽을 때, 모세의 심정으로 그 안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경 읽기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 베드로의 마음으로 그 속에 들어가야 예수님이 내게 다가오시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겉핥기입니다. 수박이 아무리 잘 익었어도 겉만 만지고 핥아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운데를 잘라 빨갛게 익은 것을 한 입 먹어야 수박을 진짜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어린 열두 살 아이의 말이 랍비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성장의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 성인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청소년기를 지나는 아이와도 같습니다. 아침에 굳게 결심했다가도 점심에는 그 결심들을 폐기처분합니다. 아침엔 거룩해졌다가 저녁에는 탐욕스러운 인간이 됩니다. 이런 내 삶의 모습이 얼마나 뒤죽박죽일까요? 하나님이 눈에는 우리가 아주 위험천만한 아기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부모인 분들은 아실 겁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어렵던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 같은 인간을 만나시고,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내가 나를 보면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원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나를 인정해라. 너를 사랑하는 내게 예배드려라. 내가 네게 모든 축복을 주었으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고 즐거워하며 자율적으로 살아라.” 두 번째는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을까 겁내고 두려워하며 나를 섬기지 말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준 내 사랑을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자유자로, 성숙한 자로, 내가 기뻐하는 대로 살아가라”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계속 자라야 합니다. 성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올 한해는 이런 신앙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성숙하리라. 영적으로 성숙하리라. 내가 말씀 속에 들어가리라. 공감적 직관을 가지고 성령을 보리라. 그래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접촉하리라’
어정쩡하게 인생을 보내지 마시고, 어정쩡하게 신앙생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으십시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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