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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불쌍히 여기시다

마가복음 6: 34

김지철 목사

2013.02.17

예수님도 감정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감정 표현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먼저 감정 표현이란, 매우 인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그 사람의 생각과 인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내면에 감정을 품고 때로는 그것을 표현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마치 어린 아이같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훼방하고 거스르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화를 내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전혀 다른 힘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 배신을 당할 때 나타나는 힘, 바로 분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이 진정한 내공으로 다져져서 나오는 힘, 바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무언가 가졌다고 마치 굉장한 것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오만한 자들, 가진 것으로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탐욕스러운 자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가진 것을 자기만을 위해서 휘두르며 남을 억압하는 자들, 그리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가진 것이 돈과 재물이든, 지식이나 권력이든 상관없이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부자들, 배우지 못한 자들을 경멸하는 지식인들, 힘없는 자들을 억누르고 남의 것을 빼앗는 권력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기득권에 안주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볼 때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까지 퍼부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부자, 지식인, 권력자, 종교 지도자들을 예수님께서 다 매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숨겨진 인물들 중에는 예수님을 도왔던 부자나 지식인,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것으로 흡족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가진 건강과 재물, 지식, 권력은 받은 선물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나의 특권으로만, 나만을 위한 독자적인 권력이나 힘으로만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이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가까이 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상처 난 자들, 질병 때문에 탄식하는 자들, 귀신의 억압으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들,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제가 없었을까요? 그들은 있는 자들과는 달리 겸손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더 많은 시기와 다툼, 더 많은 탐욕들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만나시면서 화를 내시거나 분노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힘들고,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이미 절망 속에서 큰 아픔들을 겪으며 탄식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먼저 위로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용기를 갖고 살아가라고 그들을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면,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6:34)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큰 무리’를 보셨다는 말씀에서 이 곳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앞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각 마을로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열심히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병 치유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충성스럽고, 신실한 제자들이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 쉴 틈이 없었다. 아니,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았구나.’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쉼을 요청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마가복음 6:31-32)

성경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사람들을 만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쉼을 위해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마가복음 6:33)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안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샛말로, 예수님의 사생활이 침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했을까요? “좀 쉬자. 우리도 밥 좀 먹자. 당신들 저리 갔다가 이따 와라.”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며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이들에게 움직였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 말씀 듣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들을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흔들리고 있구나. 마치 길 가다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방치되어 있구나.’ 그래서 식사하시는 것도 잊으시고, 다시 그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음을 예수님은 비판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느끼셨다고 기록합니다. 양이 목자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들에서 짐승의 밥이 되거나 도둑들에게 잡혀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꼭 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정말 목자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지도자다”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로, 율법을 판정하는 자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인물들이 당시에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 사두개인들, 정치 권력자들 모두가 스스로를 지도자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자가 없다”며 비판하셨습니다.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양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을 이용하려는 가짜 목자만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지도자를 찾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목자 자신을 위해서 양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거짓 지도자들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뽑는 이유는, 공동체를 위함입니다.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지도자를 위해서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대통령을 위해서 나라와 백성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를 위해서 성도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목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장로님, 권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지도자란, 공동체를 위한 자리입니다.
그것이 체력이든, 금력이든, 권력이나 지혜든 우리가 가진 것이 넘치고 커질수록 더 풍부해져야 하는 성품이 있습니다. 더 깊어져야 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바로 넉넉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이 생기면 그동안 당했던 일들, 설움을 겪었던 일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갚아주고 싶어 합니다. ‘나를 우습게 알았지? 내가 이만한 힘을 가진 자란 걸 몰랐지? 내가 당한 것을 그대로 갚아줄 거야.’ 이것은 보복의 마음이며, 미움과 분노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책임자입니까? 직장의 대표입니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습니까? 그 자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공동체는 붕괴되고 맙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많이 가질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연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남을 위해 배려하겠다는 결심이며 연약한 사람을 위해 내 마음의 문을 열어놓겠다는 다짐입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이웃을 위한 개방적인 삶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입니다.

상대방의 아픔에 함께하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다’의 말은 원어를 살펴보면 그 뜻이 더 강력합니다. 원어로는, ‘창자가 타들어 가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내장이 아프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너무 안타까울 때, ‘애간장이 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쌍히 여기다’의 의미입니다. 바로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리에서 생명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치유가 나타나고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만큼 이것은 소중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는 핏덩이 같은 나를 불쌍히 여기신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똥, 오줌을 치우는 등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신 덕분에 우리가 생명을 누리며 이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기도하게 하고, 손을 열게 합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태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망각한 불쌍히 여김입니다. 그것은 동냥에 불과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어머니의 사랑도 공의가 없으면 독이 됩니다.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자녀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녀를 키울 때도 있습니다. 자녀를 잘 키운 최고의 어머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자녀에게 집착하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과 불쌍히 여김이 아닙니다.
둘째, 진심이 결여된 불쌍히 여김입니다. 인격과 결합하지 않은 불쌍히 여김은 값싼 동정에 멈춰 서게 됩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경박한 쾌락주의에 불과합니다. 진정성이 있어야 진정한 불쌍히 여김입니다.
셋째, 독선과 교만이 담긴 불쌍히 여김입니다. ‘나는 주는 자고, 너는 받는 자야. 나는 베푸는 자고, 너는 베풂을 당하는 자야. 나는 위에 있는 자고, 너는 밑에 있는 자야.’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게 되면 받는 사람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내려오셨습니까? 하늘에서 그냥 “용서하자,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끝마치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처럼 죄인이 되셨고, 나처럼 아파하셨고, 나처럼 슬퍼하셨습니다. 나처럼 외로우셨고, 나처럼 절망하고 낙심하시면서 우리의 상처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프레드릭 부크너(Frederick Buechner)는 ‘불쌍히 여김’이라는 단어를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평화와 기쁨이 없는 한 내게도 평화와 기쁨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라고 정의합니다. 네가 평화롭지 않으면 나도 평화롭지 않다는 마음, 네가 기뻐하지 않으면 나도 기뻐할 수가 없다는 마음, 이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영어로 compassion입니다. 여기에서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은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즉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문제를 나눈다는 것이 ‘불쌍히 여기다’의 의미입니다.

긍휼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 한 사람이 불쌍히 여기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을 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다, 민망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 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 그리고 오늘 본문 다음에 일어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도 모두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1년에 한 번 정도는 구제와 봉사팀에 참여해서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보는 기회를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나보다 잘난 사람들한테 배우는 것보다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보면서 배우는 게 더 많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2-3년에 한 번쯤은 외지 선교 여행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고등부 자녀들, 대학·청년들이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 대한민국보다 열악한 지역으로 선교를 다녀오면 꼭 간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 스스로를 생각하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만큼 나를 키워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내게 주신 믿음과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이제는 불평하며, 우울해 하며 살 수 없게 되었어요.”
세상이 자꾸만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살벌해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따뜻한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마음들이 있을 때 우리의 공동체 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지도자일수록 더욱 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공동체에 생명이 살아나고, 공동체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비전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내게는 긍휼함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불쌍함을 갖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그 넉넉한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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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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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도 감정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감정 표현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먼저 감정 표현이란, 매우 인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그 사람의 생각과 인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내면에 감정을 품고 때로는 그것을 표현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마치 어린 아이같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훼방하고 거스르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화를 내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전혀 다른 힘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 배신을 당할 때 나타나는 힘, 바로 분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이 진정한 내공으로 다져져서 나오는 힘, 바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무언가 가졌다고 마치 굉장한 것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오만한 자들, 가진 것으로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탐욕스러운 자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가진 것을 자기만을 위해서 휘두르며 남을 억압하는 자들, 그리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가진 것이 돈과 재물이든, 지식이나 권력이든 상관없이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부자들, 배우지 못한 자들을 경멸하는 지식인들, 힘없는 자들을 억누르고 남의 것을 빼앗는 권력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기득권에 안주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볼 때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까지 퍼부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부자, 지식인, 권력자, 종교 지도자들을 예수님께서 다 매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숨겨진 인물들 중에는 예수님을 도왔던 부자나 지식인,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것으로 흡족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가진 건강과 재물, 지식, 권력은 받은 선물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나의 특권으로만, 나만을 위한 독자적인 권력이나 힘으로만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이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가까이 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상처 난 자들, 질병 때문에 탄식하는 자들, 귀신의 억압으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들,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제가 없었을까요? 그들은 있는 자들과는 달리 겸손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더 많은 시기와 다툼, 더 많은 탐욕들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만나시면서 화를 내시거나 분노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힘들고,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이미 절망 속에서 큰 아픔들을 겪으며 탄식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먼저 위로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용기를 갖고 살아가라고 그들을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면,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6:34)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큰 무리’를 보셨다는 말씀에서 이 곳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앞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각 마을로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열심히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병 치유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충성스럽고, 신실한 제자들이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 쉴 틈이 없었다. 아니,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았구나.’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쉼을 요청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마가복음 6:31-32)

성경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사람들을 만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쉼을 위해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마가복음 6:33)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안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샛말로, 예수님의 사생활이 침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했을까요? “좀 쉬자. 우리도 밥 좀 먹자. 당신들 저리 갔다가 이따 와라.”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며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이들에게 움직였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 말씀 듣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들을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흔들리고 있구나. 마치 길 가다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방치되어 있구나.’ 그래서 식사하시는 것도 잊으시고, 다시 그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음을 예수님은 비판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느끼셨다고 기록합니다. 양이 목자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들에서 짐승의 밥이 되거나 도둑들에게 잡혀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꼭 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정말 목자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지도자다”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로, 율법을 판정하는 자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인물들이 당시에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 사두개인들, 정치 권력자들 모두가 스스로를 지도자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자가 없다”며 비판하셨습니다.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양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을 이용하려는 가짜 목자만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지도자를 찾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목자 자신을 위해서 양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거짓 지도자들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뽑는 이유는, 공동체를 위함입니다.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지도자를 위해서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대통령을 위해서 나라와 백성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를 위해서 성도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목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장로님, 권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지도자란, 공동체를 위한 자리입니다.
그것이 체력이든, 금력이든, 권력이나 지혜든 우리가 가진 것이 넘치고 커질수록 더 풍부해져야 하는 성품이 있습니다. 더 깊어져야 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바로 넉넉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이 생기면 그동안 당했던 일들, 설움을 겪었던 일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갚아주고 싶어 합니다. ‘나를 우습게 알았지? 내가 이만한 힘을 가진 자란 걸 몰랐지? 내가 당한 것을 그대로 갚아줄 거야.’ 이것은 보복의 마음이며, 미움과 분노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책임자입니까? 직장의 대표입니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습니까? 그 자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공동체는 붕괴되고 맙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많이 가질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연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남을 위해 배려하겠다는 결심이며 연약한 사람을 위해 내 마음의 문을 열어놓겠다는 다짐입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이웃을 위한 개방적인 삶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입니다.

상대방의 아픔에 함께하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다’의 말은 원어를 살펴보면 그 뜻이 더 강력합니다. 원어로는, ‘창자가 타들어 가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내장이 아프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너무 안타까울 때, ‘애간장이 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쌍히 여기다’의 의미입니다. 바로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리에서 생명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치유가 나타나고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만큼 이것은 소중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는 핏덩이 같은 나를 불쌍히 여기신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똥, 오줌을 치우는 등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신 덕분에 우리가 생명을 누리며 이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기도하게 하고, 손을 열게 합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태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망각한 불쌍히 여김입니다. 그것은 동냥에 불과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어머니의 사랑도 공의가 없으면 독이 됩니다.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자녀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녀를 키울 때도 있습니다. 자녀를 잘 키운 최고의 어머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자녀에게 집착하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과 불쌍히 여김이 아닙니다.
둘째, 진심이 결여된 불쌍히 여김입니다. 인격과 결합하지 않은 불쌍히 여김은 값싼 동정에 멈춰 서게 됩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경박한 쾌락주의에 불과합니다. 진정성이 있어야 진정한 불쌍히 여김입니다.
셋째, 독선과 교만이 담긴 불쌍히 여김입니다. ‘나는 주는 자고, 너는 받는 자야. 나는 베푸는 자고, 너는 베풂을 당하는 자야. 나는 위에 있는 자고, 너는 밑에 있는 자야.’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게 되면 받는 사람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내려오셨습니까? 하늘에서 그냥 “용서하자,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끝마치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처럼 죄인이 되셨고, 나처럼 아파하셨고, 나처럼 슬퍼하셨습니다. 나처럼 외로우셨고, 나처럼 절망하고 낙심하시면서 우리의 상처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프레드릭 부크너(Frederick Buechner)는 ‘불쌍히 여김’이라는 단어를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평화와 기쁨이 없는 한 내게도 평화와 기쁨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라고 정의합니다. 네가 평화롭지 않으면 나도 평화롭지 않다는 마음, 네가 기뻐하지 않으면 나도 기뻐할 수가 없다는 마음, 이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영어로 compassion입니다. 여기에서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은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즉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문제를 나눈다는 것이 ‘불쌍히 여기다’의 의미입니다.

긍휼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 한 사람이 불쌍히 여기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을 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다, 민망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 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 그리고 오늘 본문 다음에 일어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도 모두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1년에 한 번 정도는 구제와 봉사팀에 참여해서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보는 기회를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나보다 잘난 사람들한테 배우는 것보다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보면서 배우는 게 더 많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2-3년에 한 번쯤은 외지 선교 여행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고등부 자녀들, 대학·청년들이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 대한민국보다 열악한 지역으로 선교를 다녀오면 꼭 간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 스스로를 생각하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만큼 나를 키워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내게 주신 믿음과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이제는 불평하며, 우울해 하며 살 수 없게 되었어요.”
세상이 자꾸만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살벌해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따뜻한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마음들이 있을 때 우리의 공동체 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지도자일수록 더욱 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공동체에 생명이 살아나고, 공동체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비전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내게는 긍휼함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불쌍함을 갖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그 넉넉한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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