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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어떤 한 해를 보내셨습니까.
옛말에 ‘이 세상에서 노력 없이 얻는 것은 나이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삽니까? 그런데 옛말처럼, 나이만은 예외입니다. 세월은 가만히 두어도 흘러가기에 한 해가 지나면 누구나 한 살을 더 먹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이 끝나면 나이 먹는 것도 사라지고 맙니다.
『내가 죽을 때 누가 울어줄까?』라는 책을 쓴 로빈 샤르마(Robin S. Sharma)는 그의 글 첫 장에서 “가슴 뛰는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얘야,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음을 터트렸지만, 사람들은 기뻐했단다. 네가 죽을 때는 사람들은 울음을 터트리지만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오늘은 2012년을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이 시간, 지난 한 해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즐겁게 살았는가? 아니면 지루해하며 살았는가? 나는 감사하면서 살았는가? 아니면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았는가? 나는 가치 있게 살았는가? 아니면 시간을 낭비하면서 살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물어보실지 모릅니다. “너 스스로를 판단해 봐라. 내가 만약 네게 인생을 다시 한 번 준다면,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계속 살 것이냐?”
살아있다는 것은 언젠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죽게 되면,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모든 것의 마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십니다.
죽음을 맞는 두려움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명과 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일에 매달립니까? 왜 때로 일중독에 빠지기도 합니까? 누군가 나에게 “너 왜 사니?” 하고 물었을 때 무의미한 삶이 아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언가 맡겨진 일이 있음을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연애하고 싶어 하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도,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라고 과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시간과 장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한 번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하는 질문을 해봅니다. 길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도, 세상의 지위와 자리에 붙잡혀 사는 이유도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번째는 실제적인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살아있던 존재가 한 줌의 흙보다도 의미 없는 비존재로 바뀌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사모합니다.
이렇게 두려움이 많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요한계시록 22:13)
그리스어의 첫 글자가 알파(α), 마지막 글자가 오메가(Ω)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강단에 알파와 오메가를 새겨놓습니다. 우리 강단에도 두 글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시간적 의미로는 예수님이 모든 시간의 출발과 끝, 곧 시간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공간적 의미로는 예수님이 온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즉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고 상을 줄 자에게는 상을, 징계를 할 자에게 벌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자와 구원자’로서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12)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너는 너의 시간을 잘 사용했느냐? 내가 네가 생명을 주어 이 땅에 살게 하였는데, 내가 네게 하루 24시간을 주었는데, 너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는 것, 의미 없이 소진시키는 것입니다. 헌법상 횡령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사람이 주인과는 상관없이 그 재물을 마음대로 소비하거나 탕진하는 죄를 말합니다.
여기서 재물을 시간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시간을 맡기겠다. 이제부터 이 시간을 네가 사용하도록 해라.”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낭비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에 대한 횡령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미 있게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웃들과 더불어 사랑하며 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그 뜻대로 시간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질문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나옵니다. 한 달란트는 20년 봉급을 다 모아 놓은 정도의 매우 큰 돈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많은 돈을 맡겨준 주인이 무서웠습니다. 새로운 모험을 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땅바닥에 숨겨놓았습니다. 본전이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는 묻어둔 한 달란트를 꺼내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주인이 칭찬했을까요? 내가 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리지 않고 가져왔으니 괜찮다고 그랬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엄히 꾸짖으며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불렀습니다. 악한 것, 게으른 것은 동의어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곧 악하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게으름으로 삶을 낭비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일을 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성실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일, 일, 또 일, 이렇게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일중독에 빠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가 쓴『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안에는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후회의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열 번 째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일중독자들은 열이면 열 모두 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일에 빠져있느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스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생깁니까? 시간의 주인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시간을 맡긴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라고 주셨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일, 일, 일, 그 속에 나를 매몰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워집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 예수님은 처음이고 마지막, 곧 전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시간이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시간이 예수님에게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시간이 ‘지금’이 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모든 시간은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서 새로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세상 시간에 따라 모든 것은 결국 헌 것이 되어버리지만, 시간에 충일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인생에서 결코 늦은 때란 없단다. 네가 깨닫는 바로 그 시간,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바로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동일하게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삶이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내 마음대로 써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삶이란 내 것이 아니구나. 누군가 내게 선물로 주신 것이구나.’ 그들은 큰 사고나 사건을 통해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언제 삶의 기쁨을 느끼십니까? 사랑하는 이와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것, 따뜻한 햇살 한 줌이 얼굴을 비추는 것, 하늘에 떠가는 구름과 하얀 눈으로 뒤덮힌 산을 보는 것, 옆에서 재잘대는 어린 아이들의 말소리를 듣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살아가는 기쁨 아닙니까?
예배는 시간의 주인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큰 기쁨의 복입니다. 저는 요즘 이른 새벽, 밤새 내린 눈으로 꽁꽁 언 길을 걸어 나오면서 ‘우리 성도님들, 어떻게 예배드리러 나올까?’ 염려하다가도 7시 30분 또 9시 30분 예배에 참석하신 한분, 한분을 보면 가슴 가득 감사가 차오르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소중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비아냥거립니다. “그거 엄청난 시간 낭비 아니냐? 게다가 헌금까지 드린다고? 시간 뺏기고 돈 잃고 도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고 있는 것이냐?”
과연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에 중독되었던 내가, 내 존재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나 자신이 이 세상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이 바로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시간이 충일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간을 넘어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시간을 거룩하게 사용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마르바 던(Marvaj.Dawn)이라는 사람은 예배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배는 시간낭비다. 그러나 참으로 고귀한 시간낭비다. 예배는 우리를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광채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참여합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때, 예배드리세요. 나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될 때, 기도하고 찬양하세요.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내 실존 전체가 새로워지는 은총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시간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시간을 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낭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의 낭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진실하게 살라고 하셨는데 거짓과 불의 속에 나를 빠뜨리는 것, 그것이 시간의 낭비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 이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하셨는데 스스로를 학대하는 삶의 태도가 시간의 낭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살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질을, 시간의 질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는,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사나 죽으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시간을 내 속에 채우십시오.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되게 해주세요.” 이러한 확인이 있은 후에는 무슨 일이든 하셔도 좋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렇게 수고하고 땀 흘리며, 쉬어야 할 때 쉬면서 주님과 함께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복되게 사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시간들을 낭비하지 않고,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2013년을 새롭게 맞이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한 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2: 12 ~ 13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한 해를 보내셨습니까.
옛말에 ‘이 세상에서 노력 없이 얻는 것은 나이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삽니까? 그런데 옛말처럼, 나이만은 예외입니다. 세월은 가만히 두어도 흘러가기에 한 해가 지나면 누구나 한 살을 더 먹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이 끝나면 나이 먹는 것도 사라지고 맙니다.
『내가 죽을 때 누가 울어줄까?』라는 책을 쓴 로빈 샤르마(Robin S. Sharma)는 그의 글 첫 장에서 “가슴 뛰는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얘야,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음을 터트렸지만, 사람들은 기뻐했단다. 네가 죽을 때는 사람들은 울음을 터트리지만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오늘은 2012년을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이 시간, 지난 한 해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즐겁게 살았는가? 아니면 지루해하며 살았는가? 나는 감사하면서 살았는가? 아니면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았는가? 나는 가치 있게 살았는가? 아니면 시간을 낭비하면서 살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물어보실지 모릅니다. “너 스스로를 판단해 봐라. 내가 만약 네게 인생을 다시 한 번 준다면,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계속 살 것이냐?”
살아있다는 것은 언젠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죽게 되면,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모든 것의 마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십니다.
죽음을 맞는 두려움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명과 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일에 매달립니까? 왜 때로 일중독에 빠지기도 합니까? 누군가 나에게 “너 왜 사니?” 하고 물었을 때 무의미한 삶이 아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언가 맡겨진 일이 있음을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모두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연애하고 싶어 하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도,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라고 과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시간과 장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한 번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하는 질문을 해봅니다. 길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도, 세상의 지위와 자리에 붙잡혀 사는 이유도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번째는 실제적인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살아있던 존재가 한 줌의 흙보다도 의미 없는 비존재로 바뀌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사모합니다.
이렇게 두려움이 많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요한계시록 22:13)
그리스어의 첫 글자가 알파(α), 마지막 글자가 오메가(Ω)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강단에 알파와 오메가를 새겨놓습니다. 우리 강단에도 두 글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시간적 의미로는 예수님이 모든 시간의 출발과 끝, 곧 시간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공간적 의미로는 예수님이 온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즉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고 상을 줄 자에게는 상을, 징계를 할 자에게 벌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자와 구원자’로서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12)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너는 너의 시간을 잘 사용했느냐? 내가 네가 생명을 주어 이 땅에 살게 하였는데, 내가 네게 하루 24시간을 주었는데, 너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는 것, 의미 없이 소진시키는 것입니다. 헌법상 횡령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사람이 주인과는 상관없이 그 재물을 마음대로 소비하거나 탕진하는 죄를 말합니다.
여기서 재물을 시간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시간을 맡기겠다. 이제부터 이 시간을 네가 사용하도록 해라.”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낭비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에 대한 횡령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미 있게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웃들과 더불어 사랑하며 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그 뜻대로 시간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질문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나옵니다. 한 달란트는 20년 봉급을 다 모아 놓은 정도의 매우 큰 돈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많은 돈을 맡겨준 주인이 무서웠습니다. 새로운 모험을 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땅바닥에 숨겨놓았습니다. 본전이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는 묻어둔 한 달란트를 꺼내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주인이 칭찬했을까요? 내가 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리지 않고 가져왔으니 괜찮다고 그랬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엄히 꾸짖으며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불렀습니다. 악한 것, 게으른 것은 동의어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곧 악하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게으름으로 삶을 낭비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일을 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성실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일, 일, 또 일, 이렇게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일중독에 빠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가 쓴『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안에는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후회의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열 번 째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일중독자들은 열이면 열 모두 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일에 빠져있느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스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생깁니까? 시간의 주인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시간을 맡긴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라고 주셨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일, 일, 일, 그 속에 나를 매몰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워집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 예수님은 처음이고 마지막, 곧 전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시간이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시간이 예수님에게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시간이 ‘지금’이 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모든 시간은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서 새로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세상 시간에 따라 모든 것은 결국 헌 것이 되어버리지만, 시간에 충일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인생에서 결코 늦은 때란 없단다. 네가 깨닫는 바로 그 시간,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바로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동일하게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삶이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내 마음대로 써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삶이란 내 것이 아니구나. 누군가 내게 선물로 주신 것이구나.’ 그들은 큰 사고나 사건을 통해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언제 삶의 기쁨을 느끼십니까? 사랑하는 이와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것, 따뜻한 햇살 한 줌이 얼굴을 비추는 것, 하늘에 떠가는 구름과 하얀 눈으로 뒤덮힌 산을 보는 것, 옆에서 재잘대는 어린 아이들의 말소리를 듣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살아가는 기쁨 아닙니까?
예배는 시간의 주인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큰 기쁨의 복입니다. 저는 요즘 이른 새벽, 밤새 내린 눈으로 꽁꽁 언 길을 걸어 나오면서 ‘우리 성도님들, 어떻게 예배드리러 나올까?’ 염려하다가도 7시 30분 또 9시 30분 예배에 참석하신 한분, 한분을 보면 가슴 가득 감사가 차오르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소중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비아냥거립니다. “그거 엄청난 시간 낭비 아니냐? 게다가 헌금까지 드린다고? 시간 뺏기고 돈 잃고 도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고 있는 것이냐?”
과연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에 중독되었던 내가, 내 존재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나 자신이 이 세상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이 바로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시간이 충일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간을 넘어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시간을 거룩하게 사용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마르바 던(Marvaj.Dawn)이라는 사람은 예배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배는 시간낭비다. 그러나 참으로 고귀한 시간낭비다. 예배는 우리를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광채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참여합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때, 예배드리세요. 나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될 때, 기도하고 찬양하세요.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내 실존 전체가 새로워지는 은총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시간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시간을 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낭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의 낭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진실하게 살라고 하셨는데 거짓과 불의 속에 나를 빠뜨리는 것, 그것이 시간의 낭비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 이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하셨는데 스스로를 학대하는 삶의 태도가 시간의 낭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살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질을, 시간의 질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는,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사나 죽으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시간을 내 속에 채우십시오.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되게 해주세요.” 이러한 확인이 있은 후에는 무슨 일이든 하셔도 좋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렇게 수고하고 땀 흘리며, 쉬어야 할 때 쉬면서 주님과 함께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복되게 사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시간들을 낭비하지 않고,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2013년을 새롭게 맞이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한 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