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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더불어 사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신뢰할 만한 사람과 동행하는 것. 그것이 인생을 살며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혼자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하는 외로움일 것입니다.
소설『25시』를 쓴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외로움, 고독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괴로운 고통이다. 아무리 격심한 공포라도 모두가 함께 있으면 견딜 수 있으나 고독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외로움으로 절절하게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시대에는 수많은 소리들, 아우성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고독에 대한, 외로움에 대한 사무침과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데서 오는 외침입니다.
신문과 TV를 통해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대하면서, 때로는 욱하여 욕도 하게 만들고, 분노를 느끼게 하는 그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외로움에 대한 또 다른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고, 무언가 가진 자들은, “나에게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좀 봐봐. 나는 남에게 명령할 수 있고, 남을 휘두르며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자야!”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힘없는 자들, 연약한 자들은, “왜 나만 이런 고생을 해야 해?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야!” 다른 사람을 탓하며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마음이 조금 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이 두 가지 속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조금이라도 우쭐대고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비굴한 근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나를 어떻게든 알리고,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일 것입니다. 결국 외롭다는 이야기입니다. 군중 속에 있어도 고독하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보면, 하나님은 이 외로움을 덜어 주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남자인 아담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보기 좋다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이 혼자 있으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남자일 뿐이고, 그냥 여자일 뿐입니다.
인간이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도 하고, 때로는 복닥대며 미워도 하고,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을 가지며 더불어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까요? 홀로 있기에 느끼는 외로움을 함께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짝을 지어 주시고, 서로 대화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함께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에게로 데리고 와서 하와와 아담을 서로 소개하는 그때에, 아담이 하와를 보며 기쁨으로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창세기 2:23)
아담은 최고의 찬탄을 쏟아 내면서 이 여인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화할 줄 알도록, 사랑할 줄 알도록 만드셨습니다. 남녀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친구’라는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우정의 축복도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함께 있는 것은 서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완성을 향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생. 서로 이기게 하고 서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처음 그 순간부터 이것을 깨버립니다. 그리고는 “너 때문이야!” 하고 원망하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인간상이 어떻게 변모되었을까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을 때, 사탄의 말처럼 정말 하나님처럼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됨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겁이 나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러운 ‘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실존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게 된 것입니다.
신뢰가 깨어질 때 생기는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수없이 만나면서도 선택해서 사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쉽게 마음을 열 수 없는 것일까요?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었다가 속게 되면 어쩌지? 상대방을 신뢰했다가 나중에 나만 상처 입고 끝나버리는 것 아닐까?’ 젊은 사람들이 때로 연애하기를 싫어하고, 친구 사귀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위기는 이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책임지기를 싫어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변명부터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상처받은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을 떠나면서 갖게 된 것은 상대방을 향한 높은 방어벽이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보호하려는, 자기를 변명하려는 방어기재가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회피하여 도망하려고 합니다. 아담은 말합니다. “바로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 여자를 안 만드셨으면 되는데… 하나님이 만드셔서 제가 이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게 되었을 때, 상생의 공동체는 깨졌습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했고, 여자에게 모든 문제를 다 덮어씌우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갖게 되는 이 두 가지 감정, 두려움과 뻔뻔함은 늘 함께 갑니다. 두려움을 너무 많이 타게 되면 뻔뻔해집니다. 또 뻔뻔해지면 사실 그 속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이중적인 위험에 빠져있는 인간을 어떻게든 고치고 싶어 하십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러한 인간상의 위기를 하나님은 해결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한 인간상의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지난 주일은 마리아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리아의 순종은 그 다음 요셉의 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서로를 탓하고 원망했던 삶과는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요셉의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가 어느 날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약혼한 여인이 간음을 하게 되면 이혼 사유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은 간음죄로 돌로 쳐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죄인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약혼한 남녀의 성적인 관계는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친정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1년이 지난 후에야 정식으로 혼례를 치루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셉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선한 인격을 가진 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여자와 이 사건을 생각하며 그저 조용히 혼인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태복음 1:19)
이 일을 생각할 때 요셉에게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별 생각을 다하지 않았겠습니까? ‘내 약혼녀인데… 신뢰의 상징이고 친밀함의 표시인데 결혼을 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니…’ 요셉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치를 떨 정도의 배신의 아픔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용납하기 어려웠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내적인 번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때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마태복음 1:20~21)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신뢰해라.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그가 아들을 낳을 텐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는 요셉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예수아’, 구약의 ‘여호수아’라는 말의 축약 형태로 쓰인 말입니다. 아주 흔한, 당대 많은 사람들이 썼던 이름이 ‘예수’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매우 대비되지 않습니까? 첫째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분장한 사탄의 말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선악과를 먹었고, 아담과 하와가 함께 범죄 속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둘째 인간인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 그의 어머니, 아버지인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외로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나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간헐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령의 사람에게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구약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건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새 사건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서로 상처를 주고, 불신하고,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그 모든 장벽들을 하나님이 깨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아, 네가 하나님을 떠나 두려움으로 탄식하며 신음하던 그 옛 시대를 이제 내가 매듭짓겠다. 인간아, 네가 사람 속에 파묻혀 있어도 외로워하던 그 시대를 이제 내가 종결시키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살펴볼 때 확인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도망가는 역사를 만들고, 거꾸로 하나님은 그 도망가는 인간을 끊임없이 찾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경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되자. 그러면 우리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역사, 그것은 오히려 두려움과 뻔뻔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인간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지막 날에 내 아들을 너희에게 파송하겠다. 그는 너희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다. 너희와 함께 잠을 잘 것이다. 너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너희와 손을 마주 잡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표시이다.” 그렇게 이 땅에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두려움을 떨쳐버려라. 이제는 네가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것이 죄일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고,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었다.” 우리의 두려움을 해결하고,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가 믿을 만한 친구로 곁에 다가오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이름은 ‘아빠’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어린아이가 “아빠!” 하고 달려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니 하나님 앞에 다 토해 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토록 가까운 존재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으로 보여주셨습니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 (요한복음 15:15)
예수님은 제자들을 앞에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친구다. 너희는 내 친구다. 너희를 사랑하고, 배반함이 없는,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그런 친구다. 너희도 나를 친구로 받으라.”
우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자유롭게 하면서 존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억압하는 건 우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우리를 위하는 친구로 다가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한 함께 있으며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생명을 가르치고, 예수님 자신을 가르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기쁜 소식을 누리고 전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까요? 잃어버렸던 나의 아버지를 내가 다시 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친구들이 나를 떠나도 예수님이 내 생명의 친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으며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혹시 욥과 같은 고난을 받고 계십니까? 욥은 어떤 고난을 받았습니까? 열 명의 자녀가 이별 인사도 없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와서는 “네가 잘못했다.”며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며 신음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욥의 고통이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다’는 것입니다. 욥은 중보자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나를 하나님과 만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중보자가 계십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토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나의 사랑하는 아바 아버지인 것을 믿고 내 고난의 현장, 아픔의 현장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이 아픔들을 우리가 말씀으로 넘어서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 시대의 고난의 현장, 슬픔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함께 나누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전하는 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 18 ~ 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결국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더불어 사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신뢰할 만한 사람과 동행하는 것. 그것이 인생을 살며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혼자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하는 외로움일 것입니다.
소설『25시』를 쓴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외로움, 고독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괴로운 고통이다. 아무리 격심한 공포라도 모두가 함께 있으면 견딜 수 있으나 고독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외로움으로 절절하게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시대에는 수많은 소리들, 아우성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고독에 대한, 외로움에 대한 사무침과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데서 오는 외침입니다.
신문과 TV를 통해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대하면서, 때로는 욱하여 욕도 하게 만들고, 분노를 느끼게 하는 그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외로움에 대한 또 다른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고, 무언가 가진 자들은, “나에게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좀 봐봐. 나는 남에게 명령할 수 있고, 남을 휘두르며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자야!”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힘없는 자들, 연약한 자들은, “왜 나만 이런 고생을 해야 해?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야!” 다른 사람을 탓하며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마음이 조금 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이 두 가지 속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조금이라도 우쭐대고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비굴한 근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나를 어떻게든 알리고,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일 것입니다. 결국 외롭다는 이야기입니다. 군중 속에 있어도 고독하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보면, 하나님은 이 외로움을 덜어 주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남자인 아담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보기 좋다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이 혼자 있으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남자일 뿐이고, 그냥 여자일 뿐입니다.
인간이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도 하고, 때로는 복닥대며 미워도 하고,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을 가지며 더불어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까요? 홀로 있기에 느끼는 외로움을 함께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짝을 지어 주시고, 서로 대화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함께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에게로 데리고 와서 하와와 아담을 서로 소개하는 그때에, 아담이 하와를 보며 기쁨으로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창세기 2:23)
아담은 최고의 찬탄을 쏟아 내면서 이 여인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화할 줄 알도록, 사랑할 줄 알도록 만드셨습니다. 남녀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친구’라는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우정의 축복도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함께 있는 것은 서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완성을 향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생. 서로 이기게 하고 서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처음 그 순간부터 이것을 깨버립니다. 그리고는 “너 때문이야!” 하고 원망하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인간상이 어떻게 변모되었을까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을 때, 사탄의 말처럼 정말 하나님처럼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됨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겁이 나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러운 ‘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실존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게 된 것입니다.
신뢰가 깨어질 때 생기는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수없이 만나면서도 선택해서 사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쉽게 마음을 열 수 없는 것일까요?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었다가 속게 되면 어쩌지? 상대방을 신뢰했다가 나중에 나만 상처 입고 끝나버리는 것 아닐까?’ 젊은 사람들이 때로 연애하기를 싫어하고, 친구 사귀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위기는 이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책임지기를 싫어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변명부터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상처받은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을 떠나면서 갖게 된 것은 상대방을 향한 높은 방어벽이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보호하려는, 자기를 변명하려는 방어기재가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회피하여 도망하려고 합니다. 아담은 말합니다. “바로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 여자를 안 만드셨으면 되는데… 하나님이 만드셔서 제가 이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게 되었을 때, 상생의 공동체는 깨졌습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했고, 여자에게 모든 문제를 다 덮어씌우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갖게 되는 이 두 가지 감정, 두려움과 뻔뻔함은 늘 함께 갑니다. 두려움을 너무 많이 타게 되면 뻔뻔해집니다. 또 뻔뻔해지면 사실 그 속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이중적인 위험에 빠져있는 인간을 어떻게든 고치고 싶어 하십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러한 인간상의 위기를 하나님은 해결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한 인간상의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지난 주일은 마리아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리아의 순종은 그 다음 요셉의 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서로를 탓하고 원망했던 삶과는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요셉의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가 어느 날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약혼한 여인이 간음을 하게 되면 이혼 사유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은 간음죄로 돌로 쳐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죄인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약혼한 남녀의 성적인 관계는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친정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1년이 지난 후에야 정식으로 혼례를 치루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셉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선한 인격을 가진 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여자와 이 사건을 생각하며 그저 조용히 혼인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태복음 1:19)
이 일을 생각할 때 요셉에게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별 생각을 다하지 않았겠습니까? ‘내 약혼녀인데… 신뢰의 상징이고 친밀함의 표시인데 결혼을 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니…’ 요셉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치를 떨 정도의 배신의 아픔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용납하기 어려웠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내적인 번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때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마태복음 1:20~21)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신뢰해라.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그가 아들을 낳을 텐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는 요셉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예수아’, 구약의 ‘여호수아’라는 말의 축약 형태로 쓰인 말입니다. 아주 흔한, 당대 많은 사람들이 썼던 이름이 ‘예수’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매우 대비되지 않습니까? 첫째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분장한 사탄의 말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선악과를 먹었고, 아담과 하와가 함께 범죄 속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둘째 인간인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 그의 어머니, 아버지인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외로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나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간헐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령의 사람에게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구약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건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새 사건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서로 상처를 주고, 불신하고,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그 모든 장벽들을 하나님이 깨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아, 네가 하나님을 떠나 두려움으로 탄식하며 신음하던 그 옛 시대를 이제 내가 매듭짓겠다. 인간아, 네가 사람 속에 파묻혀 있어도 외로워하던 그 시대를 이제 내가 종결시키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살펴볼 때 확인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도망가는 역사를 만들고, 거꾸로 하나님은 그 도망가는 인간을 끊임없이 찾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경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되자. 그러면 우리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역사, 그것은 오히려 두려움과 뻔뻔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인간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지막 날에 내 아들을 너희에게 파송하겠다. 그는 너희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다. 너희와 함께 잠을 잘 것이다. 너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너희와 손을 마주 잡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표시이다.” 그렇게 이 땅에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두려움을 떨쳐버려라. 이제는 네가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것이 죄일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고,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었다.” 우리의 두려움을 해결하고,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가 믿을 만한 친구로 곁에 다가오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이름은 ‘아빠’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어린아이가 “아빠!” 하고 달려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니 하나님 앞에 다 토해 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토록 가까운 존재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으로 보여주셨습니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 (요한복음 15:15)
예수님은 제자들을 앞에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친구다. 너희는 내 친구다. 너희를 사랑하고, 배반함이 없는,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그런 친구다. 너희도 나를 친구로 받으라.”
우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자유롭게 하면서 존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억압하는 건 우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우리를 위하는 친구로 다가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한 함께 있으며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생명을 가르치고, 예수님 자신을 가르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기쁜 소식을 누리고 전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까요? 잃어버렸던 나의 아버지를 내가 다시 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친구들이 나를 떠나도 예수님이 내 생명의 친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으며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혹시 욥과 같은 고난을 받고 계십니까? 욥은 어떤 고난을 받았습니까? 열 명의 자녀가 이별 인사도 없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와서는 “네가 잘못했다.”며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며 신음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욥의 고통이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다’는 것입니다. 욥은 중보자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나를 하나님과 만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중보자가 계십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토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나의 사랑하는 아바 아버지인 것을 믿고 내 고난의 현장, 아픔의 현장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이 아픔들을 우리가 말씀으로 넘어서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 시대의 고난의 현장, 슬픔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함께 나누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전하는 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