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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 온 가족이 모이는 잔치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 설입니다. 이런 명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가까이 계시든 멀리 계시든, 살아계시든 일찍 돌아가셨든 상관없이 부모님을 생각합니다. “어머니, 아버지!”하고 부르면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신 소중한 분들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생각납니다. 함께 웃고, 울고, 위로하기도 하고, 위로 받기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가족이란,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축복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가족과 가정이란 마치 우리 삶의 베이스캠프(base camp)와도 같습니다. 아침마다 이 곳을 떠나지만, 저녁이 되면 다시 오고 싶은 곳, 돌아와야 하는 본거지입니다. 특히 설날은 핵가족으로 머물던 사람들도 본래의 베이스캠프로 모여 대가족의 기쁨을 맛보는 날입니다.
또 이 날은 잔치를 벌이는 날이기도 합니다. 잔치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놀이입니다. 옛사람들은 윷놀이나 널뛰기도 하고, 연날리기 같은 민속놀이를 하며 이 날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런 놀이가 사라지다 보니 남자들끼리 모이면 돌이짓고 땡이나 고스톱 등을 합니다. 거기에 술까지 마시게 되면,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명절날 도박판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요즘 풍경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인 우리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려운 일은 없었는지, 함께 기도할 제목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명절에는 가족들도 만나고, 함께 놀이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없으면 잔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먹을 수 있다는 것,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전에는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힘들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사이는 너무 많이 먹고 마셔서 오히려 먹는 즐거움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이제 먹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아니, 먹을 힘도 없습니다.” 삶이 끝나는 순간에는 식욕이 사라지고, 입맛도 없어집니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아니, 먹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됩니다. 지금도 소화가 잘 안 되어서 음식을 먹으면 꼭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 분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잘 먹지 못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즐거움 중에 하나인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두 가지 삶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의 먹는 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먹는 태도입니다. 두 분의 먹고 마시는 태도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이 두 가지 태도 모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별 것 아닌 인물로 격하시키고 싶었던 그들에게 두 분의 먹는 문제가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거의 먹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를 귀신이 들렸다, 미쳤다 하며 공격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누가복음 7:33)
요한은 금식하기를 즐겨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에도 별 것 아닌 것들을 먹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절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태복음 3:4)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이 모습 또한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세상의 부랑아들과 한패요, 한 통속’이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에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누가복음 7:34)
세례 요한은 금욕적이고 엄숙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는 자같이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더 가깝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절식하고 절제하는 쪽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쪽에 가깝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 요한처럼 금식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금식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금식하는 흉내만 내고 있었습니다. 금식의 본래적 뜻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 지도자들의 금식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내가 얼마나 경건한지 봐라. 내가 얼마나 절제하면서 금식하는지,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지 봐라’ 내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마다 슬픈 기색을 보여주었습니다. 얼굴을 흉하게 찡그렸습니다. “내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하고 있다”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금식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금식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6)
금식은 소중한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내 실존 전체를 드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금식을 이렇게 예찬했습니다.
금식은 영혼의 식사이자 정신의 양식이고, 천사의 생명이자 과오의 소멸이다. 또한 채무의 소거이자 구원의 약이며, 은총의 근원이자 정절의 토대이다. 금식을 통해 인간은 신에게, 하나님에게 더 빨리 닿을 수 있다.
사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금식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금식을 하면, 먹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루만 금식을 해도 생각나는 것은 온통 먹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하면서 자기를 절제하고,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심을 고백하는 경험은 매우 귀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 때는 준비와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생애 중에는 금식을 하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삶이란 잔치인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 잔치의 중심에는 먹고, 마시는 것이 들어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훨씬 적극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몸과 영혼이 회복됩니다.
먹을 때는 기쁘게 먹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신 소중한 복입니다. 그렇다면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몸에 어떤 복을 가져다줄까요?
첫째,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힘을 줍니다. 성경에는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특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감한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영적인 대결을 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 바알 우상을 따르던 아합왕과 이세벨이 진노하여 엘리야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엘리야는 덜컥 두려움이 생겨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야는 로뎀 나무 밑에 앉게 됩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보니 처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쫓기는 신세인 것이 한심했습니다. 탈진하여 모든 것이 귀찮았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힘과 영적인 힘이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세요. 나 좀 죽여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항의를 하다가 로뎀 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열왕기상 19:5)
여기 하나님의 치유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사람, 절망하고, 낙담하는 사람,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설 때, 바로 이 모습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몸이 회복되도록 엘리야를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누워있지 말고, 빈둥빈둥 있지 말고 일어나서 네 앞의 음식을 먹으라고 연거푸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만지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육체가 먼저 강건해져야 되겠다. 일어나라. 먹으라. 마셔라.”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망가집니다. 마음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몸이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보신 적 있습니까? 아프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습니다. 무슨 목표를 세우기는 더더욱 싫습니다. 내 인생이 이제 끝은 아닌가 싶어 답답합니다. 이렇듯 몸이 망가지면 영혼의 근력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일어나라, 먹어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둘째, 먹고 마시는 것은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종종 하나님 나라를 잔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와서 함께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 중에서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집을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던 아들은, 먹을 것이 다 떨어지니 아버지 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본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 달려갑니다. 아들의 목을 껴안고, 얼굴에 입을 맞춥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히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겨 줍니다. 그리고는 “너는 이제 다시 내 아들이다”라고 돌아온 그를 아들의 자리로 복귀시켜 줍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맞이함의 마지막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먹고 마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23~24)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가져와서 함께 먹고 즐기자. 너는 내 아들이다. 네 육체와 네 영혼이 회복되었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잔치는 소망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서 잔치를 많이 베푸셨습니다. 누구에게 베푸셨을까요? 아무것도 없는 자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조롱거리가 되는 사람들, 비난 받는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세리였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통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세상의 찌꺼기들, 세상의 쓰레기와 같은 자들과 한패’라는 욕설입니다.
그런데 이 별명 속에 예수님의 진가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소진된 자, 자기 존재감을 잃어버린 자, 가치관을 상실한 자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면서 그들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소망을 불러일으키신 것입니다. 너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버려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이며, 너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천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복 된 자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도 그렇습니다. 허허벌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이 이대로 돌아가면 굶을 것이라 생각했던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그들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떡과 빵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다.” 잔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새 언약의 피다.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 하나님 나라에서 주신 이 기쁨의 잔치를 세상에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를 누리는 것입니다. 밥 한 숟가락을 뜰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감사함으로 먹습니다. 내가 기쁨으로 먹습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바로 그 순간에, 내 인생이 하나님과 더불어 열어가는 잔치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비밀스럽게 하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누가복음 7:35)
지혜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혜의 자녀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함께 잔치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이 설날에도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친구요,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신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삶의 내용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바로 내 것이 되듯, 우리가 예배드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내게 주신 말씀을 ‘내 것’으로 먹고 마시는 것, 이것이 곧 구원이고 생명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잔치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수고한 자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나가서도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잔치를 벌이며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잔치를 베풀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우울한 세력들, 낙심하는 마음들, 미움들, 분노들 모두 훌훌 벗어버리고, 남은 인생을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감사의 잔치를 벌이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7: 33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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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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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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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설은 온 가족이 모이는 잔치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 설입니다. 이런 명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가까이 계시든 멀리 계시든, 살아계시든 일찍 돌아가셨든 상관없이 부모님을 생각합니다. “어머니, 아버지!”하고 부르면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신 소중한 분들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생각납니다. 함께 웃고, 울고, 위로하기도 하고, 위로 받기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가족이란,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축복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가족과 가정이란 마치 우리 삶의 베이스캠프(base camp)와도 같습니다. 아침마다 이 곳을 떠나지만, 저녁이 되면 다시 오고 싶은 곳, 돌아와야 하는 본거지입니다. 특히 설날은 핵가족으로 머물던 사람들도 본래의 베이스캠프로 모여 대가족의 기쁨을 맛보는 날입니다.
또 이 날은 잔치를 벌이는 날이기도 합니다. 잔치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놀이입니다. 옛사람들은 윷놀이나 널뛰기도 하고, 연날리기 같은 민속놀이를 하며 이 날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런 놀이가 사라지다 보니 남자들끼리 모이면 돌이짓고 땡이나 고스톱 등을 합니다. 거기에 술까지 마시게 되면,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명절날 도박판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요즘 풍경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인 우리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려운 일은 없었는지, 함께 기도할 제목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명절에는 가족들도 만나고, 함께 놀이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없으면 잔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먹을 수 있다는 것,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전에는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힘들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사이는 너무 많이 먹고 마셔서 오히려 먹는 즐거움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이제 먹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아니, 먹을 힘도 없습니다.” 삶이 끝나는 순간에는 식욕이 사라지고, 입맛도 없어집니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아니, 먹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됩니다. 지금도 소화가 잘 안 되어서 음식을 먹으면 꼭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 분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잘 먹지 못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즐거움 중에 하나인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두 가지 삶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의 먹는 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먹는 태도입니다. 두 분의 먹고 마시는 태도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이 두 가지 태도 모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별 것 아닌 인물로 격하시키고 싶었던 그들에게 두 분의 먹는 문제가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거의 먹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를 귀신이 들렸다, 미쳤다 하며 공격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누가복음 7:33)
요한은 금식하기를 즐겨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에도 별 것 아닌 것들을 먹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절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태복음 3:4)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이 모습 또한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세상의 부랑아들과 한패요, 한 통속’이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에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누가복음 7:34)
세례 요한은 금욕적이고 엄숙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는 자같이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더 가깝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절식하고 절제하는 쪽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쪽에 가깝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 요한처럼 금식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금식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금식하는 흉내만 내고 있었습니다. 금식의 본래적 뜻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 지도자들의 금식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의 금식은, ‘내가 얼마나 경건한지 봐라. 내가 얼마나 절제하면서 금식하는지,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지 봐라’ 내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마다 슬픈 기색을 보여주었습니다. 얼굴을 흉하게 찡그렸습니다. “내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하고 있다”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금식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금식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6)
금식은 소중한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내 실존 전체를 드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금식을 이렇게 예찬했습니다.
금식은 영혼의 식사이자 정신의 양식이고, 천사의 생명이자 과오의 소멸이다. 또한 채무의 소거이자 구원의 약이며, 은총의 근원이자 정절의 토대이다. 금식을 통해 인간은 신에게, 하나님에게 더 빨리 닿을 수 있다.
사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금식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금식을 하면, 먹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루만 금식을 해도 생각나는 것은 온통 먹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하면서 자기를 절제하고,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심을 고백하는 경험은 매우 귀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 때는 준비와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생애 중에는 금식을 하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삶이란 잔치인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 잔치의 중심에는 먹고, 마시는 것이 들어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훨씬 적극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몸과 영혼이 회복됩니다.
먹을 때는 기쁘게 먹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신 소중한 복입니다. 그렇다면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몸에 어떤 복을 가져다줄까요?
첫째,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힘을 줍니다. 성경에는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특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감한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영적인 대결을 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 바알 우상을 따르던 아합왕과 이세벨이 진노하여 엘리야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엘리야는 덜컥 두려움이 생겨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야는 로뎀 나무 밑에 앉게 됩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보니 처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쫓기는 신세인 것이 한심했습니다. 탈진하여 모든 것이 귀찮았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힘과 영적인 힘이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세요. 나 좀 죽여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항의를 하다가 로뎀 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열왕기상 19:5)
여기 하나님의 치유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사람, 절망하고, 낙담하는 사람,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설 때, 바로 이 모습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몸이 회복되도록 엘리야를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누워있지 말고, 빈둥빈둥 있지 말고 일어나서 네 앞의 음식을 먹으라고 연거푸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만지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육체가 먼저 강건해져야 되겠다. 일어나라. 먹으라. 마셔라.”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망가집니다. 마음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몸이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보신 적 있습니까? 아프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습니다. 무슨 목표를 세우기는 더더욱 싫습니다. 내 인생이 이제 끝은 아닌가 싶어 답답합니다. 이렇듯 몸이 망가지면 영혼의 근력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일어나라, 먹어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둘째, 먹고 마시는 것은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종종 하나님 나라를 잔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와서 함께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 중에서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집을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던 아들은, 먹을 것이 다 떨어지니 아버지 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본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 달려갑니다. 아들의 목을 껴안고, 얼굴에 입을 맞춥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히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겨 줍니다. 그리고는 “너는 이제 다시 내 아들이다”라고 돌아온 그를 아들의 자리로 복귀시켜 줍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맞이함의 마지막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먹고 마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23~24)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가져와서 함께 먹고 즐기자. 너는 내 아들이다. 네 육체와 네 영혼이 회복되었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잔치는 소망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서 잔치를 많이 베푸셨습니다. 누구에게 베푸셨을까요? 아무것도 없는 자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조롱거리가 되는 사람들, 비난 받는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세리였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통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세상의 찌꺼기들, 세상의 쓰레기와 같은 자들과 한패’라는 욕설입니다.
그런데 이 별명 속에 예수님의 진가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소진된 자, 자기 존재감을 잃어버린 자, 가치관을 상실한 자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면서 그들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소망을 불러일으키신 것입니다. 너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버려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이며, 너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천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복 된 자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도 그렇습니다. 허허벌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이 이대로 돌아가면 굶을 것이라 생각했던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그들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떡과 빵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다.” 잔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새 언약의 피다.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 하나님 나라에서 주신 이 기쁨의 잔치를 세상에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를 누리는 것입니다. 밥 한 숟가락을 뜰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감사함으로 먹습니다. 내가 기쁨으로 먹습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바로 그 순간에, 내 인생이 하나님과 더불어 열어가는 잔치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비밀스럽게 하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누가복음 7:35)
지혜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혜의 자녀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함께 잔치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이 설날에도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친구요,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신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삶의 내용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바로 내 것이 되듯, 우리가 예배드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내게 주신 말씀을 ‘내 것’으로 먹고 마시는 것, 이것이 곧 구원이고 생명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잔치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수고한 자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나가서도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잔치를 벌이며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잔치를 베풀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우울한 세력들, 낙심하는 마음들, 미움들, 분노들 모두 훌훌 벗어버리고, 남은 인생을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감사의 잔치를 벌이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