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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외로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3.1절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라인가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신앙 선배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애국 열사들의 목숨을 건 삶이 이 나라를 축복의 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계청의 보고서에서도 나타났듯이 몇 년 사이, 조국에 대한 국민들의 자부심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것은 이 민족의 미래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새롭게 열린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어두운 면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높은 자살률입니다. 201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 국가입니다. 10만 명당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를 따져보자면, 독일 9명, 미국 11명, 프랑스 17명, 일본은 24명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무려 31명입니다. 독일 자살률의 3배를 넘는 수치입니다. 청소년의 자살률도 만만치 않습니다. 10만 명당 8.3명으로, 전체 자살률의 약 3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 10년 동안 청소년의 자살률이 2배나 급증했다는 것은 매우 우려해야 할 일입니다.
점점 늘어나는 청소년 자살에 대한 대책으로 2012년에는 10개월 동안 포털사이트에서 청소년들의 자살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성적과 진학문제가 19.6%, 학교 폭력이 20.5%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44.3%이라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이유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아무도 나의 문제, 내 고민과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도 이해를 못하고, 친구나 형제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외로움에 청소년들이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은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실감하는 가장 처절하고 힘든 삶의 문제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죽음이다. 살아있는 자들은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세금이다. 이 땅의 백성으로 살면서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외로움이다. 인간이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나는 혼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 ‘나는 혼자구나. 홀로 이 땅에 왔다가 결국은 홀로 인생을 끝마치는 구나’라고 깊이 깨닫게 되는 순간의 외로움,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외로움이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왜 그렇게 바쁘고, 시끄러울까요? 우리나라 사람처럼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과도하게 움직이면서, 내 삶은 매우 의미 있는 삶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나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허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음의 외로움과 공허를 바쁨으로 덮어보려는 위장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술 소비 1위 국가가 되었을까요? 그것도 독한 술, 독주 소비 세계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육체의 쾌락에 빠져들게 하는 환락가는 곳곳에까지 침투했습니다. 이것은 외로움으로부터 도피하고픈 인간의 비명이 아닐까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은 외로움입니다. 고독하고 쓸쓸하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과 감정이 우리를 황폐하게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를 순결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회심리학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별합니다.
영어에서 외로움은 loneliness입니다.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입니다. 고립되어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solitude입니다. 이것은 고독, 혹은 홀로 있음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괴롭게 하는 감정 없이 그냥 홀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기 내면을 음미하고 반성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자기 삶을 재충전할 수도 있고, 홀로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 이 두 가지는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홀로 있음을 삶을 새롭게 하는 자리로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홀로 있음의 외로움 속에서 탄식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외롭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뛰어난 인물들은 어떠할까요? 미국의 최고 정치가며 지도자로 존경받았던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비난과 공격에 직면했던 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해 남북전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나라가 분열되고, 상처 난 아픔에 대한 비난을 링컨은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링컨이 암살당하던 1865년 4월 14일 밤, 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들이 나중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주머니 속에는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라고 수를 놓은 손수건, 시골 소년들이 사용하는 주머니칼, 실로 수선한 안경 케이스, 5달러짜리 어음이 든 지갑, 그리고 가위로 오려낸 낡고 오래된 신문기사 몇 가지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오려진 신문기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링컨의 외로움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는 ‘에이브라함 링컨은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도 외로움을 달래줄 칭찬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이끄는 나라를 자랑스러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신념과 신앙으로 달려간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외로움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술가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예술가들은 대부분 ‘고독한 창조자’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고독의 터널을 통과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1796년 26살 무렵부터 청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44살이 되던 1814년, 완전히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점점 들리지 않는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던 32살 때,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플룻(flute) 소리를 듣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목동의 노래 소리를 듣는데 또 다시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이런 일들이 나를 절망으로 내몰았다. 그 절망감이 점점 깊어지면서 삶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붙잡아 준 것은 오직 나의 예술뿐이었다.”
그에게 자살 충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인 청력의 상실 때문에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었을 때, 음악을 통해서 살아납니다. 어느 베토벤의 전기 작가는 그에게 닥친 외로움의 위기가 그를 음악에만 전념하도록 하여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외롭습니까? 고독합니까? 홀로 있다는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까? 외로움,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외로움을 ‘홀로 있음’이라는 자리로 승화를 시키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속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예수님도 외로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단독자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은 힘든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비천하다고, 인간이 가야할 길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조롱하는 그 길을 예수님은 홀로 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다가온 것으로 시작합니다. 서기관은 구약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율법으로 보니, 예수님이 특별한 사람 같았습니다. ‘저 분이 지혜자가 아닐까? 예언자가 아닐까?’ 그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마태복음 8:19)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겠다고 하는 서기관을 보셨습니다. 준수하고 모범적인 서기관이었을 것입니다. 옳으면 뒤따라갈 용기가 있는 서기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시험하십니다. 그의 실존 자체를 흔들어 보시려는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 나를 따르기로 하면 무슨 상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아느냐? 네가 홀로 있음을 경험할 수 있느냐? 외로움을 넘어설 수 있느냐?” 예수님은 묻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그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태복음 8:20)
예수님은 아무것도 갖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집도 없고, 가정도 없고, 재산도 없고, 사람들에게 보호받지도 못하는 허허벌판에 던져진 존재처럼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처럼, 떠돌이처럼, 외로움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서기관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 여우를 봐라 굴이 있지 않느냐?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둥지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자기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나는 홀로 이 길을 간다.”
결국 서기관에게 이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 길을 가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포기하는 법이다. 자랑하기 전에 겸손해지는 자리까지 내려와야 된다. 네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 네가 0점부터,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 네가 외로운 자리에 들어가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예수님은 스스로 외로워지셨습니다.
신앙의 출발에는 바로 이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요동치는 이유는 이것 없이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전체이기 때문에 내가 지니고 있는 좋았던 모든 것들이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기쁨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쥐고 예수님을 따라오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조금만 없어지면 불평하고,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누가 조금이라도 가지고 간다고 생각되면 ‘아니, 어떻게 이렇게 나를 돌아보십니까!’하고 하나님께 항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모습 아닙니까?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랐는지에 대해서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주저주저했을 것입니다. 그의 지성이 막았을 것입니다. 그의 종교적인 명예가 예수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가진 것을 놓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도전하려는 그를 포기하게 했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지성인의 모습이며, 전형적인 중산층의 모습입니다. 내 손에 무언가 쥐어야 인생을 그럭저럭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자기를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 오는 고독감이 가난 중의 가난이다.” 바로 그 고독한 길을 예수님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길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것은 자기의 죄와 자기의 무능과 자기의 행위 때문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의 죄악을 위한 허물의 십자가였고, 그가 가신 길은 내가 받을 고통을 대신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야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긍휼한 마음(compassion)으로 그 고통을 만지는 사람은 치유와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치유가 시작되는 것은 고통과 일치감을 맛볼 때라는 것은 사실 역설적입니다.” 고통과 외로움이 다가올 때, 그것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긍휼에서 우러나온 연대감으로 그것을 어루만지고 대면하는 사람에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을 대면하셨습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한 연대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외로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 중의 가난을 경험하기를 자처하셨습니다. 가장 외롭고 가장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퍼하시고, 우시며, 화도 내셨습니다. 때로는 두려워하기도 하시고, 홀로 외롭게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 고난의 길, 하나님과 단절되는 외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 가운데서도 주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죄악에 대한 분노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이 갖고 있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이 갖고 있었던 외로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친구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외로움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목사에게도 외로움이 있습니다. 대통령에게도 외로움이 있습니다. 직장인에게도, 가정주부에게도 외로움이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외로움을 슬픔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자리와 시간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나만의 외로운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영혼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축복의 자리인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예배드리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맡겨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느냐? 바닥에서, 인생의 0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 네가 그동안 누렸던 명예들, 돈과 재물들, 권력들 다 내려놓고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느냐?”
이어 또 물으십니다.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한가? 정말 예수님만을 네 인생의 주인으로 삼을 수 있느냐? 그리고 예수님이 네게 복이요, 기쁨인 것을 선포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홀로 외로운 길을 가셨습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오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혹 외롭고, 탄식하게 되는 삶의 자리가 있거든 조용히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과 대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물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금 내게 주신 사명을 깨달아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 18 ~ 2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아무도 외로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3.1절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라인가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신앙 선배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애국 열사들의 목숨을 건 삶이 이 나라를 축복의 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계청의 보고서에서도 나타났듯이 몇 년 사이, 조국에 대한 국민들의 자부심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것은 이 민족의 미래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새롭게 열린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어두운 면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높은 자살률입니다. 201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 국가입니다. 10만 명당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를 따져보자면, 독일 9명, 미국 11명, 프랑스 17명, 일본은 24명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무려 31명입니다. 독일 자살률의 3배를 넘는 수치입니다. 청소년의 자살률도 만만치 않습니다. 10만 명당 8.3명으로, 전체 자살률의 약 3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 10년 동안 청소년의 자살률이 2배나 급증했다는 것은 매우 우려해야 할 일입니다.
점점 늘어나는 청소년 자살에 대한 대책으로 2012년에는 10개월 동안 포털사이트에서 청소년들의 자살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성적과 진학문제가 19.6%, 학교 폭력이 20.5%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44.3%이라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이유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아무도 나의 문제, 내 고민과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도 이해를 못하고, 친구나 형제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외로움에 청소년들이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은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실감하는 가장 처절하고 힘든 삶의 문제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죽음이다. 살아있는 자들은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세금이다. 이 땅의 백성으로 살면서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외로움이다. 인간이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나는 혼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 ‘나는 혼자구나. 홀로 이 땅에 왔다가 결국은 홀로 인생을 끝마치는 구나’라고 깊이 깨닫게 되는 순간의 외로움,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외로움이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왜 그렇게 바쁘고, 시끄러울까요? 우리나라 사람처럼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과도하게 움직이면서, 내 삶은 매우 의미 있는 삶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나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허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음의 외로움과 공허를 바쁨으로 덮어보려는 위장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술 소비 1위 국가가 되었을까요? 그것도 독한 술, 독주 소비 세계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육체의 쾌락에 빠져들게 하는 환락가는 곳곳에까지 침투했습니다. 이것은 외로움으로부터 도피하고픈 인간의 비명이 아닐까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은 외로움입니다. 고독하고 쓸쓸하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과 감정이 우리를 황폐하게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를 순결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회심리학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별합니다.
영어에서 외로움은 loneliness입니다.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입니다. 고립되어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solitude입니다. 이것은 고독, 혹은 홀로 있음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괴롭게 하는 감정 없이 그냥 홀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기 내면을 음미하고 반성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자기 삶을 재충전할 수도 있고, 홀로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 이 두 가지는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홀로 있음을 삶을 새롭게 하는 자리로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홀로 있음의 외로움 속에서 탄식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외롭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뛰어난 인물들은 어떠할까요? 미국의 최고 정치가며 지도자로 존경받았던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비난과 공격에 직면했던 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해 남북전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나라가 분열되고, 상처 난 아픔에 대한 비난을 링컨은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링컨이 암살당하던 1865년 4월 14일 밤, 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들이 나중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주머니 속에는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라고 수를 놓은 손수건, 시골 소년들이 사용하는 주머니칼, 실로 수선한 안경 케이스, 5달러짜리 어음이 든 지갑, 그리고 가위로 오려낸 낡고 오래된 신문기사 몇 가지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오려진 신문기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링컨의 외로움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는 ‘에이브라함 링컨은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도 외로움을 달래줄 칭찬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이끄는 나라를 자랑스러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신념과 신앙으로 달려간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외로움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술가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예술가들은 대부분 ‘고독한 창조자’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고독의 터널을 통과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1796년 26살 무렵부터 청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44살이 되던 1814년, 완전히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점점 들리지 않는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던 32살 때,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플룻(flute) 소리를 듣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목동의 노래 소리를 듣는데 또 다시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이런 일들이 나를 절망으로 내몰았다. 그 절망감이 점점 깊어지면서 삶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붙잡아 준 것은 오직 나의 예술뿐이었다.”
그에게 자살 충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인 청력의 상실 때문에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었을 때, 음악을 통해서 살아납니다. 어느 베토벤의 전기 작가는 그에게 닥친 외로움의 위기가 그를 음악에만 전념하도록 하여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외롭습니까? 고독합니까? 홀로 있다는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까? 외로움,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외로움을 ‘홀로 있음’이라는 자리로 승화를 시키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속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예수님도 외로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단독자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은 힘든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비천하다고, 인간이 가야할 길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조롱하는 그 길을 예수님은 홀로 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다가온 것으로 시작합니다. 서기관은 구약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율법으로 보니, 예수님이 특별한 사람 같았습니다. ‘저 분이 지혜자가 아닐까? 예언자가 아닐까?’ 그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마태복음 8:19)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겠다고 하는 서기관을 보셨습니다. 준수하고 모범적인 서기관이었을 것입니다. 옳으면 뒤따라갈 용기가 있는 서기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시험하십니다. 그의 실존 자체를 흔들어 보시려는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 나를 따르기로 하면 무슨 상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아느냐? 네가 홀로 있음을 경험할 수 있느냐? 외로움을 넘어설 수 있느냐?” 예수님은 묻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그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태복음 8:20)
예수님은 아무것도 갖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집도 없고, 가정도 없고, 재산도 없고, 사람들에게 보호받지도 못하는 허허벌판에 던져진 존재처럼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처럼, 떠돌이처럼, 외로움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서기관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 여우를 봐라 굴이 있지 않느냐?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둥지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자기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나는 홀로 이 길을 간다.”
결국 서기관에게 이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 길을 가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포기하는 법이다. 자랑하기 전에 겸손해지는 자리까지 내려와야 된다. 네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 네가 0점부터,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 네가 외로운 자리에 들어가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예수님은 스스로 외로워지셨습니다.
신앙의 출발에는 바로 이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요동치는 이유는 이것 없이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전체이기 때문에 내가 지니고 있는 좋았던 모든 것들이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기쁨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쥐고 예수님을 따라오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조금만 없어지면 불평하고,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누가 조금이라도 가지고 간다고 생각되면 ‘아니, 어떻게 이렇게 나를 돌아보십니까!’하고 하나님께 항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모습 아닙니까?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랐는지에 대해서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주저주저했을 것입니다. 그의 지성이 막았을 것입니다. 그의 종교적인 명예가 예수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가진 것을 놓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도전하려는 그를 포기하게 했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지성인의 모습이며, 전형적인 중산층의 모습입니다. 내 손에 무언가 쥐어야 인생을 그럭저럭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자기를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 오는 고독감이 가난 중의 가난이다.” 바로 그 고독한 길을 예수님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길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것은 자기의 죄와 자기의 무능과 자기의 행위 때문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의 죄악을 위한 허물의 십자가였고, 그가 가신 길은 내가 받을 고통을 대신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야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긍휼한 마음(compassion)으로 그 고통을 만지는 사람은 치유와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치유가 시작되는 것은 고통과 일치감을 맛볼 때라는 것은 사실 역설적입니다.” 고통과 외로움이 다가올 때, 그것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긍휼에서 우러나온 연대감으로 그것을 어루만지고 대면하는 사람에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을 대면하셨습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한 연대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외로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 중의 가난을 경험하기를 자처하셨습니다. 가장 외롭고 가장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퍼하시고, 우시며, 화도 내셨습니다. 때로는 두려워하기도 하시고, 홀로 외롭게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 고난의 길, 하나님과 단절되는 외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 가운데서도 주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죄악에 대한 분노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이 갖고 있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이 갖고 있었던 외로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친구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외로움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목사에게도 외로움이 있습니다. 대통령에게도 외로움이 있습니다. 직장인에게도, 가정주부에게도 외로움이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외로움을 슬픔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자리와 시간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나만의 외로운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영혼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축복의 자리인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예배드리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맡겨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느냐? 바닥에서, 인생의 0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 네가 그동안 누렸던 명예들, 돈과 재물들, 권력들 다 내려놓고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느냐?”
이어 또 물으십니다.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한가? 정말 예수님만을 네 인생의 주인으로 삼을 수 있느냐? 그리고 예수님이 네게 복이요, 기쁨인 것을 선포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홀로 외로운 길을 가셨습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오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혹 외롭고, 탄식하게 되는 삶의 자리가 있거든 조용히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과 대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물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금 내게 주신 사명을 깨달아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