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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과 비전의 성령

사도행전 2: 14 ~ 21

김지철 목사

2016.04.24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생 최고의 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성령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사건,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삶이 성령의 역사와 함께 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웠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슬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도 홀로 있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홀로 있으면 버림받은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일까요? 성경을 읽어 보면 수많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에 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나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인식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나’를 주장하실 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본래 사람을 무서워했습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인생의 가치까지 바꿀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사도행전 2:14)

여기에 나타나는 베드로는 더 이상 사람을 겁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알려줄 것이 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삶을 통제하는 매우 중요한 중심축이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물론 이것은 필요한 걱정입니다.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평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게 되면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가치도 다른 사람에 의해 정해지게 됩니다. 내 자아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지식이나 지혜가 풍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누리는 것도 별로 없던 평범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예수님은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처음에 큰소리도 쳤습니다. 그러나 쉽게 실패하고 넘어졌습니다. 어린 여종의 말 한마디에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사랑하는 예수님과 가치관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비하와 연민이 있습니다. 나도 나를 신용할 수 없다는 마음, 내가 나를 봐도 별 볼 일 없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커지면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정면으로 보는 것을 거절합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는 비겁한 자에서 용감한 자가 됐습니다. 도망가던 자가 담대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게 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깨닫자, 자신 안에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과 일행을 조롱한 것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반격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13)

“저 친구들 도대체 뭐야. 아침부터 술 취했나봐. 이상한 말을 하면서 저러고 있잖아.” 사람들은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사실을 바로잡습니다.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15)

성경에 나타난 시간은 해가 뜰 때부터 계산이 되는데, 제 삼시면 오전 9시입니다. 즉 베드로의 이 말은 아침부터 술 먹고 취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난 한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느라 아침에도 술에 취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술 문화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사랑을 표현하는 의미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면 세상의 근심걱정이 사라지기라도 하듯 무섭게 마십니다. 이것은 시대를 망하게 하는 징조 중 하나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베드로가 이렇게 담대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으니 약 두 달이 안 되었습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예전의 제 모습을 돌아봤습니다. 저는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이 늘 더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면에 시니컬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곡해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보든 ‘저 뒤에는 나쁜 의도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말로 표현하거나 행동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제 안에서 염려를 키웠고,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존재처럼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늘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서 저는 변화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밝고 따뜻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힘든 일을 만나면,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며 좌절했지만, 바뀐 후에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거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새로운 세계를 숨겨 놓으셨을 거야’라고 기대하며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이야기에도 그 안에 좋은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자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고,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또 이웃을 보는 관점도 변화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볼 때, 대부분 0점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게 되면 -10점, -30점, -50점으로 점수를 깎았습니다. 그러자 세상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참 인복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는 누군가를 만날 때 대부분 100점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면 조금 서운하거나 마음이 상해도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은 플러스에 머물게 됩니다. 관계를 이어갈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게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동생을 잃고, 나는 인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움츠러들곤 했었는데, 그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생긴 변화였습니다.
제 변화는 베드로처럼 두 달 만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시간에 걸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 성령의 역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역사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 예언의 은사를 받는 것일까요? 물론 이러한 은사를 받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인식이 바꾸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의 핵심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그가 물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가 두려움에 차 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5:10)

“베드로야, 지금까지 물고기를 낚는 데 네 인생을 보내지 않았느냐? 하지만 물고기는 네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물고기는 네 인생의 수단일 뿐이다.”
돈이 인생의 목표일까요? 명예를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까요? 권력을 갖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까요? 이러한 것들은 모두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무엇입니까?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에 관심을 두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받고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졌을까요? 복음서를 읽어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도 여전히 물고기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으면 다른 제자보다 더 큰 힘과 권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 때문에 제자들은 서로 다퉜습니다. 예수님을 옆에서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성령의 역사를 받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구나. 성령은 사랑의 영이구나. 성령은 인간을 살리는 영이구나. 성령은 인간에게 소망과 신뢰를 주는 영이구나.’ 그제야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꿈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그의 첫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메뚜기 재앙을 비롯해 기근과 가난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요엘 선지자가 등장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계시며, 인간이 회복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인용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꿈과 환상, 지혜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만남들 속에서 실망하고 낙담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새로운 비전을 주십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소중하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하늘의 꿈을 꾸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구약의 요엘서에는 ‘너희의 늙은이’가 먼저 나오고, 그 후에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젊은이가 먼저 나오고 다음에 늙은이가 나옵니다. 연령 순서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성령의 신앙은 무엇보다 ‘청년’을 요청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면서 젊은이의 신앙, 청년의 기독교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청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청년이었습니다. 바울도 청년이었습니다. 이 말은 젊은이에게만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께서 인간을 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청춘을 만드는 것이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나이든 사람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꿈을 꾸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고의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으로 살았던 인생을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점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물고기만을 추구하면서, 수단을 목표로 삼았던 인생을 사람을 목표로 하는 인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보이는 복, 물질적인 복에 집착하면서 살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복, 영적인 복, 평안의 복, 전도의 복을 귀하게 여기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21절의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사도행전 2:21)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꿈이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힘 있는 자나 힘없는 자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의 자리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길에 들어서는 구원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축복을 기억하며 삶의 목표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돈 잘 벌기 위해서입니까? 세상에서 잘나가기 위해서입니까? 세상에서 자랑하며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미래를 꿈꾸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꿈이었고, 갈릴리 어부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갈릴리 어부가 어떻게 그런 꿈을 꿀 수 있었을까요? 물고기를 잡아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에게 하나님이 성령의 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이콘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이콘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소중한 존재임을 선언하면서 이 축복의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왔습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축복을 가슴에 새기면서 인생의 목표를 새롭게 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 그래서 우리에게도 소중한 사람을 우리 삶의 목표로 삼고 남은 인생을 열어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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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 14 ~ 21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생 최고의 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성령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사건,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삶이 성령의 역사와 함께 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웠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슬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도 홀로 있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홀로 있으면 버림받은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일까요? 성경을 읽어 보면 수많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에 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나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인식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나’를 주장하실 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본래 사람을 무서워했습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인생의 가치까지 바꿀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사도행전 2:14)

여기에 나타나는 베드로는 더 이상 사람을 겁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알려줄 것이 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삶을 통제하는 매우 중요한 중심축이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물론 이것은 필요한 걱정입니다.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평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게 되면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가치도 다른 사람에 의해 정해지게 됩니다. 내 자아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지식이나 지혜가 풍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누리는 것도 별로 없던 평범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예수님은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처음에 큰소리도 쳤습니다. 그러나 쉽게 실패하고 넘어졌습니다. 어린 여종의 말 한마디에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사랑하는 예수님과 가치관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비하와 연민이 있습니다. 나도 나를 신용할 수 없다는 마음, 내가 나를 봐도 별 볼 일 없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커지면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정면으로 보는 것을 거절합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는 비겁한 자에서 용감한 자가 됐습니다. 도망가던 자가 담대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게 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깨닫자, 자신 안에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과 일행을 조롱한 것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반격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13)

“저 친구들 도대체 뭐야. 아침부터 술 취했나봐. 이상한 말을 하면서 저러고 있잖아.” 사람들은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사실을 바로잡습니다.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15)

성경에 나타난 시간은 해가 뜰 때부터 계산이 되는데, 제 삼시면 오전 9시입니다. 즉 베드로의 이 말은 아침부터 술 먹고 취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난 한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느라 아침에도 술에 취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술 문화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사랑을 표현하는 의미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면 세상의 근심걱정이 사라지기라도 하듯 무섭게 마십니다. 이것은 시대를 망하게 하는 징조 중 하나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베드로가 이렇게 담대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으니 약 두 달이 안 되었습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예전의 제 모습을 돌아봤습니다. 저는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이 늘 더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면에 시니컬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곡해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보든 ‘저 뒤에는 나쁜 의도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말로 표현하거나 행동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제 안에서 염려를 키웠고,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존재처럼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늘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서 저는 변화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밝고 따뜻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힘든 일을 만나면,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며 좌절했지만, 바뀐 후에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거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새로운 세계를 숨겨 놓으셨을 거야’라고 기대하며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이야기에도 그 안에 좋은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자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고,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또 이웃을 보는 관점도 변화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볼 때, 대부분 0점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게 되면 -10점, -30점, -50점으로 점수를 깎았습니다. 그러자 세상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참 인복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는 누군가를 만날 때 대부분 100점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면 조금 서운하거나 마음이 상해도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은 플러스에 머물게 됩니다. 관계를 이어갈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게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동생을 잃고, 나는 인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움츠러들곤 했었는데, 그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생긴 변화였습니다.
제 변화는 베드로처럼 두 달 만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시간에 걸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 성령의 역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역사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 예언의 은사를 받는 것일까요? 물론 이러한 은사를 받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인식이 바꾸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의 핵심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그가 물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가 두려움에 차 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5:10)

“베드로야, 지금까지 물고기를 낚는 데 네 인생을 보내지 않았느냐? 하지만 물고기는 네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물고기는 네 인생의 수단일 뿐이다.”
돈이 인생의 목표일까요? 명예를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까요? 권력을 갖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까요? 이러한 것들은 모두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무엇입니까?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에 관심을 두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받고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졌을까요? 복음서를 읽어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도 여전히 물고기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으면 다른 제자보다 더 큰 힘과 권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 때문에 제자들은 서로 다퉜습니다. 예수님을 옆에서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성령의 역사를 받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구나. 성령은 사랑의 영이구나. 성령은 인간을 살리는 영이구나. 성령은 인간에게 소망과 신뢰를 주는 영이구나.’ 그제야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꿈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그의 첫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메뚜기 재앙을 비롯해 기근과 가난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요엘 선지자가 등장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계시며, 인간이 회복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인용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꿈과 환상, 지혜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만남들 속에서 실망하고 낙담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새로운 비전을 주십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소중하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하늘의 꿈을 꾸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구약의 요엘서에는 ‘너희의 늙은이’가 먼저 나오고, 그 후에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젊은이가 먼저 나오고 다음에 늙은이가 나옵니다. 연령 순서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성령의 신앙은 무엇보다 ‘청년’을 요청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면서 젊은이의 신앙, 청년의 기독교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청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청년이었습니다. 바울도 청년이었습니다. 이 말은 젊은이에게만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께서 인간을 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청춘을 만드는 것이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나이든 사람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꿈을 꾸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고의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으로 살았던 인생을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점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물고기만을 추구하면서, 수단을 목표로 삼았던 인생을 사람을 목표로 하는 인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보이는 복, 물질적인 복에 집착하면서 살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복, 영적인 복, 평안의 복, 전도의 복을 귀하게 여기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21절의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사도행전 2:21)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꿈이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힘 있는 자나 힘없는 자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의 자리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길에 들어서는 구원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축복을 기억하며 삶의 목표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돈 잘 벌기 위해서입니까? 세상에서 잘나가기 위해서입니까? 세상에서 자랑하며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미래를 꿈꾸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꿈이었고, 갈릴리 어부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갈릴리 어부가 어떻게 그런 꿈을 꿀 수 있었을까요? 물고기를 잡아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에게 하나님이 성령의 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이콘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이콘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소중한 존재임을 선언하면서 이 축복의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왔습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축복을 가슴에 새기면서 인생의 목표를 새롭게 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 그래서 우리에게도 소중한 사람을 우리 삶의 목표로 삼고 남은 인생을 열어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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