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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해 본 적 있습니까?
요즘 소망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목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배드리는 교회’였고, 두 번째는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 다음 세대를 키워나가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전할 세 번째 가치와 목표는 ‘전도와 선교’ 그리고 ‘봉사와 나눔’입니다. 두 번에 걸쳐서 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신앙이란 전승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벽을 앞에 두고 도를 닦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에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복음이 내 안에 심어지면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인 것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과정이고 전승입니다.
성도님들에게 질문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전도해 본 적 있으십니까? “나는 평생 한 번도 전도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혹은 “나는 전도 훈련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전도는 전문 전도자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직 전도할 만큼 신앙이 자라나지 않았다”, “아니, 나 자신도 예수 믿기가 버거운데 어떻게 남까지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전도할 수 있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게 기쁨과 감사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전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있어도 전도할 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입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거부당하면 어떡하지? 전도한다고 사람들에게 조롱받으면 어떡하지?’ 때로는 내 삶의 모습이 부끄러워서도 망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거짓과 불의와 더러움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을 내가 아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화를 잘 내고 오래 참지 못하고 절제의 능력이 부족한데, 솔직히 예수 믿는 나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른 것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연약한 내 모습으로부터 오는 자괴감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희생의 대가를 치를 용기가 없어서 못한다고도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예수님을 믿으며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생명까지 내걸고 그 일을 감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찮아서 전도하기를 거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찮아서 성경을 안 읽고, 귀찮아서 기도하지 않고, 귀찮아서 봉사하지 않고, 귀찮아서 전도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전도하는 자도 복을 받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시간을 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 전체를 봤을 때, 엄청난 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주 이렇게 꾸준히 나가는 데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게다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가지고 옵니다. 내가 돈을 내면서 평생 이렇게 열심히 참여하는 곳이 교회 외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많은 시간과 정성과 물질의 헌신이 우리에게 있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 내 영혼이 기뻐 뛰노는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가?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싶고, 뜨겁게 예배드리며 말씀을 읽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서 용솟음치는가?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감격과 감사가 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전도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 청년부에서 남해로 여름 사역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쓴 수기인데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홀로 살고 계시는 할머니를 만나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를 만나 전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동네에 여느 어르신들처럼 당신은 나이가 너무 많아 늦었고, 자식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은 좋다는 말씀만 앵무새처럼 되뇌셨습니다. 저는 원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날만큼은 저도 모르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 영접하시고 구원받으셔야 천국 간다는 똑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고 팀원들이 지쳐 가는 것이 보이자 더 이상은 무리겠다 싶어 할 수 없이 간단히 축복 기도만 해 드리고 가려 하는데, 기도 후 눈을 뜨니 어르신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고 예수님 영접을 어떻게 하는가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영접기도를 함께 하고 나오는 모두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가 돌아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시던 그 어르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사랑하시는지 눈앞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전도를 받은 그분도 감격스러워하셨지만 더 감격한 것은 함께 기도하며 영접하는 것을 보았던 우리 청년들이었습니다.”
전도란 참 놀라운 것이어서 전도 받은 사람도 복을 받지만 전도하는 사람도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하면서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전도하는 자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들도 전도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도 전도에 무지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이것을 해야 하나?’ 하는 귀찮은 마음에 붙들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그들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담대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자기 문제도 해결하기 바빴기 때문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라간 것도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잘되고, 출세하고, 돈 버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와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섬김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고, 오로지 자신에게 있는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서 이웃이 그들의 가슴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말씀에 나타난 ‘성령의 임재’, 즉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건입니다. ‘나’밖에 모르던 이기주의자가, 이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을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성령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그냥 ‘영’이라고 하지 않고 거룩한 영, ‘성령’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성령을 보내셨습니까? 인간은 창세기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자꾸만 도망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망가는 인간을 따라오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쫓아가는 것은 너를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사탄의 종에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란다. 너를 저주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축복하기 위해서 이렇게 너를 따라가는 거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언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을 보내시고, 도망가는 인간을 품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꾸만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온 인류를 위해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연약한 자를 붙들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해서 낙담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셨던 예수님께는 어떤 한계가 있었을까요? 보이는 분이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계시면 갈릴리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계셔서 한반도에 있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이 땅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어디에 있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예수님이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임재하십니다. 이러한 역사를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교회 시대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구분들을 철폐하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영적인 혁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영적인 혁명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 동안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고 내 판단으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했지만,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심으로써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혁명인 것입니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성령님이 오셔야 예수님을 알 수 있고,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실 때 일어나는 거대한 혁명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더 큰 영적 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왔다. 이제는 죄의 종에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 마음에 확인시키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면, 곧 옛 자아의 해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악의 옛 자아, 불순종의 옛 자아, 사탄에 얽매였던 옛 자아를 깨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자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야기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입니다. 옛 자아가 해체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주인이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났다는 선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나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게 되었는가!’ 자기 인생의 혁명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주님이 주신 은혜의 자리에 들어서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은 개인의 차원에서도 역사하시지만,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아주 작은 시간의 자리에도 역사하시지만, 거대한 역사를 바꾸는 일에도 참여하십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만든 이야기인 사도행전의 사건이 이것을 보여 줍니다. 이 성령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특별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입니다. 늘 보던 사람들, 늘 볼 수 있는 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졌을 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백이십 명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들은 본래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하고는, 허무함 속에서 탄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앞으로의 삶과 생계를 걱정하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담대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모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성령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임하는 사건입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 있는 내재적인 영을 끄집어낸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성찰에 의해서 내 속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나의 바깥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받아야 할 영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펴는 이유는, 말씀 속에서 다가오시는 성령님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영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십니다.
또한 ‘그때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나서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겁먹고 비겁했던 제자들이 이제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진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증인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았다. 내가 들었다. 내가 만졌다. 내가 경험했다.” 이것을 전하는 자가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증인은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경험했다. 내가 느꼈다. 내가 보았다. 내가 살았다.” 예수님을 통해 경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할 말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할 말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그 속에 생겼습니다. 도전하는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신앙이 부모의 신앙일 때, 마치 앵무새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앙이 도약을 합니다. 어떻게 도약을 할까요? 어머니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아버지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내 신앙은 생명력을 가진 신앙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때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신앙은 삼인칭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와 당신’이라는 이인칭의 만남을 통해 역동성이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당신과 내’가 ‘우리’라는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때부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의 순간순간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제자들의 삶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한계성, 차별성들을 과감하게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먼저 지역적인 한계의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지 말고, 유대까지 넘어가고 너희가 미워하는 사마리아까지 나가라는, 세상을 향한 꿈과 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섬에서 오신 분도 있고, 북쪽에서 오신 분도 있습니다. 동쪽에서, 또는 서쪽에서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고향이나 삶의 현장은 다 다르지만, 우리는 그 경계선들을 넘어 이곳에 왔습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한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중국과 일본, 동남아와 저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미와 북미와 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은 이러한 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집에 와서 그 고기를 나눠 먹고, 또 다음 날 고기를 낚는 것밖에는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할 말이 생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 그 이유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일 자체에만 얽매였던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어떤 삶이 보람되고 의미 있는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가치관을 깨닫게 되면, 지리적인 장벽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들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중 하나가 남자와 여자의 차별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성을 깨뜨리시면서, 여자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가부장적인 구조 속에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또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이 극복되었습니다.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차별성이 무너졌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보편성과 일체성이 모든 것을 덮을 만큼 크고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극복이 무엇을 통해 주어진 것일까요? 바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랑스럽게 예수님을 따라가십시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나 자신을 열어 놓으십시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자리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크시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고, 세계를 향한 꿈과 비전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빚진 자로서,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가르쳐 줘서, 누군가가 전해 줘서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찍 예수님을 알게 된 우리는 사랑의 빚,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웃에게 복음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복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오늘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건강할 때 젊은 사람들과 여름 봉사사역이나 해외 선교사역에 참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젊은 청년들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조금 연세가 드신 분들은 이삼 년에 한 번 정도 국내외 봉사사역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도 함께하시는 구나’ 깨닫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도한 기억이 없다거나 전도한 지 오래되어서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 계십니까? 그렇다면 딱 한 사람, ‘이 사람에게 꼭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는 그 사람을 위해 오늘부터 한 달 동안 매일매일 기도하세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소원하세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 전도해 보세요. 교회에 초청하세요.
우리 중 누구도 스스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어서, 그로 인해 내 안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한 영혼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예수님을 자랑하고 전하는 복 된 교회, 복 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1: 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전도해 본 적 있습니까?
요즘 소망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목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배드리는 교회’였고, 두 번째는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 다음 세대를 키워나가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전할 세 번째 가치와 목표는 ‘전도와 선교’ 그리고 ‘봉사와 나눔’입니다. 두 번에 걸쳐서 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신앙이란 전승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벽을 앞에 두고 도를 닦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에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복음이 내 안에 심어지면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인 것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과정이고 전승입니다.
성도님들에게 질문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전도해 본 적 있으십니까? “나는 평생 한 번도 전도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혹은 “나는 전도 훈련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전도는 전문 전도자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직 전도할 만큼 신앙이 자라나지 않았다”, “아니, 나 자신도 예수 믿기가 버거운데 어떻게 남까지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전도할 수 있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게 기쁨과 감사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전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있어도 전도할 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입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거부당하면 어떡하지? 전도한다고 사람들에게 조롱받으면 어떡하지?’ 때로는 내 삶의 모습이 부끄러워서도 망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거짓과 불의와 더러움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을 내가 아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화를 잘 내고 오래 참지 못하고 절제의 능력이 부족한데, 솔직히 예수 믿는 나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른 것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연약한 내 모습으로부터 오는 자괴감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희생의 대가를 치를 용기가 없어서 못한다고도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예수님을 믿으며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생명까지 내걸고 그 일을 감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찮아서 전도하기를 거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찮아서 성경을 안 읽고, 귀찮아서 기도하지 않고, 귀찮아서 봉사하지 않고, 귀찮아서 전도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전도하는 자도 복을 받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시간을 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 전체를 봤을 때, 엄청난 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주 이렇게 꾸준히 나가는 데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게다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가지고 옵니다. 내가 돈을 내면서 평생 이렇게 열심히 참여하는 곳이 교회 외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많은 시간과 정성과 물질의 헌신이 우리에게 있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 내 영혼이 기뻐 뛰노는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가?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싶고, 뜨겁게 예배드리며 말씀을 읽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서 용솟음치는가?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감격과 감사가 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전도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 청년부에서 남해로 여름 사역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쓴 수기인데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홀로 살고 계시는 할머니를 만나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를 만나 전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동네에 여느 어르신들처럼 당신은 나이가 너무 많아 늦었고, 자식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은 좋다는 말씀만 앵무새처럼 되뇌셨습니다. 저는 원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날만큼은 저도 모르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 영접하시고 구원받으셔야 천국 간다는 똑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고 팀원들이 지쳐 가는 것이 보이자 더 이상은 무리겠다 싶어 할 수 없이 간단히 축복 기도만 해 드리고 가려 하는데, 기도 후 눈을 뜨니 어르신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고 예수님 영접을 어떻게 하는가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영접기도를 함께 하고 나오는 모두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가 돌아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시던 그 어르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사랑하시는지 눈앞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전도를 받은 그분도 감격스러워하셨지만 더 감격한 것은 함께 기도하며 영접하는 것을 보았던 우리 청년들이었습니다.”
전도란 참 놀라운 것이어서 전도 받은 사람도 복을 받지만 전도하는 사람도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하면서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전도하는 자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들도 전도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도 전도에 무지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이것을 해야 하나?’ 하는 귀찮은 마음에 붙들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그들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담대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자기 문제도 해결하기 바빴기 때문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라간 것도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잘되고, 출세하고, 돈 버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와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섬김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고, 오로지 자신에게 있는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서 이웃이 그들의 가슴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말씀에 나타난 ‘성령의 임재’, 즉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건입니다. ‘나’밖에 모르던 이기주의자가, 이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을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성령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그냥 ‘영’이라고 하지 않고 거룩한 영, ‘성령’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성령을 보내셨습니까? 인간은 창세기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자꾸만 도망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망가는 인간을 따라오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쫓아가는 것은 너를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사탄의 종에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란다. 너를 저주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축복하기 위해서 이렇게 너를 따라가는 거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언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을 보내시고, 도망가는 인간을 품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꾸만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온 인류를 위해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연약한 자를 붙들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해서 낙담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셨던 예수님께는 어떤 한계가 있었을까요? 보이는 분이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계시면 갈릴리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계셔서 한반도에 있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이 땅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어디에 있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예수님이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임재하십니다. 이러한 역사를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교회 시대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구분들을 철폐하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영적인 혁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영적인 혁명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 동안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고 내 판단으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했지만,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심으로써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혁명인 것입니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성령님이 오셔야 예수님을 알 수 있고,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실 때 일어나는 거대한 혁명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더 큰 영적 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왔다. 이제는 죄의 종에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 마음에 확인시키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면, 곧 옛 자아의 해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악의 옛 자아, 불순종의 옛 자아, 사탄에 얽매였던 옛 자아를 깨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자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야기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입니다. 옛 자아가 해체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주인이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났다는 선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나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게 되었는가!’ 자기 인생의 혁명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주님이 주신 은혜의 자리에 들어서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은 개인의 차원에서도 역사하시지만,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아주 작은 시간의 자리에도 역사하시지만, 거대한 역사를 바꾸는 일에도 참여하십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만든 이야기인 사도행전의 사건이 이것을 보여 줍니다. 이 성령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특별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입니다. 늘 보던 사람들, 늘 볼 수 있는 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졌을 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백이십 명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들은 본래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하고는, 허무함 속에서 탄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앞으로의 삶과 생계를 걱정하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담대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모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성령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임하는 사건입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 있는 내재적인 영을 끄집어낸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성찰에 의해서 내 속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나의 바깥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받아야 할 영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펴는 이유는, 말씀 속에서 다가오시는 성령님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영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십니다.
또한 ‘그때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나서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겁먹고 비겁했던 제자들이 이제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진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증인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았다. 내가 들었다. 내가 만졌다. 내가 경험했다.” 이것을 전하는 자가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증인은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경험했다. 내가 느꼈다. 내가 보았다. 내가 살았다.” 예수님을 통해 경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할 말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할 말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그 속에 생겼습니다. 도전하는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신앙이 부모의 신앙일 때, 마치 앵무새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앙이 도약을 합니다. 어떻게 도약을 할까요? 어머니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아버지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내 신앙은 생명력을 가진 신앙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때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신앙은 삼인칭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와 당신’이라는 이인칭의 만남을 통해 역동성이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당신과 내’가 ‘우리’라는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때부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의 순간순간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제자들의 삶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한계성, 차별성들을 과감하게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먼저 지역적인 한계의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지 말고, 유대까지 넘어가고 너희가 미워하는 사마리아까지 나가라는, 세상을 향한 꿈과 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섬에서 오신 분도 있고, 북쪽에서 오신 분도 있습니다. 동쪽에서, 또는 서쪽에서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고향이나 삶의 현장은 다 다르지만, 우리는 그 경계선들을 넘어 이곳에 왔습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한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중국과 일본, 동남아와 저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미와 북미와 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은 이러한 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집에 와서 그 고기를 나눠 먹고, 또 다음 날 고기를 낚는 것밖에는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할 말이 생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 그 이유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일 자체에만 얽매였던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어떤 삶이 보람되고 의미 있는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가치관을 깨닫게 되면, 지리적인 장벽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들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중 하나가 남자와 여자의 차별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성을 깨뜨리시면서, 여자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가부장적인 구조 속에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또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이 극복되었습니다.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차별성이 무너졌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보편성과 일체성이 모든 것을 덮을 만큼 크고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극복이 무엇을 통해 주어진 것일까요? 바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랑스럽게 예수님을 따라가십시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나 자신을 열어 놓으십시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자리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크시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고, 세계를 향한 꿈과 비전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빚진 자로서,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가르쳐 줘서, 누군가가 전해 줘서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찍 예수님을 알게 된 우리는 사랑의 빚,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웃에게 복음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복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오늘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건강할 때 젊은 사람들과 여름 봉사사역이나 해외 선교사역에 참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젊은 청년들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조금 연세가 드신 분들은 이삼 년에 한 번 정도 국내외 봉사사역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도 함께하시는 구나’ 깨닫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도한 기억이 없다거나 전도한 지 오래되어서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 계십니까? 그렇다면 딱 한 사람, ‘이 사람에게 꼭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는 그 사람을 위해 오늘부터 한 달 동안 매일매일 기도하세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소원하세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 전도해 보세요. 교회에 초청하세요.
우리 중 누구도 스스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어서, 그로 인해 내 안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한 영혼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예수님을 자랑하고 전하는 복 된 교회, 복 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