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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는 교회 -하나님의교회 4-

고린도전서 1: 26 ~ 31

김지철 목사

2012.10.07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한국에 온 것은 1885년입니다. 가난했던 이 나라, 세계열강 속에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이 나라에 하나님이 주신 복음과 사랑을 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아펜젤러는 27살, 언더우드는 26살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 땅의 복음화를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 한국에 그들의 젊음과 청춘을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다음은 이 땅을 바라보던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의 심정을 담고 있는 기도문입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옷을 쓰고 다니거나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이 기도문을 읽고 있으면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열정을 놓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선배들로 인해 이 땅은 하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교사들의 활동과는 별개로 우리 안에서도 신앙을 갖고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무역을 위해 중국을 왕래하다가 당시 중국에 선교사로 와있었던 로스 목사의 도움을 받아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 후 서상륜은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을 들고 가족의 고향이었던 황해도 장연에 돌아와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것이 한국의 첫 번째 교회인 소래교회입니다. 이때가 1884년이었습니다.
많은 교회사가들이 놀라고 있는 것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한국 사람이 이 땅에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민족과 함께 가는 교회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신사참배 강요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거부하며 저항했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분사회였던 당시에 양반과 쌍놈이라는 사회적 계급을 과감하게 타파했던 것도 한국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양반도, 쌍놈도, 지식인도, 무식인도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서 예배드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엄격한 남녀 구분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야했던 여성의 인권을 살려낸 것도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성경을 한글로 공부하게 하고, 여성들의 교회 내 활동을 허락하며 그들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으로 민족 교회로써의 긍지를 살려나갔기 때문에 6.25 전쟁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굳건한 신앙 가운데 조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정치라는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국 교회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아픔에 동참하였으며, 연약한 자,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병든 자의 친구가 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이 땅에 복음과 사랑의 씨앗을 심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축복은 곧 대한민국의 축복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기억해야 합니다.

소망교회는 1977년 10월에 세워졌습니다. 어느새 35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주님의 종들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교회에 헌신했기에 오늘의 소망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130년에 가까운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 보면, 올해로 35주년을 맞는 소망교회는 ‘청년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나이로만이 아니라 그 모습과 정신으로도 소망교회는 청년교회일 수 있어야 합니다. 35년을 소망교회와 함께하신, 지금은 60대, 70대, 80대가 되신 분들의 신앙의 연륜과 전통, 신앙의 복을 우리가 다음세대까지 이어가게 하려면 교회는 더욱 청년다워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청년다워진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교회가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겠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꿈과 비전, 열정과 헌신,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만 무너져도 청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망교회가 35년 동안 품어온 꿈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교회의 비전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대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하게 대접할 때,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들은 수많은 활동들을 펼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 ‘Let God be God!(하나님이 하나님 되어야 한다)’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로 돌아가기 위해 개혁운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배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예배에 대한 오해를 가집니다. 예배를 마치 하나의 공연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람객이 되어, ‘기도를 잘 했는가? 성가를 잘 부르는가? 목사는 설교를 제대로 준비했는가?’ 생각하며 감시하고 감상하듯이 예배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관람자이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관람하실까요? 바로 내가 예배드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예배를 보시면서 기뻐하기도 하시고, 슬퍼하시거나 안타깝게 여기시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하나님께 영혼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말씀듣기를 열망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지, 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에게 병 치유의 은사를 허락해 주시고, 하늘의 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가슴 뛰는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 속에 초대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신비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것들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온전히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창한 꿈을 꾸기 전에 가장 기본적인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예배 공동체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꿈과 비전입니다.

열정을 품고 헌신해야 합니다.

두 번째 청년 됨은 열정과 헌신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에 대한 떨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과 떨림을 잃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는 일곱 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중 첫 번째로 언급된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 축복받은 교회였습니다. 수고도 하고 인내도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수고했구나. 네가 땀도 흘렸구나. 네가 정통교리와 정통신앙을 지녔구나. 예수님을 위해서 오래참고 인내심도 많았구나.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교회였구나.”
하지만 그런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나치지 않으시고 날카롭게 지적하시며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네게 하나 꾸중할 것이 있는데 너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부지런히 수고하고는 있지만, 그 마음에 처음 사랑, 즉 첫사랑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상실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습관화된 신앙에 머물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 신앙의 연륜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큰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을 뽐내며 거기에 멈춰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사랑을 버린 모습입니다. 첫사랑을 버리면, 겸손을 잃고 오만해지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첫사랑을 기억하십니까? 사랑해도 사랑해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 싶은 마음, 하나님께 드려도 드려도 더 드리고 싶은 자원하는 마음이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내 속에 즐거움이 있어서 주님을 생각하면 기뻐 뛰노는 영혼의 감격을 고백하는 것이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랑, 이런 감격, 이런 설렘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까?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Laodicea) 교회를 향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중하십니다.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해라. 내 영혼의 뜨거운 기쁨으로 감당하든지 아니면 차가운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엄정하게 행해 나가든지 해라. 이처럼 미지근하면 내가 너를 토해 낼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처음 사랑의 뜨거움과 설렘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신앙은 열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처음 사랑의 뜨거운 고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니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 사랑의 기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도전과 혁신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도전과 개혁정신입니다. 가정과 직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도전이고 혁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전도이고 봉사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우리의 말과 생각, 삶의 행위들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순간,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망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향해서 한걸음씩 나아갈 수가 있을까?’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말씀 두 가지를 늘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후에 하신 말씀,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나와 같은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내가 있음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한다면, 내가 있음으로 이 가정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면, 내가 있음으로 내 직장이, 내 사업이, 내 삶의 모든 자리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 같은, 우리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내가 있음으로 그곳이 더 아름다워지고, 더 진실해지고, 더욱 선한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존재함으로 하나님께서 “보기가 참 좋구나”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또 다른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원하셨던’ 그 마음,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통치하시는 세계가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곧 도전이고 개혁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살아있고, 하나님의 진실과 사랑의 능력이 숨 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젊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갖고 살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십시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마지막에서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어떠한 때 하나님이 부르셨느냐? 별 볼 일 없을 때 부르시지 않았느냐? 아무것도 갖지 못한 연약한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너희를 부르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잘나가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미련하고 연약한 너희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어찌 너희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느냐? 모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냐?” 옛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잊고 뭔가 조금 가졌다고, 뭔가 조금 잘한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분파하고 분쟁하는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오직 주님을 자랑해라. 하나님을 자랑해라. 예수님을 자랑해라. 성령님의 역사를 자랑해라. 예수님이 지혜인 것을 자랑해라.”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옛 모습, 내가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회복할 때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 처음 사랑과 열정을 되찾을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은 낡아지나 영혼과 정신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복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다시 온전히 주님 앞에 예배드리고, 주님께서 주신 열정과 헌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처음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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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 26 ~ 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한국에 온 것은 1885년입니다. 가난했던 이 나라, 세계열강 속에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이 나라에 하나님이 주신 복음과 사랑을 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아펜젤러는 27살, 언더우드는 26살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 땅의 복음화를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 한국에 그들의 젊음과 청춘을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다음은 이 땅을 바라보던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의 심정을 담고 있는 기도문입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옷을 쓰고 다니거나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이 기도문을 읽고 있으면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열정을 놓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선배들로 인해 이 땅은 하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교사들의 활동과는 별개로 우리 안에서도 신앙을 갖고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무역을 위해 중국을 왕래하다가 당시 중국에 선교사로 와있었던 로스 목사의 도움을 받아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 후 서상륜은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을 들고 가족의 고향이었던 황해도 장연에 돌아와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것이 한국의 첫 번째 교회인 소래교회입니다. 이때가 1884년이었습니다.
많은 교회사가들이 놀라고 있는 것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한국 사람이 이 땅에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민족과 함께 가는 교회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신사참배 강요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거부하며 저항했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분사회였던 당시에 양반과 쌍놈이라는 사회적 계급을 과감하게 타파했던 것도 한국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양반도, 쌍놈도, 지식인도, 무식인도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서 예배드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엄격한 남녀 구분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야했던 여성의 인권을 살려낸 것도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성경을 한글로 공부하게 하고, 여성들의 교회 내 활동을 허락하며 그들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으로 민족 교회로써의 긍지를 살려나갔기 때문에 6.25 전쟁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굳건한 신앙 가운데 조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정치라는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국 교회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아픔에 동참하였으며, 연약한 자,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병든 자의 친구가 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이 땅에 복음과 사랑의 씨앗을 심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축복은 곧 대한민국의 축복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기억해야 합니다.

소망교회는 1977년 10월에 세워졌습니다. 어느새 35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주님의 종들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교회에 헌신했기에 오늘의 소망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130년에 가까운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 보면, 올해로 35주년을 맞는 소망교회는 ‘청년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나이로만이 아니라 그 모습과 정신으로도 소망교회는 청년교회일 수 있어야 합니다. 35년을 소망교회와 함께하신, 지금은 60대, 70대, 80대가 되신 분들의 신앙의 연륜과 전통, 신앙의 복을 우리가 다음세대까지 이어가게 하려면 교회는 더욱 청년다워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청년다워진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교회가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겠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꿈과 비전, 열정과 헌신,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만 무너져도 청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망교회가 35년 동안 품어온 꿈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교회의 비전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대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하게 대접할 때,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들은 수많은 활동들을 펼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 ‘Let God be God!(하나님이 하나님 되어야 한다)’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로 돌아가기 위해 개혁운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배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예배에 대한 오해를 가집니다. 예배를 마치 하나의 공연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람객이 되어, ‘기도를 잘 했는가? 성가를 잘 부르는가? 목사는 설교를 제대로 준비했는가?’ 생각하며 감시하고 감상하듯이 예배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관람자이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관람하실까요? 바로 내가 예배드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예배를 보시면서 기뻐하기도 하시고, 슬퍼하시거나 안타깝게 여기시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하나님께 영혼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말씀듣기를 열망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지, 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에게 병 치유의 은사를 허락해 주시고, 하늘의 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가슴 뛰는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 속에 초대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신비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것들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온전히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창한 꿈을 꾸기 전에 가장 기본적인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예배 공동체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꿈과 비전입니다.

열정을 품고 헌신해야 합니다.

두 번째 청년 됨은 열정과 헌신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에 대한 떨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과 떨림을 잃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는 일곱 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중 첫 번째로 언급된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 축복받은 교회였습니다. 수고도 하고 인내도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수고했구나. 네가 땀도 흘렸구나. 네가 정통교리와 정통신앙을 지녔구나. 예수님을 위해서 오래참고 인내심도 많았구나.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교회였구나.”
하지만 그런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나치지 않으시고 날카롭게 지적하시며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네게 하나 꾸중할 것이 있는데 너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부지런히 수고하고는 있지만, 그 마음에 처음 사랑, 즉 첫사랑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상실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습관화된 신앙에 머물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 신앙의 연륜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큰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을 뽐내며 거기에 멈춰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사랑을 버린 모습입니다. 첫사랑을 버리면, 겸손을 잃고 오만해지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첫사랑을 기억하십니까? 사랑해도 사랑해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 싶은 마음, 하나님께 드려도 드려도 더 드리고 싶은 자원하는 마음이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내 속에 즐거움이 있어서 주님을 생각하면 기뻐 뛰노는 영혼의 감격을 고백하는 것이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랑, 이런 감격, 이런 설렘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까?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Laodicea) 교회를 향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중하십니다.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해라. 내 영혼의 뜨거운 기쁨으로 감당하든지 아니면 차가운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엄정하게 행해 나가든지 해라. 이처럼 미지근하면 내가 너를 토해 낼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처음 사랑의 뜨거움과 설렘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신앙은 열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처음 사랑의 뜨거운 고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니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 사랑의 기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도전과 혁신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도전과 개혁정신입니다. 가정과 직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도전이고 혁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전도이고 봉사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우리의 말과 생각, 삶의 행위들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순간,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망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향해서 한걸음씩 나아갈 수가 있을까?’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말씀 두 가지를 늘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후에 하신 말씀,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나와 같은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내가 있음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한다면, 내가 있음으로 이 가정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면, 내가 있음으로 내 직장이, 내 사업이, 내 삶의 모든 자리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 같은, 우리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내가 있음으로 그곳이 더 아름다워지고, 더 진실해지고, 더욱 선한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존재함으로 하나님께서 “보기가 참 좋구나”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또 다른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원하셨던’ 그 마음,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통치하시는 세계가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곧 도전이고 개혁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살아있고, 하나님의 진실과 사랑의 능력이 숨 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젊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갖고 살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십시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마지막에서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어떠한 때 하나님이 부르셨느냐? 별 볼 일 없을 때 부르시지 않았느냐? 아무것도 갖지 못한 연약한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너희를 부르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잘나가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미련하고 연약한 너희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어찌 너희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느냐? 모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냐?” 옛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잊고 뭔가 조금 가졌다고, 뭔가 조금 잘한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분파하고 분쟁하는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오직 주님을 자랑해라. 하나님을 자랑해라. 예수님을 자랑해라. 성령님의 역사를 자랑해라. 예수님이 지혜인 것을 자랑해라.”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옛 모습, 내가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회복할 때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 처음 사랑과 열정을 되찾을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은 낡아지나 영혼과 정신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복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다시 온전히 주님 앞에 예배드리고, 주님께서 주신 열정과 헌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처음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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