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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시선이 가장 중요합니까?
지난주에 중고등부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소망수양관을 방문했습니다. 특별히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따로 만났습니다. 스무 명 가까운 고3 친구들이 공부하는 것을 잠시 두고 수련회에 참석한 모습이 아주 기특했습니다. 대견했습니다. 대학 입시가 며칠 남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길 줄 아는 복된 자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더 많은 고3 친구들이 온다는 소리에 기쁜 마음으로 이들과 차를 마시면서 대화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질문이 있는지 물었더니 몇몇 학생들이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는데, 그중 한 남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남의 시선을 받는 것이 늘 꺼림칙합니다. 그 시선을 너무 의식하다 보니 자꾸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데 남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그 학생에게 저는 나도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만 반대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하지?’ 하며 낙담한다고 말입니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누구의 시선을 받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자 친구의 시선을 먼저 받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합니다. 왜입니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어머니들은 아들의 이런 모습에 “이런 못된 놈!”하고 화를 낸 적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여자 친구 생겼다고 내 말은 안 듣고 여자 친구 시선을 더 신경 쓰는 거냐?” 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삶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사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가 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한다면 우리는 아마 인생의 많은 어려움들을 쉽게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 굉장한 후원자가 생기는 특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수많은 문제들에 부딪혀도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인정하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담대해지겠습니까?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시선들이 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시선 앞에 서기를 원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를 원해서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시선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갖고 있던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통해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그의 삶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율법’이라는 삶의 해석학의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이라는 살아계신 인격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관점의 중심에 서 있음을 새롭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 시대에 자신을 보내신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서 위대하시고 참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의 인생을 열어가게 됩니다.
사랑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이 나의 후견자가 되신다는 것, 아니 그분이 바로 내 아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근거이자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말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로마서 3:4)
바울의 복음은 유대 종교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8절까지 읽어 보면 네 개의 질문과 네 개의 대답이 교차하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은 유대인의 질문이고 대답은 복음 안에서의 바울의 대답입니다. 사실 바울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 질문들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그도 가지고 있었던 질문들이기도 했습니다. 유대 종교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의 복음을 듣게 된 유대인들이 ‘그것이 정말 옳은가? 그것이 맞는가?’ 묻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와 바울의 복음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의 자기주장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백성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약속의 자손의 표징인 할례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다. 더 이상 예수의 복음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방인들만 죄인이 아니다. 유대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다 연약한 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또 유대의 종교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바울을 향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바울아, 너는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네 논리에 의하면 죄가 많을수록, 죄 짓는 사람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빛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죄를 짓는 죄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옳지 않은 것 아닌가?’
이것은 마치 이런 질문과도 같습니다. 가룟 유다를 이야기하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공로자일 수 있지 않은가? 왜 가룟 유다를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하는가?”
바울은 이러한 논리는 궤변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죄는 분명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그냥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기에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죽음을 당하게 하여 모든 인간의 죄를 아들, 예수님에게 다 건네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이유로 은혜를 더 은혜 되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죄를 짓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후안무치한 생각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은혜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입자!’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더 죄를 짓자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늘 삶의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져 봤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인생의 답일까?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겨도 괜찮을까? 하나님은 정말 진리의 하나님, 참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갖고 온 삶의 질문들을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10대와 20대에는 ‘내가 누구일까?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일까? 내 꿈과 비전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내 삶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일까?’에 대해 수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0대, 40대가 되면 현실주의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러면서 도덕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까?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과 술수를 쓰며 돈과 권력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온 삶이 과연 괜찮은 것일까?’ 마음에서 양심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신앙인으로서 무거운 짐과도 같은 죄책감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50대, 60대를 넘기면서 우리는 몸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늙고 있구나. 몸이 젊을 때와는 달리 말을 듣지 않네.’ 언제부터인가 자려고 누우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쑤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이러다가 언젠가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되겠구나. 다가올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근심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것이 곧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이와 상관없이 삶의 순간순간 갖게 되는 질문이자 문제들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 삶 전체를 엄습하는 이 질문들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인생에 의미와 목표가 있는가? 둘째,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과 죄책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셋째, 고난의 문제,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를 넘어갈 대책이 있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의 해결책인가?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이신가?’
답은 오직 참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것이 인생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내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은 유명한 철학자나 위대한 사상가, 혹은 어떤 다른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내 실존이 느꼈던 허무, 그것으로 인한 방황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삶이 변화되었음을 다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 (요한복음 14:6)
이 말씀이 왜 충격적입니까? 명백하게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라고 삶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제일 처음 힘들어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굉장히 도발적이며 도전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진리를 향해서 함께 나가자. 가다 보면 그 진리에 도달할 것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라는 인격,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내가 곧 ‘길’이라는 선언입니다. I am the Way and the Truth. 삶의 방향성을 이토록 명백하게 제시하는 분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 결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까? 아니면 거절할까?’ 강력한 도전과 도발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이 말씀도 아주 강력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우선권을 바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여기저기 한 번씩 건드리며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의 우선권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생의 허무를 말하면서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아닙니까?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비워진 곳을 말씀으로 채우고 성령으로 채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그 안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자기를 비우는 것은 자기부인입니다. 하지만 비우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다른 이상한 것이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자신을 비웠으면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라는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모든 질문과 인생에서 경험하는 허무와 무의미성을 잘라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이 살 만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붙잡으면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고,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놀라운 말씀까지 주지 않으셨습니까?
두 번째로 우리는 도덕성의 문제, 바로 양심의 가책에 의한 질문을 늘 품고 있습니다. 내 속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불의, 탐욕, 정욕, 시기와 질투, 이기, 교만 등이 내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못살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넘어설 비책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짐, 육체적인 짐을 모두 예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우리가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르십니다. “다른 데로 가지 말고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영적인 짐, 정신적인 짐, 육체적인 짐, 우리를 억누르는 그 모든 짐들을 지고 예수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요청을 드러내는 많은 말씀들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절도 그중 하나입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향해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붙잡고 있는 것, 내 머리를 누르고 있는 것, 내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을 예수님께 토해내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풀어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이 세상에 도대체 어디에 또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왜 인간에게 고통이 존재하지? 왜 하나님은 고난을 허용하시지? 왜 하나님은 어려운 때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지?’
고난이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그래도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육체에 질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도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그렇게 두려워할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아도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안다면, 물론 고난 자체는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못 이겨낼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천국 잔치를 베푸신다는 것을,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그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믿는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미래를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넘어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고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세계,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천국 잔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3∼4)
오늘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이 인생이라는 책의 마지막 챕터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 챕터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러니 죽으면 인생은 끝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펴 놓으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내 인생의 다음 챕터가 있음을, 하나님이 내 인생을 그렇게 열어 주셨음을 믿고 그것을 향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게 하지 말고 현재의 위기가 나를 규정하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미래가 나를 규정하도록 마음을 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으로 믿고, 감사의 고백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챕터가 죽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아님을 압니다. 죽음 이후의 다음 챕터를 마련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님의 아들답게 딸답게 인생을 열어가겠습니다” 선포하며 살아가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3: 1 ~ 8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구의 시선이 가장 중요합니까?
지난주에 중고등부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소망수양관을 방문했습니다. 특별히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따로 만났습니다. 스무 명 가까운 고3 친구들이 공부하는 것을 잠시 두고 수련회에 참석한 모습이 아주 기특했습니다. 대견했습니다. 대학 입시가 며칠 남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길 줄 아는 복된 자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더 많은 고3 친구들이 온다는 소리에 기쁜 마음으로 이들과 차를 마시면서 대화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질문이 있는지 물었더니 몇몇 학생들이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는데, 그중 한 남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남의 시선을 받는 것이 늘 꺼림칙합니다. 그 시선을 너무 의식하다 보니 자꾸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데 남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그 학생에게 저는 나도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만 반대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하지?’ 하며 낙담한다고 말입니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누구의 시선을 받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자 친구의 시선을 먼저 받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합니다. 왜입니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어머니들은 아들의 이런 모습에 “이런 못된 놈!”하고 화를 낸 적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여자 친구 생겼다고 내 말은 안 듣고 여자 친구 시선을 더 신경 쓰는 거냐?” 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삶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사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가 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한다면 우리는 아마 인생의 많은 어려움들을 쉽게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 굉장한 후원자가 생기는 특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수많은 문제들에 부딪혀도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인정하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담대해지겠습니까?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시선들이 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시선 앞에 서기를 원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를 원해서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시선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갖고 있던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통해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그의 삶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율법’이라는 삶의 해석학의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이라는 살아계신 인격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관점의 중심에 서 있음을 새롭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 시대에 자신을 보내신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서 위대하시고 참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의 인생을 열어가게 됩니다.
사랑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이 나의 후견자가 되신다는 것, 아니 그분이 바로 내 아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근거이자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말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로마서 3:4)
바울의 복음은 유대 종교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8절까지 읽어 보면 네 개의 질문과 네 개의 대답이 교차하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은 유대인의 질문이고 대답은 복음 안에서의 바울의 대답입니다. 사실 바울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 질문들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그도 가지고 있었던 질문들이기도 했습니다. 유대 종교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의 복음을 듣게 된 유대인들이 ‘그것이 정말 옳은가? 그것이 맞는가?’ 묻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와 바울의 복음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의 자기주장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백성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약속의 자손의 표징인 할례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다. 더 이상 예수의 복음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방인들만 죄인이 아니다. 유대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다 연약한 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또 유대의 종교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바울을 향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바울아, 너는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네 논리에 의하면 죄가 많을수록, 죄 짓는 사람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빛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죄를 짓는 죄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옳지 않은 것 아닌가?’
이것은 마치 이런 질문과도 같습니다. 가룟 유다를 이야기하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공로자일 수 있지 않은가? 왜 가룟 유다를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하는가?”
바울은 이러한 논리는 궤변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죄는 분명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그냥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기에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죽음을 당하게 하여 모든 인간의 죄를 아들, 예수님에게 다 건네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이유로 은혜를 더 은혜 되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죄를 짓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후안무치한 생각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은혜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입자!’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더 죄를 짓자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늘 삶의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져 봤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인생의 답일까?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겨도 괜찮을까? 하나님은 정말 진리의 하나님, 참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갖고 온 삶의 질문들을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10대와 20대에는 ‘내가 누구일까?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일까? 내 꿈과 비전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내 삶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일까?’에 대해 수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0대, 40대가 되면 현실주의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러면서 도덕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까?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과 술수를 쓰며 돈과 권력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온 삶이 과연 괜찮은 것일까?’ 마음에서 양심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신앙인으로서 무거운 짐과도 같은 죄책감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50대, 60대를 넘기면서 우리는 몸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늙고 있구나. 몸이 젊을 때와는 달리 말을 듣지 않네.’ 언제부터인가 자려고 누우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쑤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이러다가 언젠가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되겠구나. 다가올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근심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것이 곧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이와 상관없이 삶의 순간순간 갖게 되는 질문이자 문제들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 삶 전체를 엄습하는 이 질문들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인생에 의미와 목표가 있는가? 둘째,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과 죄책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셋째, 고난의 문제,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를 넘어갈 대책이 있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의 해결책인가?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이신가?’
답은 오직 참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것이 인생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내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은 유명한 철학자나 위대한 사상가, 혹은 어떤 다른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내 실존이 느꼈던 허무, 그것으로 인한 방황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삶이 변화되었음을 다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 (요한복음 14:6)
이 말씀이 왜 충격적입니까? 명백하게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라고 삶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제일 처음 힘들어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굉장히 도발적이며 도전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진리를 향해서 함께 나가자. 가다 보면 그 진리에 도달할 것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라는 인격,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내가 곧 ‘길’이라는 선언입니다. I am the Way and the Truth. 삶의 방향성을 이토록 명백하게 제시하는 분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 결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까? 아니면 거절할까?’ 강력한 도전과 도발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이 말씀도 아주 강력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우선권을 바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여기저기 한 번씩 건드리며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의 우선권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생의 허무를 말하면서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아닙니까?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비워진 곳을 말씀으로 채우고 성령으로 채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그 안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자기를 비우는 것은 자기부인입니다. 하지만 비우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다른 이상한 것이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자신을 비웠으면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라는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모든 질문과 인생에서 경험하는 허무와 무의미성을 잘라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이 살 만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붙잡으면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고,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놀라운 말씀까지 주지 않으셨습니까?
두 번째로 우리는 도덕성의 문제, 바로 양심의 가책에 의한 질문을 늘 품고 있습니다. 내 속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불의, 탐욕, 정욕, 시기와 질투, 이기, 교만 등이 내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못살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넘어설 비책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짐, 육체적인 짐을 모두 예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우리가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르십니다. “다른 데로 가지 말고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영적인 짐, 정신적인 짐, 육체적인 짐, 우리를 억누르는 그 모든 짐들을 지고 예수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요청을 드러내는 많은 말씀들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절도 그중 하나입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향해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붙잡고 있는 것, 내 머리를 누르고 있는 것, 내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을 예수님께 토해내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풀어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이 세상에 도대체 어디에 또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왜 인간에게 고통이 존재하지? 왜 하나님은 고난을 허용하시지? 왜 하나님은 어려운 때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지?’
고난이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그래도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육체에 질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도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그렇게 두려워할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아도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안다면, 물론 고난 자체는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못 이겨낼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천국 잔치를 베푸신다는 것을,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그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믿는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미래를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넘어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고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세계,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천국 잔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3∼4)
오늘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이 인생이라는 책의 마지막 챕터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 챕터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러니 죽으면 인생은 끝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펴 놓으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내 인생의 다음 챕터가 있음을, 하나님이 내 인생을 그렇게 열어 주셨음을 믿고 그것을 향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게 하지 말고 현재의 위기가 나를 규정하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미래가 나를 규정하도록 마음을 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으로 믿고, 감사의 고백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챕터가 죽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아님을 압니다. 죽음 이후의 다음 챕터를 마련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님의 아들답게 딸답게 인생을 열어가겠습니다” 선포하며 살아가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