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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 5

김지철 목사

2008.01.20

사람들은 지배하는 힘이 아닌 온유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 중 세 번째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으며 그런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땅을 축복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을 다스리는 지도자, 통치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 환경을 주인노릇하며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안에는 온유한 자가 이 땅에 마지막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지난 20세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정치군사적인 힘을 늘리고 경제적인 번영과 풍요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가장 큰 덕목으로 강력한 힘,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그 의미가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모든 분야에 그런 힘이 필요한데, 그것은 강력한 카리스마가 주는 힘보다 더 위에 있는 부드러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힘, 신뢰의 힘이 바탕이 되는 부드러운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품격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온유한 성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 역사는 지배하는 힘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섬기는 힘, 봉사하는 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미국만큼 강력한 군사와 경제대국을 이룩한 나라는 이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라는 인류 최고의 덕목을 세계 온 국가에 수출한 나라입니다. 로마제국을 통한 평화라는 말을 라틴어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곧 ‘로마의 평화’라고 말했듯이 20세기 들어서면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곧 ‘미국의 평화’라는 말을 쓸 정도로 미국은 국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왔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계 각국으로부터 비난까지 받는 나라로 지금까지 누려왔던 번영의 모습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에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지닌 온유한 품격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온유함이 없고 사람들에게 천박함을 보이기 때문에 비판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심리는 참으로 묘한 데가 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공격적인 힘과 강력한 능력을 예찬하여 그 앞에 나가면 머리를 숙이고 아첨합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인간들은 지도자에게 더 고급스러운 품격을 요청합니다.

온유함이란 연약한 자의 덕이 아니라 강한 자의 덕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무엇이며,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온유함이란 연약한 자의 덕이라기보다는 강한 자의 덕, 지도자의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에게 온유함이 사라지면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온유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착한사람 혹은 유약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기 고집이 없고 쉽게 복종하는 사람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온유함이란 원기왕성하게 질주하는 힘을 지닌 야생마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고삐를 당기는 것에 따라서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준마를 온유함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로움,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여유로움, 많은 것을 가졌으나 겸손하고, 힘을 사용할 수 있으나 통제할 줄 아는 모습입니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힘을 조절하여서 아무 때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고 축복하는 건설의 현장에 모든 것을 사용하는 힘이 온유함입니다. 격정적으로 폭발하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힘이 온유함입니다. 거칠고 사나운 야생마가 아니라 고삐달린 야생마가 온유함입니다.
좋은 차일수록 가속 패달을 밟기만 하면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좋은 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잘 들어야 합니다. 좋은 차처럼 강력한 힘과 절제할 수 있는 힘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바로 온유함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유약하고 연약한 자가 온유를 잘못 이해하면 착한사람 콤플렉스에 빠집니다. 억지로 끌려가면서 속마음으로는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외면으로는 웃지만 내면이 썩는 것은 진정한 온유함의 모습이 아닙니다. 강인한 자가 온유하게 되면 열매를 맺고 인간관계가 유연해집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빗물이 가장 낮은 바다를 향해서 가는 것과 같이 온유한 곳을 향해서 갑니다. 썩은 물, 부패한 물, 세상의 구정물들이 다 바다로 향해 흘러가지만 그것을 끌어안은 바닷물이 그 모든 것들을 어느 순간 정화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이란 멈추어선 고정된 덕이 아니라 모세와 같은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입니다. 너무나 많이 가졌기에 겸손하고,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온유함을 지닌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함의 참된 모습입니다.
온유함이란 멈추어 선 고정된 덕이 아닙니다. 한번 온유해지면 평생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한번 온유함을 소유하면 저절로 온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이란 흘러가는 유연한 덕입니다. 매일매일 자기 삶의 긴장과 훈련을 통해서 배워야하는 덕입니다. 어쩌면 배워서 되는 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져 가슴속으로 들어와야 생깁니다.
성경에 온유함의 인물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모세가 있습니다. 성경은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 12:3)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젊고 패기만만할 때, 왕자였을 때 사용하지 않으셨을까요? 젊은 나이에 모세는 힘과 권력이 있었습니다. 전략과 사람을 사용할 줄 아는 용병술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지도자로서 갖추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한 가지가 모자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기에는 온유함이 모자랐습니다.

온유함 없는 지도자는 자기 욕심을 채웁니다.
온유함 없는 지도자는 이기적이고 교만해집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억누르고 독재를 행하고 자기자랑을 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지도자 중에 온유함이 없어서 무너진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을 가졌기에 사십년 동안 광야생활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자기 삶이 변화되고 축복 받을 수 있는 민족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자기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지도자, 온유함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민족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하나님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면서 진노하셔서 이 백성을 광야에서 멸하겠다고 할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내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입니다. 제 이름을 당신의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실지라도 이 백성을 위해서 간구하오니 이 백성을 살려주세요.”
그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가슴으로 끌어안고 기도하는 온유함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를 보면서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모세는 자기 백성을 가슴으로 안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는 투쟁과 사랑이 부딪치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태복음 11:29)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온유함을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하다는 것이 얼마나 살기 힘든 것임을 몰랐기 때문일까요? 당시 사람들의 치열하고 척박한 삶을 예수님도 목격하셨습니다. 삶을 깊이 묵상하면서 현실의 고통과 재난을 깊이 알기에 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도 산다는 것이 투쟁이며 거대한 싸움의 역사인 것을 알고 계셨고 그렇게 사시면서 온유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온유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생의 모습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면 하나는 투쟁이고 하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대한 투쟁의 역사는 사탄과의 투쟁, 악과의 투쟁, 질병과의 투쟁, 죄악과의 투쟁, 죽음과의 투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어둠의 세계를 향해서 예수님은 전적으로 그들과 싸워 나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사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귀신을 쫒아내고 억눌린 사람을 고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다시 확인시켜주신 것이었고, 이것은 곧 예수님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투쟁의 밑바탕에는 거짓과 악에 대한 투쟁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만이 생명을 이끄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삶에 전반적으로 투쟁이 걸쳐 있지만 투쟁만을 강조해서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합니다. 거칠어지고 과격한 싸움꾼이 됩니다. 반대로 투쟁 없는 사랑만 이야기하면 부드럽고 착한 것 같은데 유약한 모습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인생에는 투쟁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인품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내면적인 끊임없는 투쟁과 사랑이 인격 안에서 부딪쳐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이란 투쟁과 사랑이 부딪칠 때 생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악에 대한 분노, 인간에 대한 연민과 불쌍한 마음이 들어 있을 때 그 속에서 생겨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온유함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투쟁과 사랑의 역사 속에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지만 사랑이 투쟁보다 클 때 온유함이 나타납니다.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참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항해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함의 모습 때문입니다.

온유함이란 길들여진 야생마처럼 성령에 의해 조절되는 성품입니다.

온유함이란 길들여진 야생마처럼 자기 통제를 할 줄 아는 성품입니다. 인간은 본래 온유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성품 그 자체로는 온유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온유한 성품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령의 역사 속에 마음이 붙들림을 받았을 때 온유해집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비난받아서 자존심이 상합니다. 모욕 받고 찔림을 당하기에 온유해지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대꾸하고 싶고 부딪치고 싶습니다. 상처받은 자존심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과 같아서 온유함이 자랄 자리가 없습니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를 가슴으로 깨닫게 될 때 진정한 온유함이 우리들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건강한 자아상과 자부심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인생이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왕이 뜰로 산책을 나가 꽃과 나무들이 시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먼저 떡갈나무에게 물어보니 떡갈나무는 자신이 소나무처럼 키가 크게 자랄 수 없기 때문에 죽어간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소나무에게 물어봤더니 자신은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시들어 간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는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기에 시들고 죽어간다고 말합니다. 왕은 그 옆에 싱싱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들꽃을 발견하고 이렇게 묻습니다.
“애야,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 싱싱하게 잘 자라느냐?”
그때 들꽃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께서 저를 심으실 때 마음껏 편히 잘 자라라고 하시면서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함을 상실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애야, 너는 너란다. 너는 너대로 내가 사랑하는 존재란다. 너는 소중한 존재란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너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이처럼 격려하시고 깨닫게 해주실 때 자존감과 온유함이 생깁니다. 그때 내가 있는 자리와 환경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목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향해서 달려갈 때 온유한 자의 복이 내가 서있는 땅에 내려줄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은 온유해질 수가 없습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에 너무 쉽게 빠지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넉넉할 수가 없고 남에 대해서도 넉넉해질 수가 없습니다. 성급하고 조급한 사람은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고 남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약한 사람은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기에 자기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도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것만 챙기기 때문에 남의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함이란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내면에 열정과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 속에 나타나는 성품의 부드러움 속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할 때 생기는 성품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온유한 자를 축복해주십니다. 내가 있는 자리, 내가 주인인 자리, 내가 가는 자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땅을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신 귀한 온유함의 축복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는 주님께서 주신 온유함이 없습니다. 남의 것과 비교하여 열등감과 우월감에 쉽게 빠집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우리 안에 온유함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깨닫게 해주시고 온유함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며 내가 서있는 땅에서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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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 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사람들은 지배하는 힘이 아닌 온유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 중 세 번째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으며 그런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땅을 축복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을 다스리는 지도자, 통치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 환경을 주인노릇하며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안에는 온유한 자가 이 땅에 마지막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지난 20세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정치군사적인 힘을 늘리고 경제적인 번영과 풍요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가장 큰 덕목으로 강력한 힘,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그 의미가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모든 분야에 그런 힘이 필요한데, 그것은 강력한 카리스마가 주는 힘보다 더 위에 있는 부드러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힘, 신뢰의 힘이 바탕이 되는 부드러운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품격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온유한 성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 역사는 지배하는 힘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섬기는 힘, 봉사하는 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미국만큼 강력한 군사와 경제대국을 이룩한 나라는 이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라는 인류 최고의 덕목을 세계 온 국가에 수출한 나라입니다. 로마제국을 통한 평화라는 말을 라틴어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곧 ‘로마의 평화’라고 말했듯이 20세기 들어서면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곧 ‘미국의 평화’라는 말을 쓸 정도로 미국은 국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왔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계 각국으로부터 비난까지 받는 나라로 지금까지 누려왔던 번영의 모습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에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지닌 온유한 품격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온유함이 없고 사람들에게 천박함을 보이기 때문에 비판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심리는 참으로 묘한 데가 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공격적인 힘과 강력한 능력을 예찬하여 그 앞에 나가면 머리를 숙이고 아첨합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인간들은 지도자에게 더 고급스러운 품격을 요청합니다.

온유함이란 연약한 자의 덕이 아니라 강한 자의 덕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무엇이며,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온유함이란 연약한 자의 덕이라기보다는 강한 자의 덕, 지도자의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에게 온유함이 사라지면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온유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착한사람 혹은 유약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기 고집이 없고 쉽게 복종하는 사람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온유함이란 원기왕성하게 질주하는 힘을 지닌 야생마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고삐를 당기는 것에 따라서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준마를 온유함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로움,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여유로움, 많은 것을 가졌으나 겸손하고, 힘을 사용할 수 있으나 통제할 줄 아는 모습입니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힘을 조절하여서 아무 때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고 축복하는 건설의 현장에 모든 것을 사용하는 힘이 온유함입니다. 격정적으로 폭발하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힘이 온유함입니다. 거칠고 사나운 야생마가 아니라 고삐달린 야생마가 온유함입니다.
좋은 차일수록 가속 패달을 밟기만 하면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좋은 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잘 들어야 합니다. 좋은 차처럼 강력한 힘과 절제할 수 있는 힘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바로 온유함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유약하고 연약한 자가 온유를 잘못 이해하면 착한사람 콤플렉스에 빠집니다. 억지로 끌려가면서 속마음으로는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외면으로는 웃지만 내면이 썩는 것은 진정한 온유함의 모습이 아닙니다. 강인한 자가 온유하게 되면 열매를 맺고 인간관계가 유연해집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빗물이 가장 낮은 바다를 향해서 가는 것과 같이 온유한 곳을 향해서 갑니다. 썩은 물, 부패한 물, 세상의 구정물들이 다 바다로 향해 흘러가지만 그것을 끌어안은 바닷물이 그 모든 것들을 어느 순간 정화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이란 멈추어선 고정된 덕이 아니라 모세와 같은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입니다. 너무나 많이 가졌기에 겸손하고,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온유함을 지닌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함의 참된 모습입니다.
온유함이란 멈추어 선 고정된 덕이 아닙니다. 한번 온유해지면 평생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한번 온유함을 소유하면 저절로 온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이란 흘러가는 유연한 덕입니다. 매일매일 자기 삶의 긴장과 훈련을 통해서 배워야하는 덕입니다. 어쩌면 배워서 되는 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져 가슴속으로 들어와야 생깁니다.
성경에 온유함의 인물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모세가 있습니다. 성경은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 12:3)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젊고 패기만만할 때, 왕자였을 때 사용하지 않으셨을까요? 젊은 나이에 모세는 힘과 권력이 있었습니다. 전략과 사람을 사용할 줄 아는 용병술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지도자로서 갖추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한 가지가 모자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기에는 온유함이 모자랐습니다.

온유함 없는 지도자는 자기 욕심을 채웁니다.
온유함 없는 지도자는 이기적이고 교만해집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억누르고 독재를 행하고 자기자랑을 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지도자 중에 온유함이 없어서 무너진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을 가졌기에 사십년 동안 광야생활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자기 삶이 변화되고 축복 받을 수 있는 민족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자기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지도자, 온유함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민족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하나님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면서 진노하셔서 이 백성을 광야에서 멸하겠다고 할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내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입니다. 제 이름을 당신의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실지라도 이 백성을 위해서 간구하오니 이 백성을 살려주세요.”
그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가슴으로 끌어안고 기도하는 온유함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를 보면서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모세는 자기 백성을 가슴으로 안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는 투쟁과 사랑이 부딪치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태복음 11:29)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온유함을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하다는 것이 얼마나 살기 힘든 것임을 몰랐기 때문일까요? 당시 사람들의 치열하고 척박한 삶을 예수님도 목격하셨습니다. 삶을 깊이 묵상하면서 현실의 고통과 재난을 깊이 알기에 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도 산다는 것이 투쟁이며 거대한 싸움의 역사인 것을 알고 계셨고 그렇게 사시면서 온유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온유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생의 모습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면 하나는 투쟁이고 하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대한 투쟁의 역사는 사탄과의 투쟁, 악과의 투쟁, 질병과의 투쟁, 죄악과의 투쟁, 죽음과의 투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어둠의 세계를 향해서 예수님은 전적으로 그들과 싸워 나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사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귀신을 쫒아내고 억눌린 사람을 고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다시 확인시켜주신 것이었고, 이것은 곧 예수님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투쟁의 밑바탕에는 거짓과 악에 대한 투쟁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만이 생명을 이끄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삶에 전반적으로 투쟁이 걸쳐 있지만 투쟁만을 강조해서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합니다. 거칠어지고 과격한 싸움꾼이 됩니다. 반대로 투쟁 없는 사랑만 이야기하면 부드럽고 착한 것 같은데 유약한 모습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인생에는 투쟁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인품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내면적인 끊임없는 투쟁과 사랑이 인격 안에서 부딪쳐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이란 투쟁과 사랑이 부딪칠 때 생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악에 대한 분노, 인간에 대한 연민과 불쌍한 마음이 들어 있을 때 그 속에서 생겨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온유함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투쟁과 사랑의 역사 속에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지만 사랑이 투쟁보다 클 때 온유함이 나타납니다.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참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항해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함의 모습 때문입니다.

온유함이란 길들여진 야생마처럼 성령에 의해 조절되는 성품입니다.

온유함이란 길들여진 야생마처럼 자기 통제를 할 줄 아는 성품입니다. 인간은 본래 온유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성품 그 자체로는 온유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온유한 성품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령의 역사 속에 마음이 붙들림을 받았을 때 온유해집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비난받아서 자존심이 상합니다. 모욕 받고 찔림을 당하기에 온유해지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대꾸하고 싶고 부딪치고 싶습니다. 상처받은 자존심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과 같아서 온유함이 자랄 자리가 없습니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를 가슴으로 깨닫게 될 때 진정한 온유함이 우리들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건강한 자아상과 자부심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인생이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왕이 뜰로 산책을 나가 꽃과 나무들이 시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먼저 떡갈나무에게 물어보니 떡갈나무는 자신이 소나무처럼 키가 크게 자랄 수 없기 때문에 죽어간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소나무에게 물어봤더니 자신은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시들어 간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는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기에 시들고 죽어간다고 말합니다. 왕은 그 옆에 싱싱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들꽃을 발견하고 이렇게 묻습니다.
“애야,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 싱싱하게 잘 자라느냐?”
그때 들꽃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께서 저를 심으실 때 마음껏 편히 잘 자라라고 하시면서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함을 상실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애야, 너는 너란다. 너는 너대로 내가 사랑하는 존재란다. 너는 소중한 존재란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너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이처럼 격려하시고 깨닫게 해주실 때 자존감과 온유함이 생깁니다. 그때 내가 있는 자리와 환경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목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향해서 달려갈 때 온유한 자의 복이 내가 서있는 땅에 내려줄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은 온유해질 수가 없습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에 너무 쉽게 빠지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넉넉할 수가 없고 남에 대해서도 넉넉해질 수가 없습니다. 성급하고 조급한 사람은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고 남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약한 사람은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기에 자기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도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것만 챙기기 때문에 남의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함이란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내면에 열정과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 속에 나타나는 성품의 부드러움 속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할 때 생기는 성품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온유한 자를 축복해주십니다. 내가 있는 자리, 내가 주인인 자리, 내가 가는 자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땅을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신 귀한 온유함의 축복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는 주님께서 주신 온유함이 없습니다. 남의 것과 비교하여 열등감과 우월감에 쉽게 빠집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우리 안에 온유함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깨닫게 해주시고 온유함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며 내가 서있는 땅에서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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