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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그대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맞아. 어떻게 잘난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나? 나 같은 사람도 소중한 사람인데…’라는 생각 때문에 고맙다가도, 실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진행되는 것 같아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외모지상주의(lookism)’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모를 인생을 살아가거나 성공하는 데 제일 주요한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외모를 무시하면서는 하루도 살 수 없을 만큼 외모지상주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외모가 삶의 중요한 여러 여건들을 결정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합니다. 결혼을 하려는 모든 남자들의 첫 번째 항목이 세계적으로 동일하다고 합니다. “여자는 예뻐야 해.” 이것이 모든 남자들의 말입니다. 남자들은 더 예쁜 여자를 얻기 위해 돈과 권력을 추구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고든 팻저(Gordon Patzer)가 쓴 『LOOKS』의 부제는 ‘외모 : 상상이상의 힘’입니다. 외모가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외모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방식과 똑같이 간호사가 신생아를 돌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또한 외모는 교사가 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는 학생들을 평가하고 학점을 매기는 방식에서도 중요한 요인이다. … 외모는 법정이나 선거와 같은 중립적 지대로 알려진 영역에까지 영향력의 촉수를 뻗친다. 예를 들어 배심원들은 매력을 덜 끄는 변호사보다 이목 끄는 변호사의 주장을 좀 더 신용하는 편이다.”
예쁜 아이에게 이유식을 더 많이 주고, 외모가 출중한 학생에게 후한 점수를 주며 선거나 재판장에서도 외모가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외모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모주의의 막강한 힘이 개인이나 가족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정치적인 차원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인종주의나 성 차별도 외모주의에 기인합니다.
이러한 외모주의는 끊임없이 열등감과 우월감을 만들어냅니다. 조금 잘났다고 교만해지고, 반대로 조금 못났다고 해서 기가 죽습니다. 무엇보다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자존감마저 저하시키고 자신감도 축소시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다윗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발견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저항적인 질문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사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불공평하게 만들지 않으셨나요? 무엇보다 외모로 말이에요. 왜 어떤 사람은 키가 크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키가 작게 만드셨나요? 왜 어떤 사람은 잘생기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못생기게 만드셨나요? 그래놓고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질문을 할 만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 왕의 후임자로 세우시는 장면을 봐도 그렇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 즉 다윗의 아버지 집에 방문합니다. 그리고는 이새의 여덟 아들들을 살펴봅니다. 맏아들을 보니 아주 잘생겼습니다. 게다가 키도 컸습니다. ‘맞구나! 이 친구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 왕의 후임자구나.’ 사무엘은 확신합니다.
…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사무엘상 16:6)
그런데 곧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판단을 뒤집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니라 (사무엘상 16:7)
“잘생긴 얼굴과 큰 키에 반했느냐? 아니다. 내가 보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마음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중요한 말씀에 다시 남은 아들들을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던 마지막 아들, 다윗을 보게 됩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상 16:12)
하나님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을 자임을 사무엘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그의 외모가 아주 강력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과 내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단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곧 키, 몸매, 옷, 돈과 재물, 학벌, 사회적인 지위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가하지 말라’는 것은 ‘우선에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즉 판단의 첫 번째 항목으로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판단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외모에 속지 말고, 그 속에 진실성,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압에게서는 보지 못한 진정성을 다윗에게서는 발견하셨습니다. 단순히 키나 체격이 아니라 풍기는 이미지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름은 이후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 안에서의 엘리압과 다윗의 대화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한 인간의 내면세계는 외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진실한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품위가 있는가? 말과 행동을 일치하려고 애를 쓰는가? 시간을 잘 지키는가? 이러한 것들의 대답은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인재를 등용하는 판단 기준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습니다. 몸 신(身), 말씀 언(言), 글 서(書), 판단력을 의미하는 판(判)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외적인 것을 보지만 결국 그 사람의 내면세계로 들어갑니다. 언어의 세계, 생각의 세계, 판단력의 세계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사람을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판단은 필요합니다.
사람의 첫인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사람의 언어에서 풍겨 나오는 가치관들이 더 소중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로마서 2:1)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것에는 무척 빠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것에는 아주 느리고 게으릅니다. 남을 비판할 때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가혹하게 굽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비판할 때는 마치 솜방망이를 휘두르듯 너그럽습니다. 온갖 변명할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냅니다. 또 때로는 도식화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지. 너처럼 못된 놈과는 다르지.’ 남의 약점, 결점, 문제점을 찾는 데에는 무척 바쁩니다. 게다가 그것들을 찾아 확대 포장을 하고, 거기에 부정적인 감정과 미움의 감정을 양념처럼 뿌립니다. 그리고는 비아냥거립니다. 마치 나 혼자 재판장이 된 것처럼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이런 자리까지 올라가면 누구도 그런 비난과 조롱에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가 부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당대에 자기 자랑에 빠진 도덕주의자들일 수도 있고, 스스로의 인생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철학자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율법을 지닌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주의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이 더 가식적이라고 지적합니다. 더 위선적이며 교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실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판단과는 다른 기준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십니다.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 판단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생각하는 능력, 분별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분별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 것이 아닌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분별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아예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판단을 하되 올바르게 판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니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멈춰서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신앙은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을 강화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판단자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분별하고 내가 판단하지만,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판단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처럼 나 자신도 판단 받아야 할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가 남을 판단하느냐? 너 자신은 어떤 존재냐? 너는 네 양심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 존재냐? 너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존재냐?” 율법 조항을 613개로 나누었던 유대인들을 향해 묻는다면 이런 것입니다. “너는 이 613개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냐? 15개를 잘못한 누군가를 비난하는 자여, 너는 5개만 어겼다고 그 비난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결국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내가 조금 더 낫다며 우월성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서면 나도 연약한 존재이며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변화 받아야 할 존재임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행위나 업적, 재물, 권력, 종교, 국적, 사업 능력, 문화적 배경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면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 상태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로마서 2:5)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이것은 곧 닫힌 마음입니다. 건방진 마음입니다. 변하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을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음이 열린 자들입니다. 구하는 자고, 찾는 자며, 문을 두드리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나보다 더 큰 분, 나보다 더 옳은 분, 나보다 더 생명인 분, 곧 하나님을 향해 몸부림을 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복을 받고,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다가가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과도한 탐욕을 다 알고 계십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 더 힘 있는 것을 향해 나가면서 하나님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뒤집기’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깨닫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
이스라엘은 본래 작은 민족이 아니었습니까? 떠돌이 백성, 나그네 백성, 종 된 백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별 볼 일 없는 백성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민족으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뒤집기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하시며 연약한 자들을 감싸셨던 그것이 바로 인생의 뒤집기입니다.
성숙한 사회란 뒤집기가 가능한 사회입니다. 북한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뒤집기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평생 가난하고, 2,3대를 걸쳐 계속 가난해야만 하는 국가라면 그것은 올바른 국가가 아닙니다. 소외된 사람이 평생 소외된 채로 살아야만 하는 국가라면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국가입니다. 가난한 자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어서 다음 세대에는 상황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사회가 올바른 사회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외모에 집착하고 거기에 인생을 고정시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열등감이 많은 사람인 경우가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지적당할까봐 겁이 나서 혼자 떠드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슴이 열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좌우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그 싸움 안에는 가운데가, 중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나 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심입니다. 나라에 대한 충성이 중심, 곧 첫 번째여야 합니다. 내가 속한 당에 대한 충성은 두 번째, 세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더 중심을 두어야 하는지를 놓치면 모든 정치인들은 파당 분자가 되고 맙니다. 나와 조금만 달라도 받아드리지 못하고 정죄하며 비난하게 됩니다. 중심에 대한 생각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에게도 외모로 인한 열등감이 있을 겁니다. ‘왜 나는 키가 작지? 왜 나는 이렇게 뚱뚱하지? 내 얼굴은 내가 봐도 못생겼네’ 하는 외모적인 것에서부터 ‘왜 나는 돈이 없지? 왜 나는 사회적인 지위를 얻지 못할까?’ 등 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아픔까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이차, 삼차적인 것이란다. 제일 중요한 것은 너다. 바로 너 자신이다. 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너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 거란다.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 주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내가 갖고 있는 이 삶의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라고 말입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자괴감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지도 말고, 반대로 우월감으로 교만해지지도 말라고 말입니다. 그저 나는 하나님 안에서 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이 시간도 주님은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진정으로 예배드리러 나왔느냐?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고 있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도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이 놀라운 자존감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주님과 더불어 열어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2: 1 ~ 11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그대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맞아. 어떻게 잘난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나? 나 같은 사람도 소중한 사람인데…’라는 생각 때문에 고맙다가도, 실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진행되는 것 같아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외모지상주의(lookism)’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모를 인생을 살아가거나 성공하는 데 제일 주요한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외모를 무시하면서는 하루도 살 수 없을 만큼 외모지상주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외모가 삶의 중요한 여러 여건들을 결정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합니다. 결혼을 하려는 모든 남자들의 첫 번째 항목이 세계적으로 동일하다고 합니다. “여자는 예뻐야 해.” 이것이 모든 남자들의 말입니다. 남자들은 더 예쁜 여자를 얻기 위해 돈과 권력을 추구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고든 팻저(Gordon Patzer)가 쓴 『LOOKS』의 부제는 ‘외모 : 상상이상의 힘’입니다. 외모가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외모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방식과 똑같이 간호사가 신생아를 돌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또한 외모는 교사가 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는 학생들을 평가하고 학점을 매기는 방식에서도 중요한 요인이다. … 외모는 법정이나 선거와 같은 중립적 지대로 알려진 영역에까지 영향력의 촉수를 뻗친다. 예를 들어 배심원들은 매력을 덜 끄는 변호사보다 이목 끄는 변호사의 주장을 좀 더 신용하는 편이다.”
예쁜 아이에게 이유식을 더 많이 주고, 외모가 출중한 학생에게 후한 점수를 주며 선거나 재판장에서도 외모가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외모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모주의의 막강한 힘이 개인이나 가족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정치적인 차원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인종주의나 성 차별도 외모주의에 기인합니다.
이러한 외모주의는 끊임없이 열등감과 우월감을 만들어냅니다. 조금 잘났다고 교만해지고, 반대로 조금 못났다고 해서 기가 죽습니다. 무엇보다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자존감마저 저하시키고 자신감도 축소시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다윗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발견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저항적인 질문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사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불공평하게 만들지 않으셨나요? 무엇보다 외모로 말이에요. 왜 어떤 사람은 키가 크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키가 작게 만드셨나요? 왜 어떤 사람은 잘생기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못생기게 만드셨나요? 그래놓고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질문을 할 만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 왕의 후임자로 세우시는 장면을 봐도 그렇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 즉 다윗의 아버지 집에 방문합니다. 그리고는 이새의 여덟 아들들을 살펴봅니다. 맏아들을 보니 아주 잘생겼습니다. 게다가 키도 컸습니다. ‘맞구나! 이 친구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 왕의 후임자구나.’ 사무엘은 확신합니다.
…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사무엘상 16:6)
그런데 곧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판단을 뒤집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니라 (사무엘상 16:7)
“잘생긴 얼굴과 큰 키에 반했느냐? 아니다. 내가 보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마음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중요한 말씀에 다시 남은 아들들을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던 마지막 아들, 다윗을 보게 됩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상 16:12)
하나님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을 자임을 사무엘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그의 외모가 아주 강력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과 내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단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곧 키, 몸매, 옷, 돈과 재물, 학벌, 사회적인 지위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가하지 말라’는 것은 ‘우선에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즉 판단의 첫 번째 항목으로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판단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외모에 속지 말고, 그 속에 진실성,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압에게서는 보지 못한 진정성을 다윗에게서는 발견하셨습니다. 단순히 키나 체격이 아니라 풍기는 이미지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름은 이후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 안에서의 엘리압과 다윗의 대화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한 인간의 내면세계는 외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진실한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품위가 있는가? 말과 행동을 일치하려고 애를 쓰는가? 시간을 잘 지키는가? 이러한 것들의 대답은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인재를 등용하는 판단 기준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습니다. 몸 신(身), 말씀 언(言), 글 서(書), 판단력을 의미하는 판(判)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외적인 것을 보지만 결국 그 사람의 내면세계로 들어갑니다. 언어의 세계, 생각의 세계, 판단력의 세계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사람을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판단은 필요합니다.
사람의 첫인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사람의 언어에서 풍겨 나오는 가치관들이 더 소중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로마서 2:1)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것에는 무척 빠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것에는 아주 느리고 게으릅니다. 남을 비판할 때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가혹하게 굽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비판할 때는 마치 솜방망이를 휘두르듯 너그럽습니다. 온갖 변명할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냅니다. 또 때로는 도식화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지. 너처럼 못된 놈과는 다르지.’ 남의 약점, 결점, 문제점을 찾는 데에는 무척 바쁩니다. 게다가 그것들을 찾아 확대 포장을 하고, 거기에 부정적인 감정과 미움의 감정을 양념처럼 뿌립니다. 그리고는 비아냥거립니다. 마치 나 혼자 재판장이 된 것처럼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이런 자리까지 올라가면 누구도 그런 비난과 조롱에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가 부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당대에 자기 자랑에 빠진 도덕주의자들일 수도 있고, 스스로의 인생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철학자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율법을 지닌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주의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이 더 가식적이라고 지적합니다. 더 위선적이며 교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실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판단과는 다른 기준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십니다.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 판단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생각하는 능력, 분별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분별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 것이 아닌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분별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아예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판단을 하되 올바르게 판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니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멈춰서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신앙은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을 강화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판단자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분별하고 내가 판단하지만,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판단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처럼 나 자신도 판단 받아야 할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가 남을 판단하느냐? 너 자신은 어떤 존재냐? 너는 네 양심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 존재냐? 너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존재냐?” 율법 조항을 613개로 나누었던 유대인들을 향해 묻는다면 이런 것입니다. “너는 이 613개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냐? 15개를 잘못한 누군가를 비난하는 자여, 너는 5개만 어겼다고 그 비난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결국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내가 조금 더 낫다며 우월성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서면 나도 연약한 존재이며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변화 받아야 할 존재임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행위나 업적, 재물, 권력, 종교, 국적, 사업 능력, 문화적 배경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면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 상태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로마서 2:5)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이것은 곧 닫힌 마음입니다. 건방진 마음입니다. 변하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을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음이 열린 자들입니다. 구하는 자고, 찾는 자며, 문을 두드리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나보다 더 큰 분, 나보다 더 옳은 분, 나보다 더 생명인 분, 곧 하나님을 향해 몸부림을 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복을 받고,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다가가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과도한 탐욕을 다 알고 계십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 더 힘 있는 것을 향해 나가면서 하나님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뒤집기’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깨닫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
이스라엘은 본래 작은 민족이 아니었습니까? 떠돌이 백성, 나그네 백성, 종 된 백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별 볼 일 없는 백성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민족으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뒤집기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하시며 연약한 자들을 감싸셨던 그것이 바로 인생의 뒤집기입니다.
성숙한 사회란 뒤집기가 가능한 사회입니다. 북한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뒤집기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평생 가난하고, 2,3대를 걸쳐 계속 가난해야만 하는 국가라면 그것은 올바른 국가가 아닙니다. 소외된 사람이 평생 소외된 채로 살아야만 하는 국가라면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국가입니다. 가난한 자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어서 다음 세대에는 상황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사회가 올바른 사회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외모에 집착하고 거기에 인생을 고정시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열등감이 많은 사람인 경우가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지적당할까봐 겁이 나서 혼자 떠드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슴이 열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좌우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그 싸움 안에는 가운데가, 중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나 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심입니다. 나라에 대한 충성이 중심, 곧 첫 번째여야 합니다. 내가 속한 당에 대한 충성은 두 번째, 세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더 중심을 두어야 하는지를 놓치면 모든 정치인들은 파당 분자가 되고 맙니다. 나와 조금만 달라도 받아드리지 못하고 정죄하며 비난하게 됩니다. 중심에 대한 생각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에게도 외모로 인한 열등감이 있을 겁니다. ‘왜 나는 키가 작지? 왜 나는 이렇게 뚱뚱하지? 내 얼굴은 내가 봐도 못생겼네’ 하는 외모적인 것에서부터 ‘왜 나는 돈이 없지? 왜 나는 사회적인 지위를 얻지 못할까?’ 등 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아픔까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이차, 삼차적인 것이란다. 제일 중요한 것은 너다. 바로 너 자신이다. 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너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 거란다.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 주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내가 갖고 있는 이 삶의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라고 말입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자괴감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지도 말고, 반대로 우월감으로 교만해지지도 말라고 말입니다. 그저 나는 하나님 안에서 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이 시간도 주님은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진정으로 예배드리러 나왔느냐?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고 있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도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이 놀라운 자존감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주님과 더불어 열어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