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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미움을 풀어내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지난 주일, 용서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 적개심을 그냥 한 번 터트려 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 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고 하셨습니다. 목사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오는가, 성경에 어떻게 저런 글이 실려 있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들은 대로 한 번 해 보셨습니까?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 저주를 터트리면 놀랍게도 그것은 두 배가 됩니다. 미움을 말하면 말할수록 더 미워집니다. 분노를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분노에 붙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망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기도 속에 우리의 미움과 분노와 저주를 터트리면, 놀랍게도 그 감정은 1/2로 감소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또 이것을 한 번 더 하면 내 안에 있던 미움과 분노는 1/4로 줄어듭니다. 세 번 하면 얼마로 줄어들까요? 처음의 1/8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나를 못살게 굴었던 마음 속 미움과 화가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나를 붙잡고 있었던 분노의 집착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서 분노하면 계속해서 내 안에 분노가 나타납니다. 내가 똑같은 불평과 불만을 하고 있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원망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속에 내 불평과 원망을 집어넣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로 다가오시는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과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화나게 한 상대방을 쉽게 용서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를 하나, 둘, 셋… 이렇게 세고 있습니다. 또한 피해를 직접 입은 자만이 상대를 용서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피해를 입은 내가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스스로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여기는 것을 감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해서 남을 죽인 자들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용서해 줄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용서’라는 단어를 폄하하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값싼 용서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데… 용서를 빨리 함으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하지. 못된 행동과 악한 범죄를 용서라는 이름으로 묵인해 주는 것 아니겠어? 또 다른 악을 배양하는 위험이 존재하는 거라고!’ 이렇게 우리는 용서하지 않아야 할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해를 받은 사람이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마저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요? 그렇다면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복일까요? 왜 용서가 필요할까요? 우리 인생에서 용서는 왜 중요할까요? 피해를 입은 자도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해를 준 자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용서란 상처를 준 자나 받은 자 모두가 진정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길, 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제 속에 나 자신을 묻어 놓고 살게 됩니다. 어제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이 어제 위에서 제한이 됩니다. 내일을 향해서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어제라는 기억에 얽매여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일까요? 상처에 대한 용서 없이는 결코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용서란 무엇일까요? 죄를 용납하자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상대방이 지은 죄악을 망각하자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용서를 보면 결코 감정적, 감상적 용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악을 싫어하십니다.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악을 한 가지로 축약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거스른 죄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죄입니다. 교만과 교만이 반복되는 죄이고,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을 막아 버리는 죄입니다. 그것은 곧 불신앙의 죄이고, 다시 표현한다면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를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네가 그 죄의 결과를 지어야 한다.” 하시며 예수님이 고통 받으시는 것을 지켜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싫어하시고,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속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죄의 형벌이 죽음인 것을 스스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예수님에게 나와라.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 앞에 나오면 네 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내가 흰 눈 같이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서 우리는 용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내가 잘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로워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용서에 내가 묵묵히 동의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나쁜 놈이 과연 용서 받을 만한 자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물으면서도 절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혹독하게 징벌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불쑥불쑥 솟아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또 질문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용서받을 자격과 조건을 갖춘 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니오’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문을 외우면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라는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지만, 나부터 시작해야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내가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화해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를 억누르는 내 속의 분노로부터 해방되려면, 내가 먼저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얽어매고, 자꾸만 과거로 끌어들이고, 끊임없이 지난날의 상처로 나를 화나게 만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후회와 회개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형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자기들의 과거가 생각났습니다. ‘아, 맞아.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지…’ 형들은 위험에 처하자 지나간 일에 대해 반성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요셉이 듣게 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창세기 42:21)
“맞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 속에 빠진 것은, 생각해 보니 우리에겐 잊어버린 죄악이 있었어….” 형제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자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물론 그 어려움이 반드시 나의 죄 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때에 하나님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실존적으로 흔들어 놓으시고, 때로는 삶의 터전을 뒤흔들어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온 것이 축복인 것을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듯 내 인생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아닐까?’ 하고 후회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잘 안되면 얼마나 많이 후회를 합니까? 그러나 회개까지는 이르지 않을 때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후회란 과거 잘못에 대한 탄식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원인과 동기, 본질의 잘못이 아닌 방법론적인 잘못이라 생각하며 또 다른 계획을 세워 나가는 것은 후회입니다. 또, 내가 아니라 남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후회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내 언어와 행위의 본질과 동기가 잘못되었었구나. 생각과 판단력을 변화시켜야겠다. 남이 바뀌기 전에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해!’ 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들을 때 ‘맞아, 저것은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 나는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어요.’ 하는 마음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 새벽기도에서는 사울왕과 다윗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사울왕은 싫어하시고, 다윗은 예뻐하셨을까요? 그렇다면 왜 그러셨을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둘의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후회와 회개의 차이입니다. 사울왕은 뭐가 잘 안되면 계속 후회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고칠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다윗이 나에게 이런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후회가 아닌 회개를 합니다. ‘맞아, 내가 잘못했지. 내가 바뀌어야해. 나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이야.’ 이처럼 사울왕은 후회만 하는 왕이었고, 다윗은 회개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 그 둘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도 나타납니다. 먼저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와 베드로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잘못한 것을 후회했으나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맞아, 본질적으로 내게 문제가 있었지.’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하나님은 다시 거두셔서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냥 자기의 길을 가다가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후회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본질과 동기가 변화되어 궁극적으로 내가 변화되기를 하나님 앞에서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 번의 후회보다 단 한 번의 진정한 회개가 더 훌륭합니다. 그 한 번의 회개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자기 갱신이 일어납니다. 자기 개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 새사람 되기를 열망함으로 하나님께 내 인생을 드릴 수 있는 결단과 헌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진심을 알기 위해 일을 꾸밉니다.
요셉은 지금 이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형들이 후회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의 자루마다 먹을 양식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막내인 베냐민의 자루 속에는 요셉이 쓰던 은잔을 몰래 집어넣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형들은 ‘아, 이제 우리가 모두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요셉의 병사들에게 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그들을 향해서 호통을 칩니다.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창세기 44:4∼5)
이것은 요셉의 명령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진심을 알고 싶었습니다. 결국 형들은 붙잡혀 다시 오게 됩니다. 그때 유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유다는 동생 요셉인 줄도 모르고 과연 어떤 마음으로 자기의 형제들과 자신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44장 16절에서 34절에 걸쳐 나오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창세기 44:16)
깜짝 놀랐습니다. 자루를 뒤져보니 막냇동생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이 쓰던 은잔이 나온 것입니다. 유다는 앞장서서 변명을 합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 내셨으니, 자신들이 다 주의 노예가 되겠다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 말을 아주 강경하게 반대합니다.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을 붙잡아서 종이 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창세기 44:17)
형들의 진심은 진정한 회개였습니다.
창세기 44장은 유다의 긴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회개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다가 말하는 죄는 베냐민이 요셉의 은잔을 훔친 죄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죄를 복수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의 죄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요셉을 미워해서 그를 애굽의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의 잘못을 기억한 것입니다. 동생을 팔아 넘겼을 때 잔인하고 무자비했던 태도가 기억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동생인 베냐민마저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것에 대한 회개입니다.
둘째는, 형제간의 연대성이 생긴 것입니다. 유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형들은 은잔이 발견된 동생을 향해, “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냐? 너 혼자 종이 되라. 우리는 가겠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연대성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베냐민의 죄가 곧 자신들의 죄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베냐민 한 명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형제들 모두가 함께 이 일을 책임지겠다는,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십여 년 전 요셉을 애굽으로 팔았을 때 형들은 요셉의 부르짖음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잔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베냐민이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형들의 마음은 긍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으면서 슬퍼합니다. 베냐민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이 잘못을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유다의 긴 연설에 나타나는 ‘아버지’라는 표현입니다. 16절부터 34절까지의 연설을 읽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아버지’입니다. 무려 열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리 아버지가 너무 늙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내아들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그의 형이 있었지만 어디 갔는지 모릅니다. 찢겨 죽은 것 같습니다. 늙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도 안타까워했는데 막내아들까지 잃어버리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아버지의 생명과 이 막내아들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막내아들을 편애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를 위해 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다에게도 아들이 셋 있었습니다. 그런데 못된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들을 먼저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 아들을 먼저 땅에 묻은 아버지의 슬픔과 아픔을 유다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아들을 또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의 아픔으로 그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유다의 고백이 마지막에 이어집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세기 44:33)
“이 아이의 잘못을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내가 대신 감옥살이 하겠습니다. 내가 당신의 노예로 평생 지내겠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는 보내주십시오.” 라며 자신이 대신 고난을 받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진심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깨닫게 됩니까? 내 안의 진심을 어떻게 깨닫게 됩니까? “아내를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내놓겠다.”, “남편을 위해서 내가 모든 어려움을 당하겠다.” 이것이 아내와 남편의 진심이 나타나는 순간이 아닐까요? 아들과 딸을 위해서 부모인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하는 것을 보며 우리 자녀들이 감격하는 것도 부모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의 길을 가신 것처럼 유다가 베냐민 대신 그 길을 가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나는 후회하면서 인생을 살았는가, 아니면 진정 회개하면서 살았는가하는 것입니다. 후회만 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에 붙잡혀 있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용서는 결코 정의를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 속에 나를 맡기면서 내 속에 있는 상처와 한 맺힘을 풀어 놓고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시대에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지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시대의 아픔과 상처가 회복됩니다. 지금도 교회와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자기 삶을 내어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만큼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런 귀한 존재가 되어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주님의 귀한 아들들, 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44: 27 ~ 34
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분노와 미움을 풀어내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지난 주일, 용서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 적개심을 그냥 한 번 터트려 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 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고 하셨습니다. 목사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오는가, 성경에 어떻게 저런 글이 실려 있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들은 대로 한 번 해 보셨습니까?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 저주를 터트리면 놀랍게도 그것은 두 배가 됩니다. 미움을 말하면 말할수록 더 미워집니다. 분노를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분노에 붙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망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기도 속에 우리의 미움과 분노와 저주를 터트리면, 놀랍게도 그 감정은 1/2로 감소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또 이것을 한 번 더 하면 내 안에 있던 미움과 분노는 1/4로 줄어듭니다. 세 번 하면 얼마로 줄어들까요? 처음의 1/8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나를 못살게 굴었던 마음 속 미움과 화가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나를 붙잡고 있었던 분노의 집착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서 분노하면 계속해서 내 안에 분노가 나타납니다. 내가 똑같은 불평과 불만을 하고 있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원망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속에 내 불평과 원망을 집어넣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로 다가오시는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과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화나게 한 상대방을 쉽게 용서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를 하나, 둘, 셋… 이렇게 세고 있습니다. 또한 피해를 직접 입은 자만이 상대를 용서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피해를 입은 내가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스스로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여기는 것을 감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해서 남을 죽인 자들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용서해 줄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용서’라는 단어를 폄하하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값싼 용서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데… 용서를 빨리 함으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하지. 못된 행동과 악한 범죄를 용서라는 이름으로 묵인해 주는 것 아니겠어? 또 다른 악을 배양하는 위험이 존재하는 거라고!’ 이렇게 우리는 용서하지 않아야 할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해를 받은 사람이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마저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요? 그렇다면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복일까요? 왜 용서가 필요할까요? 우리 인생에서 용서는 왜 중요할까요? 피해를 입은 자도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해를 준 자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용서란 상처를 준 자나 받은 자 모두가 진정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길, 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제 속에 나 자신을 묻어 놓고 살게 됩니다. 어제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이 어제 위에서 제한이 됩니다. 내일을 향해서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어제라는 기억에 얽매여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일까요? 상처에 대한 용서 없이는 결코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용서란 무엇일까요? 죄를 용납하자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상대방이 지은 죄악을 망각하자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용서를 보면 결코 감정적, 감상적 용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악을 싫어하십니다.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악을 한 가지로 축약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거스른 죄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죄입니다. 교만과 교만이 반복되는 죄이고,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을 막아 버리는 죄입니다. 그것은 곧 불신앙의 죄이고, 다시 표현한다면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를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네가 그 죄의 결과를 지어야 한다.” 하시며 예수님이 고통 받으시는 것을 지켜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싫어하시고,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속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죄의 형벌이 죽음인 것을 스스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다시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예수님에게 나와라.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 앞에 나오면 네 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내가 흰 눈 같이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서 우리는 용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내가 잘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로워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용서에 내가 묵묵히 동의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나쁜 놈이 과연 용서 받을 만한 자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물으면서도 절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혹독하게 징벌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불쑥불쑥 솟아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또 질문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용서받을 자격과 조건을 갖춘 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니오’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문을 외우면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라는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지만, 나부터 시작해야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내가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화해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를 억누르는 내 속의 분노로부터 해방되려면, 내가 먼저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얽어매고, 자꾸만 과거로 끌어들이고, 끊임없이 지난날의 상처로 나를 화나게 만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후회와 회개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형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자기들의 과거가 생각났습니다. ‘아, 맞아.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지…’ 형들은 위험에 처하자 지나간 일에 대해 반성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요셉이 듣게 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창세기 42:21)
“맞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 속에 빠진 것은, 생각해 보니 우리에겐 잊어버린 죄악이 있었어….” 형제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자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물론 그 어려움이 반드시 나의 죄 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때에 하나님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실존적으로 흔들어 놓으시고, 때로는 삶의 터전을 뒤흔들어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온 것이 축복인 것을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듯 내 인생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아닐까?’ 하고 후회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잘 안되면 얼마나 많이 후회를 합니까? 그러나 회개까지는 이르지 않을 때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후회란 과거 잘못에 대한 탄식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원인과 동기, 본질의 잘못이 아닌 방법론적인 잘못이라 생각하며 또 다른 계획을 세워 나가는 것은 후회입니다. 또, 내가 아니라 남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후회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내 언어와 행위의 본질과 동기가 잘못되었었구나. 생각과 판단력을 변화시켜야겠다. 남이 바뀌기 전에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해!’ 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들을 때 ‘맞아, 저것은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 나는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어요.’ 하는 마음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 새벽기도에서는 사울왕과 다윗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사울왕은 싫어하시고, 다윗은 예뻐하셨을까요? 그렇다면 왜 그러셨을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둘의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후회와 회개의 차이입니다. 사울왕은 뭐가 잘 안되면 계속 후회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고칠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다윗이 나에게 이런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후회가 아닌 회개를 합니다. ‘맞아, 내가 잘못했지. 내가 바뀌어야해. 나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이야.’ 이처럼 사울왕은 후회만 하는 왕이었고, 다윗은 회개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 그 둘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도 나타납니다. 먼저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와 베드로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잘못한 것을 후회했으나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맞아, 본질적으로 내게 문제가 있었지.’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하나님은 다시 거두셔서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냥 자기의 길을 가다가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후회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본질과 동기가 변화되어 궁극적으로 내가 변화되기를 하나님 앞에서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 번의 후회보다 단 한 번의 진정한 회개가 더 훌륭합니다. 그 한 번의 회개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자기 갱신이 일어납니다. 자기 개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 새사람 되기를 열망함으로 하나님께 내 인생을 드릴 수 있는 결단과 헌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진심을 알기 위해 일을 꾸밉니다.
요셉은 지금 이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형들이 후회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의 자루마다 먹을 양식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막내인 베냐민의 자루 속에는 요셉이 쓰던 은잔을 몰래 집어넣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형들은 ‘아, 이제 우리가 모두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요셉의 병사들에게 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그들을 향해서 호통을 칩니다.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창세기 44:4∼5)
이것은 요셉의 명령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진심을 알고 싶었습니다. 결국 형들은 붙잡혀 다시 오게 됩니다. 그때 유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유다는 동생 요셉인 줄도 모르고 과연 어떤 마음으로 자기의 형제들과 자신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44장 16절에서 34절에 걸쳐 나오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창세기 44:16)
깜짝 놀랐습니다. 자루를 뒤져보니 막냇동생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이 쓰던 은잔이 나온 것입니다. 유다는 앞장서서 변명을 합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 내셨으니, 자신들이 다 주의 노예가 되겠다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 말을 아주 강경하게 반대합니다.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을 붙잡아서 종이 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창세기 44:17)
형들의 진심은 진정한 회개였습니다.
창세기 44장은 유다의 긴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회개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다가 말하는 죄는 베냐민이 요셉의 은잔을 훔친 죄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죄를 복수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의 죄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요셉을 미워해서 그를 애굽의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의 잘못을 기억한 것입니다. 동생을 팔아 넘겼을 때 잔인하고 무자비했던 태도가 기억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동생인 베냐민마저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것에 대한 회개입니다.
둘째는, 형제간의 연대성이 생긴 것입니다. 유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형들은 은잔이 발견된 동생을 향해, “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냐? 너 혼자 종이 되라. 우리는 가겠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연대성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베냐민의 죄가 곧 자신들의 죄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베냐민 한 명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형제들 모두가 함께 이 일을 책임지겠다는,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십여 년 전 요셉을 애굽으로 팔았을 때 형들은 요셉의 부르짖음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잔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베냐민이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형들의 마음은 긍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으면서 슬퍼합니다. 베냐민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이 잘못을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유다의 긴 연설에 나타나는 ‘아버지’라는 표현입니다. 16절부터 34절까지의 연설을 읽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아버지’입니다. 무려 열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리 아버지가 너무 늙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내아들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그의 형이 있었지만 어디 갔는지 모릅니다. 찢겨 죽은 것 같습니다. 늙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도 안타까워했는데 막내아들까지 잃어버리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아버지의 생명과 이 막내아들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막내아들을 편애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를 위해 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다에게도 아들이 셋 있었습니다. 그런데 못된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들을 먼저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 아들을 먼저 땅에 묻은 아버지의 슬픔과 아픔을 유다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아들을 또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의 아픔으로 그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유다의 고백이 마지막에 이어집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세기 44:33)
“이 아이의 잘못을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내가 대신 감옥살이 하겠습니다. 내가 당신의 노예로 평생 지내겠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는 보내주십시오.” 라며 자신이 대신 고난을 받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진심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깨닫게 됩니까? 내 안의 진심을 어떻게 깨닫게 됩니까? “아내를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내놓겠다.”, “남편을 위해서 내가 모든 어려움을 당하겠다.” 이것이 아내와 남편의 진심이 나타나는 순간이 아닐까요? 아들과 딸을 위해서 부모인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하는 것을 보며 우리 자녀들이 감격하는 것도 부모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의 길을 가신 것처럼 유다가 베냐민 대신 그 길을 가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나는 후회하면서 인생을 살았는가, 아니면 진정 회개하면서 살았는가하는 것입니다. 후회만 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에 붙잡혀 있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용서는 결코 정의를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 속에 나를 맡기면서 내 속에 있는 상처와 한 맺힘을 풀어 놓고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시대에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지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시대의 아픔과 상처가 회복됩니다. 지금도 교회와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자기 삶을 내어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만큼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런 귀한 존재가 되어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주님의 귀한 아들들, 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