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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레의 아들 : 야고보 – 예수님의 제자들 7 –

누가복음 9: 51 ~ 56

김지철 목사

2014.09.07

‘우레의 아들’은, 예수님이 지어주신 별명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모두 별명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별명을 가진 이들은 단 세 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리고 그 별명은 예수님이 직접 지어 주셨습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마가복음 3:16∼17)

시몬에게 주신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은 칭찬 같습니다. 그런데 ‘우레의 아들’, 즉 천둥의 아들은 칭찬인지 꾸중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왜 우레의 아들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기질이나 말, 행동을 보시면서 별명을 붙이셨습니다. “너희의 모습을 보니 참 불 같구나. 내가 너희의 이름을 우레의 아들, 천둥의 아들이라 하겠다.” 번개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과격함과 격렬한 성품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목소리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레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더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 이런 이름을 붙이실 때 예수님의 표정은 어떠셨을까요? “이 못된 놈들!” 하는 화난 표정이셨을까요, 아니면 미소를 짓고 계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후자일 것 같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님의 분노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와 요한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칭처럼 아주 위험하고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이제 마지막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시면서 결단하시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겠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방민족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당시 유대인들이 불결하다고 여기는 장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곳을 통과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순례자가 자신들의 마을로 지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을이 무슨 동네북인가? 왜 자꾸만 우리 마을로 올라가는가!’ 그들은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반감을 그대로 표출하며 예수님의 일행을 막아섭니다. 바로 이때, 이것을 보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욱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욕설도 퍼부었을 것입니다. “이 나쁜 놈들아!”하며 크게 소리도 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누가복음 9:54∼55)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능력을 그들에게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시면 멸망할 족속들인데 지금 멸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은 똑같이 격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격노의 이유가, 내용이 달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체면이 구겨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미움이 사람의 생명을 다치게 한다는 사실에 화를 내셨습니다. 즉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화와 화가 부딪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화를 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생각이 아주 뚜렷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구나. 이제 곧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가시겠구나. 정치적 메시야로 등극하시게 되는구나!’ 그들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메시야의 길을 막는 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 못하는 민족, 예언적 능력이 없는 민족은 싹 쓸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냐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의 기질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갖고 있는 이러한 기질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들의 어머니의 기질이 극성스러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꼭 닮았습니다.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모든 어머니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이 조금 더 심하여 아들들에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여성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 바로 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였습니다. 성경은 그 이름을 살로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자리까지 그녀가 함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에 호감이 가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마음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바로 마태복음 20장 20절 때문입니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태복음 20:20∼21)

어머니에게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명예욕도, 권력욕도 있었습니다. 아마 아들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직접 부탁하는 것이 힘들지 모른다. 어떻게 선생님께 그렇게 부탁하겠니? 내가 대신 부탁하마.”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사실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이런 어머니들이 무언가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 이야기를 건네던 때에, 예수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집도 없었고, 가정도 없었고, 정치적인 후원자나 배경도 없었습니다. 법적인 보호 장치도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조금 있었을 뿐 그야말로 절망적인 현실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된다는, 왕중의 왕이 된다는, 마지막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머니에게 있던 마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아들을 위해서는 스스로 다 버릴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내 아들을 위해서는 체면이 깎이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입니다. 또 이런 어머니들의 눈에는 아들의 약점은 안 보입니다. 내 아들이 최고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 소개를 한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어머니의 이러한 화급함이 아들의 화급함과 맞물려 있습니다. 어머니의 극성스런 모습이 아들의 극성스런 모습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극성스런 어머니의 부탁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태복음 20:22)

예수님은 그들이 걱정되셨습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영광의 자리, 메시야의 자리에 가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승리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가장 낮은 자리, 고난 받는 자리에 가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힐 죽음의 자리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는 이 길에 너희가 동행할 수 있겠느냐? 내가 마실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러나 예수님의 이 물음을 깊게 깨닫지 못한 어머니와 두 아들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야고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충직한 제자가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스데반이라면, 사도들 중에 첫 번째 순교자는 야고보입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잔을 함께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똑같은 성격을 지녔던 요한은 반대로 100세가 넘게 살았습니다.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보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는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였고, 요한은 살아있는 순교자였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인생에 참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는 것이 나쁜 것일까요? 아니면 좋은 것일까요? 화를 내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삶이 건강하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감정 상태일 때, 화를 내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화를 안 내고 꾹꾹 참아두면 병이 생깁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병으로, 세계의학협회사전에도 들어 있는 병이 있습니다. 화를 안 내서 생기는 병, 화병입니다. 우리말로는 그 앞에 한 자를 더해 울화병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화가 나도 그저 참아서 스트레스성 장애를 일으키는 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화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성가시다. 약오르다. 짜증나다. 분하다. 뿔나다. 화나다. 성나다. 골나다. 노하다. 발분하다. 용심나다(제주방언), 분개하다. 분격하다. 분노하다. 격분하다. 대로하다. 격노하다. 광분하다. 거기에다가 천인공로하다. 이토록 다양한 표현들이 있는 것은 어쩌면 화를 참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는 낼 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선을 넘고,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요즘 그동안 내지 못했던 화를 다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복잡하고 시끄러워진 것입니다. 절제가 안 되고 멈추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화를 내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화를 내는 것의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자기가 살아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협을 느낄 때,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시대의 어르신들은 부부로 살면서 누가 화를 냈습니까? 아버지만 화를 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그냥 속으로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젠 어머니들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이 초긴장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언제 아내가 나를 내팽개칠까?’하고 걱정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필요하면 화를 내야 합니다. 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를 힘들게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모습입니다. 건강한 감성입니다. 내 속에 있는 화와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아야 서로의 삶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하게 표현하지 않고 화를 잘못된 방향으로 풀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화를 내지 않고 속으로만 쌓으면 속이 상하고 파괴되어 결국 건강마저 잃게 됩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진 이들이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남이 뭐라고 해도 화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속을 들여다보면 화가 충만합니다. 그러니 속으로 얼마나 곪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아프겠습니까? 그로 인해 얼마나 자존감이 깨어지겠습니까?
화를 표현하는 것에 더 이상 불편함 마음을 갖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화는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를 표현할 줄 아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다만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노를 사용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화를 내면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화를 낸다는 것은 유대감이 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걸음을 거절하고 모독하니 마치 자신들을 모독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멀리 있는 어떤 사람이 누구에겐가 맞으면 뭐라고 합니까? “아, 그 사람 참 안 됐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맞은 사람이 내 아들이고 내 딸입니다. 그것을 알고도 “참 안 되었네.”하고 말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나쁜 놈아! 내 아들을 때리다니… 내 딸을 때리다니!” 하고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가 분노하게 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속한 자로서 잘못된 것과 악한 것, 불의에 대한 분노는 소중한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분노가 지금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사마리아 사람들이 멸하는 것을 예수님이 동의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원하시죠? 예수님도 속으로는 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싹 없애버리는 것을 좋아하시죠? 예수님을 거절하는 저런 못된 놈들은 혼이 나야지요!’ 나의 생각이 곧 예수님의 생각일 것이라고 넘겨잡고는 예수님께 요청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못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을 만나면 가슴 속에 막 화가 솟구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을 베푸셔서 저 나쁜 사람을 처치해 달라고, 꼴 좀 보지 않게 해달라고 구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시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에 멀쩡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팔뚝 하나, 다리 하나 잘라지면 누가 자기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아주 보기가 싫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 가다가 넘어지지도 않나요?’ 그렇게 물어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너의 그 마음으로 너에게 손을 댔다면 너는 이미 바스라졌을 거야. 너는 먼지처럼 됐을 거야. 너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거야.”
지금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욕해도 하나님은 나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시네요!” 라며 오만방자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고 사랑으로 참으시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렇게 화 잘 내는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은 왜 그렇게 늘 데리고 다니셨을까 궁금해집니다. 예수님을 보면, 다른 제자들보다 이 별난 제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움직이실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 이상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다른 눈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분노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하면, 그 안에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를 안 내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열정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냥 지나가면 되는 거다 생각하며 내버려 둡니다. 분노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란, 열정의 다른 표현이며 무관심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분노해야 내가 바뀝니다. 게으름에 분노해야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매일 술독에 빠져 있는 모습에 분노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남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노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계속 변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란 저항의 표시입니다. 분노란 새로운 창조의 표시입니다. 또한 변화의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를 품으십시오.

예수님은 미움과 자신의 욕망 때문에 분노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보시며 그들의 분노를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위해서 분노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해서 분노해라. 미움 때문에 저주하며 분노하지 말고 사랑 때문에 긍휼히 여기며 분노해라. 너의 탐욕 때문에 분노하지 말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분노해라.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통분히 여겨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분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이처럼 승화되어야 합니다. 폭력적 분노가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랑과 긍휼의 분노가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에게는 이런 에피소드가 남아있습니다. 역사학자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것으로 야보고가 참수형을 당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AD 44년경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첫 번째로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를 재판장에 끌고 온 간수는 야고보를 핍박하고 채찍질하다가 결국 그에게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에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화낸 것, 잘못한 것을 용서할 수 있겠소? 나도 당신과 함께 이 길을 가고 싶소.” 야고보는 “그대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참수형을 당했다는 전설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잘못된 것과 악한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분노,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는 역사를 바꿉니다. 거기에서 생명의 사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귀한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훼파되는 것을 아파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계 속에 있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분노할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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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 51 ~ 56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우레의 아들’은, 예수님이 지어주신 별명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모두 별명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별명을 가진 이들은 단 세 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리고 그 별명은 예수님이 직접 지어 주셨습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마가복음 3:16∼17)

시몬에게 주신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은 칭찬 같습니다. 그런데 ‘우레의 아들’, 즉 천둥의 아들은 칭찬인지 꾸중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왜 우레의 아들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기질이나 말, 행동을 보시면서 별명을 붙이셨습니다. “너희의 모습을 보니 참 불 같구나. 내가 너희의 이름을 우레의 아들, 천둥의 아들이라 하겠다.” 번개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과격함과 격렬한 성품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목소리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레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더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 이런 이름을 붙이실 때 예수님의 표정은 어떠셨을까요? “이 못된 놈들!” 하는 화난 표정이셨을까요, 아니면 미소를 짓고 계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후자일 것 같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님의 분노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와 요한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칭처럼 아주 위험하고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이제 마지막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시면서 결단하시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겠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방민족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당시 유대인들이 불결하다고 여기는 장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곳을 통과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순례자가 자신들의 마을로 지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을이 무슨 동네북인가? 왜 자꾸만 우리 마을로 올라가는가!’ 그들은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반감을 그대로 표출하며 예수님의 일행을 막아섭니다. 바로 이때, 이것을 보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욱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욕설도 퍼부었을 것입니다. “이 나쁜 놈들아!”하며 크게 소리도 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누가복음 9:54∼55)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능력을 그들에게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시면 멸망할 족속들인데 지금 멸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은 똑같이 격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격노의 이유가, 내용이 달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체면이 구겨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미움이 사람의 생명을 다치게 한다는 사실에 화를 내셨습니다. 즉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화와 화가 부딪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화를 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생각이 아주 뚜렷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구나. 이제 곧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가시겠구나. 정치적 메시야로 등극하시게 되는구나!’ 그들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메시야의 길을 막는 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 못하는 민족, 예언적 능력이 없는 민족은 싹 쓸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냐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의 기질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갖고 있는 이러한 기질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들의 어머니의 기질이 극성스러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꼭 닮았습니다.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모든 어머니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이 조금 더 심하여 아들들에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여성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 바로 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였습니다. 성경은 그 이름을 살로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자리까지 그녀가 함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에 호감이 가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마음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바로 마태복음 20장 20절 때문입니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태복음 20:20∼21)

어머니에게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명예욕도, 권력욕도 있었습니다. 아마 아들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직접 부탁하는 것이 힘들지 모른다. 어떻게 선생님께 그렇게 부탁하겠니? 내가 대신 부탁하마.”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사실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이런 어머니들이 무언가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 이야기를 건네던 때에, 예수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집도 없었고, 가정도 없었고, 정치적인 후원자나 배경도 없었습니다. 법적인 보호 장치도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조금 있었을 뿐 그야말로 절망적인 현실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된다는, 왕중의 왕이 된다는, 마지막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머니에게 있던 마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아들을 위해서는 스스로 다 버릴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내 아들을 위해서는 체면이 깎이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입니다. 또 이런 어머니들의 눈에는 아들의 약점은 안 보입니다. 내 아들이 최고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 소개를 한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어머니의 이러한 화급함이 아들의 화급함과 맞물려 있습니다. 어머니의 극성스런 모습이 아들의 극성스런 모습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극성스런 어머니의 부탁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태복음 20:22)

예수님은 그들이 걱정되셨습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영광의 자리, 메시야의 자리에 가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승리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가장 낮은 자리, 고난 받는 자리에 가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힐 죽음의 자리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는 이 길에 너희가 동행할 수 있겠느냐? 내가 마실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러나 예수님의 이 물음을 깊게 깨닫지 못한 어머니와 두 아들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야고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충직한 제자가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스데반이라면, 사도들 중에 첫 번째 순교자는 야고보입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잔을 함께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똑같은 성격을 지녔던 요한은 반대로 100세가 넘게 살았습니다.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보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는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였고, 요한은 살아있는 순교자였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인생에 참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는 것이 나쁜 것일까요? 아니면 좋은 것일까요? 화를 내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삶이 건강하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감정 상태일 때, 화를 내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화를 안 내고 꾹꾹 참아두면 병이 생깁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병으로, 세계의학협회사전에도 들어 있는 병이 있습니다. 화를 안 내서 생기는 병, 화병입니다. 우리말로는 그 앞에 한 자를 더해 울화병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화가 나도 그저 참아서 스트레스성 장애를 일으키는 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화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성가시다. 약오르다. 짜증나다. 분하다. 뿔나다. 화나다. 성나다. 골나다. 노하다. 발분하다. 용심나다(제주방언), 분개하다. 분격하다. 분노하다. 격분하다. 대로하다. 격노하다. 광분하다. 거기에다가 천인공로하다. 이토록 다양한 표현들이 있는 것은 어쩌면 화를 참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는 낼 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선을 넘고,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요즘 그동안 내지 못했던 화를 다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복잡하고 시끄러워진 것입니다. 절제가 안 되고 멈추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화를 내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화를 내는 것의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자기가 살아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협을 느낄 때,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시대의 어르신들은 부부로 살면서 누가 화를 냈습니까? 아버지만 화를 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그냥 속으로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젠 어머니들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이 초긴장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언제 아내가 나를 내팽개칠까?’하고 걱정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필요하면 화를 내야 합니다. 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를 힘들게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모습입니다. 건강한 감성입니다. 내 속에 있는 화와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아야 서로의 삶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하게 표현하지 않고 화를 잘못된 방향으로 풀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화를 내지 않고 속으로만 쌓으면 속이 상하고 파괴되어 결국 건강마저 잃게 됩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진 이들이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남이 뭐라고 해도 화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속을 들여다보면 화가 충만합니다. 그러니 속으로 얼마나 곪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아프겠습니까? 그로 인해 얼마나 자존감이 깨어지겠습니까?
화를 표현하는 것에 더 이상 불편함 마음을 갖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화는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를 표현할 줄 아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다만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노를 사용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화를 내면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화를 낸다는 것은 유대감이 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걸음을 거절하고 모독하니 마치 자신들을 모독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멀리 있는 어떤 사람이 누구에겐가 맞으면 뭐라고 합니까? “아, 그 사람 참 안 됐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맞은 사람이 내 아들이고 내 딸입니다. 그것을 알고도 “참 안 되었네.”하고 말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나쁜 놈아! 내 아들을 때리다니… 내 딸을 때리다니!” 하고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가 분노하게 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속한 자로서 잘못된 것과 악한 것, 불의에 대한 분노는 소중한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분노가 지금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사마리아 사람들이 멸하는 것을 예수님이 동의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원하시죠? 예수님도 속으로는 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싹 없애버리는 것을 좋아하시죠? 예수님을 거절하는 저런 못된 놈들은 혼이 나야지요!’ 나의 생각이 곧 예수님의 생각일 것이라고 넘겨잡고는 예수님께 요청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못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을 만나면 가슴 속에 막 화가 솟구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을 베푸셔서 저 나쁜 사람을 처치해 달라고, 꼴 좀 보지 않게 해달라고 구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시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에 멀쩡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팔뚝 하나, 다리 하나 잘라지면 누가 자기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아주 보기가 싫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 가다가 넘어지지도 않나요?’ 그렇게 물어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너의 그 마음으로 너에게 손을 댔다면 너는 이미 바스라졌을 거야. 너는 먼지처럼 됐을 거야. 너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거야.”
지금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욕해도 하나님은 나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시네요!” 라며 오만방자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고 사랑으로 참으시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렇게 화 잘 내는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은 왜 그렇게 늘 데리고 다니셨을까 궁금해집니다. 예수님을 보면, 다른 제자들보다 이 별난 제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움직이실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 이상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다른 눈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분노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하면, 그 안에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를 안 내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열정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냥 지나가면 되는 거다 생각하며 내버려 둡니다. 분노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란, 열정의 다른 표현이며 무관심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분노해야 내가 바뀝니다. 게으름에 분노해야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매일 술독에 빠져 있는 모습에 분노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남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노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계속 변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란 저항의 표시입니다. 분노란 새로운 창조의 표시입니다. 또한 변화의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를 품으십시오.

예수님은 미움과 자신의 욕망 때문에 분노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보시며 그들의 분노를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위해서 분노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해서 분노해라. 미움 때문에 저주하며 분노하지 말고 사랑 때문에 긍휼히 여기며 분노해라. 너의 탐욕 때문에 분노하지 말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분노해라.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통분히 여겨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분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이처럼 승화되어야 합니다. 폭력적 분노가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랑과 긍휼의 분노가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에게는 이런 에피소드가 남아있습니다. 역사학자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것으로 야보고가 참수형을 당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AD 44년경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첫 번째로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를 재판장에 끌고 온 간수는 야고보를 핍박하고 채찍질하다가 결국 그에게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에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화낸 것, 잘못한 것을 용서할 수 있겠소? 나도 당신과 함께 이 길을 가고 싶소.” 야고보는 “그대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참수형을 당했다는 전설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잘못된 것과 악한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분노,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는 역사를 바꿉니다. 거기에서 생명의 사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귀한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훼파되는 것을 아파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계 속에 있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분노할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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