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우리가 범죄하였도다 -요셉 이야기 8-
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정말 하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남에게 한 번도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나는 평생 너무 착하고, 선해서 남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나는 분명히 상처를 주지 않은 것 같은데, 누군가는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가 그러합니다. 때로는 토닥거리면서 부부싸움을 하다가, “내가 언제 당신에게 상처를 줬어?”라고 물으면 상대는 분명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자녀와 부모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사랑과 정성과 시간과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키운 자녀 아닙니까? 그런데 자녀들은 부모 때문에 상처를 입으면서 자랐다고 말합니다.
친구 간에도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아주 친밀한 사이일수록 상처는 크기 마련입니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일은, 내게 상처를 준 상대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특히 이것은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욱더 어렵습니다. 때로 우리는 “너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미움과 심지어 저주까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아니 그보다 더한 저주를 할 때도 있습니다. ‘깊은 병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죽어 내 눈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성경에는 탄식시가 많은데, 그중에는 저주하는 시도 있습니다. 저는 시편에서 다윗의 시를 읽다가 성경에 이런 시편이 있나 싶어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시편 109편 8절부터 몇 구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그’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시편 109:8∼13)
사라지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라는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런 노래를 하나님 앞에 드릴까? 정말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저주해도 괜찮은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우리 마음을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상처 준 자를 용서하는 것과 서로의 화해는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내게 상처를 준 자가 너무 태연한 것입니다. 내게 상처를 준 자가 오히려 기고만장하며 뻔뻔합니다. 그러면 용서를 하려고 해도 용서가 안 됩니다. 이것이 과연 개인의 차원뿐일까요? 공동체나 민족차원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진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경덕 교수가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넷 판에 ‘MAKING PEACE WITH HISTORY’라는 광고를 실었습니다. 역사와 함께 평화를 만들어 보자는 광고입니다. 왼쪽에 있는 지도자는 독일의 현 총리인 메르켈(Merkel)과 옛 수상인 브란트(Brandt)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일본의 지도자로는 아소(Aso) 부총리, 아베(Abe) 총리, 하시모토(Hashimoto) 오사카 시장을 제시하면서 그 밑에 몇 가지를 써 놓고 있습니다.
독일의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1970년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고통을 안겨주었던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그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장면입니다. 과거의 침략을 통해 고통을 준 역사에 대한 참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또 현 총리인 메르켈은 나치로 인해 피해를 받은 국가들에게 지속적인 사죄를 하면서 이번 20일, 독일 남부에 있는 다카오 수용소를 방문해서 그때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추모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조금 다릅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과거 침략 역사에 대해서 결코 속죄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성노예는 일본군을 위해 필요한 요소였다고 위안부 문제를 정당화했습니다. 또 아소 부총리는 나치의 개헌 수법을 배워서 일본 헌법을 개정하자는 말과 함께,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군국주의적 요소를 확대해 나가자고 제안했던 인물입니다.
아소의 나치 발언 이후 일본 네티즌들에게 조사를 했습니다. ‘아소의 나치 발언이 문제가 있는가?’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문제가 없다는 대답이 전체 55%였고, 문제 있다는 대답은 40%였습니다. 즉 일본의 국가 지도자들과 그 백성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일본의 지도자들과 일본 백성을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확인해야 될 것은, 용서는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화해는 쌍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용서 콤플렉스에 빠져서 용서하는 것을 참 두려워합니다. 특히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용서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을 받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떠올릴 때 함께 떠오르는 모습들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용서하면 저 사람과 또 웃으며 살아야겠지. 저 사람과 악수도 해야지. 나는 저 사람과 화해하기 싫은데…’
용서는 하되 화해까지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용서입니다. 화해까지 안 가도 괜찮습니다. 물론 화해가 마지막 목표이기는 하지만, 화해하기 싫어서 용서까지 안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내 안에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끙끙 앓습니다. 용서할까? 말까? 하는 문제로 삶을 허비할 때도 있습니다.
죄고백이 없어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일 좋은 용서의 과정은, 화해의 과정은 무엇일까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내가 잘못했소!” 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가 되고, 더 나아가 화해까지 갈 수 있게 됩니다. 본래 용서와 화해란 유죄판결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행하지 않았다면 용서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렇듯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이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 없는 화해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를 하지 않는다고, 상대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용서하지 않고, 용서를 할지 말지 고민만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그것도 또한 아닙니다. 오늘 읽은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용서를 해야 되는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했던 형들이 배신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깊은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애굽의 장사하는 사람에게 자기를 종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10년이 넘는 종살이와 노예생활을 감당했습니다. 성폭행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3년 이상 음침한 감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분노가 있었을까요? 그 속에 얼마나 많은 회한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는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풍년의 7년이 지나고 흉년이 2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무려 집을 떠난 지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언제부터 용서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이십여 년 동안 분노를 삭이고 있다가 형을 만나면서부터 용서가 시작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화해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지만, 이미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용서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에 가득했던 탄식과 슬픔으로 좌절하지 않고, 맡겨진 삶을 열심히 살았던 것도 복수를 위해서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자기에게 불의를 행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용서를 해 온 것입니다.
용서가 화해로 이어지기 위해 요셉은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팔아버린 동생 요셉이 저 자리에 앉아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총리 앞에 서게 되었기에 그들은 머리를 숙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그가 동생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형인 줄 알았지만, 금방 다가가서 “내가 동생 요셉입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용서가 용서되고, 화해가 화해되기 위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껴안고 통곡하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아주 엄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화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미 그 양심이 망각의 자리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동생 요셉을 팔았던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요셉이 다시 되찾게 해 준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7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말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창세기 42:7)
여기에서 말하는 ‘엄한’이란, 형들을 아주 거칠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스파이구나, 정탐꾼이구나. 너희들 적국에서 왔지! 이 나라의 것들을 알아보고 나서 돌아가 침공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열 명의 형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감옥에 사흘 동안 가두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경험했던 종과 노예의 어둠의 시절, 감옥의 시절을 조금만이라도 경험해 보라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곧 형들에게 옛날에 대한 기억을 다시 되돌리게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동생이 있다고 하는데, 그 동생을 데리고 와라. 그러나 너희들 중에서 한 사람은 여기에 남아있어야 한다.”
그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냥 가자니, 자기 중 형제 한 사람은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집에 가서 동생을 데리고 오자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동생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으로, 아버지가 사랑하는 요셉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주었던 동생인데, 이 동생을 데리고 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이 잠자다가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야,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지 않냐?” 20여 년 전 그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죄악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세기 42:21)
요셉이 울부짖었다는 이야기는 요셉의 말이 아닌, 형들의 회상 속에서 나옵니다. 요셉이 형들을 향해서 애걸복걸했다는 것입니다. “형들, 내가 잘못했어. 내가 건방졌어. 형들은 일하는 옷을 입고 있는데, 나는 때때옷을 입고 있었어. 내가 꿈을 꾸고 나서 너무 자랑했어. 내가 못됐어. 나 좀 살려줘.” 그렇게 요셉이 애걸할 때에 형들이 귀를 닫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요셉을 팔아 넘겼던 것, 그때 우리가 듣지 않았던 우리의 죄악,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행해지는 이 괴로움의 이유가 아닌가 하고 그들은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잘나갈 때는 어제 일이 기억이 안 납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때에는 자기 잘난 맛에 일이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인생에 어둠이 다가오면, 갑자기 질병이 걸리거나 가정에 문제가 생길 때, 갑자기 직장이 흔들릴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내 인생 왜 이런 거지? 왜 여기까지 왔지?”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17살 난 동생이 울부짖던 것을 듣지 않았던 자기들의 죄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요셉과 형들 사이에 용서받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대부분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요셉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항의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요셉은 고통을 받았지만 그래도 총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나는 지금도 요셉처럼 감옥에 들어가 있고, 나는 요셉처럼 지금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말입니까?”, “내게 상처를 준 자가 뻔뻔하게 으스대면서 세상에 살고 있는데, 왜 그를 용서하라고 말씀합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힘들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울분과 고통이 있어도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때 화해까지 먼저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까 말씀드렸듯이 화해는 쌍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일방적인 것입니다.
마음의 분노에 대해 솔직해도 됩니다.
우리가 용서하려고 할 때 필요한 몇 가지 마음의 태도가 있습니다. 용서하겠다는 선언과 여전히 마음 속에서 쏟아지는 분노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해야 된다는 당위성 때문에 용서하지만 내 느낌과 감정은 아직 용서할 수가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여준 시가 다윗의 분노의 시, 저주의 시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109편에 이어 또 다른 저주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란, 바로 다윗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시편69:22∼28)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울분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용서의 첫 번째 단계는 내 속에 나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분노와 적개심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우리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느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여보, 난 이것 싫어. 나는 이것을 하면 마음이 괴로워.” 감정에 대한 표현을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때로는 부모가 자식에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빠를 붙들고, 엄마를 붙들고 자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난 이것은 싫어요.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것에서 한 단계 더 나가야 합니다. 다윗의 시에 나타난 것은 단순히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깊은 저주의 표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화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앓는 것은, 건강하게 화를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절제되지 않은 화를 함부로 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용서를 하기 위한 첫 번째이자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내게 있는 분노와 슬픔, 탄식을 다 쏟아부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있는 분노를 터트려야 합니다. 욕해도 괜찮습니다. 못 살겠다고 말하며 내 속에 있는 화를 다 쏟아 내십시오. 건강하게 분노를 터트릴 줄 알아야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 속에 맺혔던 것들이 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맺힌 마음을 풀어주십니다.
기독교 신앙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무엇일까요? 내 속에 있는 미움과 상처, 분노로 맺혀진 것들을 예수님이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예수님께 터트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터트려야 합니다. 이것이 용서를 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 상처가 나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과거가 나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슬픔과 고통이 나의 미래를 차단시킵니다.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내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잘못했다고 얘기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내 속의 치료를 이루지 못합니다. 나를 치료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내 상처를 치유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내 문제, 내 고통과 슬픔, 탄식을 치유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미움과 분노들을 담백하게 표현하시되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껏 표현하세요. 화가 나는 대로 다 표현하세요. 신앙의 선배였던 다윗도 시편 속에서 이렇게 별 말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시는 것을 다시 확인하세요. 우리의 용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입니다.
한 분, 한 분 모두가 미움과 분노로 맺힌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 마시고, 하나하나 주님 앞에 다 토해내면서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42: 18 ~ 25
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정말 하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남에게 한 번도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나는 평생 너무 착하고, 선해서 남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나는 분명히 상처를 주지 않은 것 같은데, 누군가는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가 그러합니다. 때로는 토닥거리면서 부부싸움을 하다가, “내가 언제 당신에게 상처를 줬어?”라고 물으면 상대는 분명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자녀와 부모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사랑과 정성과 시간과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키운 자녀 아닙니까? 그런데 자녀들은 부모 때문에 상처를 입으면서 자랐다고 말합니다.
친구 간에도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아주 친밀한 사이일수록 상처는 크기 마련입니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일은, 내게 상처를 준 상대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특히 이것은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욱더 어렵습니다. 때로 우리는 “너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미움과 심지어 저주까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아니 그보다 더한 저주를 할 때도 있습니다. ‘깊은 병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죽어 내 눈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성경에는 탄식시가 많은데, 그중에는 저주하는 시도 있습니다. 저는 시편에서 다윗의 시를 읽다가 성경에 이런 시편이 있나 싶어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시편 109편 8절부터 몇 구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그’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시편 109:8∼13)
사라지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라는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런 노래를 하나님 앞에 드릴까? 정말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저주해도 괜찮은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우리 마음을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상처 준 자를 용서하는 것과 서로의 화해는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내게 상처를 준 자가 너무 태연한 것입니다. 내게 상처를 준 자가 오히려 기고만장하며 뻔뻔합니다. 그러면 용서를 하려고 해도 용서가 안 됩니다. 이것이 과연 개인의 차원뿐일까요? 공동체나 민족차원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진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경덕 교수가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넷 판에 ‘MAKING PEACE WITH HISTORY’라는 광고를 실었습니다. 역사와 함께 평화를 만들어 보자는 광고입니다. 왼쪽에 있는 지도자는 독일의 현 총리인 메르켈(Merkel)과 옛 수상인 브란트(Brandt)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일본의 지도자로는 아소(Aso) 부총리, 아베(Abe) 총리, 하시모토(Hashimoto) 오사카 시장을 제시하면서 그 밑에 몇 가지를 써 놓고 있습니다.
독일의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1970년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고통을 안겨주었던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그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장면입니다. 과거의 침략을 통해 고통을 준 역사에 대한 참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또 현 총리인 메르켈은 나치로 인해 피해를 받은 국가들에게 지속적인 사죄를 하면서 이번 20일, 독일 남부에 있는 다카오 수용소를 방문해서 그때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추모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조금 다릅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과거 침략 역사에 대해서 결코 속죄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성노예는 일본군을 위해 필요한 요소였다고 위안부 문제를 정당화했습니다. 또 아소 부총리는 나치의 개헌 수법을 배워서 일본 헌법을 개정하자는 말과 함께,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군국주의적 요소를 확대해 나가자고 제안했던 인물입니다.
아소의 나치 발언 이후 일본 네티즌들에게 조사를 했습니다. ‘아소의 나치 발언이 문제가 있는가?’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문제가 없다는 대답이 전체 55%였고, 문제 있다는 대답은 40%였습니다. 즉 일본의 국가 지도자들과 그 백성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일본의 지도자들과 일본 백성을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확인해야 될 것은, 용서는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화해는 쌍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용서 콤플렉스에 빠져서 용서하는 것을 참 두려워합니다. 특히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용서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을 받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떠올릴 때 함께 떠오르는 모습들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용서하면 저 사람과 또 웃으며 살아야겠지. 저 사람과 악수도 해야지. 나는 저 사람과 화해하기 싫은데…’
용서는 하되 화해까지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용서입니다. 화해까지 안 가도 괜찮습니다. 물론 화해가 마지막 목표이기는 하지만, 화해하기 싫어서 용서까지 안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내 안에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끙끙 앓습니다. 용서할까? 말까? 하는 문제로 삶을 허비할 때도 있습니다.
죄고백이 없어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일 좋은 용서의 과정은, 화해의 과정은 무엇일까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내가 잘못했소!” 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가 되고, 더 나아가 화해까지 갈 수 있게 됩니다. 본래 용서와 화해란 유죄판결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행하지 않았다면 용서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렇듯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이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 없는 화해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를 하지 않는다고, 상대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용서하지 않고, 용서를 할지 말지 고민만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그것도 또한 아닙니다. 오늘 읽은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용서를 해야 되는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했던 형들이 배신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깊은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애굽의 장사하는 사람에게 자기를 종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10년이 넘는 종살이와 노예생활을 감당했습니다. 성폭행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3년 이상 음침한 감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분노가 있었을까요? 그 속에 얼마나 많은 회한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는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풍년의 7년이 지나고 흉년이 2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무려 집을 떠난 지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언제부터 용서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이십여 년 동안 분노를 삭이고 있다가 형을 만나면서부터 용서가 시작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화해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지만, 이미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용서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에 가득했던 탄식과 슬픔으로 좌절하지 않고, 맡겨진 삶을 열심히 살았던 것도 복수를 위해서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자기에게 불의를 행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용서를 해 온 것입니다.
용서가 화해로 이어지기 위해 요셉은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팔아버린 동생 요셉이 저 자리에 앉아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총리 앞에 서게 되었기에 그들은 머리를 숙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그가 동생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형인 줄 알았지만, 금방 다가가서 “내가 동생 요셉입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용서가 용서되고, 화해가 화해되기 위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껴안고 통곡하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아주 엄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화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미 그 양심이 망각의 자리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동생 요셉을 팔았던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요셉이 다시 되찾게 해 준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7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말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창세기 42:7)
여기에서 말하는 ‘엄한’이란, 형들을 아주 거칠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스파이구나, 정탐꾼이구나. 너희들 적국에서 왔지! 이 나라의 것들을 알아보고 나서 돌아가 침공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열 명의 형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감옥에 사흘 동안 가두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경험했던 종과 노예의 어둠의 시절, 감옥의 시절을 조금만이라도 경험해 보라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곧 형들에게 옛날에 대한 기억을 다시 되돌리게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동생이 있다고 하는데, 그 동생을 데리고 와라. 그러나 너희들 중에서 한 사람은 여기에 남아있어야 한다.”
그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냥 가자니, 자기 중 형제 한 사람은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집에 가서 동생을 데리고 오자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동생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으로, 아버지가 사랑하는 요셉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주었던 동생인데, 이 동생을 데리고 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이 잠자다가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야,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지 않냐?” 20여 년 전 그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죄악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세기 42:21)
요셉이 울부짖었다는 이야기는 요셉의 말이 아닌, 형들의 회상 속에서 나옵니다. 요셉이 형들을 향해서 애걸복걸했다는 것입니다. “형들, 내가 잘못했어. 내가 건방졌어. 형들은 일하는 옷을 입고 있는데, 나는 때때옷을 입고 있었어. 내가 꿈을 꾸고 나서 너무 자랑했어. 내가 못됐어. 나 좀 살려줘.” 그렇게 요셉이 애걸할 때에 형들이 귀를 닫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요셉을 팔아 넘겼던 것, 그때 우리가 듣지 않았던 우리의 죄악,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행해지는 이 괴로움의 이유가 아닌가 하고 그들은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잘나갈 때는 어제 일이 기억이 안 납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때에는 자기 잘난 맛에 일이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인생에 어둠이 다가오면, 갑자기 질병이 걸리거나 가정에 문제가 생길 때, 갑자기 직장이 흔들릴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내 인생 왜 이런 거지? 왜 여기까지 왔지?”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17살 난 동생이 울부짖던 것을 듣지 않았던 자기들의 죄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요셉과 형들 사이에 용서받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대부분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요셉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항의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요셉은 고통을 받았지만 그래도 총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나는 지금도 요셉처럼 감옥에 들어가 있고, 나는 요셉처럼 지금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말입니까?”, “내게 상처를 준 자가 뻔뻔하게 으스대면서 세상에 살고 있는데, 왜 그를 용서하라고 말씀합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힘들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울분과 고통이 있어도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때 화해까지 먼저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까 말씀드렸듯이 화해는 쌍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일방적인 것입니다.
마음의 분노에 대해 솔직해도 됩니다.
우리가 용서하려고 할 때 필요한 몇 가지 마음의 태도가 있습니다. 용서하겠다는 선언과 여전히 마음 속에서 쏟아지는 분노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해야 된다는 당위성 때문에 용서하지만 내 느낌과 감정은 아직 용서할 수가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여준 시가 다윗의 분노의 시, 저주의 시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109편에 이어 또 다른 저주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란, 바로 다윗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시편69:22∼28)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울분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용서의 첫 번째 단계는 내 속에 나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분노와 적개심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우리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느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여보, 난 이것 싫어. 나는 이것을 하면 마음이 괴로워.” 감정에 대한 표현을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때로는 부모가 자식에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빠를 붙들고, 엄마를 붙들고 자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난 이것은 싫어요.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것에서 한 단계 더 나가야 합니다. 다윗의 시에 나타난 것은 단순히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깊은 저주의 표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화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앓는 것은, 건강하게 화를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절제되지 않은 화를 함부로 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용서를 하기 위한 첫 번째이자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내게 있는 분노와 슬픔, 탄식을 다 쏟아부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있는 분노를 터트려야 합니다. 욕해도 괜찮습니다. 못 살겠다고 말하며 내 속에 있는 화를 다 쏟아 내십시오. 건강하게 분노를 터트릴 줄 알아야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 속에 맺혔던 것들이 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맺힌 마음을 풀어주십니다.
기독교 신앙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무엇일까요? 내 속에 있는 미움과 상처, 분노로 맺혀진 것들을 예수님이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예수님께 터트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터트려야 합니다. 이것이 용서를 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 상처가 나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과거가 나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슬픔과 고통이 나의 미래를 차단시킵니다.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내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잘못했다고 얘기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내 속의 치료를 이루지 못합니다. 나를 치료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내 상처를 치유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내 문제, 내 고통과 슬픔, 탄식을 치유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미움과 분노들을 담백하게 표현하시되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껏 표현하세요. 화가 나는 대로 다 표현하세요. 신앙의 선배였던 다윗도 시편 속에서 이렇게 별 말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시는 것을 다시 확인하세요. 우리의 용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입니다.
한 분, 한 분 모두가 미움과 분노로 맺힌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 마시고, 하나하나 주님 앞에 다 토해내면서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