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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평가 받음의 연속입니다.
2013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로 성경주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열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시간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좀 무거운 주제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을 조금 쉽고 편안한 말로 바꾼다면, ‘평가’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시험, 테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제일 공부하기 싫을 때 아닙니까. 시험을 치를 때면 참으로 괴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등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 대학입시는 얼마나 치열했습니까? 붙는 사람보다 떨어지는 사람들이 더 많기도 했습니다. 요사이 직장시험은 어떠합니까? 수십 대 일,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됩니다. 직장에 들어간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먼저 승진하는가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평가의 삶은 다시 반복됩니다.
자녀를 결혼시키려는 부모들은 결혼이 잘 안된다고 걱정을 합니다. 인구의 절반이 남자고, 절반이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내 짝’을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평가와 시험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상대방을 평가하고 상대방도 나를 평가합니다. 이 평가와 평가가 어느 정도 만나져야 결혼이 성사되는데 자꾸 어긋나는 것입니다.
기업들은 1년의 결산을 통해 평가를 받습니다. 얼마나 회사를 잘 운영했는지, 이익이 얼마만큼 많이 남았는지로 평가를 받습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그렇게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경을 쓰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론입니다. 여론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이제 선거철이 다가오면 그들은 아주 겸손해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위치가 선거의 결과와 평가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세상에 평가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평가 때문에 낙심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번쩍 눈을 뜨고 정신 차리게 되기도 합니다. 부지런해지기도 합니다. 열정을 갖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전념하게 되는 것도 평가가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다시’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주일예배를 인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고, 또 성도님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매주, 매일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때로는 그것이 무거운 짐처럼 압박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인 것을 알기에 즐겁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바르게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며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령 충만한 능력을 우리 것으로 받을 수가 있을까?’
여러분도 저와 같은 심정을 가정과 직장 생활 가운데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위치를 잘 지키며 감당하고 있는가? 부모님에게는 좋은 아들, 귀한 딸인가? 직장인과 사회인으로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되물을 것입니다.
특히 연말연시가 되면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년에도 올 한 해를 산 것처럼 똑같이 살아야 될까, 어디에 마음과 정열을 쏟아부은 한 해였나’ 되돌아보며 반성을 합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회개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인생이란 시작하는 시간도 있고, 마감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24시간을 공평하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네가 이 시간을 운영해봐라. 마음껏 활용하여 사용해봐라. 그러나 명심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네 삶을 평가할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심판할 시간이 있다.”
그래서 살아있는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잘 작동되지 않으면, 이리저리 해 보다가 리셋을 누를 때가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다시’가 살아있을 때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시’가 불가능한 시간이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평가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이것은 리셋이 안 됩니다.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내 생을 다시 한 번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도 죽게 되면 내 곁에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흙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아픔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언어, 내 행동, 내 인격, 내가 살아왔던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노출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하실지 꾸중하실지는 오늘 우리의 삶의 태도와 내용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큰 위로가 됩니다. 왜 두려울까요?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라고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더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반성과 자기훈련의 기회를 갖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 앞에 ‘심판’을 놓아 두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위로가 될까요? 이 세상은 임시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지상에서 겪었던 슬픔, 탄식, 아픔, 상처받고 미움과 분노로 떨었던 이 모든 것들이, 만약 이 세상이 전체라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응어리지고 한 맺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더 큰 세계, 영원한 세계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세계를 향할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를 아시는 분이 그동안 내가 흘린 눈물을 닦아주시고, 내 슬픔을 위로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가올 죽음을 인정할 때 삶이 소중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의 기도문이 실려 있습니다. 모세는 인생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길 원합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얼마나 사는지, 살아있을 동안에 무엇을 하는 것이 참된 지혜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12)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 날’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야 할 날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만큼 살 수 있는지 그날을 헤아리게 해달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내 인생이 언젠가 마감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고, 오늘을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죽는 인생임을 알아야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언젠가는 끝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오늘 이렇게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 삶이 소중하고 귀하다고 선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야 할 그날을 헤아릴 줄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지혜자들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말을 소위 잘나가는 사람,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에게 먼저 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장군 옆에서 “당신은 인간입니다. 당신은 신이 아닙니다. 죽음을 기억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쉽게 허영심과 교만에 빠지고, 스스로 자랑하는 모든 것들을 끌어내기 위한 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살아있음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만큼 위대한 존재가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직 인간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인간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인간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이 하늘과 땅의 아름다운 전부를 보고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한계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빚고 생기를 불어 넣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걷어 가시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먼지와도 같고 아침 이슬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인생은 일장춘몽, 한 번 긴 꿈을 꾸는 것과도 같다’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모습입니다.
들판의 아름다운 꽃들도 시듭니다. 가을과 겨울이 오면 그냥 사라지고 마는 존재인 꽃처럼 인간을 만드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얘야, 너는 창조주가 아니란다. 너는 인간이란다. 너는 피조물이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20세까지 장수한 모세의 기도는 그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시편 90:3)
‘티끌로 돌아가라 하셨다’는 것은, 네 인생의 본 지점이 어디인지 스스로 알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왕으로 살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다윗은 시편 39편 5절에서 이렇게 자기 인생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시편 39:5)
그래서 무얼 알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 내 삶과 죽음을 관할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분이 내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면 내가 살아 움직이고 내 속에서 하나님의 기운과 영을 거두어 가시면 나는 차디찬 하나의 물질로, 아니 티끌로 돌아가는 것, 인생은 그런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모세는 절절하게 자기의 삶을 회고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9∼10)
막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날아갑니까? 사라질 데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다하였다고, 내 삶의 세월이 신속히 지나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넌센스 퀴즈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는 무엇인가? 답은 ‘눈 깜짝할 새’입니다. 우리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눈 깜짝할 새 여기까지 왔습니다. 2013년 1월 1일을 시작했다 싶었는데 어느덧 12월 말이 됐습니다. 이제 이 한 해도 사흘 남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니까 그냥 지나갔구나 싶습니다. 나는 육십이요, 나는 칠십이요, 나는 팔십이요, 구십이요, 백이요 라고 연수를 자랑해 봐도 그냥 지나간 것일 뿐입니다.
오십 년, 백 년 전과 달리 우리의 시간도 질적으로 농축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입니다. 이것은 연대기적인 개념으로 1년 365일,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또 다른 단어는 ‘카이로스’입니다. 이것은 의미와 뜻이 있고 질적으로 충만한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를 양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카이로스는 질의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365일 중에 자기 생일은 기억하지 않습니까? 결혼하신 분들은 결혼한 날짜를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 속에 의미가 충만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 시작은 그것이었습니다. “때가 찼다. 회개하라.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말씀에서의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지금은 질적으로 새로워져야 할 때, 바로 그런 때가 우리에게 다가왔다고 말씀하시며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시간은 질적으로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늘 평상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어떻게 카이로스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적인 지상의 시간 속에 하늘로부터 오시는 영원한 시간을 접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노스로 바뀝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지상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손길과 시간이 다가오기는 것, 즉 크로노스의 삶이지만 영원한 생명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땅의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만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듯 시간과 영원이 접촉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이때 내 시간이 영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질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을 붙들어야 됩니다. 어떻게 붙들까요? 오늘 모세의 말씀처럼,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 기도하면서 배워야 됩니다.
모세는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나를 가르쳐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깨우쳐달라고, 내 속에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나이지만, 내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듣고 배우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 속에 채우겠습니다. 하늘의 참된 지혜를 갖기를 소원합니다.”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나 나이가 많이 되었을 때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도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내 것으로 삼는 것,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 배움의 이유가 내가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길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면서, doing보다는 being, 내 존재 자체가 소중해집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나의 존재를 위해 배울 줄 아는 사람들은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영원한 세계 속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이 무엇일까요? 내게 주신 지금의 이 시간을 음미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즐거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시간에 대한 의미를 우리의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나의 오늘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은 33년을 사셨습니다. 짧은 생이었습니다. 그 중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인생을 마감하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시간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의 목표 속에 하나님의 목표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크로노스의 삶에서 카이로스의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웃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랑해야 할 사람의 손이 따뜻할 때 한 번 더 만져보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대화하고, 한 번 더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로노스적인 삶에서 카이로스적인 삶으로 바뀌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잘해 보겠다. 내년에는 더 잘해 보겠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바로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예배드리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가족들을 만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직장에 나갔을 때, 모두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하나님의 시간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은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실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게 주어진 이 삶을,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길 수는 있습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남은 인생 가운데 주어진 매 순간들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90: 3 ~ 12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삶은 평가 받음의 연속입니다.
2013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로 성경주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열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시간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좀 무거운 주제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을 조금 쉽고 편안한 말로 바꾼다면, ‘평가’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시험, 테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제일 공부하기 싫을 때 아닙니까. 시험을 치를 때면 참으로 괴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등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 대학입시는 얼마나 치열했습니까? 붙는 사람보다 떨어지는 사람들이 더 많기도 했습니다. 요사이 직장시험은 어떠합니까? 수십 대 일,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됩니다. 직장에 들어간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먼저 승진하는가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평가의 삶은 다시 반복됩니다.
자녀를 결혼시키려는 부모들은 결혼이 잘 안된다고 걱정을 합니다. 인구의 절반이 남자고, 절반이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내 짝’을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평가와 시험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상대방을 평가하고 상대방도 나를 평가합니다. 이 평가와 평가가 어느 정도 만나져야 결혼이 성사되는데 자꾸 어긋나는 것입니다.
기업들은 1년의 결산을 통해 평가를 받습니다. 얼마나 회사를 잘 운영했는지, 이익이 얼마만큼 많이 남았는지로 평가를 받습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그렇게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경을 쓰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론입니다. 여론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이제 선거철이 다가오면 그들은 아주 겸손해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위치가 선거의 결과와 평가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세상에 평가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평가 때문에 낙심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번쩍 눈을 뜨고 정신 차리게 되기도 합니다. 부지런해지기도 합니다. 열정을 갖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전념하게 되는 것도 평가가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다시’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주일예배를 인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고, 또 성도님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매주, 매일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때로는 그것이 무거운 짐처럼 압박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인 것을 알기에 즐겁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바르게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며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령 충만한 능력을 우리 것으로 받을 수가 있을까?’
여러분도 저와 같은 심정을 가정과 직장 생활 가운데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위치를 잘 지키며 감당하고 있는가? 부모님에게는 좋은 아들, 귀한 딸인가? 직장인과 사회인으로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되물을 것입니다.
특히 연말연시가 되면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년에도 올 한 해를 산 것처럼 똑같이 살아야 될까, 어디에 마음과 정열을 쏟아부은 한 해였나’ 되돌아보며 반성을 합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회개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인생이란 시작하는 시간도 있고, 마감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24시간을 공평하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네가 이 시간을 운영해봐라. 마음껏 활용하여 사용해봐라. 그러나 명심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네 삶을 평가할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심판할 시간이 있다.”
그래서 살아있는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잘 작동되지 않으면, 이리저리 해 보다가 리셋을 누를 때가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다시’가 살아있을 때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시’가 불가능한 시간이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평가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이것은 리셋이 안 됩니다.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내 생을 다시 한 번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도 죽게 되면 내 곁에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흙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아픔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언어, 내 행동, 내 인격, 내가 살아왔던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노출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하실지 꾸중하실지는 오늘 우리의 삶의 태도와 내용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큰 위로가 됩니다. 왜 두려울까요?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라고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더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반성과 자기훈련의 기회를 갖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 앞에 ‘심판’을 놓아 두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위로가 될까요? 이 세상은 임시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지상에서 겪었던 슬픔, 탄식, 아픔, 상처받고 미움과 분노로 떨었던 이 모든 것들이, 만약 이 세상이 전체라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응어리지고 한 맺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더 큰 세계, 영원한 세계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세계를 향할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를 아시는 분이 그동안 내가 흘린 눈물을 닦아주시고, 내 슬픔을 위로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가올 죽음을 인정할 때 삶이 소중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의 기도문이 실려 있습니다. 모세는 인생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길 원합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얼마나 사는지, 살아있을 동안에 무엇을 하는 것이 참된 지혜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12)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 날’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야 할 날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만큼 살 수 있는지 그날을 헤아리게 해달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내 인생이 언젠가 마감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고, 오늘을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죽는 인생임을 알아야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언젠가는 끝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오늘 이렇게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 삶이 소중하고 귀하다고 선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야 할 그날을 헤아릴 줄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지혜자들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말을 소위 잘나가는 사람,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에게 먼저 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장군 옆에서 “당신은 인간입니다. 당신은 신이 아닙니다. 죽음을 기억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쉽게 허영심과 교만에 빠지고, 스스로 자랑하는 모든 것들을 끌어내기 위한 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살아있음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만큼 위대한 존재가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직 인간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인간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인간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이 하늘과 땅의 아름다운 전부를 보고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한계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빚고 생기를 불어 넣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걷어 가시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먼지와도 같고 아침 이슬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인생은 일장춘몽, 한 번 긴 꿈을 꾸는 것과도 같다’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모습입니다.
들판의 아름다운 꽃들도 시듭니다. 가을과 겨울이 오면 그냥 사라지고 마는 존재인 꽃처럼 인간을 만드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얘야, 너는 창조주가 아니란다. 너는 인간이란다. 너는 피조물이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20세까지 장수한 모세의 기도는 그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시편 90:3)
‘티끌로 돌아가라 하셨다’는 것은, 네 인생의 본 지점이 어디인지 스스로 알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왕으로 살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다윗은 시편 39편 5절에서 이렇게 자기 인생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시편 39:5)
그래서 무얼 알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 내 삶과 죽음을 관할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분이 내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면 내가 살아 움직이고 내 속에서 하나님의 기운과 영을 거두어 가시면 나는 차디찬 하나의 물질로, 아니 티끌로 돌아가는 것, 인생은 그런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모세는 절절하게 자기의 삶을 회고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9∼10)
막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날아갑니까? 사라질 데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다하였다고, 내 삶의 세월이 신속히 지나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넌센스 퀴즈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는 무엇인가? 답은 ‘눈 깜짝할 새’입니다. 우리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눈 깜짝할 새 여기까지 왔습니다. 2013년 1월 1일을 시작했다 싶었는데 어느덧 12월 말이 됐습니다. 이제 이 한 해도 사흘 남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니까 그냥 지나갔구나 싶습니다. 나는 육십이요, 나는 칠십이요, 나는 팔십이요, 구십이요, 백이요 라고 연수를 자랑해 봐도 그냥 지나간 것일 뿐입니다.
오십 년, 백 년 전과 달리 우리의 시간도 질적으로 농축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입니다. 이것은 연대기적인 개념으로 1년 365일,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또 다른 단어는 ‘카이로스’입니다. 이것은 의미와 뜻이 있고 질적으로 충만한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를 양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카이로스는 질의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365일 중에 자기 생일은 기억하지 않습니까? 결혼하신 분들은 결혼한 날짜를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 속에 의미가 충만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 시작은 그것이었습니다. “때가 찼다. 회개하라.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말씀에서의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지금은 질적으로 새로워져야 할 때, 바로 그런 때가 우리에게 다가왔다고 말씀하시며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시간은 질적으로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늘 평상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어떻게 카이로스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적인 지상의 시간 속에 하늘로부터 오시는 영원한 시간을 접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노스로 바뀝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지상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손길과 시간이 다가오기는 것, 즉 크로노스의 삶이지만 영원한 생명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땅의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만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듯 시간과 영원이 접촉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이때 내 시간이 영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질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을 붙들어야 됩니다. 어떻게 붙들까요? 오늘 모세의 말씀처럼,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 기도하면서 배워야 됩니다.
모세는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나를 가르쳐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깨우쳐달라고, 내 속에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나이지만, 내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듣고 배우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 속에 채우겠습니다. 하늘의 참된 지혜를 갖기를 소원합니다.”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나 나이가 많이 되었을 때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도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내 것으로 삼는 것,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 배움의 이유가 내가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길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면서, doing보다는 being, 내 존재 자체가 소중해집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나의 존재를 위해 배울 줄 아는 사람들은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영원한 세계 속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이 무엇일까요? 내게 주신 지금의 이 시간을 음미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즐거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시간에 대한 의미를 우리의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나의 오늘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은 33년을 사셨습니다. 짧은 생이었습니다. 그 중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인생을 마감하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시간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의 목표 속에 하나님의 목표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크로노스의 삶에서 카이로스의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웃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랑해야 할 사람의 손이 따뜻할 때 한 번 더 만져보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대화하고, 한 번 더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로노스적인 삶에서 카이로스적인 삶으로 바뀌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잘해 보겠다. 내년에는 더 잘해 보겠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바로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예배드리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가족들을 만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직장에 나갔을 때, 모두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하나님의 시간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은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실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게 주어진 이 삶을,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길 수는 있습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남은 인생 가운데 주어진 매 순간들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