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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이사야 53: 1 ~ 6

김지철 목사

2014.04.13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생의 마지막 주간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수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를 들고, 자기 옷들을 길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여!”라며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던 모습은 그때 하루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은 고난의 길, 십자기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시게 됩니다.
수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셨을까. 고통과 슬픔 속으로 들어가셔야만 우리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사람을 가장 절박하게 몰아가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통입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나의 이 괴로움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고통 받을 때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내게 관심이 있으십니까?”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참 많습니다. 어린 자녀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부모님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하나님께 아뢰고 있을까. 또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분이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하면 함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제발 도와달라고, 제발 고쳐달라고, 저 깊은 고통의 수렁에서 건져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은총이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다보면 제 마음에는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실까 하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와 비통함이 자꾸만 솟아납니다.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슬픔을 만드셨을까? 만들지 않으셨다면 왜 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아마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물었던 그 섬세한 부분 하나하나에 모두 온전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답을 해주십니다. 그 대답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은 구원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자를 요청하지 않을까요?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원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원합니다. 그들도 기도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포기해 버리고는 무신론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구원자를 요청하며 상상력을 자꾸만 키웁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강력한 능력의 슈퍼맨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서 영화 ‘어벤져스2’의 촬영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곳곳에 교통체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쉽게 불평을 하던 서울 시민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오히려 환호하면서 그 불편함을 감내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벤져스가 뭐길래 반응이 이러한가 싶어 알아보니, 어벤져스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대보자면, 아이언맨, 헐크, 토르, 블랙위도우, 캡틴 아메리카 등입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부목사님들께 물어보니, 요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들이라고 합니다. 즉 이 세상을 구원하는 슈퍼맨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엄청난 힘과 능력을 가졌습니다. 하늘을 훨훨 납니다. 엄청난 화력으로 적군을 초토화시킵니다. 웬만한 공격을 받아서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슈퍼맨인 것입니다. 이런 영웅들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하니 모두가 거기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자는 어땠습니까?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속 영웅들과는 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무력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자가 되셨습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고 비천한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하는 길이 아니라 미련한 길처럼 보이는 길을 가셨습니다. 노예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죽음의 길은 강력한 힘과 능력이 나타나는 길이 아니라 초라하고 아주 보잘것없는 고통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구원자로 고백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웬일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때로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일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왜 세상의 거짓들을 다 타파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까? 고난을 받아야 세상이 구원이 되는 것일까?’
성경에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 이사야 53장을 보면, 예수님이 고난 받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아의 모습은 아주 흉했습니다. 보기가 역겨울 정도였습니다.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이사야 52:14)

상처 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습니다. 한 마디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그 모습을 다시 한 번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품위도 풍채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아름다웠는데 수난을 받으며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형편없는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모두 가능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 우스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을 성경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3)

그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통과 질병을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런 자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고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사야서를 쓴 자신도 그러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잘못과 악으로 저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그것은 당연한 고통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자기의 죄 때문에 받는 당연한 벌이니 거기에 우리가 무슨 관심을 둘 필요가 있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그가 고난을 받은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고, 그가 슬픔을 진 것은 자기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슬픔은 내 슬픔이었고, 그가 고난 받음은 내 고난 때문이었고, 그가 십자가의 죽음 앞에 선 것은 내가 죽어야할 것을 대신 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고난을 이렇게 새롭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그가 대신 징계를 받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아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놀라운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고난의 길을 어떻게 가셨을까요? 첫 번째로, 그분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이사야 53:7)

우리는 보통 억울한 일을 당하면 소리소리 치지 않습니까? 나 억울한 일 당했다고, 내 죄 때문이 아닌데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소리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는 남의 고난을 대신 지시면서도 침묵하며 그것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즉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이사야 53:9)

우리는 오른쪽 뺨을 맞으면 어떻게 합니까? 상대는 오른쪽 뺨, 왼쪽 뺨 다 맞아야 한다며 보복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이분은 강포를 행하지 않으시고 그 수난을 그대로 용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통, 슬픔, 눈물은 강한 힘과 능력으로 치유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어떤 인간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방법입니다. 그것은 강한 자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고난의 길로 내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버림받은 모든 자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몸이 아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삶이 절망스러워서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죄악 속에 살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자유를 억압받고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두를 끌어안으시면서 이 고난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라. 나의 십자가의 수난을 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애통하며 눈물 흘리면서 너희가 고난 받는 자리에 참여하고 있다. 너희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를 보시며 애통해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애통해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에는 우리의 슬픔과 절망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이나 딸이 고열과 기침으로 밤새 앓는 것을 볼 때, 어머니들이 똑같이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대신 아플게요. 내가 대신 열이 날게요. 내가 기침할게요.” 그것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과 동참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애통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애통해하며 고난 받으시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이사야 53:10)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 그리스도가 수난받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상처를 받아야 된다. 네가 눈물을 흘리고, 절망해야 된다. 모든 질고를 네가 대신 져야만 한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능력 많으신 분이 우리의 모습처럼 오시고, 죄인처럼 오시고, 우리의 절망에 참여하시면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거기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구원의 드라마, 구원의 역사입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한 것이기에, 이사야 저자도 ‘내가 몰랐었다’면서, 1절에 보면 ‘우리가 전한 것을 도대체 누가 믿었느냐’고 묻습니다. 나도 지금 깨달았다고, 나도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 자신의 죄 때문인 줄 알았으나 이제는 나의 부끄러운 죄를 대신 지신 것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계시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속에서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위대한 사랑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분이셨습니다. 애통해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음이 생깁니다. 애통하면서 고난 받는 것이 왜 우리에게 치유가 되는 것일까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애통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화석과 같이 굳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공동체는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통하는 사람, 애통하는 공동체가 있어야 사회가 살아납니다. 애통함이 있을 때 그 사회는 생명의 자리가 됩니다. 국가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불의와 악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일터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는 사람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홀로 사는 노인이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면서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역사가 바뀝니다. 그래야 생명의 사건, 회복과 치유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애통해야 생명과 영혼이 생동하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애통해합니까? 사랑하는 사람만이 애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애통함이 사라집니다. 바로 이 사랑으로, 예수님의 애통에 하나님도 참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예수님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빠지셨던 그분이 나의 절망을 치유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짐을 지시고 죽음으로 가신 분 때문에 내가 져야할 죄의 짐을 풀어 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이 놀라운 사랑의 축복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애통은 예수님의 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애통이 우리의 애통이 될 때 이 시대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애통함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애통함의 범주가 커지면 커질수록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애통함이 없는 지도자가 되면 그곳은 잔인한 사회가 되고 맙니다. 지도자가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의 지도력이 커집니다.
지난 4월7일에 애통하는 마음이 만든 조그만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노원구에 작은 희망을 심어준 사건입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용주 장로님이 오랫동안 준비하셨고, 또 북방선교부 회원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정성을 쏟은 덕분에 학교가 하나 생겼습니다. ‘미래소망스쿨’이라는 학교입니다. 이곳은 탈북자 자녀들을 위한 기숙형 학교입니다.
어려움 중에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이 제일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도 빈곤한 가정의 어린 아이들, 억압 받는 어린 아이들이 겪은 어려움만큼 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조그만 학교를 만든 것입니다.
탈북어린이 수천 명 중에 30명에서 약 50명 정도 되는 작은 수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도 버려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멀리는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굶주린 사람들, 가까이는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독거노인들, 돌볼 사람이 없는 장애우들, 버려진 여성들, 노숙자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위태로운 사람들이 빈곤한 아동들입니다.
정치인들이 아이 하나 안고 사진 찍는 것은 좋아하지만, 사실 아이들에게는 별 관심이 적습니다. 대신 어른들, 노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에게는 투표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복지 혜택의 기회가 주어져도 부모가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별히 탈북 가정의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를 애통하게 여긴 사람들이 작은 정성을 모았고, 북한 선교를 위한 헌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학교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땅의 정치체제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통일은 인간의 통일입니다. 저 북녘의 백성들 중에 가장 가난하고 힘든 사람이 어린 아이들과 여성들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계속 도와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탈북자들이 이 땅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과 자유로 하나님이 주신 인권의 존엄성을 갖고 이 땅에 정착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통일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통일될 수 있도록 목회자, 또는 평신도 전문가들을 키워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저 북한이 치유를 받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의 어려운 이웃들, 특히 저 북한의 동포들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될 것입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성도님들 모두를 새벽기도에 초대합니다. 또 이번 주간에 하루에 한 끼 정도 금식하면서, 아니면 아예 하루를 정해 세 끼를 금식하시면서 예수님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참여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써야 했을 그 돈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 마음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축복,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그저 누리기만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그들에게도 가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한 이 백성과 이 나라가 되도록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을 앞에 두고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의 역사를 되새기며 감당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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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 1 ~ 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생의 마지막 주간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수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를 들고, 자기 옷들을 길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여!”라며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던 모습은 그때 하루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은 고난의 길, 십자기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시게 됩니다.
수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셨을까. 고통과 슬픔 속으로 들어가셔야만 우리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사람을 가장 절박하게 몰아가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통입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나의 이 괴로움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고통 받을 때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내게 관심이 있으십니까?”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참 많습니다. 어린 자녀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부모님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하나님께 아뢰고 있을까. 또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분이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하면 함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제발 도와달라고, 제발 고쳐달라고, 저 깊은 고통의 수렁에서 건져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은총이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다보면 제 마음에는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실까 하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와 비통함이 자꾸만 솟아납니다.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슬픔을 만드셨을까? 만들지 않으셨다면 왜 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아마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물었던 그 섬세한 부분 하나하나에 모두 온전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답을 해주십니다. 그 대답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은 구원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자를 요청하지 않을까요?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원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원합니다. 그들도 기도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포기해 버리고는 무신론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구원자를 요청하며 상상력을 자꾸만 키웁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강력한 능력의 슈퍼맨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서 영화 ‘어벤져스2’의 촬영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곳곳에 교통체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쉽게 불평을 하던 서울 시민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오히려 환호하면서 그 불편함을 감내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벤져스가 뭐길래 반응이 이러한가 싶어 알아보니, 어벤져스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대보자면, 아이언맨, 헐크, 토르, 블랙위도우, 캡틴 아메리카 등입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부목사님들께 물어보니, 요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들이라고 합니다. 즉 이 세상을 구원하는 슈퍼맨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엄청난 힘과 능력을 가졌습니다. 하늘을 훨훨 납니다. 엄청난 화력으로 적군을 초토화시킵니다. 웬만한 공격을 받아서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슈퍼맨인 것입니다. 이런 영웅들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하니 모두가 거기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자는 어땠습니까?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속 영웅들과는 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무력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자가 되셨습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고 비천한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하는 길이 아니라 미련한 길처럼 보이는 길을 가셨습니다. 노예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죽음의 길은 강력한 힘과 능력이 나타나는 길이 아니라 초라하고 아주 보잘것없는 고통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구원자로 고백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웬일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때로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일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왜 세상의 거짓들을 다 타파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까? 고난을 받아야 세상이 구원이 되는 것일까?’
성경에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 이사야 53장을 보면, 예수님이 고난 받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아의 모습은 아주 흉했습니다. 보기가 역겨울 정도였습니다.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이사야 52:14)

상처 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습니다. 한 마디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그 모습을 다시 한 번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품위도 풍채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아름다웠는데 수난을 받으며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형편없는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모두 가능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 우스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을 성경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3)

그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통과 질병을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런 자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고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사야서를 쓴 자신도 그러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잘못과 악으로 저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그것은 당연한 고통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자기의 죄 때문에 받는 당연한 벌이니 거기에 우리가 무슨 관심을 둘 필요가 있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그가 고난을 받은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고, 그가 슬픔을 진 것은 자기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슬픔은 내 슬픔이었고, 그가 고난 받음은 내 고난 때문이었고, 그가 십자가의 죽음 앞에 선 것은 내가 죽어야할 것을 대신 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고난을 이렇게 새롭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그가 대신 징계를 받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아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놀라운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고난의 길을 어떻게 가셨을까요? 첫 번째로, 그분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이사야 53:7)

우리는 보통 억울한 일을 당하면 소리소리 치지 않습니까? 나 억울한 일 당했다고, 내 죄 때문이 아닌데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소리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는 남의 고난을 대신 지시면서도 침묵하며 그것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즉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이사야 53:9)

우리는 오른쪽 뺨을 맞으면 어떻게 합니까? 상대는 오른쪽 뺨, 왼쪽 뺨 다 맞아야 한다며 보복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이분은 강포를 행하지 않으시고 그 수난을 그대로 용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통, 슬픔, 눈물은 강한 힘과 능력으로 치유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어떤 인간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방법입니다. 그것은 강한 자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고난의 길로 내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버림받은 모든 자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몸이 아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삶이 절망스러워서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죄악 속에 살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자유를 억압받고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두를 끌어안으시면서 이 고난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라. 나의 십자가의 수난을 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애통하며 눈물 흘리면서 너희가 고난 받는 자리에 참여하고 있다. 너희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를 보시며 애통해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애통해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에는 우리의 슬픔과 절망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이나 딸이 고열과 기침으로 밤새 앓는 것을 볼 때, 어머니들이 똑같이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대신 아플게요. 내가 대신 열이 날게요. 내가 기침할게요.” 그것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과 동참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애통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애통해하며 고난 받으시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이사야 53:10)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 그리스도가 수난받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상처를 받아야 된다. 네가 눈물을 흘리고, 절망해야 된다. 모든 질고를 네가 대신 져야만 한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능력 많으신 분이 우리의 모습처럼 오시고, 죄인처럼 오시고, 우리의 절망에 참여하시면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거기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구원의 드라마, 구원의 역사입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한 것이기에, 이사야 저자도 ‘내가 몰랐었다’면서, 1절에 보면 ‘우리가 전한 것을 도대체 누가 믿었느냐’고 묻습니다. 나도 지금 깨달았다고, 나도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 자신의 죄 때문인 줄 알았으나 이제는 나의 부끄러운 죄를 대신 지신 것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계시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속에서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위대한 사랑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분이셨습니다. 애통해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음이 생깁니다. 애통하면서 고난 받는 것이 왜 우리에게 치유가 되는 것일까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애통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화석과 같이 굳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공동체는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통하는 사람, 애통하는 공동체가 있어야 사회가 살아납니다. 애통함이 있을 때 그 사회는 생명의 자리가 됩니다. 국가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불의와 악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일터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는 사람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홀로 사는 노인이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면서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역사가 바뀝니다. 그래야 생명의 사건, 회복과 치유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애통해야 생명과 영혼이 생동하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애통해합니까? 사랑하는 사람만이 애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애통함이 사라집니다. 바로 이 사랑으로, 예수님의 애통에 하나님도 참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예수님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빠지셨던 그분이 나의 절망을 치유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짐을 지시고 죽음으로 가신 분 때문에 내가 져야할 죄의 짐을 풀어 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이 놀라운 사랑의 축복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애통은 예수님의 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애통이 우리의 애통이 될 때 이 시대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애통함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애통함의 범주가 커지면 커질수록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애통함이 없는 지도자가 되면 그곳은 잔인한 사회가 되고 맙니다. 지도자가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의 지도력이 커집니다.
지난 4월7일에 애통하는 마음이 만든 조그만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노원구에 작은 희망을 심어준 사건입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용주 장로님이 오랫동안 준비하셨고, 또 북방선교부 회원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정성을 쏟은 덕분에 학교가 하나 생겼습니다. ‘미래소망스쿨’이라는 학교입니다. 이곳은 탈북자 자녀들을 위한 기숙형 학교입니다.
어려움 중에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이 제일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도 빈곤한 가정의 어린 아이들, 억압 받는 어린 아이들이 겪은 어려움만큼 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조그만 학교를 만든 것입니다.
탈북어린이 수천 명 중에 30명에서 약 50명 정도 되는 작은 수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도 버려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멀리는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굶주린 사람들, 가까이는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독거노인들, 돌볼 사람이 없는 장애우들, 버려진 여성들, 노숙자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위태로운 사람들이 빈곤한 아동들입니다.
정치인들이 아이 하나 안고 사진 찍는 것은 좋아하지만, 사실 아이들에게는 별 관심이 적습니다. 대신 어른들, 노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에게는 투표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복지 혜택의 기회가 주어져도 부모가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별히 탈북 가정의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를 애통하게 여긴 사람들이 작은 정성을 모았고, 북한 선교를 위한 헌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학교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땅의 정치체제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통일은 인간의 통일입니다. 저 북녘의 백성들 중에 가장 가난하고 힘든 사람이 어린 아이들과 여성들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계속 도와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탈북자들이 이 땅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과 자유로 하나님이 주신 인권의 존엄성을 갖고 이 땅에 정착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통일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통일될 수 있도록 목회자, 또는 평신도 전문가들을 키워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저 북한이 치유를 받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의 어려운 이웃들, 특히 저 북한의 동포들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될 것입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성도님들 모두를 새벽기도에 초대합니다. 또 이번 주간에 하루에 한 끼 정도 금식하면서, 아니면 아예 하루를 정해 세 끼를 금식하시면서 예수님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참여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써야 했을 그 돈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 마음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축복,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그저 누리기만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그들에게도 가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한 이 백성과 이 나라가 되도록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을 앞에 두고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의 역사를 되새기며 감당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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