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 – 성경주제 12 : 대속 –

고린도후서 5: 13 ~ 17

김지철 목사

2013.11.24

죽음을 인식할 때, 하루가 소중해 집니다.

헬라 철학자인 플라톤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그대의 필생의 역작인『대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플라톤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죽음을 연습하는 거라네.”
후대의 고대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이 말을 ‘죽음이란 늙은 사람에게나 젊은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오늘로 내 인생이 마감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장례식을 치를 줄 안다면, 내가 살아있는 오늘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복된지 다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제로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 했던 시간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오늘이니 말입니다.
고대 기독교 교부 중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주 의연하게 살아가는 그를 보며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루하루가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불안한 기색이 없으십니까?” 그러자 교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매일 나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네.”
지혜의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내일 또 인생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종말론적으로 내게 주신 하루라고 생각할 때 우리 삶이 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하루의 삶은 매우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스스로 겪으셨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별것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요? 그냥 흘러가는 삶의 과정일까요? ‘편하게 살다가 죽으면 죽는 거지, 뭐…’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죽음이란 결코 인생의 한 과정이 아닙니다. 죽음 속에는 인간의 총체적인 부정, 총체적인 허무, 총체적인 절망, 총제적인 고난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슬픔과 탄식, 좌절, 인간의 모든 무거운 짐이 죽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불안은 바로 존재론적인 불안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느 날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갈 것에 대한,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불안이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엄습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종교적인 탁월성은 인간 생로병사의 고통을 깊이 꿰뚫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삶의 질긴 고난의 인연들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면벽하고 도를 닦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뿐만 아니라 기쁨마저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성과 감정의 다양한 흔들림마저 다 잘라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훌쩍 떠나려고 합니다. 결국 최고의 경지라는 해탈의 과정은, 비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할까요? 예수님의 생애는 비천함과 비애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을 스스로 지니시고 경험하셨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삶의 위기를 예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겪는 슬픔, 외로움, 아픔, 인간의 탄식과 절망의 고통을 예수님은 그냥 맞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만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배척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전문가라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적대하면서 예수님을 수없이 고발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있었던 제자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다 약속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동자를 보면서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고독했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적대자들의 야유와 조롱 속에 갇힌 삶이었고, 모욕을 받고, 얻어맞기도 하면서, 가장 비참하고 무서운 십자가에서 못 박힌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앞에 당신의 아픔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버림받았다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아들의 고통을 못 본 체 방치하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 안에 나의 모든 고통이 들어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가장 비참하게 죽은 그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습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한 그분이 왜 우리의 주님이고, 왜 우리가 그분을 예배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 그분을 모시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내거는 것일까요? 바로 그분 한 사람의 고난 속에 내 고난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한 사람의 죽음 속에 나의 죽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슬픔 속에 나의 슬픔이 있고, 그분의 외로움 속에 내 외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나도 그 속에서 죽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세상에는 많은 정치가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독재자도 있습니다. 또 세상에는 위인들과 성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독재자의 특징은 ‘나 한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들은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고, 저 북쪽의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자기의 정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을 억압하고 억눌렀습니다.
우리는 왜 독재를 싫어합니까? 자기 혼자 생명을 갖기 위해서 다른 모든 사람을 내려 누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신음하는 것을 역사의 잔재들을 통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위인과 성인은 정반대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게 무엇일까요? 공동체를 위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뜻 아닐까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다’는 뜻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복 받게 하기 위해서 내가 고난을 받겠다’는 뜻 아닐까요? 이렇듯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 내 아픔을 불사하겠다’는 것이 지도자입니다. 그것이 위인이고, 복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과학자 중에도 있고, 교육자와 예술가 중에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등 그들은 자기 분야의 스승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웃을 위해 쓰임 받은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들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분입니다. 아니 한 걸음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비약과 도약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쓰임 받음’ 이상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한 사람이 희생합니다. 죽임을 당합니다. 자발적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무얼 걸고 갑니까? 생명을 걸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을 높여주기 위해서 왔다.” 이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물로 드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죽음으로 우리가 살도록, 당신이 탄식함으로 우리가 노래를 부르도록, 당신이 아파함으로 우리가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고난을 대신 지시고, 우리로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사실이 복음이고, 곧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나’ 때문에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이 곧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지도자로 있었을 때,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싫어했을까요?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을까요?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라… 구약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인데, 어떻게 저주 받은 자가 메시야냐? 어떻게 저주 받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머리로써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이단 중에 이단이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앞장섰던 것입니다.
바울이 씩씩거리며 예수님을 믿는 자를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죄인 예수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십자가에 죽은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그는 그 관계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아, 저것은 나를 위한 죽음이구나! 내 죄를 위한 죽음이구나! 내 질병을 위한 죽음이고, 내 억울함과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구나! 저 속에 내 교만이 있고, 내 죄악과 절망이 들어 있구나!’ 십자가 속에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아들을 내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내리사랑은 누구도 못 말리지 않습니까? 아들이 못돼도, 딸이 내 말을 잘 안 들어도 “아이고 내 아들, 내 딸!”하며 그저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아들보다 나 같은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포기할 정도로 사랑하신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 하늘과 땅을 다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역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죽을 때에 주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내가 살아도 죽고, 죽어도 산다’는 최고의 비밀을 가슴으로부터 확인하게 됩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삶의 목표가 명백해 집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성경에는 구약 전통에서부터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을 죽여서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매년 유월절에 죄 용서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그 피의 제물을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셨다는 그 사실을 확인함으로 하나님 앞에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옛 자아가 사라지고, 새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인 것은 바로 ‘사랑의 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린도후서 5:13)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 내 죽음이 있고, 예수님의 부활 속에 나의 부활이 있고, 예수님의 생명 속에 내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이제는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너무나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복이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하나님과 영원히 살아가는 것도 내 인생의 복이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며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의 자리에 들어갈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너무 괴롭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오늘 죽으면서 주님과 함께 오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생명이 얼마나 찬란한가를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축복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씀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5:14)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 내 죽음이 있고, 우리의 죽음이 있고, 인간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 자아, 내 속에 있는 걱정근심, 모든 절망, 외로움, 교만, 죄악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감격하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죽음이 우리를 협박할 수 없습니다. 내 몸에, 내 마음에, 내 생명에 예수님이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생명의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내 죄악과 교만을 함께 못 박아 이제는 주님과 함께 새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은총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것, 죽지 않으려고 애쓰며 가졌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이겨 나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믿음이란, 내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언젠가는 육체적인 죽음이 다가올 것입니다. 너무 겁내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괴로운 일이니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러지 마십시오.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예 예수님과 함께 오늘 죽으세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십시오.

살아있다는 것, 이 자체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렇게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 가슴이 뛰고, 손이 따끈따끈하다는 것, 옆에는 귀한 가족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복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일들이 주어졌습니까? 어떤 위인이나 성인도,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공자도 이 일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신 유일하신 분,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매일 예수님과 함께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만을 주님과 함께 깨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업적 좀 남겨 놓겠다는 생각, 그런 나를 억압하는 세계들을 주님의 십자가에 다 묶어 놓고, 해방되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려 했던 탐욕을 주님의 말씀 앞에,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억누르는 모든 짐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선물과 축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삶의 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이 어제의 생명과 다르다는 놀라움을 느끼며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죽음의 권세자인 사탄에게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고린도후서 5: 13 ~ 17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죽음을 인식할 때, 하루가 소중해 집니다.

헬라 철학자인 플라톤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그대의 필생의 역작인『대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플라톤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죽음을 연습하는 거라네.”
후대의 고대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이 말을 ‘죽음이란 늙은 사람에게나 젊은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오늘로 내 인생이 마감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장례식을 치를 줄 안다면, 내가 살아있는 오늘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복된지 다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제로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 했던 시간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오늘이니 말입니다.
고대 기독교 교부 중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주 의연하게 살아가는 그를 보며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루하루가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불안한 기색이 없으십니까?” 그러자 교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매일 나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네.”
지혜의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내일 또 인생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종말론적으로 내게 주신 하루라고 생각할 때 우리 삶이 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하루의 삶은 매우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스스로 겪으셨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별것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요? 그냥 흘러가는 삶의 과정일까요? ‘편하게 살다가 죽으면 죽는 거지, 뭐…’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죽음이란 결코 인생의 한 과정이 아닙니다. 죽음 속에는 인간의 총체적인 부정, 총체적인 허무, 총체적인 절망, 총제적인 고난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슬픔과 탄식, 좌절, 인간의 모든 무거운 짐이 죽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불안은 바로 존재론적인 불안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느 날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갈 것에 대한,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불안이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엄습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종교적인 탁월성은 인간 생로병사의 고통을 깊이 꿰뚫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삶의 질긴 고난의 인연들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면벽하고 도를 닦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뿐만 아니라 기쁨마저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성과 감정의 다양한 흔들림마저 다 잘라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훌쩍 떠나려고 합니다. 결국 최고의 경지라는 해탈의 과정은, 비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할까요? 예수님의 생애는 비천함과 비애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을 스스로 지니시고 경험하셨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삶의 위기를 예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겪는 슬픔, 외로움, 아픔, 인간의 탄식과 절망의 고통을 예수님은 그냥 맞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만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배척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전문가라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적대하면서 예수님을 수없이 고발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있었던 제자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다 약속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동자를 보면서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고독했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적대자들의 야유와 조롱 속에 갇힌 삶이었고, 모욕을 받고, 얻어맞기도 하면서, 가장 비참하고 무서운 십자가에서 못 박힌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앞에 당신의 아픔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버림받았다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아들의 고통을 못 본 체 방치하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 안에 나의 모든 고통이 들어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가장 비참하게 죽은 그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습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한 그분이 왜 우리의 주님이고, 왜 우리가 그분을 예배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 그분을 모시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내거는 것일까요? 바로 그분 한 사람의 고난 속에 내 고난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한 사람의 죽음 속에 나의 죽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슬픔 속에 나의 슬픔이 있고, 그분의 외로움 속에 내 외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나도 그 속에서 죽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세상에는 많은 정치가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독재자도 있습니다. 또 세상에는 위인들과 성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독재자의 특징은 ‘나 한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들은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고, 저 북쪽의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자기의 정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을 억압하고 억눌렀습니다.
우리는 왜 독재를 싫어합니까? 자기 혼자 생명을 갖기 위해서 다른 모든 사람을 내려 누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신음하는 것을 역사의 잔재들을 통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위인과 성인은 정반대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게 무엇일까요? 공동체를 위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뜻 아닐까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다’는 뜻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복 받게 하기 위해서 내가 고난을 받겠다’는 뜻 아닐까요? 이렇듯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 내 아픔을 불사하겠다’는 것이 지도자입니다. 그것이 위인이고, 복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과학자 중에도 있고, 교육자와 예술가 중에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등 그들은 자기 분야의 스승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웃을 위해 쓰임 받은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들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분입니다. 아니 한 걸음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비약과 도약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쓰임 받음’ 이상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한 사람이 희생합니다. 죽임을 당합니다. 자발적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무얼 걸고 갑니까? 생명을 걸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을 높여주기 위해서 왔다.” 이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물로 드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죽음으로 우리가 살도록, 당신이 탄식함으로 우리가 노래를 부르도록, 당신이 아파함으로 우리가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고난을 대신 지시고, 우리로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사실이 복음이고, 곧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나’ 때문에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이 곧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지도자로 있었을 때,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싫어했을까요?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을까요?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라… 구약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인데, 어떻게 저주 받은 자가 메시야냐? 어떻게 저주 받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머리로써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이단 중에 이단이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앞장섰던 것입니다.
바울이 씩씩거리며 예수님을 믿는 자를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죄인 예수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십자가에 죽은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그는 그 관계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아, 저것은 나를 위한 죽음이구나! 내 죄를 위한 죽음이구나! 내 질병을 위한 죽음이고, 내 억울함과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구나! 저 속에 내 교만이 있고, 내 죄악과 절망이 들어 있구나!’ 십자가 속에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아들을 내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내리사랑은 누구도 못 말리지 않습니까? 아들이 못돼도, 딸이 내 말을 잘 안 들어도 “아이고 내 아들, 내 딸!”하며 그저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아들보다 나 같은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포기할 정도로 사랑하신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 하늘과 땅을 다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역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죽을 때에 주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내가 살아도 죽고, 죽어도 산다’는 최고의 비밀을 가슴으로부터 확인하게 됩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삶의 목표가 명백해 집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성경에는 구약 전통에서부터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을 죽여서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매년 유월절에 죄 용서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그 피의 제물을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셨다는 그 사실을 확인함으로 하나님 앞에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옛 자아가 사라지고, 새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인 것은 바로 ‘사랑의 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린도후서 5:13)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 내 죽음이 있고, 예수님의 부활 속에 나의 부활이 있고, 예수님의 생명 속에 내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이제는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너무나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복이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하나님과 영원히 살아가는 것도 내 인생의 복이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며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의 자리에 들어갈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너무 괴롭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오늘 죽으면서 주님과 함께 오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생명이 얼마나 찬란한가를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축복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씀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5:14)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 내 죽음이 있고, 우리의 죽음이 있고, 인간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 자아, 내 속에 있는 걱정근심, 모든 절망, 외로움, 교만, 죄악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감격하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죽음이 우리를 협박할 수 없습니다. 내 몸에, 내 마음에, 내 생명에 예수님이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생명의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내 죄악과 교만을 함께 못 박아 이제는 주님과 함께 새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은총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것, 죽지 않으려고 애쓰며 가졌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이겨 나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믿음이란, 내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언젠가는 육체적인 죽음이 다가올 것입니다. 너무 겁내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괴로운 일이니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러지 마십시오.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예 예수님과 함께 오늘 죽으세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십시오.

살아있다는 것, 이 자체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렇게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 가슴이 뛰고, 손이 따끈따끈하다는 것, 옆에는 귀한 가족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복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일들이 주어졌습니까? 어떤 위인이나 성인도,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공자도 이 일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신 유일하신 분,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매일 예수님과 함께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만을 주님과 함께 깨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업적 좀 남겨 놓겠다는 생각, 그런 나를 억압하는 세계들을 주님의 십자가에 다 묶어 놓고, 해방되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려 했던 탐욕을 주님의 말씀 앞에,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억누르는 모든 짐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선물과 축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삶의 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이 어제의 생명과 다르다는 놀라움을 느끼며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죽음의 권세자인 사탄에게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